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마초연의-204화 (204/306)

204화. 장안성의 맹세

마초는 여포와 단기접전을 치르고 죽기 직전의 상태가 되어 돌아왔다. 장료와 감녕이 양쪽에서 부축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순유는 그답지 않게 벽력같이 호통을 쳤다.

“소주공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그대들은 무엇을 했는가!”

장료와 감녕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만한 상황이었다. 보다 못한 마초가 손사래를 치며 순유를 말렸다.

“내가 직접 여포의 목을 취하겠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순 별가는 이들을 그만 나무라십시오.”

그럼에도 순유의 분노는 쉬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만큼 마초의 상처가 깊었던 것이다.

한동안 누워 있던 마초가 활동을 시작한 것은 한 달 후, 장안성에 봄기운이 조금씩 돌기 시작할 때였다.

“여포가 강적은 강적이었나 봅니다. 복파장군께서 한 달이나 누워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199년 음력 1월, 장안성의 어느 누각.

재건된 장안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이곳에서 마초는 가후와 마주 앉아 있었다. 가후가 마초의 안부를 묻자 마초는 씩 웃으며 말을 받았다.

“가 선생, 사실 한 달 만에 일어난 것도 대단한 것이오. 여포가 워낙 용맹하여 마지막까지 승패를 장담하기 어려웠소이다. 내게 운이 따랐을 뿐이지요.”

그것은 사실이었다. 마초 자신이 훨씬 유리한 상황에서 이미 큰 상처를 입은 여포와 겨루었지만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여포와 비슷한 경지에 오르기는 했지만, 무공으로 그를 뛰어넘는 것은 아무래도 어려웠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려면 어때. 살아남아서 대업을 이어가게 된 건 나다.’

가후는 그런 마초를 보며 잔잔히 웃었다.

“복파장군께서 한 달간 두문불출한 것은 여포에게 입은 몸의 상처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동안 마음을 정리하셨던 것 아닙니까.”

“하하, 역시 가 선생은 못 속이겠군요. 맞습니다.”

여포와의 싸움이 끝난 후, 마초는 마음속에서 뭔가가 빠져나간 것처럼 멍하니 있는 일이 잦았다.

마휴가 죽은 후, 영웅이 되기로 맹세하며 두 가지의 뜻을 세웠다. 여포의 목을 베서 마휴의 원수를 갚는 것, 그리고 마휴의 뜻을 이어서 난세를 끝내는 것이다.

5년 가까이 쉼 없이 달려왔다. 그 결과 두 가지 목표 중 하나를 완수했다.

항상 긴장한 상태로 살아 온 마초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긴장했던 몸과 마음은 첫 번째 목표를 달성하자 한껏 풀어졌다. 마초는 그 상태로 두 번째 목표를 어떻게 달성할지 깊이 고민했다.

그리고 오늘, 어느 정도 결론을 내고 가후를 부른 것이다.

“가 선생. 나는 초평 연간의 선생과는 도저히 함께 할 수 없었소.”

“또 그 얘기를 하려고 부르셨습니까?”

가후가 장난기 넘치는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마초는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선생은 크게는 이각을 도와 천하를 어지럽힌 역적이었고, 작게는 내 아우를 죽게 만든 계책을 낸 원수이기도 했소. 그러나 건안 연간의 선생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올시다. 크게는 여포의 계책을 간파하여 관중 백성들을 구한 영웅이고, 작게는 장안의 내 가족들을 살린 은인이기도 하지요.”

척.

마초는 무릎을 꿇고 고쳐 앉았다. 그리고 두 손을 모아 포권의 예를 취하며 말했다.

“그러니 선생. 이제 나 또한 생각을 바꾸겠습니다. 나는 이제부터 난세를 끝내 초가 은공께 청하니, 부디 이 난세를 끝내는 데 힘을 보태 주십시오.”

가후가 장안 공략의 음모를 재빨리 알리지 않았다면 아버지와 아내, 그리고 두 아들의 목숨이 위태로웠을 것이다. 가족의 목숨을 구한 은인이니 이제는 가후를 봐도 옛 생각 때문에 괴롭지 않았다.

