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반격하는 늑대
밤낮없이 말을 달려 장안에 도착한 가후는 마등에게 자신의 의심을 전했다.
마등은 즉시 자오곡을 수색해서 천사군의 병졸 몇 명을 붙잡았다. 이들을 심문해 의심이 사실임을 확인한 마등은 바로 병주로 전령을 보내 마가군을 귀환시키려 했으나, 이번에는 가후가 막았다. 본대는 그대로 두고 비밀리에 소수의 별동대만 장안으로 이동시키라는 것이었다.
“오히려 좋은 기회입니다. 관중도독께서 잠시 기다리시면 두 가지 이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오?”
“첫째는 여포를 장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포를 잡으면 병주병의 잔당들은 한 번에 와해됩니다. 복파장군이 병주 전역을 뒤지며 잔당 토벌을 하는 수고를 덜 수 있지요.”
“으음… 두 번째는 무엇이오.”
“한중을 병탄할 명분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즉, 이번에 한중의 장로가 장안을 습격한 것을 구실로 삼아 한중을 정벌하여 마가군의 영토로 삼으라는 것이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섬뜩한 이야기를 하는 가후를 보며 마등은 쓴웃음을 지었다.
“맹기에게 듣기로 가 상서는 앉은 자리에서 천 리를 내다보는 심모원려가 있다고 하더니 정말이구려. 덕분에 죽을 목숨들을 구하였소이다.”
마등이 가후에게 깊게 고개를 숙이자 가후도 답례했다.
“그저 죄를 씻기 위한 계책일 뿐입니다. 관중도독부가 무너지면 관중은 다시 한번 폐허가 될 테고… 누군가 저와 같은 죄를 다시 짓게 될 테니까요.”
* * *
“전부 토벌하라!”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장안의 도관에서는 난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천사도 신도들의 거사를 미리 예측하고 매복해 있던 마가군 병사들이 일제히 도관을 들이친 것이다. 천여 명의 신도들을 이끄는 장로의 아우 장위가 분투했지만, 마가군 삼천이 미리 상황을 알고 대비하고 있었으니 병사들이 픽픽 쓰러져 나갔다.
“이런 빌어먹을! 어디서 계획이 새어나간 것이냐!”
장위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사실 계획은 새어나가지 않았다. 설마 먼 형주 땅에 곡물 시장의 동향만 보고 장안 기습을 의심하는 인물이 있을 줄은, 그리고 그 인물이 한 가닥 의심만으로 과감하게 행동을 벌일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적들이 이렇게 방비하고 있다면 자오곡을 넘는 본대도 지금쯤 함정에 빠져 있겠군. 제기랄!”
장위는 분노에 차서 눈앞에 보이는 마가군 병사 한 명을 칼로 찍었다.
전황은 몹시 불리했다. 지금 상대하는 마가군은 장안에 남은 수비병들이 아니라 마초가 이끄는 원정군 중 최정예들이었기 때문이다. 마초는 원정군의 일부를 티 나지 않게 조금씩 이동시켜서 장로의 장안 습격에 대비했다. 오늘 도관을 습격한 마가군 중에는 본래 금철기 소속인 자들도 다수 섞여 있었다. 특히 맨 앞에서 천사군을 밀어붙이고 있는 실눈을 뜬 장수와 구리 방울을 단 장수는 도저히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무위를 뽐냈다.
장위는 비명처럼 부르짖었다.
“여 장군, 도와주시오!”
천 명으로 장안성 내부에 소요를 만들고, 관중도독부를 장악하는 계획.
이런 대담한 계획을 짤 수 있었던 것은 여포의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가군의 주요 장수들이 없는 장안성이라면 선봉에 선 여포를 아무도 막을 수 없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천사도 청년들의 무리에 섞여 있던 여포는 싸움에 끼어들지 않고 있었다. 살아남은 함진영 백여 명이 여포를 호위하고 있었다.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자 여포는 위장을 위해 입었던 허름한 옷을 벗어 버리고 눈부신 나신을 드러냈다. 그리고 화려한 갑옷과 비단 전포를 꿰어 입기 시작했다.
척.
마지막으로 두 가닥 깃털을 꽂은 봉시관을 머리에 쓴 여포가 앞으로 나섰다.
“졌군.”
