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천하제일 (2)
퍼억!
마초를 짓밟을 기세로 달리던 적토마는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옆에서 뛰어 들어온 도철이 적토마를 들이받았기 때문이다.
적토마가 크게 휘청거리는 동안, 마초는 뛰어올라 도철의 등에 다시 올라탔다.
“질긴 놈이군. 절초를 세 번이나 맞고도 힘이 남았느냐.”
마초는 다시 한번 치란을 뽑아 들었다. 여포에게 돌진하려던 찰나, 누군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아장 마대였다. 손에는 말고삐를 잡고 주인 없는 말을 한 필 더 끌고 있었다.
“그렇단 말이지.”
마초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마초는 크게 원을 그리며 여포와 마대의 사이로 위치를 조정했다.
이번에는 여포가 먼저 달려들었다. 등에 여기저기 화살이 꽂힌 여포는 수극을 들어 마초를 겨눴다. 마초는 조금 속도를 늦췄다. 돌진하는 여포를 향해 마초는 천천히 도철을 몰아 다가갔다.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여포는 수극을 휘둘렀다.
부웅!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나며 수극이 허공을 갈랐다. 마초는 도철의 등자에 오른발만을 둔 채로 오른쪽으로 몸을 숙여 수극을 피했다.
“걸렸구나.”
여포가 그대로 주먹을 들었다. 그는 권격만으로 도철을 쓰러뜨릴 자신이 있었다. 도철은 왼쪽 옆으로 이동해서 여포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났다. 동시에 마초는 등자를 박차고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그리고 아주 찰나의 순간이 지난 후, 마초는 백마가 아닌 흑갈색 말의 안장에 착지했다. 마대가 끌고 온 절영이 마초의 등 뒤에서 급가속해서 마초를 태운 것이다.
“가자, 절영!”
자식에게서 어미로 옮겨 탄 마초가 낮게 호령했다.
끼기기긱!
절영은 땅을 미끄러지며 여포와 적토마를 향해 전진했다. 여포가 수극을 들어 마초를 찍었다. 마초는 피하지 않고 중심선을 지켰다. 병기끼리 부딪히는 순간, 청경의 수법으로 여포의 수극에 실린 힘의 방향을 아주 살짝 틀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낙일의 수법으로 여포의 머리를 노렸다. 치란이 여포의 수극을 타고 여포의 머리를 파고들었다.
퍽!
여포가 머리를 틀었다. 치란의 칼날이 여포의 목덜미 근육을 파고들어 선혈이 튀었다.
“흡!”
마초는 그대로 치란에 체중을 실어 힘껏 찍어 눌렀다. 두 조각이 나지 않기 위해 여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몸을 뒤로 빼는 것이다.
퍼억!
치란은 여포를 깊게 베지 못했다. 대신 여포가 몸을 빼낸 자리에 있는 적토마의 잔등을 헤집었다.
촤아아악.
적토마의 잔등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마중적토(馬中赤兎), 인중여포(人中呂布).
최고의 명마로 그 이름이 이천 년간 전해질 수도 있었던 적토마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리고 여포는 낙마했다.
그 자리에 모인 모두가 눈을 의심했다. 적토마가 베이고 여포가 낙마했다. 서 있는 것은 절영에 탄 마초였다. 마초는 치란을 허공에 한 번 휘둘러 도신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금철기, 그리고 함진영. 양쪽 군사들 모두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여포가 낙마한 믿을 수 없는 광경을 그저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금철기 사이에 있던 마대가 침묵을 깨고 외쳤다.
“보았느냐! 이제 우리 형님이, 서량의 마초가 천하제일이다!”
툭.
함진영의 누군가가 창을 바닥에 던졌다.
그것이 신호였다. 전세가 기우는 것을 보자 함진영의 군사들은 저마다 창칼을 바닥에 던지기 시작했다. 몇몇 대담한 군사들은 마초가 건 현상금을 노리고 여포를 찔러 보려 하였으나, 여포가 타는 듯한 눈으로 한 번 돌아보자 오금이 저려서 더 이상 다가갈 수 없었다.
“온후.”