“이제 내년이면 낙양이 재건됩니다. 이번에는 우리 마가군도 새 조정에 입조할 것입니다. 낙양에 새로 세워질 조정에는 선생의 힘이 필요합니다. 내가 조정에 선생의 자리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글쎄요. 마가군을 위해 공을 세웠다고 이각을 섬긴 죄가 씻어지지는 않습니다. 조정에는 저보다 더 어울리는 사람이 많이 있을 겁니다. 그러니…….”

가후는 마초를 향해 마주 손을 모았다.

“조정이 아닌 마가군의 관직이라면 맡아 보도록 하지요.”

마초는 가후를 향해 깊이 머리를 숙였다.

순유, 법정, 황권. 모두 국가의 대계를 맡을 수 있는 탁월한 선비들이다.

그러나 난세에는 뛰어난 선비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많이 있다. 작은 단서를 가지고 천 리 밖의 일을 짐작하고, 정도가 아닌 궤계(詭計)로서 천 리 밖의 일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자.

마초에게는 그런 모사가 필요했다. 그리고 이 시대에 모사로서 가후만큼 뛰어난 인물은 없었다.

“선생께서 힘을 빌려주신다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당장은 거기장군부의 종사로 모실 것이지만, 곧 조정에서 이번 전쟁에 대한 논공행상이 있을 테니 그때 내가 더 큰 관직을 받으면 내 부중으로 모시겠습니다.”

“그것은 복파장군께서 알아서 하실 일입니다. 가모는 그저 헌신하여 조금이나마 죄를 씻는 것에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선생. 오늘 이 자리에 선생의 환영회를 겸해서 제 사람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사양하지 마십시오.”

마초는 그렇게 말하며 가후와 함께 누각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래에는 이미 주안상이 마련되어 있었다. 마초는 상석에 앉으며 가후에게 왼쪽 바로 옆자리를 권했다.

“제가 이곳에 앉아도 괜찮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가 선생을 모셔서 무겁게 쓸 생각이라 이미 말해 두었습니다. 이 자리에 모인 전원이 두 손을 들어 환영했지요.”

가후는 고개를 들어 자신의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을 보았다.

방덕, 서황, 이감, 월길, 마대, 그리고 나관중.

5년 전, 마초와 함께 미오성에서 난세를 끝내겠다고 맹세한 이들이었다.

“원래 한 명이 더 있는데, 그 녀석은 지금 남중에 가 있어서 오지 못했지요.”

마초는 미오성에서 같이 맹세한 동지들 중 맹획을 제외한 6인을 보며 말했다.

“다들 무사히 살아남아서 승리하고 이렇게 다시 모였군. 그날 맹세한 두 가지 중 하나를 지켰다.”

미오성에서 같이 맹세한 여섯 명은 저마다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개가 무량한 표정이었다.

“이제 남은 하나를 지키기 위해 새롭게 결의를 다지고자 한다. 우리는 난세를 끝낼 것이다. 단숨에 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어쩌면 우리의 평생을 바쳐야 할 수도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이각, 유탄, 원술, 손책, 원소, 여포를 쳐부순 것처럼, 누구라도 그 길을 막는다면 전부 짓밟고 진군할 것이다.”

이미 맹세를 나눈 여섯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초가 내쳐 말했다.

“앞으로의 싸움은 더욱 힘들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것을 위해 이 자리에 가 선생과 다른 일곱 명을 모신 것이다.”

가후, 그리고 미오성의 6인은 마초의 왼쪽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마초의 오른쪽에도 여섯 명이 앉아 있었다. 순유, 법정, 장료, 감녕, 황권, 왕평이 그들이었다. 조운도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그는 천자를 모시는 우림중랑장이니 태원 전투가 끝난 후 허도로 돌아가 있었다.

“남중에 있는 녀석과 나까지 합치면 열다섯이군. 우리 열다섯 명이 힘을 합쳐 난세를 끝낼 것을 이 자리에서 맹세하도록 하세.”

마초는 맹세의 잔을 들었다. 이 자리에 모인 부하들 열세 명은 앞으로 마초의 최측근으로 활동하게 될 것이다.

“곧 하북의 소식이 전해질 것이다. 원소는 황하를 건너 업으로 철수했고, 조맹덕이 원소를 추격해서 크게 이겼다고 하니 앞으로 다시 황하 이남을 노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되나요? 계속 장안에 남게 되나요? 아니면 허도로 가게 됩니까?”

