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마초연의-205화 (205/306)

205화. 여남의 삼형제

예주 여남군.

알자복야 황보력은 유비를 마주하고 있었다.

“이것은 폐하께서 내리신 예주 자사의 관인입니다. 유 대인께서는 숱한 백성들을 구하여 명망이 높으십니다. 이번 전쟁에서는 원소의 눈을 피해 후방에서 원가의 세력을 교란하기까지 하셨지요. 이에 관중도독께서 표를 올려 유 대인을 예주자사에 봉해 달라 청하셨고, 폐하께서 윤허하셨습니다.”

유비는 희미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웃음을 지으며 황보력에게 머리를 숙였다.

“관중도독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황보 복야께서도 힘써 주셨음이 틀림없으니, 이 유모가 참으로 복이 많습니다.”

정중하게, 하지만 당당하게.

예주 자사의 벼슬을 받는 유비의 태도는 흠잡을 데 없는 명사의 그것이었다. 여남의 원가 지지 세력을 규합한다는 핑계로 여남으로 가서 원소의 뒤통수를 치고 독립한 인물이라고는 보기 힘든 세련된 모습이었다.

장비는 그런 유비의 모습이 낯선지 유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대형은 뭐든 적당히 하는 법이 없구려. 이제 정치를 하겠다더니 영락없이 정치인이 다 되셨소. 이래서야 왕년에 누상촌의 미친개였다고 해도 아무도 안 믿겠구만?”

“허허허, 익덕 아우는 손님 앞에서 지나친 농은 삼가도록 하게.”

“우욱…….”

유비에게 협객은 때려치우고 정치를 하라고 권한 것은 장비 본인이다.

그러나 장비는 막상 정치인이 된 의형의 모습을 보자 적응이 되지 않았다. 성질이 불같기로, 언행이 거칠기로 삼형제 중에서 단연 으뜸인 유비였기 때문이다.

오늘부터 예주 자사가 된 유비는 만면에 웃음을 띤 채 능숙하게 황보력을 접대했다. 어딘지 귀티 나는 얼굴과 유달리 큰 귀는 거친 협객일 때보다 지금이 더 잘 어울렸다. 몇 순배 술이 돌자 황보력은 은근히 궁금한 것을 물었다.

“두 분 아우님들이 참으로 영웅의 기상이 있으십니다.”

“두 아우가 병장기를 다루는 재주가 조금 있어서 이름이 알려졌습니다. 기예는 대단치 않으나 나름대로 의기는 가진 이들입니다.”

“기예가… 대단치 않다고요?”

당대 최고 명장 황보숭의 조카에 서량 출신인 황보력이다. 무예와 병법에도 어느 정도 소양이 있었으니, 관우와 장비에 대해 모를 수가 없는 것이다.

“두 분 아우님들은 만 명을 대적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장안의 호사가들은 관, 장 두 아우님들을 저희 소주공이신 복파장군과 함께 천하 용장이라고 부르지요. 혼자서 전쟁의 승패를 바꿀 수 있는, 천하에 단 셋뿐인 무장이라고 하더군요.”

“그건 과찬이십니다. 명실상부 천하제일인이신 복파장군께 비할 바는 못 됩니다. 정말 그랬으면 이 유모가 가는 곳마다 실패했겠습니까?”

유비는 짐짓 너스레를 떨었다.

장비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피식피식 웃고 있었다. 불과 몇 달 전에 전쟁터에서 마초와 실제로 겨뤄본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마맹기라면 천하제일의 이름을 가져도 이상하지 않지.’

사람들은 여포, 관우, 장비, 마초 네 사람을 가리켜 천하 용장이라 불렀다. 그중에서도 필두였던 여포가 마초의 손에 죽자 자연스럽게 천하 용장은 세 명으로 줄어들고, 천하제일의 칭호는 이제 마초가 가져가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마초, 장비, 관우 간의 힘의 우열은?

‘그야 생사결을 해 봐야 알겠지만… 그런 건 아무려면 어때.’

장비는 무명(武名)에 별 미련이 없었다. 그저 이 좋은 여남군에 자리 잡게 도와준 마초가 고마울 뿐이었다.

황보력은 유비에게 다시 한 잔 술을 따랐다. 이제 장안의 특산물이 되어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증류식 소주였다. 유비는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큼직한 청동 잔에 담긴 소주를 또 한 번 비웠다.

“그런데 관공께서는 보이지 않으십니다.”

“아아, 운장은 황보 복야가 데려온 손님을 안내하고 있소이다.”

황보력은 예주에 오며 몇 명의 손님을 데려왔다. 마초가 관우에게 소개하라고 한 손님들이었다.

마초의 배려로 부귀영화를 내던지고 빈털터리가 된 유비에게 돌아온 관우다. 그것을 흔쾌히 허락해 준 마초에게 수시로 감사를 표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관우는 마초가 보낸 손님들을 만나며 다시 한번 마초에게 감사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 * *

“가가(哥哥). 오랜만이네요.”

