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마초연의-193화 (193/306)

193화. 천리행 (2)

돈구현.

개봉대전에서 패하고 황하 이남의 거점을 모두 상실한 원소군은 황하 이북에 요새를 쌓으며 장기전을 준비했다. 황하 이북, 기주와 연주의 경계에 있는 돈구현은 황하를 따라 죽 늘어선 원소군 요새들에 군량을 보급하는 기지 역할을 하는 고을이었다.

“벌써 이십 년 전 일인가. 이 돈구현에 현령으로 부임해 온 애송이가 하나 있었지.”

조조는 돈구현성의 성벽 위에서 발밑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때는 늦은 밤이었지만, 조조의 시야는 마치 대낮처럼 환했다. 성벽 옆에 잔뜩 지어진 원소군 군량고들이 전부 불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는 일마다 실패만 거듭하는 애송이였어. 썩은 나라를 바꿔 보겠다고 십상시의 아재비를 때려죽였다 좌천되어 돈구현령으로 온 거지. 자기 자신도 환관의 의붓손자인 주제에, 권세를 휘두르는 환관 몇 놈만 때려잡으면 천하가 평안해질 줄 알았던 모양이야. 그런 만용을 부릴 수 있었던 것조차도 환관인 조부의 위세를 빌렸던 까닭이니, 이런 얼간이가 천하에 또 어디 있겠나?”

조조는 불타는 군량고를 내려다보며 한참 동안 깔깔대며 웃었다. 그리고 자신의 옆에 결박당해 있는 옛 친구를 보며 말했다.

“중간(순우경의 자), 자네를 이런 식으로 보게 될 줄은 몰랐군.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나.”

순우경과 조조는 낙양에서 같이 서원팔교위 관직을 지낸 동기였다. 한 명은 한의 사공으로 대군을 지휘하고 있고, 한 명은 원소군의 무장으로 군량고를 지키다 붙잡혀서 옛 친구 앞에 무릎을 꿇게 된 것이다. 순우경은 조조의 시선을 외면하며 대답했다.

“승패는 하늘이 정하는 것인데 어찌 이유를 댈 수 있겠는가.”

“이런, 이런. 답답한 친구 같으니. 중간, 승패는 사람이 정하는 것이라네.”

조조는 순우경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황하를 사이에 두고 싸우려면 보급기지로 이 돈구현만 한 곳이 없지. 그런데 하필 내가 이십 년 전에 돈구현령을 지내서 이곳의 지세를 속속들이 알고 있단 말이야. 그러니 본초는 이 돈구현에 몰래 상장을 배치해 놓고, 군량고를 미끼로 나를 끌어들여 잡을 생각이었겠지.”

“…….”

“본초는 아무래도 힘에 너무 취해서 권모와 술수를 다 잊어버린 모양이야. 이런 얕은수에 내가 넘어갈 것이라 생각했나? 으하하하!”

조조는 웃음을 그칠 줄 몰랐다. 숨이 차서 더 웃기 힘들 만큼 웃었을 때, 선봉장 하후연이 조조의 곁으로 다가와 군례를 올렸다. 원소군의 군복을 입은 키가 큰 장수 한 명이 하후연과 같이 있었다.

“사공. 장 장군을 모셔왔습니다.”

“장합이 사공을 뵙습니다.”

장합은 정중한 태도로 조조에게 예를 올렸다. 조조는 흐뭇한 표정으로 그런 장합의 손을 맞잡았다.

“그대가 장준예인가. 하북의 상장이 나를 따르게 되었으니 앞으로 걱정할 게 무엇이겠소?”

소부대 전투에 능하고 선제공격을 즐기는 조조다. 자신이 현령으로 있으면서 지리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돈구현에 원소군의 군량고가 있다면 직접 습격하여 대세를 결정지으려 할 것이다.

그것이 원소의 계산이었다. 그러나 원소가 돈구현에 파 놓은 함정은 너무나도 쉽게 무력화됐다. 매복해 있다 조조를 습격했어야 할, 계획의 핵심인 장합이 배신한 것이다.

“장합, 대장군께서 일개 교위에 지나지 않던 너를 발탁하여 상장으로 삼았거늘, 네놈이 원가의 은혜를 입은 몸으로 이럴 수 있느냐!”

순우경이 분노에 차서 장합에게 일갈했다. 장합의 배신만 아니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 묶여 있는 건 조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합은 순우경을 보며 머리를 숙였다.

“순우 장군. 이런 일을 막기 위해 대장군께 여러 번 진언을 드렸습니다. 지금 편성된 수준의 복병으로는 조공의 군사와 승패를 셈하기 어려우니 중기병이 꼭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대장군께서는 곽도와 봉기의 무리들이 소장을 참소하는 말만 들으실 뿐, 필요한 만큼의 군사는 내어 주지 않으셨지요.”

“변명을 할 셈이냐! 네놈이 이끄는 복병만으로도 충분히 싸워 볼 만한…….”

“예. 싸워볼 만은 했지요. 소장이 셈하기로는 열 번 싸웠으면 세 번은 이겼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일곱 번은 졌겠지요. 순우 장군, 무(武)에 일곱 가지 덕이 있지만, 그중 7할의 확률로 죽을 수밖에 없는 자리에 부하들을 밀어 넣는 건 없습니다.”

“크윽… 장합, 네놈!”