월길이 물었다. 마초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둘 다 아니다. 이제 내년이면 낙양 조정에 새 황궁이 완공된다. 우리는 새로 들어서는 낙양 조정에 입조할 것이다.”

때가 되었다.

처음 협천자를 거절할 때와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이제 마가군은 관중과 서량을 아우르고 있고, 여포군 잔당의 토벌이 끝나면 곧 병주도 세력권으로 편입될 것이다. 수차례 큰 공을 세워서 명망도 높다. 마가군을 서량 군벌이라고 백안시하던 명문 사족들은 조조에게 대항하기 위한 뒷배경으로 마가군을 원할 것이다. 천자의 신임도 탄탄하다. 그때는 제대로 된 문관도 부족했지만 지금은 가후, 순유, 법정, 황권을 비롯해 수많은 명사들이 마가군을 따르고 있다.

“조조와 공동 정권을 세워 조정을 운영할 준비가 끝났다. 그런데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지.”

자리에 모인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가군은 받은 것은 반드시 되돌려준다. 한중 천사도의 무리들이 장안성을 기습해 점거하려 했으니, 받은 대로 돌려주마.”

천사도의 습격으로 자칫하면 가족이 다시 한번 위험해질 뻔했다.

마초는 이 일을 적당히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 * *

익주 한중군, 남정성.

“호아신변(護我身邊), 화개일월(華盖日月), 급급여율령(急急如律令)…….”

퍽!

천사도의 간령 하나가 자신의 모습을 숨기는 은형법의 주문을 외웠지만 허사였다. 신의 힘을 빌려 목숨을 구하고자 했던 간령은 마가군 병사가 휘두른 칼날에 주문을 다 끝맺기도 전에 목이 날아갔다.

장로는 묵묵히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봤다.

“장안 기습이 실패한 이상 내 목숨이 길게 남지 않았을 것은 짐작했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빨리 올 줄은 몰랐군.”

거사일은 작년 섣달그믐날이었다. 지금이 2월이니, 두 달도 되지 않아서 마가군이 남정성에 들이닥친 것이다.

천혜의 요새라는 한중이지만 마가군의 진격 앞에서는 무력했다. 먼저 방덕과 장료의 기병대가 진창도로 크게 우회해서 들이닥쳤다. 익주 자사 유범의 군사들이 길을 열어주니 거칠 것이 없었다. 그와 동시에 서황과 왕평이 이끄는 보병대가 자오곡을 넘어 한중 평야에 나타났다.

그리고 마초가 직접 이끄는 본대가 포수의 물길을 거슬러 또 한 방향에서 한중으로 침투했다. 감녕이 선두에 서서 물길을 열었다.

장안 원정의 실패로 궤멸적인 타격을 입은 천사군이다. 세 갈래 대군이 쳐들어오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유범의 익주군을 상대로 선전하던 천사군이지만, 마가군을 맞이하니 전혀 상대가 되지 않았다.

한중 남정성은 그렇게 다시 한번 마가군에게 포위당하게 되었다. 지난 익주 내전에서와 다른 점은 이번에는 정말로 성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공성전을 예상했는데, 덕분에 수고를 덜었군.”

마초는 장로를 바라보며 무심하게 말했다.

남정성을 포위한 후, 유범에게 공성병기를 지원받아 성을 두드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장로는 성이 포위되자 깨끗하게 항복을 결의하고 성문을 열었다. 수성을 해 봐야 몇 달을 넘기지 못하고 성이 떨어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복파장군의 원한이 깊은 것을 이해하네. 그러나 이는 군웅들끼리의 일이니, 내 목을 가져가되 부디 한중 백성들의 피가 흐르지 않도록 승자의 아량을 베풀어 주게.”

장로의 말투는 평온했다. 한 시대 최고의 종교 지도자다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장로의 말을 들은 마초는 비웃음을 띨 뿐이었다.

“장로. 이 와중에도 세 치 혀를 놀릴 생각이 드나?”

“내 목은 주겠다고 하지 않나. 그저 백성들만…….”