거친 숨을 몰아쉬는 여포의 곁으로 부장 조성이 다가왔다. 적토마가 쓰러지는 것을 보고 여분의 말 한 필을 끌고 온 것이다.
“새 말을 가져왔습니다.”
“알았다.”
여포는 훌쩍 뛰어올라 새 말에 올라탔다. 그런 그를 보고 조성이 담담하게 말했다.
“이번 싸움은 졌습니다.”
“알고 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죽을 생각이시면 저도 같이 적진에 돌격해서 죽겠습니다. 살 생각이시면 제가 죽기로 싸워 길을 열겠습니다.”
두 가닥 산새의 깃털이 가볍게 떨렸다. 조성은 그 모습이 묘하게 웃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조성. 너는 아직도 나를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냐.”
“그 말씀은…….”
“나는 살 것이다.”
여포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입을 닫았다. 조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온후는 명성이나 체면에 얽매인 적이 없다.’
승리, 그리고 쾌락.
여포에게 의미 있는 것들은 오직 살아서만 가질 수 있는 것들이었다.
조성은 창을 단단히 쥐고 돌격을 준비했다. 죽음을 각오하니 마음이 평온해졌다. 그런데 돌격하기 전에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었다.
“온후. 살아남으시면 마초를 잡을 방법이 있습니까?”
“있다.”
“그렇다면 마음 편히 죽지요.”
조성은 그렇게 말하고 씩 웃었다. 아직 기가 꺾이지 않은 함진영의 기병들이 조성의 옆으로 모여들었다.
“함진영! 돌격하라!”
“우와아아!”
조성은 그대로 함진영을 휘몰아 마가군 진영으로 돌격했다.
조성과 함진영들은 분전했다. 이백여 기의 함진영 돌격대는 같은 수의 금철기가 바닥에 쓰러지고 나서야 무너졌다. 여기저기 상처를 입으면서도 날뛰는 조성을 잡기 위해 끝내 방덕이 편곤을 들고 직접 나서야만 했다.
그 사이 여포는 말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전장의 소음을 뒤로 한 채, 부하들이 싸우는 방향의 반대편으로 말을 달려 다시 분수를 건넜다.
가장 강성할 때 2만을 헤아리던 여포의 병주군은 태원 벌판의 싸움에서 대패, 와해되었다. 죽은 자, 항복한 자, 뿔뿔이 흩어져 도망친 자를 제외하면 겨우 백여 기만이 패주하는 여포의 뒤를 따랐다.
“도망치지 마라, 여포!”
“깃털 두 개 꽂은 놈이 여포다! 여포를 잡아라!”
여기저기서 마가군 장수들이 여포를 추격했다. 한 시진 전까지 천하제일인이었던 여포의 위상은 이제 전혀 달라져 있었다.
투둑.
여포는 미련 없이 산새의 깃털 두 개가 달린 봉시관을 바닥에 내던졌다. 한때 그의 상징이었던 봉시관은 말발굽에 어지럽게 짓밟혀 형체를 알 수 없게 변했다.
굴욕감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여포는 오직 다음 행선지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첫째, 세력은 있으나 제대로 된 무장이 없어야 한다. 둘째, 마초의 본거지에서 가까워야 한다.’
변방의 싸움은 죽어야 끝난다. 그리고 여포는 아직 살아 있었다.
홀로 절영을 몰아 분수 유역까지 다가간 마초는 여포가 내던진 봉시관을 집어 들었다. 그토록 강대해 보이던 여포는 자신과의 단기접전에서 패한 뒤 다시 강을 건너 도주하고 있었다.
“도망쳐서 삶을 구하느냐. 네놈답구나.”
어느새 다가온 나관중이 진언했다.
“주공. 더 이상 가시는 건 위험합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여포가 멀리 도망치지는 못할 것입니다. 곧 다시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곧 겨울이 온다. 놈이 군사 수백이라도 먹이려면 병주 어딘가를 떠돌다 약탈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꼬리를 밟히겠군요.”
“그래. 그때를 기다려 여포를 사냥할 것이다.”
