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태원 전투 (1)
병주 태원군.
여포의 부장 학맹은 밀려드는 적군을 보며 부르짖었다.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다는 말인가!”
돈구현에 있는 원소군의 군량고가 조조의 습격을 받아 불타버린 것이 한 달 전.
조조의 기세를 막기 위해 여포에게 후방 습격을 청하는 원소의 사자가 온 것이 스무날 전.
그래서 여포가 함진영을 이끌고 동쪽 기주 방면으로 출진한 게 불과 열흘 전이다.
“그런데 어떻게, 불과 열흘 만에 저런 대군이 태원 벌판에 집결할 수 있다는 말이냐!”
태원성의 동쪽으로 분수라는 강이 남북으로 흐른다. 분수의 남쪽은 마가군의 영역인 관중 지방이니, 마초가 이 강을 거슬러 올라 습격하는 것에는 충분히 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침공은 서쪽에서 일어났다. 때맞춰 장안에서 출발한 관중도독부의 1만 군사들이 순식간에 병주목의 치소 상군을 떨어뜨리고 서쪽에서 태원으로 쳐들어왔다. 마가군의 주력은 황하 전선에 투입돼 있기에 설마 장안에서 출병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것이다.
서쪽에서 허를 찌르며 나타난 적들을 상대하느라 수비가 흐트러진 사이, 남쪽에서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방어선을 무너뜨리며 마가군의 3만 본대가 진격해 왔다.
“단 하루였다. 남쪽 방면의 수비군이 서쪽의 마가군과 결전을 벌이기 위해 이동한 그 하루를 정확히 노리다니… 이는 필시 내부에 간자가 있는 것이다!”
학맹의 추측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서쪽 방면의 마가군 별동대 사이에 익숙한 얼굴이 껴 있었던 것이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학맹은 벽력같이 호통을 쳤다.
“위속, 배신했느냐! 네놈이 온후의 은혜를 입은 바 적지 않거늘!”
“정신 차려라, 학맹. 부하들의 여자나 빼앗는 자를 따라 죽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여포가 새로 들인 첩이 아니었으면 네 처를 빼앗았을 수도 있고, 그랬으면 나보다 먼저 네가 배신했을 수도 있다.”
“닥쳐라! 서량 마가군에 붙은 놈이 감히!”
학맹은 마가군 사이에 껴 있는 위속을 바라보며 버럭 성을 냈다. 그때 위속의 옆에서 갑주도 걸치지 않은 관복 차림의 청년 하나가 말을 달려 나왔다. 깡마른 체격에 신경질적인 인상, 섬뜩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저자가 학맹인가.”
“그렇습니다, 법 군사! 이 위속에 비하면 그 재주가 하찮으니 법 군사께서 신경 쓰실 필요는 없는 자입지요!”
위속은 청년의 앞에서 요란하게 아부를 떨었다. 청년, 법정은 경멸을 가득 담은 눈으로 위속을 보며 대꾸했다.
“그렇다면 그대가 저자의 목을 취해 오면 되겠군.”
“네? 아, 그건 좀…….”
“기다리겠소.”
법정은 그렇게 말하고 유유히 등을 돌렸다. 졸지에 학맹과 겨루게 된 위속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학맹과 법정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어, 그, 이건 그러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학맹이 위속 자신보다는 윗줄이었다. 용병에 능하고 일 처리가 빈틈없어 여포의 부장 노릇까지 하는 학맹이다. 일신의 무예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선뜻 달려 나갈 수 없었다.
학맹은 그런 위속을 바라보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제 알겠군. 저 법정이라는 놈이 위속을 배신시켜서 우리의 동태를 손바닥 보듯 알고 있었구나. 그렇게 공격할 시점을 재다가 온후께서 자리를 비웠다는 정보를 얻자마자 들이친 것이 틀림없다.’
일이 이렇게 되어 버렸으니 학맹은 결단해야 했다. 잠시 위속을 씹어 먹을 듯 노려보던 학맹은 이내 말머리를 돌렸다.
“위속을 죽여 원한을 갚는 건 작은 일이고, 온후가 올 때까지 버티는 건 큰일이다. 태원성으로 들어가서 농성하며 온후를 기다리리라!”
