소설리스트

금마초연의-206화 (206/306)

206화. 대장군

200년 1월.

황하 전쟁, 또는 그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의 이름을 따서 개봉대전이라고 불리는 큰 싸움이 끝난 뒤 일 년하고 한 달이 지났다.

전쟁에 패한 원소는 황하 유역을 조조에게 빼앗겼다. 기주의 많은 고을들, 그리고 청주의 대부분의 고을들이 조조에게 귀부했다. 남쪽의 영토를 상실하며 원소의 근거지 업성은 졸지에 조조군과 대치하는 최전선이 되었고, 조조의 배후를 위협하던 여남의 기반은 배신한 유비에게 송두리째 넘어갔다.

자연스럽게 원소군도 안에서부터 갈라지게 되었다.

“근거지를 북쪽으로 옮겨야 합니다. 상산은 너른 들판이 있고 민생이 안정되어 있으니 다시 한번 왕업을 펼칠 수 있는 땅입니다.”

“무슨 소리! 주공께서 고작 조맹덕 때문에 북쪽으로 옮기셔야 한다는 말이오? 하북에는 싸우다 죽는 신하가 있을 뿐, 구차하게 도망치며 목숨을 구걸하는 신하는 있을 수 없소이다!”

신하들의 논의를 듣고 있는 원소는 가슴이 조여 오는 것 같은 압박감을 느꼈다.

패전 후 1년이 넘도록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조조는 조인과 하후연, 우금과 악진을 앞세워 각지에서 국지전을 벌였다. 개봉대전에서 무장들을 대거 잃은 원소군은 조조군을 당해내기 어려웠다. 장합이나 신평 같은 장수들은 배신해서 조조의 편에 섰다.

“쿨럭.”

원소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입에서 소리가 났다. 잠시 멍하니 있던 원소가 정신을 차려 보니 신하들 모두가 경악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슴께에는 방금 토해낸 시뻘건 선혈이 묻어 있었다.

그 와중에도 신하들의 표정은 둘로 나뉘어 있었다. 기주 호족들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뭔가 생각하고 있었다. 원소의 총신들은 낯이 하얗게 질려서 절망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사태를 깨달은 원소는 피식 웃었다.

“이렇게… 끝났군.”

얼자의 몸으로 원가의 주인이 되기 위해, 속병이 드는 걸 마다하지 않고 6년상을 치렀다. 그렇게 얻은 명성으로 목숨을 걸고 동탁과 맞섰고, 그 과정에서 힘없는 사람들을 수도 없이 죽였다. 자신의 공업을 이어 나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면 누구든 사지로 내몰았다. 친아들 원담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렇게 자신을 혹사하며 살아왔다. 몸이 예순까지 버티지 못할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설마 쉰이 못 되어 망가질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한 번도 자신과 동등한 존재라고 여겨 본 적 없는, 옛 친구 조조에게 참패하면서 병이 깊어진 것일까.

“하하하하!”

피를 토한 원소는 그저 크게 웃었다. 저마다의 계산이 가득한 신하들의 표정을 뒤로 하고, 피 묻은 옷자락을 휘날리며 자리를 떴다.

이제 신하들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소가 병이 든 것을 알아챈 이상, 저들 중 과거와 같은 충성을 바치는 이는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원가의 이름으로 왕업을 세울 생각을 하는 이 또한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이제 남은 건 파국뿐이군. 나는 그 꼴을 보기 전에 죽을 것 같으니 오히려 다행인가.”

원소는 계속 헛웃음을 지었다. 성공을 향한 욕망에 매여 살다가, 실패한 다음에야 해방된 사내는 더 이상 얼굴로 위엄을 가장하지 않았다. 거울을 보니 그 안에는 편안하게 웃는 썩 잘생긴 중년 사내가 있었다.

원소는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말했다.

“맹덕. 자네는 알겠나. 패업이란 이토록 덧없는 것이라네.”

원소의 머릿속에 개봉대전의 장면들이 떠올랐다.

하북철기에, 유비에, 여포에, 20만 대군. 질 수 없는 포진이었다.

그러나 그날 개봉 벌판에서 자신이 가진 자산들은 하나씩 부서졌다. 결국 자신의 대장거를 향해 마초가 달려 들어오며 싸움이 끝났다.

“이제 나 대신 자네가 패자로 행세하겠군. 하지만 맹덕, 자네는 나와 다른 결말을 볼 수 있겠나. 젊은 사자에게 잡아먹히지 않고 패업을 이룰 수 있겠냐는 말일세.”

옛 친구 조조.

그가 원소 자신을 꺾고 패자로 남을지, 아니면 마초의 패업에 휩쓸려 원소와 나란히 제물이 될지.

어느 쪽이든 후세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기 딱 좋은, 우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소는 체면도 잊고 낄낄거리며 웃었다. 거울 속의 사내는 외모가 너무나 출중해서 병으로 야위면 야윈 대로, 천박하게 웃으면 웃는 대로 매력적이었다.

