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심모원려(深謀遠慮)
상용현.
익주와 형주의 경계에 있는 고을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장로가 다스리는 익주 한중군에 속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형주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 곳이다. 상용의 대호족인 신씨 가문은 형주의 유표에게 칭신(稱臣)하면서 한중의 장로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등 절묘하게 줄타기를 하며 상용을 다스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이렇게 줄타기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우리도 크게 출세하려면 조정에 끈이 닿아 있어야 해.’
상용신가의 가주 신탐은 항상 조정에 연줄이 있는 사람과 친분을 쌓고 싶었다. 그래서 형주의 명사들 중 조정과 인연이 있는 인물들을 여러 번 초청했으나 그들 대부분은 시골 호족인 신탐의 초청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다 몇 년 만에 처음으로 형주의 명사가 초청에 응해 상용을 방문했다. 신탐은 뛸 듯이 기뻐하며 자신의 저택에 온갖 산해진미를 차려 놓고 명사를 대접했다.
“이것은 새끼양의 안심을 꿀에 재워서 구운 것이고, 이것은 새끼돼지의 갈비살을 볶아 꿀에 찍어 먹는 요리올시다. 또 이것은 꿀과 스무 가지 향신료를 곁들인 잉어찜으로…….”
조미료가 귀한 고대에는 조미료를 많이 쓰는 게 융숭한 대접의 척도였지만 이번에는 선을 넘은 요리들이 많았다. 신탐의 기괴한 취향 앞에 가후는 쓴웃음을 지었다.
“과분한 대접을 받는군요. 보시다시피 제가 체격이 왜소하여 음식을 많이 먹지 못하니 양해하여 주십시오.”
“핫하하하! 천하에 이름 높으신 가 상서께서 상용현을 찾아 주셨는데 마땅히 최선을 다해 대접해야지요! 여봐라! 가 상서께서 마음껏 드시도록 꿀을 더 내어 오너라!”
“아니, 그건 좀…….”
혀가 마비될 것처럼 단 요리들을 힘겹게 먹고 있는 가후에게 신탐이 은근한 태도로 물었다.
“얼마 전 조 사공과 마초 장군이 원소군을 크게 이겼다지요?”
“그렇다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이제 조조군과 마가군이 천하를 잡겠습니다그려. 가 상서는 마초 장군과 함께 천자의 피난길을 수행하셨으니 마가군에도 연이 있으시지요? 그래, 이제 곧 마가군이나 중앙 조정에서 가 상서를 부르지 않겠습니까?”
“허허허.”
가후는 그저 웃었다.
형주로 피신한 지 4년이 지났다. 지난날 이각을 도왔던 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조용히 은거할 생각이었지만 사람들은 그런 가후를 그냥 두지 않았다. 형주목 유표나 양양의 대호족 채모 같은 이들은 중앙 정계 출신인 자신을 끊임없이 불러서 빈객으로 삼으려 했다. 하도 귀찮아서 술자리에서 일부러 거친 언행을 몇 번 하고 나서야 비로소 해방되었다.
그러나 양양의 명사 한 명만은 그런 가후의 뜻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수경 선생만 아니었으면 완벽하게 조용히 살 수 있었을 텐데.’
수경장의 주인 사마휘는 자신이 후원하는 젊은이들에게 한 수 가르침을 달라는 명목으로 끊임없이 가후를 불렀다. 사마휘와 몇 번 만나다 보니 뜻이 맞아서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게다가 수경장에 드나드는 젊은이들은 하나같이 자질이 뛰어나서, 가후도 그들 중 몇 명과는 깊은 교분을 쌓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오늘 상용에도 그들 중의 한 청년과 함께 오게 되었다. 신탐은 가후에게 갖은 아양을 떨고 나서야 가후의 옆에 있는 청년에게 흥미를 보였다.
“그런데 가 상서의 옆에 계신 분께서는…….”
“서서, 자는 원직이라 합니다. 어르신께 때때로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다.”
“아하, 가 상서께서 제자를 들이셨군요?”
신탐은 껄껄 웃으며 서서에게도 잔을 권했다. 정작 가후는 손을 내저었다.
“서원직의 학문이 이미 대성하였으니 제자라함은 당치 않습니다. 그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벗일 뿐이지요.”