버티면 여포가 온다. 그러면 이길 수 있다.
학맹은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학맹이 단기접전 대신 도주를 선택하자 위속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의 옆으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키가 8척에 체격은 건장했으나 얼굴은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한 장수였다.
“으음? 귀공은 설마…….”
“후우우.”
소년 장수, 마철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백파적 토벌에서는 적과 창검을 맞대니 손발이 굳어 버렸지.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삼형제 중 체격은 가장 크다. 그러나 마철의 무재는 마초는 물론 마휴에 비교해도 부족했다. 몸이 느리고 머리 회전도 느렸다. 단병접전처럼 아주 빠르게 결단해야 하는 순간에는 머리가 하얗게 변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활이라면 자신 있다. 상대가 누구더라도, 활은 매일 묵묵히 쌓아 올린 노력 만큼 보상해 주니까. 다시 한번 전장에 나갈 수 있도록 아버님께 진언해 준 법 군사의 뜻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맞출 것이다.’
끼이익.
마철은 긴 활에 화살을 메긴 후, 시위를 한껏 당겼다. 자신의 큰 키와 긴 팔에 맞춘 활이라 위아래로 사람의 키만큼 길었다. 말 위에서는 쓰기 불편할 정도의 크기였기에 말에서 내려 단단히 땅을 딛고 섰다.
화살촉의 끝이 도주하는 학맹을 향했다. 학맹은 여포군의 무장답게 빠른 속도로 말을 달려 시야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10년간 항상 연습하던 대로, 마철은 속으로 셋을 셌다. 하나에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파악하고, 둘에 화살촉의 조준을 조정했다.
타앙!
그리고 셋에 시위를 놓았다. 시위를 떠난 화살은 비스듬한 포물선을 그리며 학맹을 향해 날았다. 묵직한 화살촉은 미동도 하지 않고 미끄러지듯 날아갔지만, 화살깃은 물고기의 꼬리처럼 마구 요동치며 중심을 잡았다.
퍼억!
날아간 화살은 학맹의 말 잔등에 박혔다. 말이 구슬픈 비명과 함께 쓰러지고, 학맹은 안장 위에서 튕겨 나가 바닥을 굴렀다. 그런 그에게 천만이 이끄는 저족 기병들이 달려들었다.
“이런, 빗나갔구나. 아직도 긴장을 떨치지 못하는 건가.”
마철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학맹의 등판을 꿰뚫을 것으로 생각했던 화살은 미묘하게 겨냥이 빗나가 말 잔등을 맞췄다. 아무래도 전투의 긴장감 때문에 손이 흐트러진 모양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적장을 낙마시킨 건 사실이다. 여기저기서 병사들의 환성이 터졌다.
“우와아아!”
“삼공자가 적장 학맹을 쓰러뜨렸다!”
마철은 머쓱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 병사들에게 답례했다. 법정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과연 마가의 일원다운 솜씨였습니다. 이번 전쟁에서 삼공자가 활약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역시 제 안목이 틀리지 않았군요.”
“과찬이십니다. 법 군사 덕분에 치욕을 씻을 기회를 잡게 되었으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마철은 포권하며 고개를 깊게 숙였다. 법정은 여전히 날카로운 눈매를 한 채 마철의 인사를 받고 고개를 들어 전장을 바라봤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남쪽에서 빠른 속도로 3만 대군이 진군해 오고 있었다. 이제껏 황하 전선에서 원소군과 싸우던 마가군의 본대였다.
* * *
“장안을 거의 비우다시피 하고 남은 병력을 모아서 선제공격을 걸었나. 마가군의 군사답군.”
마초는 팔짱을 끼고 도철에 올라탄 채 법정에 대한 인물평을 말했다.
태원성의 수비병들은 서쪽에서 나타난 법정의 부대를 막기 위해 남쪽 방면의 요새를 버리고 서쪽으로 이동해 있었다.
그 틈에 마초가 이끄는 본대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태원성 남쪽의 요새들을 통과하여 진군하고 있었다. 옆에서 마초를 따르던 나관중이 말했다.