* * *

천자 유협은 허도로 향하며 했던 약속을 지켰다.

“짐은 이제부터 낙양을 다시 세울 것이다. 그리고 낙양에 황궁이 다시 서는 순간 돌아오리라.”

폐허가 된 낙양을 재건한 뒤 정말로 돌아온 것이다. 낙양 재건에 지원을 아끼지 않은 마가군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결국 5년째가 되는 199년에 낙양의 황궁과 시가지 일부를 완공할 수 있었다.

후한의 수도로 200년간 번영하다 동탁이 파괴하며 폐허가 됐던 낙양은 마가군의 주도하에 난세의 수도로 다시 세워졌다. 예전 같은 영화는 찾아볼 수 없었으나 대신 모든 것들이 질박하고 실용적이었다.

200년 봄이 되자 어가는 다시 허도를 떠나 낙양으로 향했다. 재건된 낙양에서의 역사적인 첫 조회가 곧 열릴 것이다.

낙양 황궁의 어느 별실에서는 두 선비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숙부님을 이렇게 다시 뵙습니다.”

“조카님께서 강녕하시니 참으로 다행이오.”

순유와 순욱은 서로 깊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순욱이 순유의 7촌 숙부가 되지만, 나이로는 순유가 아홉 살 연장이라 상호 존대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모두 예주 호족으로 천하에 이름이 높은 명사들이었다. 그리고 각각 마가군과 조조군의 2인자라 할 수 있는 핵심 인물이기도 했다.

황하 전쟁의 승리 후, 논공행상에 대해 마가군과 조조군 사이에 긴 협상이 이어졌다. 협상의 대표는 자연스럽게 순유와 순욱이 맞게 되었다. 긴 협상이 마무리된 후, 두 사람은 그제야 따로 자리를 갖고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조카님께서 장안에 다녀오지도 못하고 바로 입조하는 게 안타깝소. 마 태부께서 조카님을 크게 치하하실 텐데 말이오.”

순욱이 웃으며 농을 건넸다. 순유는 그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태사, 태부, 태보를 가리켜 삼사(三師)라 한다. 실권은 없는 명예직이나, 명목상 천자의 스승이기 때문에 최고 실권직인 삼공보다도 의전상 위가 된다. 보통의 경우 삼사는 공석인 경우가 더 많았다.

마가군의 수장 마등은 태부로 임명되었다. 지금 황실에는 태후도, 태자도 없으니 천하에 마등보다 의전 서열이 높은 인물은 천자 유협과 황후 복수밖에 없게 되었다.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진 거기장군직은 떼 버렸다. 대신 관중도독의 직위를 관서대도독으로 올리고, 관중과 서량 전역과 병주, 한중의 지배권까지 관서대도독부에서 행사하도록 인정했다.

“그런데 마 태부께서 입조하실 줄 알았는데 양양후가 입조하게 된 것은 의외요.”

“처음에는 태부께서도 반대하셨지요. 그러나 양양후의 의지가 강했습니다.”

양양후란 형주 양양현의 후작을 말한다. 개봉대전 직후 마초는 따로 작위를 받았다. 이미 마등이 무릉후 작위를 받았으니 부자가 동시에 다른 현의 현후가 되는 보기 드문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아무 연고도 없는 형주 양양인가?

그것은 마초의 의지 때문이었다. 천자 유협이 마초에게 현후를 내릴 것이라는 사실을 넌지시 알리자, 마초는 굳이 봉지로 형주 양양현을 청했다.

“나중에 형주 양양에 가 봐야 할 일이 있지. 다만 조정의 관직을 가진 몸으로 먼 길을 가려면 뭔가 핑계가 필요하니까, 그곳을 봉지로 받아서 봉지를 둘러본다며 핑계 삼는 게 좋겠군.”

그런 이유로 한 점 연고도 없는 양양현의 후작이 된 것이었다.

순욱이 말을 이었다.

“양양후는 참으로 일세의 영걸이시오. 하는 싸움마다 이겼고, 관중의 기근을 끝내고 서량을 풍요로운 곳으로 만들었소. 허나 중앙 정치는 또 다른 영역이오. 온갖 권모술수가 어지럽게 난무하는 곳이니… 나는 자칫 이 한의 동량을 잃을까 걱정이 되오.”

“하하, 숙부님.”

순유는 그저 웃어버렸다.

순욱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몸은 조조군에 있지만 순욱의 충성은 오로지 한나라를 향할 뿐이었다. 그는 한의 영웅 마초가 정치에 휩쓸려 사람이 망가지진 않을까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양양후께서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인물입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번 논공행상에서 마가군의 주요 인물들은 다들 지위가 급격히 상승했다. 이제 더 이상 마가군이라는 이름으로 묶기도 어색할 만큼의 고관들이 된 것이다.