두혜는 관우를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마지막으로 본 지가… 20년쯤 됐나요? 그때는 가가도 나도 참 어렸었는데.”

관우는 그저 수염을 쓸고 있을 뿐이었다. 잠깐의 시간이 지난 후 입을 열었다.

“어찌하여 태원까지 가 있었던 것이오.”

“그야 말하자면 길지요. 그날 이후로 이곳저곳 떠돌다가…….”

두혜의 이야기는 이랬다.

17년 전, 고향 하동을 떠난 후 이곳저곳을 전전했다. 생계가 막막하던 차에 여포 휘하의 군리였던 진의록을 만나서 반강제로 혼인하게 되었다. 사랑은 전혀 없었지만, 재물을 곧잘 모으는 진의록이라 그럭저럭 난세에 의지할 만한 사내였다. 그러던 차에 여포가 자신을 탐냈고, 진의록은 여포를 배신하고 마가군 쪽에 붙는다.

그런데 진의록은 마가군에서도 여포군에서 하던 것처럼 횡령을 하다가 들켜서 처형당했고, 과부가 된 자신을 복파장군 마초가 주선해서 중원의 유력자에게 소개시켜 주겠다고 하여 군량 수송 행렬에 껴서 이동하던 중 수송 행렬이 여포에게 습격당했다.

“…그래서 태원까지 끌려갔지요. 매일 매일이 지옥 같았는데, 얼마 전 있었던 큰 싸움에서 복파장군이 승리해서 겨우 풀려났어요. 그런데 막상 풀려나니까 또 갈 데가 없더라고요. 그러던 차에 복파장군이 가가와 같은 고향 사람이니 찾아가 보라고 하더군요.”

마초는 그러면서 두혜에게 재물까지 듬뿍 안겨 주었다. 재취를 하면서 혼수로 쓰라는 명목이었는데, 그런 것치고는 너무 큰 액수였다.

“어쨌든 일이 이렇게 됐으니 내 앞길은 정해져 있는 것 아니겠어요? 가가의 첩이 돼야겠어요.”

관우 정도 위치의 사내들은 당연하게 첩을 두던 시대다. 재물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 심지어 두혜는 어릴 적부터 절세가인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정황상 관우의 첩이 되는 게 자연스럽다.

그러나 당당하게 첩이 되겠다고 선언하는 자신감은 비단 그런 것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스무 살 무렵 고향에서 설익은 감정을 주고받았던 사이였던 것이다.

“…사실 관모가 먼저 복파장군에게 청하려 했소. 그대를 구해내면 내게 보내 달라고.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복파장군이 먼저 그대를 보냈군.”

“가가가 웬일로?”

“하동에서 입었던 은혜를 갚아야 하니까. 그대가 무사하니 그걸로 됐소. 적당한 재취 자리를 알아봐 주겠으니 굳이 나의 측실로 생활할 필요 없소.”

“으흠.”

두혜의 미간에 깊게 주름이 패었다.

“가가. 겨우 그걸로 끝이에요?”

“더 필요한 게 있소?”

“있지요.”

두혜는 한숨을 쉬고 이야기를 꺼냈다.

“달거리가 끊어졌어요.”

“…….”

“여포의 아이가 내 배 속에 자라고 있어요.”

“안타까운 일이군.”

두혜는 그런 관우를 보며 피식 웃고 말을 이었다.

“나한테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했죠? 그러니 지금 내 청을 들어줘요.”

“무슨 청을 하시려오?”

“나를 첩으로 맞이하세요. 그래서 이 아이가 한수정후 관운장의 서출로 자랄 수 있도록 해 줘요. 이 아이가 여포의 핏줄로 손가락질받으며 살게 하고 싶지 않아요.”

얼핏 들으면 상식 밖의 요구다.

그러나 두혜는 당당하게 그것을 요구했고, 관우는 묵묵히 듣고 있었다.

* * *

183년, 하동군 해현.

이곳은 중국에서 가장 큰 염지(鹽池), 그러니까 소금 호수가 있었던 곳이다.

철, 술과 함께 한나라 경제의 한 축을 떠받치던 것이 소금 산업이다. 해현 최대 호족인 두가는 이 소금의 생산을 독점하고 해현의 왕이나 다름없이 군림하고 있었다.

두가의 이권을 탐내는 이들은 숱하게 많았다. 그러나 두가의 식객 중에는 출신조차 불분명한 고아 출신 청년, 고장생이 있었다. 헤아릴 수 없이 강한 용력을 타고 나서 약관의 나이에 이미 인근에서 당할 자가 없는 무사였다.

수많은 호족과 유협들이 두가의 이권을 노렸지만, 어김없이 고장생이 휘두르는 창에 숱한 피를 뿌리고 포기하게 되었다. 천애고아였던 고장생은 주인집 딸 두혜에게 연모의 시선까지 받는 성공한 무사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거칠 것이 없어진 두가의 수탈은 더욱 악랄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의 일이다.