“주공, 저들이 이대로라면 거의 방해받지 않고 태원성을 포위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 여포가 돌아와서 본거지가 포위된 꼴을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군.”
마초는 그렇게 대답하며 눈으로 쉴 새 없이 전황을 훑었다.
‘적의 수는 1만이 되지 않는다. 다들 혼비백산하여 태원성으로 들어가고 있군. 그렇다면…….’
법정을 요격하기 위해 출격한 여포군은 남쪽에서 대군이 나타나자 농성하기 위해 태원성으로 복귀하고 있었다. 군사의 수가 만만치 않으니 전부 다 들어가기 위해서는 시간이 좀 걸릴 것처럼 보였다.
“저들이 전부 성으로 복귀하기 전에 들이치면 우리가 이득을 꽤 보겠군. 월길, 적장이 누구라더냐?”
“효장(驍將) 성렴입니다.”
“성렴?”
효장 성렴과 건장(健將) 위월.
여포군에서도 가장 흉폭하다고 알려진 두 사람 중 한 명이다. 성렴의 이름을 듣자 마초가 눈을 빛내며 씩 웃었다.
“미오성 전투의 그 녀석이군.”
“그렇습니다. 우리 아단부의 형제들도 그놈의 창에 숱하게 죽어 나갔지요.”
부드득 이를 가는 월길을 보고 마초가 말했다.
“그때는 그놈이 여포인 줄 알고 달려간 사이 진짜 여포가 중군을 기습해서 낭패를 봤지. 제법 정예병들을 이끌고 있어서 따라잡지도 못했었다.”
“맞습니다. 여포로 착각할 만큼 무위가 뛰어난 놈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다닥.
마초의 뜻을 이해한 도철이 발을 구르며 몸을 데웠다.
잠시 후.
두두두두!
마초는 그대로 도철을 몰아 달려 나갔다. 글자 그대로 쏜살같이, 한껏 당겼다 쏜 화살처럼 성렴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도철을 타고 질주하는 마초를 따라잡을 수 있는 기병은 없다. 혼자 달려 나가는 마초의 등 뒤로 월길의 다급한 외침이 울렸다.
“주공! 위험합니다!”
“4년을 참고 기다렸다. 여기서 계속 참는 게 더 위험하지.”
서량병, 병주병, 강족, 흉노, 선비족.
태원 벌판에는 스스로 자신들의 기마술이 천하제일이라 자부하는 온갖 종류의 기병대들이 밀집해 있었다.
마초는 그들 사이를 무인지경처럼 뚫고 지나갔다. 도철의 속도와 마초의 기마술이 합쳐지니 감히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이가 없었다. 거대한 백마에 타서 품이 큰 비색 전포를 휘날리며 달리고 있으니 멀리서 보면 비색 꼬리가 달린 하얀 화살처럼 보였다.
“마…마초가 온다!”
“제기랄! 창을 세워라!”
마초가 순식간에 가까워지자 비명 같은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마초는 불필요한 충돌을 만들지 않은 채 적병들 사이를 그대로 통과해서 적장을 향해 달렸다.
성렴은 단기필마로 자신에게 돌진하는 마초를 보며 혀를 길게 빼물고 웃었다.
“끼헤헤헤. 말은 기가 막히게 잘 타는 놈이군. 하지만 늦었어. 성 안으로 들어가서 온후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성렴은 4년 전, 미오성 전투 당시 멀리서 마초를 본 적이 있었다. 그때도 여포 이외에는 당해낼 자가 없을 정도의 무용을 자랑했었다. 효장이라 이름난 자신이라도 정면 대결로는 승산이 없어 보였다.
“그러니까 굳이 정면 대결을 할 필요가 없지. 얼른 태원성으로 들어가서 얌전히 수성해 주마. 어디 말을 타고 공성을 할 수 있나 보자.”
공성전이 되면 기병은 무용지물이다.
성렴은 그렇게 생각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태원성을 향해 말을 달렸다. 멀리서 성문을 닫기 위해 군사들이 부산히 움직이는 게 보였다.
“기다려, 이놈들아! 아직 내가 들어가지 않았… 응?”