방덕은 진서장군의 지위를 받았다. 본래는 은퇴한 한수가 가지고 있던 지위다. 방덕은 장안에 남아 진서장군부를 열고 마가군의 서량 방면군을 지휘하기로 했다. 관서대도독부의 군무는 없어진 거기장군부 대신 방덕이 이끄는 진서장군부가 담당하게 되었다.

서황은 전장군이 되었다. 방덕과 마찬가지로 녹봉 2천 석의 고관이 된 것이다. 방덕이 마등의 곁에 남은 반면, 서황은 마초를 따라 조정에 입조했다. 원래의 역사에서 좌장군이었던 유비, 후장군이었던 원술과 동렬에 섰으니 대단한 출세를 한 것이다.

장료 또한 희망하던 장군직을 받았다. 장군호는 탕구장군이었다. 마초는 과감하게 장료에게 일군을 맡겨서 병주 전역을 돌아다니며 여포군의 잔당이나 자잘한 도적떼들을 토벌하게 했다. 아직까지도 장료의 능력이나 충성심을 의심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마초는 나관중과 상의한 끝에 장료에게 1만 군사를 맡기는 안을 밀어붙였다. 능력은 이미 지난 생의 기억으로 출중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충성심은 같이 몇 차례 사선을 넘다 보니 신뢰가 생겨 더 이상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감녕은 절충장군이 되었다. 거느린 군사는 2천에 불과했지만, 그의 임무를 가볍게 여기는 이는 없었다. 방덕과 장료가 독립부대를 이끌며 외직으로 나가고, 서황은 조정의 고관이 된 상황에서 마초의 최측근에서 보좌하는 무관 중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기 때문이다.

법정은 양무장군의 직위를 받고, 순유의 뒤를 이어 관서대도독부의 사무를 총괄하게 되었다. 서량 정벌에서 전략을 담당하고, 장안에 태학을 세우고, 태원을 선제공격해서 여포군을 와해시킨 법정이니 초고속 승진에 아무도 토를 달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 후.

마초는 몇몇 측근들과 함께 낙양에 도착했다.

마등은 자신이 낙양에 입조하고 마초에게는 마가군을 물려줘서 장안을 맡기고 싶어 했으나 마초가 극구 반대했다. 마초 자신이 거병해서 조정에 입조한 마등이 죽었던 지난 생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결국 마가군의 수장으로 관중과 서량, 한중과 병주를 다스리는 일은 마등이 계속 맡고, 대신 마가군을 대표해서 조정에서 조조와 정치 싸움을 벌이는 역할을 마초가 맡게 되었다.

오늘은 마초가 처음으로 조회에 입조하는 날이었다. 사자 투구 대신 관복을 입은 마초는 뚜벅뚜벅 걸어 대전으로 들었다.

스무 살이 된 천자 유협이 용상에 앉아 있었다. 그 아래에 조조가 섰다. 조정의 실권을 한 손에 쥔 조조는 얼마 전 삼공을 폐하고 스스로 승상에 올랐다.

그 밑으로 상서령 순욱과 시어사 순유가 보였다. 관리들의 감찰을 담당하는 어사 제도를 개편해서 어사대의 수장인 시어사 자리에 순유를 앉혔다. 순유가 가진 감찰권은 대부분의 실권을 장악한 조조와 정치 싸움을 벌이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전장군 서황을 비롯해 이미 시립해 있는 관리들이 마초에게 눈인사를 보냈다. 마초는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으며 앞으로 걸어갔다. 그가 서야 할 위치는 정해져 있었다.

마초는 천자의 바로 아래, 승상 조조의 맞은편에 섰다. 그리고 천자 유협에게 예를 올렸다.

“신(臣), 대장군 마초가 폐하를 뵙습니다.”

“짐이 대장군을 기다린 지 오래요. 이렇게 다시 보니 감개가 무량하구려.”

천자 유협은 마초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항상 조조의 신하들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해 온 유협이다. 군부의 수장인 대장군 자리에 자기 사람이 있다는 게 여간 반갑지 않았다. 반가운 것은 마초도 마찬가지였다. 황제와 대장군이 아니라면 손을 맞잡고 재회의 기쁨을 나누고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예를 마친 마초는 조조와 눈이 마주쳤다. 새롭게 승상이 된 사내는 잔잔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대장군과 헤어질 때 재건된 황도에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었지요. 이리 보게 되니 반갑기 그지없소이다.”

“강녕하셨습니까, 승상. 염려해 주신 덕분에 무사히 역적을 토벌할 수 있었습니다.”

승상 조조와 대장군 마초.

문무 양쪽에서 한나라의 정점에 서게 된 두 사람이니 말투부터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만면에 웃음을 가득 띠었다.

아직은 아니다. 그러나 이제 곧 두 사람의 치열한 싸움이 시작될 것을 자리에 모인 모두가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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