“으하하! 가 상서께서 이리 겸손하실 줄이야!”
신탐은 그 뒤로도 가후의 환심을 사려는 듯 갖은 찬사를 늘어놓았다. 가만히 듣고 있던 가후는 신탐이 칭찬하다 지칠 때가 되자 슬쩍 용건을 꺼냈다.
“신 대인, 최근 한중의 동향은 어떻습니까?”
“한중이요? 한동안 한중의 장 사군이 어찌나 못살게 구는지 아주 죽을 맛이었지요. 이곳에 도관을 크게 새로 짓겠다고 해서 그걸 말리느라 고생 좀 했습니다. 그랬다가는 유 형주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요.”
“그래서 도관은 결국 짓기로 하였습니까?”
“아닙니다. 지난달에 물건을 좀 팔아 주면 도관 얘기를 없던 걸로 하겠다고 해서 다행히 한시름 놓았습니다.”
“물건이라. 그게 무엇입니까?”
“보리 십만 석과 외발 수레 오백 량입니다. 그 외에 목재도 잔뜩 사들이더군요.”
“으음.”
신탐의 말을 듣자 가후가 낮게 탄식했다. 서서가 그런 가후를 보며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어르신의 생각이 맞은 것 같습니다. 어르신께서 천 리 밖의 일을 꿰뚫어 보신다는 소문이 과장이 아니었군요.”
“아니기를 바랐건만…….”
신탐은 그런 가후와 서서의 대화를 들으며 의아해졌다.
“가 상서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신 대인. 우리가 상용현에 온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수경장의 주인 사마휘는 재물을 잘 베풀어 인근에 덕망이 높은 선비였다.
올해는 홍수로 양양 일대의 쌀 작황이 시원치 않았다. 사마휘는 가까운 상용에서 곡물을 사들여 수경장 근처의 굶는 이들을 구휼하려 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상용의 곡물 값이 너무 비쌌다.
수해를 입지도 않았는데 곡물값이 비싸다. 가후는 이 소식을 듣자 상용의 상업을 꽉 잡고 있는 신가가 다른 곳에 곡물을 대량으로 팔아서 물량이 모자란 것이라 추측했다.
‘상용 호족이 장사를 할 만한 곳이라면 한중, 파군, 그리고 형주다. 한중과 파군은 좀처럼 흉년이 들지 않아 곡물이 모자라지 않는 곳이고, 심지어 파군은 복파장군이 개입한 익주 내전 이후 날이 갈수록 풍요롭게 변하고 있지 않은가?’
떨어져야 하는 곡물 값이 올랐다.
불길한 느낌을 감지한 가후는 오래전 신탐에게 받은 초대장을 꺼내 들고 그 길로 상용으로 향했다. 수경장의 젊은이들 중 유독 그를 잘 따르는 서서도 함께였다.
“한중에서 곡물을 대량으로 사들인 것이 아닐까 의심했는데…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군요.”
원래부터 양식이 풍부한 한중에서 대량의 곡물을 추가로 필요로 한다. 뿐만이 아니다. 외발 수레는 산을 넘어 물자를 수송할 때 쓰는 것이고, 목재는 화살을 만들 때 쓰이는 재료인 것이다.
신탐은 가후를 보며 말했다.
“저도 이상하기는 했지만, 장 사군이 전쟁 준비를 하는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니까요. 익주목 유범과 지독하게 사이가 나쁘니 드디어 한번 싸움을 벌이려는 모양입니다.”
“아니, 장로의 목적지는 익주가 아닐 것입니다.”
“익주가 아니면 어디라는 말씀입니까?”
“익주목이 군재는 없으니 장로가 지금 익주를 먼저 치면 몇 번의 승리를 거둘 수는 있겠지요. 하면 그다음에는? 익주목의 뒤에는 마가군이 있지 않습니까?”
“아… 그렇지요. 어차피 광대한 익주를 한 번 싸움으로 다 먹을 수는 없는 일. 마가군이 참전하게 되면 한중의 장로도 무사하지 못하겠지요.”
고개를 끄덕이던 신탐은 다음 순간 다시 얼굴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더욱 이상한 일입니다. 양식을 10만 석이나 사 갔으면 한중의 장정들을 죄다 군사로 징발하겠다는 건데, 장로는 대체 무엇을 위해 그런 짓을 한 걸까요? 어차피 마가군에게 보복당할 게 뻔하지 않습니까?”