두가의 수탈을 견디다 못한 전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저마다 손에 괭이와 삽을 들고 있었다. 피를 뒤집어쓴 채 그들을 베어 넘기던 고장생은 그들 사이에 껴 있는 열서너 살의 소년들을 보자 자신의 옛날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결국 고장생은 창을 멈췄다.

고장생이 돌아서자 자연스럽게 두가는 패하고 하동에서 쫓겨났다. 두혜도 이때 중원을 떠돌게 되었다. 괴물로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을 깨달은 후, 살 의지를 잃고 죽음으로 세상을 등지려던 고장생을 옥졸 서황이 말렸다.

“하북에 태평도를 믿는 무리들의 세력이 심상치 않다 하오. 곧 크게 군사를 일으켜 천하를 어지럽힐 것이오. 정히 죽으려거든 그들이나 몇백 명 길동무로 데려가시오.”

그래서 죽을 자리를 찾아 하북으로 갔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고, 탁군의 돗자리 장수 하나가 제법 큰 규모로 의용군을 모집하기에 그의 휘하에 들어갔다. 돗자리 장수는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걸 주저하지 않는 겁 없는 자였다.

‘잘 됐다. 이 자의 휘하에서 용감하게 싸우다 보면 곧 죽을 수 있으리라.’

그런데 가진 힘이 너무 세서 쉽게 죽어지지 않았다. 의용군에는 고장생보다 너댓 살 아래인 활기찬 소년이 하나 있었는데, 한 번은 단신으로 팔백 명의 적을 상대하면서 거의 죽는 데 성공할 뻔했던 것을 이 소년이 어그러뜨렸다. 둘이서 정신없이 찌르고 베다 보니 황건적 팔백 명이 둘을 당해내지 못하고 패주한 것이다.

마음대로 죽어지지도 않자 의용군 대장에게 물었다. 대장은 돗자리 장수 출신이지만 유명한 학자의 문하에서 공부했었다고 했다. 그라면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답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고? 쓸데없는 거 묻지 말고 좌전이나 읽어 봐라. 남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거기에 다 나와 있으니까.”

고장생이 고개를 끄덕이자 돗자리 장수는 작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나는 대충 읽어서 기억이 안 나지만.”

고장생은 그때부터 좌전을 읽었다.

그리고 조금 더 살아 보기로 결심했다. 새사람이 되겠다는 뜻으로 이름은 관우로 바꿨다.

* * *

관우는 두혜를 보며 말했다.

“그날, 내가 창을 멈추지 않았으면 그대의 삶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오.”

“적어도 여포의 첩이 될 일은 없었겠지요.”

“배 속의 아이에게 관씨 성을 갖게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시오. 나는 하동 두가에 큰 은혜를 입고도 갚지 않았으니, 내 이름이 그대에게 가치가 있다면 얼마든지 내어 드리겠소.”

관우는 그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포의 피를 이은 관우의 서출.

아직 아들인지 딸인지도 모르는 이 아이가 훗날 어떤 파란을 몰고 오게 될지, 이때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 * *

“갔냐?”

“갔소.”

“이런 썅, 얼굴에 쥐 나겠네. 웃는 게 이렇게 힘든 거였나?”

황보력이 떠난 뒤, 예주자사가 된 유비는 장비와 마주앉아 정치인으로서의 고충을 토로하고 있었다. 관우는 그 모습을 보며 나직하게 웃었다.

“여남에 자리 잡은 다음부터 형장께서 많이 달라지셨습니다.”

“그래야지. 언제까지 떠돌이 생활을 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

유비가 새롭게 근거지로 삼은 여남군은 현이 30개나 되는 큰 고을이었다. 풍년이면 백만 석 가까운 소출이 나오는 곳이다. 그리고 촘촘한 수로로 형주, 강동, 중원과 연결되어 있었다.

즉, 여남에 강력한 무력 집단이 있다면 형주의 유표, 강동의 손익, 중원의 조조를 동시에 견제할 수 있는 절묘한 위치인 것이다.

장비는 팔짱을 낀 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관서의 마가군 입장에서는 우리를 이용하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지요. 마초가 싸움만 잘하는 게 아니라 머리 쓰는 것도 보통이 아니오.”

“어쨌든 그로 인해 근거지를 얻었으니 좋은 일이지.”

유비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이었다.

여포는 죽었다. 원소는 하북으로 쫓겨 갔으니 다시 예전의 위상을 회복하지 못할 것이다. 강동군도 손책이 죽었으니 지리멸렬할 것이다.

‘결국 앞으로 천하의 패권을 다툴 것은 마초, 그리고 조조. 그 둘인가.’

유비는 하늘을 향해 가만히 손을 뻗었다. 푸른 하늘이 마치 손안에 잡힐 듯 들어왔다.

“그렇다면 이제… 나도 한 번 뛰어들어 볼까.”

유비는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