“백성들, 백성들, 백성들. 누가 백성인가? 자오곡을 넘어 장안성을 빼앗으려던 네놈의 신도들 말인가? 네놈의 지시에 따라 언제 병사로 돌변하여 반란을 일으킬지 모르는 놈들을 내가 왜 살려둬야 하나?”

콱.

마초는 장로의 멱살을 잡았다.

“내 가족을, 내 근거지를 먼저 건드려 놓고 이제 와서 군웅끼리의 싸움이다? 그래, 한중 백성들을 살려주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런데, 내 근거지를 먼저 건드린 놈들을 살려 놓으면 나중에 또 비슷한 일이 생겼을 때 어떻게 하지? 마초는 근거지를 공격당해도 주모자만 참수하니까 걱정하지 말고 용맹하게 싸우라고 격려해야 하나?”

마초는 타는 듯한 눈으로 장로를 노려봤다. 장로는 낮게 한숨을 쉴 뿐, 대답하지 못했다.

“이제부터 한중군은 관중도독부가 직할 통치한다. 천사도의 사원은 전부 파괴하고, 앞으로 관중도독부 관내에서 천사도를 믿는 행위를 일체 금지한다. 앞으로 천사도의 의식을 행하다 발각되는 자들은 지위고하와 남녀노소를 묻지 않고 참수할 것이다.”

한중에 대한 처분을 놓고 마초는 잠시 고민했었다.

‘전부 다 죽일까?’

종교적 신념은 정치 권력이 탄압한다고 그렇게 쉽게 꺾이지 않는다. 지금 한중의 천사도를 탄압해도 그 신도들은 어떻게든 신앙을 이어 나가며 마가군에 적대적인 집단으로 남을 것이다.

그럴 바에는 전부 학살하는 쪽이 후환이 없다. 여기서 한중의 백성 수십만을 학살한다고 조조만큼의 악명을 얻지는 않을 것이다. 귀족 사회의 평판만 잘 관리하면 힘없는 백성은 좀 학살해도 되는 시대였다. 천사도가 먼저 비열하게 마초의 근거지를 습격하려 했으니 명분은 충분했다.

그러나 마가군의 한 명이 눈물까지 흘리며 탄원했다.

“주공, 부디 조조의 길을 걷지 마십시오! 신도들은 그저 천사도가 밥을 주기에 따르는 이들이니, 그들이 목숨을 이어갈 수 있도록 자비를 베푸십시오!”

나관중이었다. 한참 동안 읍소하는 그를 보며 마초는 피식 웃어버렸다.

“비서랑은 나를 조맹덕으로 여기는가?”

“그, 그 말씀은…….”

“간령 이상의 간부들은 참수하고, 좨주 이하의 간부들은 재산을 몰수할 것이다. 평신도들은 내버려 두지. 단 절반쯤은 이곳저곳에 사민할 테니 그렇게 알라고.”

일부는 인구가 부족한 서량으로 보낸다. 또 일부는 전란으로 황폐해진 중원으로 보내고, 대신 조조로부터 중원의 유랑민들을 받아서 한중에 수용할 계획이었다.

그렇게 피는 최소한으로 보는 대신, 천사도의 흔적은 철저히 파괴되었다. 한중의 모든 도관들이 재가 되었다. 민가에서 가진 경전과 부적 같은 종교 물품들도 압수하여 불태웠다. 무사한 것은 농사지을 땅뿐이었다.

장로 또한 무사하지 못했다. 마초는 장안을 습격했던 장로에게 끔찍한 악형을 가할까 잠시 고민했으나, 그가 생각보다 민생에 많이 힘썼던 것을 확인하고 교수형으로 처형한 뒤 교인들로 하여금 후하게 장사지내도록 하였다.

“하여튼 성질대로 했으면 이 한중을 불바다로 만들었을 텐데. 저 천사도 놈들은 내가 얼마나 참고 있는지 알기나 할까?”

“주공, 참으로 옳은 선택을 하셨습니다.”

마초는 나관중을 돌아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도가쟁이들은 쉽게 뜻을 꺾지 않는다네. 나중에 틀림없이 나를 암살하려는 놈들이 생길 것 같은데… 그때 일은 그때 생각하자고.”

그렇게 한중의 일을 정리한 마초는 등방과 오반에게 전후처리를 맡기고 다시 장안으로 향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