“만약 장로에게 마가군이 보복할 여지를 없앨 방법이 하나 있다면?”
“예? 그런 방법이 있습니까? 익주목 유범이 죽기라도 하면 오히려 마가군은 익주를 직접 통치할 기회라고 여기고…….”
“장로가 노리는 게 장안이라면 어떻겠습니까.”
장안의 마초는 지금 마가군의 주력을 전부 이끌고 북방에서 여포군의 잔당을 토벌하고 있다.
만약 이 틈에 한중태수 장로가 대군을 이끌고 자오곡을 넘는다면 장안 공략도 불가능한 게 아니다. 근거지가 떨어지고 수장 마등이 죽으면 마가군도 와해되는 것이다.
신탐은 입을 벌리고 그런 가후를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장 사군에게 그런 게 가능했으면 진즉에 했겠지요. 한중에는 그런 터무니없는 작전을 지휘할 만한 무장이 없습니다.”
“만약 그런 무장이 생긴다면?”
“그야… 그때는 한중 천사군이 천하를 진동시키겠지만…….”
가후의 말에 맞장구치던 신탐의 눈이 커졌다.
“설마… 설마?”
“복파장군이 태원에서 크게 이긴 후, 지금까지 여포의 행방이 묘연하다고 들었습니다.”
“가 상서. 설마 여포가 장 사군과 결탁하여 장안을 직접 칠 것이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가후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저는 과거 그들의 무리에 협력했던 몸. 그 사내의 기질을 잘 알고 있습니다.”
여포는 명예나 굴욕 같은 단어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마치 늑대처럼,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사냥을 멈추지 않는 것이 여포의 기질이었다.
‘장로는 왜 상용에 대한 포교까지 포기하며 전쟁 물자를 사들이는가. 그리고 여포는 어디로 갔는가.’
물론 지나친 비약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만에 하나라도 사실이라면? 그때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질 것이다.
가후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신 대인, 부탁이 있습니다.”
“아… 예, 말씀하십시오.”
“말을 네 필만 사겠습니다. 제일 좋은 놈으로 주십시오.”
“가 상서께서 청하시는 건데 그 정도야 그냥 드리지요. 그런데 갑자기 말이라니요?”
“지금 당장 장안으로 가야겠습니다. 두 사람이 말을 세 필씩 끌고 갈아타며 달릴 작정입니다.”
“예? 장안이요? 가 상서, 완성 일대에 최근 도적들이 창궐하고 있습니다. 장안까지 무사히 가시기 어려울 것입니다.”
“여기 있는 서원직은 공부하는 서생이지만 열 사람 몫을 하는 무사이기도 합니다. 서원직이 저를 호위할 테니 신 대인께서는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서서가 가후를 보며 힘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가신다는 건… 며칠만 묵었다 가시지…….”
신탐이 볼멘소리를 했지만 가후는 듣지 않았다. 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서서와 함께 장안으로 말을 달렸다.
* * *
198년 12월, 한 해의 마지막 날.
아침부터 조금씩 눈이 내렸다. 장안성 내의 사람들은 저마다 눈을 쓸기 위해 부산히 움직였다.
혹독한 대기근이 끝난 후 세 번째 맞는 겨울이었다. 동탁이 천도해온 후 폐허가 될 뻔했던 장안은 마가군의 통치 하에 옛날의 화려한 모습을 회복해 가고 있었다. 마초가 황하 전선에서 원소군을 격파하고, 뒤이어 병주에서 여포군을 물리쳤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길을 가는 사람들의 표정에 활기가 돌았다.
“장안에 처음 왔던 게 4년 전이지요. 처음 왔을 때는 아귀지옥이나 마찬가지인 곳이었는데, 그동안 참 많이 변했어요. 이렇게 크게 재초(齋醮, 도교의 기도회)도 열게 되었으니 말이지요.”
재초에 초청받은 양하원은 장안 최대의 도교 사원에서 천사도의 간령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집에서 쌍둥이 아들들의 육아만 하고 있자니 답답하던 차에 마침 외출할 기회가 생긴 것이다.