질기게 계속되는 여포와의 인연. 그러나 마초는 그 인연이 올해를 넘기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잠시 후 해가 졌다. 마초는 수색을 중단하고 새롭게 마가군의 영토가 된 태원성에 입성했다.
그리고 며칠 후, 태원 벌판에 눈이 내렸다. 기나긴 북방의 겨울이 시작된 것이다. 198년 음력 10월의 일이었다.
* * *
“사군, 아이 참.”
왕이는 연신 자신의 몸을 탐하는 장로를 밀어내며 깔깔 웃었다.
낮 동안의 장로는 한중 천사도의 수장으로 남들에게 존경을 받는 종교 지도자였다. 사실상 종교 왕국이나 다름없는 한중을 다스리는 군웅이기도 했다.
그리고 밤이 되자 내연 관계에 있는 교단 간부, 왕이의 몸을 탐하고 있었다.
“왕 간령(姦令, 천사도의 간부). 그대는 참 신기한 사람이군.”
“뭐가 그리 신기하신가요?”
정사가 끝난 후, 장로는 왕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왕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런 장로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그대처럼 미색과 총명함을 함께 갖춘 여인이 천하에 또 있겠나. 그런데 방사(房事)에도 이리 능통하니, 참으로 신기하지 않은가. 하늘이 나를 도우시나 보네.”
“글쎄요. 인연은 하늘이 아니라 사람이 만드는 것이지요.”
왕이는 뜻 모를 말을 되뇌었다.
“제가 간령의 자리까지 올라간 건, 결국 사군께서 천사도를 그렇게 만드셨기에 가능한 일이지요. 여인이 중책을 맡아 바깥일을 할 수 있는 곳이 천하에 천사도 말고 어디 있겠습니까?”
“허허, 겸양이 지나치군. 그대라면 쌀 다섯 되만 들고 들어왔어도 간령이 됐을 걸세.”
“사군은 어찌 그리 마음에 없는 말을 잘하셔요?”
장로와 왕이는 그렇게 벌거벗은 채 한참 동안 서로 정담을 주고받았다.
“사군, 그런데 말이지요.”
“말해 보게.”
“천사도를 좁은 한중에만 묶어 두실 생각이십니까?”
“허허허.”
장로는 왕이를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나라고 왜 세력을 뻗칠 생각을 해 보지 않았겠나. 그런데 익주 내전에 잘못 끼어들었다가 아주 큰 곤욕을 치렀네. 서량 마가군 놈들이 자오곡을 넘어서 이곳까지 흉노 기병을 보냈었지.”
“그렇군요. 우리 천사도에 장정만 십만 명이 있는데, 그들을 동원해도 안 되나요?”
“병사는 있으나 장수가 없네. 우리 천사도의 청년들은 하나같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만약 싸움을 제대로 할 줄 아는 무장이 있었다면 천사군이 천하를 호령했겠지. 그러나 이 한중에는 싸움에 능한 이가 없네.”
제대로 된 무장이 없다는 것.
그것이 장로의 고민이었다. 기껏해야 자신의 아우 장위 정도인데, 장위 따위로는 익주목 유범이 부리는 오란, 뇌동 같은 장수들을 상대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러나 한중에는 풍부한 군량과 촘촘한 교단 조직이 있다. 종교적 신념으로 무장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장정이 10만이니, 만약 천하에 이름난 무장과 선봉이 되어 줄 정예병이 주어진다면 한중 천사군의 위상은 지금과 전혀 달라질 것이다.
“사군. 만약 이름난 무장이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이름난 무장? 왕 간령, 그게 무슨 소린가?”
“얼마 전, 장안의 교단을 통해 여포가 접촉해 왔습니다.”
“뭣이?”
장안은 왕이의 관할이었다. 왕이는 자신의 미모로 장로의 눈에 들어 사실상의 애첩이 된 후, 장안 지부에 대한 권한을 집요하게 요구해서 결국 받아냈다. 장로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왕이가 원래 서량 출신이니, 고향 근처의 대도시인 장안에 이따금 들르고 싶어 그러는 것이라 여긴 것이다.
“왕 간령. 여포라고?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아는가?”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사군께 천하를 두고 싸우라는 이야기를 드리고 있지요.”