완전히 성장(盛裝)을 한 여포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자신이 이끌던 병주병은 태원 전투에서 와해되고 불과 백여 명만이 따르고 있을 뿐이다. 마초의 근거지 장안에 잠입하여 마지막 역전을 노렸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마가군은 미리 대비하고 있었다. 도관은 포위되었다. 병력은 열세고, 적진에는 장료와 감녕이 있다. 적토마도 잃었다.
여포는 이것이 돌이킬 수 없는 완전한 패배라는 사실을 비로소 인정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었다.
‘마초가 없군.’
적진에 장료와 감녕이 있다는 것은 마가군의 핵심 장수들이 이곳으로 이동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마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여포의 옆으로 바싹 다가온 장위가 말했다.
“여 장군의 무위라면 저놈들을 제압할 수 있을 것이오! 오늘 우리가 싸우다 죽을지언정, 저놈들을 길동무로…….”
뻐억!
장위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여포가 내려친 주먹이 장위의 머리에 떨어진 것이다. 장위는 즉사하고, 주먹의 압력을 견디지 못한 안구가 눈 밖으로 튀어나왔다.
슥. 슥.
여포는 방천화극의 모양으로 자루를 짧게 만든 수극을 들어 장위의 목을 잘라냈다. 그리고 장위의 목을 들고 몇 발짝 앞으로 걸어갔다.
“여… 여 장군?”
“도대체 무슨 짓이냐!”
여포의 행동을 본 천사군과 마가군 모두가 당황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더 당황스러운 일이 일어났다.
털썩.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잘 차려입은 여포가 무릎을 꿇었다.
“항복하겠다.”
잠깐 동안 침묵이 흘렀다. 여포의 행동에 경악한 천사군과 마가군이 싸움을 그쳤다.
그리고 잠시 후, 저마다 탄식과 놀라움으로 엄청난 소음을 내기 시작했다.
“뭐… 뭐라고!”
“여 장군, 항복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오!”
“천하제일의 무장이 겨우 이런 자였던가!”
시끄러운 군중을 뚫고 장료가 앞으로 나섰다. 그 또한 표정을 알 수 없는 실눈을 하고 있었다.
“온후. 항복이라는 말이 진심입니까.”
“그렇다. 마가군의 일개 무사로 살아갈 수 있도록 탄원할 것이다.”
“그게… 받아들여질 거라고 생각합니까.”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네놈이 아니다.”
딸그랑.
뒤이어 감녕이 앞으로 나섰다. 잘생긴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였다.
“여포, 너는 우리 주군의 원수가 아니더냐. 이각이 어떻게 죽었는지 듣지 못하였느냐?”
“너희들과는 할 말이 없다. 관중도독과, 또는 마초와 이야기할 것이다.”
감녕과 장료는 서로 마주 보며 눈으로 상의했다. 그리고 잠시 후, 장료가 손을 들어 군사들에게 지시했다.
“오라를 지워라. 범을 묶는다 생각하고 단단히 묶어야 한다.”
영이 떨어져도 군사들은 섣불리 여포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그러자 감녕이 가장 먼저 다가가 여포에게 오라를 걸었다.
한때 천하를 호령하던 여포.
그러나 거듭된 패배 끝에 장안성의 도관에서 굵은 밧줄로 묶이는 신세가 되었다. 장료와 감녕은 여포의 몸을 묶은 것도 모자라서 목에 두 갈래의 올가미를 걸고 군사들에게 붙잡게 했다.
장료와 감녕은 결박한 여포를 붙들고 계단을 올랐다. 목적지는 도관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누각 위였다.
“주공.”
“여포를 데려왔습니다.”
누각 위에는 깃발과 뿔피리를 놓고 전체 전장을 지휘하는 주장(主將), 마초가 앉아 있었다.
“…….”
마초와 여포는 무표정한 얼굴로 한동안 서로를 응시했다. 그러다 마초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항복하겠다고?”
“그렇다.”
“너의 항복을 받아들이면 나는 무엇을 얻지?”
“너는 곧 천하를 놓고 조조와 겨뤄야 할 것이다. 그때 내가 선봉에 설 것이다.”
“그것참 솔깃한 이야기로군.”
마초의 옆에는 몇 명의 무장들과 함께 흰 얼굴의 서생이 서 있었다. 마초는 서생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렇다는데, 비서랑의 생각은 어떤가?”
마초의 옆에 서 있던 나관중은 짧게 대답했다.
“주공께서는 정원과 동탁의 일을 잊으셨습니까.”