뭔가 이상했다. 옆으로 휙휙 지나쳐 가는 병사들의 표정에 경악과 공포가 떠올라 있었다.
“이게 무슨… 히에엑!”
불길한 예감에 뒤를 돌아본 성렴은 헛숨을 들이켰다.
어느새 마초가 30장 거리까지 쫓아와 있었다. 마초를 태운 거대한 백마는 여포의 적토마에 뒤지지 않는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이제 최고 속도에 도달했다고 생각될 만한 지점에서 끊임없이 가속이 이어지고 있었다.
“제…제기랄! 어쨌든 성 안으로만 들어가면 내가 이긴다!”
성렴은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했다. 자신의 말도 병주 호족에게서 약탈한 준마다. 계산해 보니 태원성의 성문이 닫히기 전, 아슬아슬하게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두두두두.
두두두두.
앞에서 성렴이, 조금 뒤에서 마초가 전장을 가로질러 태원성을 향해 달렸다. 두 사람의 거리는 30장이었다가, 잠시 후 25장이 되고, 다시 20장으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15장이 된 후 더 이상 줄어들지 않았다. 성렴의 준마가 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려 짧은 거리를 질주하니 오랫동안 달려온 도철과 잠시나마 대등하게 달릴 수 있게 된 것이다.
태원성의 수비병들은 혼비백산해서 성문을 닫고 있었다. 마초는 잠시 성문이 닫히는 속도를 계산했다. 성렴은 아슬아슬하게 통과하고, 자신은 아슬아슬하게 부딪힐 것 같았다.
“효장 성렴. 끝까지 귀찮은 놈이군.”
마초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금마삭을 한 바퀴 돌려 거꾸로 쥔 후 어깨 위로 치켜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놓치지 않는다.”
그 말과 동시에 마초는 등자를 힘차게 디뎠다. 도철은 여전히 앞을 보며 달리고 있었다. 등자를 딛고 상체를 꼿꼿이 세운 마초는 온몸의 힘을 어깨에 실어 힘껏 휘둘렀다.
부우우웅!
오른손에 든 금마삭이 날았다. 1장에 달하는 긴 마상창이 마치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허공을 나는 금마삭은 마초와 성렴 사이에 있던 15장의 거리를 순식간에 지우고 성렴의 등 한복판으로 날았다.
쾅!
폭음이 일며 성렴의 등판이 꿰뚫렸다. 그러고도 금마삭에 실린 힘은 죽지 않았다. 마치 정지상태에서 창을 맞은 것처럼, 성렴의 몸이 공중에 붕 떠서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퍼어억!
“으아아악!”
성렴은 금마삭에 맞자마자 절명했기에 비명 소리를 내지 못했다. 대신 성문을 닫던 태원성의 수비병들이 저마다 비명을 질렀다.
마초가 던진 금마삭이 수십 장을 날아서 성벽의 흙벽돌 사이에 꽂힌 것이다. 성벽에 꽂힌 금마삭의 중간쯤에는 효장이라 불리며 북방에 이름을 떨치던 성렴의 시신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광경에 경악한 수비병들이 잠시 손발을 멈춘 사이, 닫히다 만 성문으로 마초와 도철이 뛰어 들어왔다. 도철은 성벽 안에서 그대로 미끄러지며 균형을 잡았다.
드드드득!
발굽이 땅을 긁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멈춘 도철을 보며 병사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변방에서 태어나 숱한 전장을 떠돌았던 병주병들이다. 여포가 적토마를 타고 전장을 주유하는 모습도 여러 번 봐서 익숙하다.
그러나 말을 탄 채 혼자서 성 안으로 뛰어 들어오는 적장은 처음이었다.
“오랜만이다, 병주병들. 다시 만나니 반갑군.”
마초는 등에 멘 5척 장도, 치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푸른 눈을 빛내며 주변을 둘러봤다.
분노.
증오.
원한.
그리고 희열이 가득한 눈동자였다.
털썩.
마초와 눈이 마주친 병주병 하나가 땅에 주저앉았다. 단기로 성 안에 돌입한 마초는 한껏 웃음을 지었다.
“4년간 하루도 빼놓지 않고 너희들을 생각했다. 그러니까… 환영해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