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태원 전투 (2)
촤아악!
마초는 치란의 칼자루 끝을 잡고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베어 내렸다. 한껏 길게 잡은 장도는 칼날에 닿는 모든 것들을 갈라냈다. 마초가 치란을 휘두른 길을 따라 그대로 적병들의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타닥.
도철은 그대로 잔걸음으로 오른쪽으로 돌았다. 마초는 다시 오른쪽에 적병들을 두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치란을 길게 잡고 왼쪽 아래에서 오른쪽 위로, 바깥쪽으로 휘둘렀다.
촤아아악!
“으아아악!”
이번에는 칼날이 가는 방향을 따라 피가 하늘로 솟구쳤다. 병주병들의 끔찍한 비명 소리도 함께였다.
“이, 이런 제길…….”
“녹각(鹿角)! 녹각을 가져와라!”
병주병 소교들이 비명처럼 소리를 지르자 어디선가 병졸들이 녹각을 가져왔다. 끝을 뾰족하게 깎아 사슴뿔처럼 만든 나무를 얽어서 세운, 기병 방어용 목책이었다.
“잘도 저런 걸 준비해 뒀군.”
마초는 피식 웃으며 도철의 잔등을 쓰다듬었다.
도철이 조금 지쳐있는 게 느껴졌다. 최고 속도로 태원 벌판을 가로질러 성 안까지 돌입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저런 녹각 정도를 뛰어넘지 못할 리는 없겠지만…….’
문제는 하나를 뛰어넘어도 뒤로 줄줄이 녹각이 있다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본 마초는 별안간 말에서 내렸다.
“도철에게는 짧은 휴식을, 병주병에게는 헛된 희망을 주지. 자, 서량의 마초가 여기 있다. 군공이 탐나는 자는 나서라.”
“쳐라!”
마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병주병 소교들의 호령이 울렸다. 마초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병주병들을 보며 땅에 떨어진 적병의 창 한 자루를 들어 왼손으로 쥐었다.
퍼퍼퍽!
마초가 창을 휘둘러 병주병들의 창을 옆에서부터 쓸었다. 병주병 다섯 명의 창이 한꺼번에 쓸려서 바닥에 처박혔다.
“아니!”
“으윽…….”
병주병들은 저마다 땅에 처박힌 창대를 뽑아내려 하였으나 마초가 청경의 수법으로 힘을 제어하자 꼼짝하지 못했다. 마초는 그 사이로 유유히 다가가 오른손에 쥔 치란을 가로로 크게 휘둘렀다.
퍼억!
“크아악!”
병주병들의 비명 소리와 함께 잘린 팔다리가 날았다.
나름대로 싸움에 능한 병주병들이지만,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 칼날에 닿는 것은 전부 잘라내는 치란에 마초의 무위가 더해지니 감당할 방법이 없었다. 일 합에 서너 명을 베어내며 뚜벅뚜벅 전진한 마초는 이내 녹각 앞에 서서 치란을 두 손으로 잡았다.
콰드득!
치란이 한 번 번뜩이자 통나무로 된 녹각도 두 토막이 나서 나뒹굴었다. 순식간에 세 개의 녹각이 베이고 삼십여 명의 군사들이 죽거나 다친 채 나뒹굴었다.
퍽!
“끄으윽…….”
마초는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덤비는 소교 한 명의 가슴에 칼을 꽂아 넣었다. 소교가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는 동안 마초는 성문 근처에 있는 병졸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너, 그리고 너.”
“예… 예?”
“성문을 열어라.”
“예!”
마초의 지목을 받은 병졸들은 닫히려던 성문을 잠자코 열기 시작했다. 그게 유일한 살길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때, 녹각 뒤에서 한 사람이 나타났다. 팔척이 넘는 키에 곰 같은 거구의 장수였다.
쿵.
장수가 손에 든 묵직한 철봉으로 땅을 짚으니 땅이 울렸다. 단기로 돌입한 마초를 막지 못해 절망에 빠져 있던 병주병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위월 장군!”
건장(健將) 위월.
성렴과 함께 여포의 심복으로 수많은 전투에서 이름을 날려 온 인물이다. 조금 떨어져서 전황을 지켜보던 위월은 마초가 말에서 내린 것을 확인하자 성큼성큼 다가왔다.
“서량의 마초. 4년 전 온후의 얼굴에 일격을 넣었다더니 과연 그 솜씨가 대단하구나. 마상 전투에서는 온후 말고 짝할 사람을 찾기 어렵겠군.”
“네놈이 위월인가.”
“그렇다.”