양하원을 초청한 천사도 간령, 왕이는 화사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게 다 복파장군께서, 그리고 태양부인께서 힘써 주신 덕이지요.”
“으흠. 그나저나 쌍둥이 아들 키우다 오랜만에 바깥바람 쐬니 좋네.”
양하원은 왕이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도관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구경했다. 왕이는 그 옆에 찰싹 붙어서 수행하고 있었다.
“저 사람들은 다 뭐죠?”
양하원의 눈에 도관 한켠에 모여 있는 청년들이 들어왔다. 천 명 가까운 사내들이었다.
“아, 저들은 도관의 일을 하는 일꾼들입니다. 오늘 재초가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 한중에서 일부러 데려왔지요.”
“흠, 그런데 참 신기하네요.”
“후후, 뭐가 그리 신기하신지요?”
왕이는 작게 웃으며 반문했다. 양하원은 그런 왕이를 보며 말했다.
“사내들이 천 명이나 있는데, 그들 중 나이가 많거나 체격이 왜소한 자가 한 명도 없이 전부 건장한 청년이군요. 어찌 된 영문이죠?”
“그야 천사도에서는 보통 한창 나이의 청년들이 교단 일을…….”
“그 교단 일이란 게 복파장군이 없는 사이 장안을 습격하는 건가?”
뚜벅. 뚜벅.
양하원은 왕이의 앞으로 다가가서 섰다. 양하원보다 머리 하나가 작은 왕이는 당혹한 표정으로 그런 양하원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부인, 그게 무슨…….”
“하마터면 당할 뻔했다. 천 리 밖의 형주에서 너희들 수작을 꿰뚫어 보고 도움을 주신 분이 아니었으면 말이야.”
콱!
양하원은 그대로 왕이의 머리채를 잡았다. 왕이는 저항해 보려 했지만, 상대는 무공을 익힌 여인이니 머리채를 잡힌 채 질질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쿵!
양하원이 집어 던지자 왕이가 나가떨어져서 기둥에 몸을 부딪쳤다. 바깥이 내려다보이는 누각이었다.
“으윽…….”
“너희 쪽 졸개들 몇 명을 붙잡았더니 실토하더군. 한중의 천사군이 자오곡을 넘어 장안을 급습하고, 장안에서는 이 재초가 한창일 때 군사를 일으켜 관중도독부를 점거할 생각이라고. 하지만 아군이 미리 대비하고 있었으니, 자오곡을 넘어 온 군사들은 지금쯤 전멸했을 것이다.”
힘들게 자오곡을 넘어 온 한중의 천사군을 막고 있는 것은 방덕과 강족 기병들이다. 지친 천사군이 당해내기에는 너무나 벅찬 상대였다.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것을 안 왕이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오냐, 그까짓 천사도 교단은 복수의 도구였을 뿐이니 내 알 바 아니다. 허나 마초가 내 지아비를 빼앗은 죄만은 용서할 수 없다. 너를 죽여서 마초에게도 똑같은 고통을 맛보게 해 주마!”
왕이는 품 안에서 비수를 뽑아 들고 양하원에게 달려들었다. 그 모습을 보자 양하원은 피식 웃으며 치맛자락을 걷어 올려 옆으로 펼쳤다.
휘리릭.
허벅지에 매달려 있던 철퇴가 양하원의 손에서 한 바퀴 돌았다. 애병 철퇴까지 들었으니 무공이 없는 왕이를 일격으로 절명시키는 것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지만, 양하원은 마지막 순간 철퇴를 살짝 틀어 머리 대신 어깨를 내리쳤다.
뻐억!
“아아악!”
쇄골이 부러진 왕이가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생전 처음 경험하는 육체의 고통에 그저 몸부림을 칠 수밖에 없었다.
“복수를 위해 복파장군의 첩이 되려고 했으면 머리통을 깨 놨을 텐데, 그게 아니니 이 정도로 끝내 주지.”
양하원의 수행원들이 달려와서 몸부림치는 왕이에게 오라를 지웠다. 관중도독부의 군사들 중에서 가려 뽑은 이들이었다.
재초가 한창인 틈을 타 거사하려던 천사도의 계획이 틀어졌다. 왕이가 잡힌 것을 보자 도관 여기저기서 소란이 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