장로는 순간적으로 왕이의 눈매가 길어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저 돈 많은 미망인으로만 보이던 왕이는 지금 장로에게 엄청난 도박을 권하며, 전에 없는 관능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야… 여포만 있다면 유범 따위는 바로 박살내고 우리가 익주를 지배할 수 있겠지. 그런데 여포는 서량 마가군의 원수일세. 마가군 놈들이 그 꼴을 두고 보겠는가?”
“여포가 없으면 다른가요?”
“그게 무슨 소린가?”
“사군께서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서량 마가군 입장에서 우리는 후방의 위협. 그들은 결국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얼마 전 원소와의 싸움에서도 이겼으니, 몇 년 안에 이 한중을 빼앗으려 할 것입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장로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한참 동안 뭔가 생각한 장로는 입을 열어 느릿느릿 말했다.
“마가군은 나의 원수라네. 익주에 계시던 내 어머니는 익주 내전의 와중에 마초의 손에 돌아가셨지. 생각 같아서는 마초의 생살을 씹어도 시원치 않네. 그러나… 마초와 맞서 싸울 방법이 없지 않은가?”
내연녀의 앞이라 마음이 약해진 것일까?
낮 동안의 근엄한 모습과는 달리, 솔직하게 심정을 토로하는 장로를 보며 왕이가 말했다.
“지금 마초는 대군을 이끌고 병주에 머물고 있다고 합니다. 마가군의 이름난 장수들도 죄다 마초의 곁에 있고요.”
“그건 알고 있네.”
“그러니 장안은 텅텅 비어 있지요. 우리가 그 장안성을 장악하는 겁니다. 연말에 장안에서 큰 규모의 재초(齋醮, 도교의 기도회)가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 장정을 천여 명 보내고, 여포로 하여금 그들을 이끌게 한다면 장안성을 안에서부터 떨어뜨릴 수 있습니다.”
“장안성을 떨어뜨리면, 그다음에는? 장안으로 되돌아오는 마초를 무슨 수로 막겠는가?”
“때맞춰 우리 십만 천사군이 자오곡을 넘어 장안으로 진군합니다. 여포가 안에서 장안의 성문을 열어젖힐 테니 장안에 입성하는 것은 시간문제. 그다음에는 거대한 장안에서 농성하며 마초와 한 번 승부를 겨뤄 볼 만하지요.”
“으음, 그건…….”
“사군께서도 비슷한 생각을 하신 적이 있으신 걸로 압니다. 선봉에 설 무장이 없어서 결행하지 못했을 뿐, 자오곡 곳곳에 도관을 지은 건 그런 날을 대비해서가 아닙니까? 곳곳의 도관마다 양식을 숨겨 놓으면 군사들이 보급의 걱정 없이 자오곡을 넘을 수 있으니까요.”
“왕 간령. 실패하면 우리 모두 목숨을 잃는 길일세.”
“성공하면 우리 천사도가 천하를 얻는 길이기도 하지요. 그리고… 천하만큼 중요한, 원수의 목도 같이 얻지 않겠습니까.”
왕이는 달콤한 목소리로 장로에게 간언했다. 여인인지, 신하인지 모호한 태도였다.
장로는 허허 웃다가, 탄식하다,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기며 시간을 오래 끌었다.
그리고 마침내 고민이 끝났을 때는 오랜만에 군웅다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장안성 안에서의 싸움이라면… 여포보다 능한 자가 없겠지. 장안에서 동탁을 참살한 게 바로 그자였으니까.”
“맞습니다.”
“왕 간령, 산은 좀 탈 줄 아는가?”
장로는 뜬금없이 왕이에게 등산 실력을 물었다. 왕이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서량 여인인데 설마 산봉우리 몇 개를 못 넘겠습니까. 산을 못 타겠으면 기어서라도 넘어갈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기특한지고. 곧 자오곡을 넘어야 할 테니 준비하게.”
장로가 결단했다.
왕이는 말없이 장로의 목에 팔을 두르고 넓은 품에 안겼다. 장로에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왕이의 눈빛은 2년간 치밀하게 준비한 복수를 앞둔 기쁨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