위월은 성큼성큼 걸어가 마초의 앞 10장 거리에 섰다.
바닥에는 녹각이 베이면서 쏟아진 통나무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말을 달리거나 재빠른 보법을 쓰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위월은 그렇게 달리기 불편한 곳 가운데로 굳이 들어가서 섰다. 마초는 위월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속도로는 나를 당할 수 없으니 일부러 움직임이 불편한 곳으로 끌어들이려는 수작이군. 덩치는 산만 한 놈이 꾀를 쓰는구나.’
마초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대로 위월이 서 있는 곳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갔다.
부웅.
위월은 마초가 들어오자 철봉을 휘둘러 어깨에 멨다. 끝으로 갈수록 굵어지는 철퇴 같은 철봉이었다.
마초는 위월을 보며 말했다.
“‘마상 전투에서는’ 따위의 말을 하는 걸 보니 마상 전투가 아니면 나를 상대할 자신이 있는 모양이군.”
“마초. 네 무예가 달인의 경지에 오른 것은 알겠으나… 자만했구나!”
팍!
위월은 말을 끝맺기도 전에 땅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두 손으로 쥔 철봉이 마초를 향해 떨어졌다.
‘땅 위에서의 싸움은 힘과 기세가 중요하다. 지금처럼 장애물이 많아 움직임이 불편한 곳이라면, 더욱!’
위월은 힘에 자신이 있었다. 이제껏 수많은 전쟁터에서 여포 외에는 자신보다 강한 완력을 지닌 상대를 보지 못했다. 마초의 무예가 뛰어나다 하나 자신에 비하면 체격의 열세가 있으니 충분히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까앙!
금속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마초에게는 피할 공간이 없다. 얇은 장도로 위월의 철봉을 받아낼 수밖에 없었다. 위월은 마초가 철봉에 실린 힘과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눌릴 것이라 생각했다.
“아… 아니!”
그러나 상황은 위월의 예상과는 다르게 돌아갔다.
마초가 한 손으로 쥔 치란이 철봉을 세로로 절반이나 파고들어 있었다. 치란의 칼날은 벌써 수십 명의 적병을 벴지만, 아직도 무쇠를 가를 정도로 예리했다.
그리고 마초 또한 왼손 하나로 위월이 두 손으로 내려치는 힘과 철봉의 무게를 버티고 있었다. 청경이나 화경의 수법이 아니라 그저 힘이었다.
“크윽!”
당황한 위월은 치란이 꽂힌 철봉을 두 손으로 잡고 뽑아내려 했다. 그러나 철봉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마초가 청경의 수법으로 위월이 쓰는 힘을 흘리고 있었다.
“힘으로는 당해낼 수 있을 것 같았나?”
마초는 그 말과 함께 오른 주먹을 위로 뻗어 위월의 턱을 후려쳤다.
뻐억!
위월의 고개가 뒤로 젖혀지고 투구가 벗겨져 하늘을 날았다. 순식간에 머리가 크게 흔들린 위월은 끊어지려는 정신을 간신히 부여잡았다.
그런데 다시 한번 마초의 주먹이 시야 가득 들어왔다. 이번에는 치란의 칼자루를 쥔 왼손 주먹이었다.
뻐억!
쿠당탕!
주먹에 맞은 위월은 자기 키만큼 되는 거리를 날아가 바닥을 굴렀다.
“커윽…….”
위월은 신음을 흘렸다.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지만, 온몸의 힘을 끌어올려 간신히 일어났다.
마초는 어느새 위월의 앞으로 다가가 있었다. 위월은 품속에서 단검을 뽑아 들고 다가오는 마초를 향해 찔렀다.
콱!
그러나 마초는 너무나도 쉽게 위월이 뻗은 손목을 잡았다. 마초가 그대로 힘을 한 번 쓰자 손목이 기묘한 각도로 틀어지기 시작했다.
우드드득.
“크아악!”
위월은 손목이 부러지는 고통과 함께 한쪽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사자 투구 아래로 푸른 눈을 빛내는 눈부신 미남자가 보였다.
‘이, 이놈은 어쩌면…….’
천하제일임이 분명한 기마술.
적토마에 뒤지지 않는 명마, 도철.
마치 수십 년 수련한 고수처럼 정교한 창술과 도법.
팔 척 장사의 손목을 어린애처럼 비트는 완력.
무쇠를 자를 수 있는 신도(神刀).
그러나 그런 것들보다 더 위협적인 것은 따로 있었다. 복수를 위해 4년간 준비한 마초의 집념, 그리고 마침내 복수의 순간을 맞은 희열이 푸른 눈을 통해 위월에게 느껴졌다.