“그럴 리가 있나. 성 셋 가진 놈이 제일 못 믿을 놈이지. 내가 그걸 모르겠나.”
계속 무표정하던 마초의 표정은 나관중과 말하는 동안 점점 바뀌었다. 말을 끝맺을 때는 알 수 없는 웃음을 띠고 다시 여포를 바라봤다.
“여포. 나는 이제 너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다.”
이제 와서 항복을 청한다 해도 마초가 들어줄 리 없다. 그런데도 여포는 어째서 항복했는가.
‘여포의 패배는 확정되었다. 도관에서 계속 싸웠으면 여포는 분투 끝에 죽거나 사로잡혔을 터. 그리고 그랬으면…….’
마초 자신의 앞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마지막 도박을 걸었군. 어떻게든 내 앞으로 와서, 내 목숨을 다시 한번 노리려는 수작이 아니냐.”
“…….”
“나는 전장에서 너와 부딪히지 않기 위해 최대한 참았다. 개봉에서는 관운장에게 너의 상대를 맡겼고, 태원에서는 일이 부득이해서 겨루게 됐지만 본래 너를 피할 생각이었다. 내가 원하는 건 너와 무예의 길고 짧음을 겨루는 것이 아니라, 너를 잡아서 조각내는 것이니까.”
“…….”
여포는 말이 없었다. 마초가 말을 이었다.
“내 목숨이 어찌 되든 너의 목숨은 여기서 끝난다. 나와의 승부가 어찌 되든 너의 명예는 회복할 수 없다. 그러나 너는 목숨도 명예도 내던지면서 마지막까지 싸움에만 최선을 다하는군. 이는 내가 따라갈 수 없는 경지이니, 무사로서 경외심이 드는구나.”
속마음을 들킨 탓일까. 산새의 깃털 두 가닥이 가늘게 떨렸다.
마초는 계속 웃으면서 말했다. 처음에는 활짝 웃었다가, 이내 얼굴이 조금씩 굳어지며, 끝내는 입꼬리만 올린 채 눈으로는 여포를 쏘아보는 예의 그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네가 무사로서 어떤 경지에 있던지 관심이 없다. 네 모든 것을 짓밟아 주마.”
딱.
마초가 손가락을 튕겼다.
퍼억!
그것이 신호였다. 군사들이 양쪽에서 올가미를 팽팽하게 당겼다. 여포의 목에 걸린 밧줄 두 가닥이 끊어질 듯 팽팽해졌다.
“더 붙어라!”
감녕이 호령하자 올가미 하나당 두 명씩의 군사들이 더 붙었다. 도합 여섯 명이 여포의 목에 걸린 두 개의 올가미를 끌어당겼다.
“…….”
여포의 눈이 충혈되었다. 두꺼운 목에 엄청나게 많은 힘줄과 혈관이 솟았다. 혹시라도 올가미가 끊어질 경우에 대비하여 감녕과 장료가 여포의 대각선 앞에 섰다. 마초에게 가는 길을 막은 것이다.
딱.
호상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마초가 다시 한번 손가락을 튕겼다. 이번에는 주변에 시립해 있던 군사들 몇몇이 앞으로 나왔다. 손에는 저마다 쇠뇌를 들고 있었다.
“쏴라!”
퍽! 퍽! 퍽! 퍽!
정예병들이, 건물 안에서, 묶여 있는 사람에게 쏘는 쇠뇌다. 대부분이 명중했다. 여포의 몸 여기저기에 짧은 쇠뇌살이 박혔다.
텅.
여포가 무릎을 꿇었다.
눈치를 보던 군사들도 그 모습을 보자 용기를 얻었다. 용감한 자 하나가 달려들어 여포의 다리에 창을 찔러 넣었다.
퍽!
여포가 크게 휘청거렸다. 여포의 근처에 유혈이 낭자해졌다.
“이야아아!”
그 모습을 보고 두 명의 군사들이 더 달려들었다. 창이 여포의 몸통을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충혈된 여포의 눈이 커졌다.
퍽!
여포는 군사가 찌르는 창날을 향해 몸을 던졌다. 창날은 여포의 몸을 스치고 피를 뿌렸다.
그리고 여포를 묶은 밧줄도 같이 창날에 스쳤다.
투두둑.
“아… 아니!”
“아직 힘이 남아 있었나!”
마가군 병사들의 경악에 찬 비명 소리가 울렸다.
밧줄을 끊어낸 여포가 마초를 향해 걸음을 내디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