‘어쩌면… 온후보다 더…….’
퍽!
위월의 생각은 거기서 끊어졌다.
마초가 치란을 한 번 휘두르자 위월의 목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마초는 위월의 목이 떨어지기도 전에 몸을 돌려 걸어갔다.
텅. 텅. 데구르르.
위월의 잘린 머리가 땅을 구르는 동안 마초는 성문에 도달했다. 위월이 등장하자 성문을 열다 말았던 병사들은 하얗게 질린 다시 성문을 열고 있었다.
두두두두.
멀리서 들리던 말발굽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방덕이 이끄는 기병대였다.
마초는 다시 몸을 돌려 태원성의 수비병들을 향해 말했다.
“더 대적할 자가 있느냐?”
쨍그랑.
감히 대꾸하는 자는 없었다. 저마다 가지고 있는 무기를 땅에 내버리는 소리만 울릴 뿐이었다.
잠시 후, 방덕의 기병대가 활짝 열린 태원성으로 입성했다. 마초가 단기로 태원성을 열어젖힌 것이다.
방덕이 성 내를 제압하는 동안 마초는 성루 위로 올랐다. 높은 곳에 오르니 전황이 잘 보였다.
처음 전투가 시작됐을 때는 태원성의 서쪽, 법정이 군사들을 이끌고 나타난 곳이 주전장이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서량병 1만과 병주병 1만의 회전이 벌어지는 사이, 마초가 남쪽의 요새들을 돌파하며 주전장은 남쪽으로 옮겨져 있었다. 동쪽으로는 분수(汾水)라는 강이 남북으로 길게 흐르고 있었는데 분수 유역은 저습지라 병주병, 서량병 모두 전장으로 삼고 있지 않았다.
성렴과 위월은 전사했다. 학맹은 사로잡히고 위속은 배신했다. 남은 장수들이 분투했지만, 성 밖의 병주병들은 조금씩 지휘체계가 흐트러지고 있었다.
마초의 곁에 다가온 방덕이 말을 걸었다.
“성 밖의 여포군을 지휘하는 장수는 조성, 그리고 후성이다. 둘 다 만만치 않지만, 아군은 적병의 네 배. 곧 전황이 기울겠지.”
“고순은 없나?”
“여포와 같이 출진했다고 하더군.”
“마침 잘 됐군.”
태원을 기습하는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여포도, 고순도 없는 상태에서 병사의 손실을 최소화하며 여포의 본거지를 떨어뜨리기 일보 직전인 것이다.
그때.
“음?”
가만히 전황을 지켜보던 마초의 눈썹이 꿈틀했다.
먼 동쪽, 분수의 건너편에서 구름 같은 먼지가 일어났다. 동쪽에서 수천 군사들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방덕이 인상을 찌푸렸다.
“여포… 그새 돌아왔나. 놀라운 속도로군.”
방덕은 재빠르게 머릿속에서 전략을 세운 후 전령을 보냈다. 태원성 남쪽의 병주병들을 자신과 법정이 상대하고, 이민족 기병들과 주전력은 전원 여포를 막기 위해 투입한다.
“여포가 전장에 들어오면 의외의 차이가 발생할 수 있으니 이를 막는 게 우선이다. 맹기, 그렇게 진행하겠다.”
“아아, 그래.”
마초는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베겠다느니, 산 채로 잡아서 처형하겠다느니 하는 느슨한 마음가짐으로 상대할 수 있는 적이 아니다. 여포를 상대할 때는 완전한 승리를 우선해야 한다.
그것을 위해 4년을 참고 힘을 길렀다. 개봉대전에서는 직접 칼을 맞댈 기회가 있었는데도 참았다. 고작 한나절을 더 참지 못할 리 없다.
총대장인 자신은 이미 단기필마로 무모한 돌격을 감행했고, 성공시켰다. 이제는 태원성에서 전체 전황을 보면서 지휘하는 게 자신의 역할이니 그것에 충실할 생각이었다.
‘4년 전과는 다르다. 여포의 돌격을 막기 위한 준비도 단단히 해 두었다. 굳이 내가 나설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것이 마초의 생각이었다.
동쪽에서 접근한 군사들이 분수를 건너기 시작했다. 그 선두에 큼직한 여(呂)자 깃발이 올라가 있는 것을 본 순간, 마초의 몸이 흥분으로 마구 떨리기 시작했다.
“왔구나.”
마초는 자신도 모르는 새 푸른 눈을 빛내며, 입꼬리를 한껏 올려 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