말문이 막힌 순우경은 그저 장합을 노려보며 이를 갈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 조조는 잠깐 멈췄던 웃음을 다시 터뜨렸다.

“으하하하! 중간, 이 답답한 친구야. 내 잠시 옛정을 생각해서 자네를 살려둘까도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자네가 살아 있으면 우리 장 장군이 불편하겠군. 내게는 옛 친구보다 하북의 상장이 훨씬 중요하니 아무래도 자네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겠네. 이제 알겠나? 승패도, 생사도 다 사람이 결정하는 것이라네. 자네도 조금만 얌전하게 굴었으면 살았을 텐데 아쉽게 됐군.”

“맹덕. 때를 잘 만나 승리했다고 천명이 너에게 돌아가지는 않는다. 나를 더 이상 모욕하지 말고 어서 목을 베라.”

“때를 잘 만나?”

순우경의 말을 듣자 조조의 한쪽 눈꼬리가 위로 치솟았다.

콱!

조조는 손으로 순우경의 목을 틀어쥐었다. 그리고 순우경의 얼굴 앞에 자신의 얼굴을 바싹 붙인 채 말했다.

“중간. 자네의 머리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듯하니 내 친절하게 설명해 줌세. 나는 지독한 얼간이였어. 조정을 개혁하는 데도 실패하고, 동탁 토벌에도 실패했네. 서주에서는 가족을 잃었고, 그래서 서주를 떨어뜨리려 했으나 그것도 실패했지. 마초에게 목을 내어 줄 뻔한 적도 있었고, 개봉 벌판에서는 하루 동안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지. 하늘이 내게 승리를 주려 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때마다 다시 일어났네.”

“커, 커억…….”

숨이 막혀 가는 순우경의 눈에 조조의 얼굴이 들어왔다. 피와 땀으로 번들거리는 얼굴에 묘한 희열이 가득 차 있었다.

“반면 자네가 택한 본초는 어떤가? 그가 이 실패를 딛고 다시 일어날 수 있겠는가?”

“컥…….”

“천시(天時)는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 그때를 잡는 것은 바로 사람의 힘일지니. 나의 승리도, 본초의 패배도 전부 사람이 만들어낸 일이니 애먼 하늘을 탓하면 뭐 하겠나?”

순우경은 말이 없었다.

계속 웃고 있던 조조의 표정이 차갑게 변했다. 조조는 자리를 떨쳐 일어나며 수하들에게 지시했다.

“순우경의 코를 잘라서 원소에게 보내라. 이 전쟁의 승자가 누구인지 천하에 알릴 것이다.”

“존명!”

하후연과 장합, 그리고 성벽 위에 도열한 조조군의 책사와 무장들이 일제히 군례를 표했다.

옛 친구에게 신체 훼손으로 끔찍한 모욕을 주도록 명한 조조는 성벽 아래로 내려왔다. 원소군의 군량이 타는 모습을 더 잘 보고 싶어서였다.

화르르.

불이 타오르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조조의 옆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갑옷의 쇳조각이 부딪히는 소리 사이로 투구에 매달아 놓은 풍성한 흰 술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지 짐작한 조조는 옆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물었다.

“이제 떠나려는가?”

“그렇소. 원본초가 이번 싸움으로 호되게 당했으니 황하의 요새를 버리고 철군할 수밖에 없을 것이오. 이제 우리 둘 모두 각자의 길을 갈 때가 됐소.”

개봉 벌판의 패배에 이어 돈구에서 막대한 군량을 잃었다. 이 전쟁에서 패배하며 원소의 권위는 결정적으로 흔들릴 것이다.

“그래. 이제 하북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날 것이다. 이제부터 원본초가 싸워야 할 적은 밖이 아니라 안에 있으니, 나는 옛 친구가 흔들리는 틈을 타 하북의 반란을 사주해야겠군. 그리고 자네는…….”

조조는 옆을 돌아봤다. 풍성한 흰 술이 달린 사자 투구를 쓴 마초가 서 있었다.

“병주를 칠 셈이군.”

“그렇소.”

이제 몇 달 후면 겨울이 온다. 북방의 겨울은 더 혹독하니, 병주 원정을 하려면 지금이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개봉대전 후 두 달, 마초는 군사들을 충분히 쉬게 하고 보급을 확보했다. 그리고 돈구현 기습의 성공으로 전쟁의 승패가 결정적으로 기울자 바로 결단을 내렸다.

“여포가 태원에 주둔하고 있다고 들었네. 천 리 길을 가려면 서둘러야겠군. 무운을 비네.”

“고맙소. 조공에게도 무운이 따르길 빌겠소.”

20만 대군을 절반 넘게 잃은 원소군에서, 지금 가장 무서운 전력은 여포의 병주병이다. 원소는 조만간 여포의 병주병을 동원해 후방을 교란하려 할 것이다.

때맞춰 마초가 태원을 공격하면 모든 여포군이 태원으로 소집될 것이다. 그리고 여포가 본거지를 지키기 위해 황하 전선에 개입하지 못하고, 하북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그때는 내가 황하를 건너 원본초를 만나러 갈 것이다. 맹기, 이제 자네와 진중에서 보는 일은 없겠군.”

“다음에는 황도에서 만나게 될 것이오.”

일이 계획대로 된다면 두 사람은 각각 승리를 거둔 후 폐허 위에 새롭게 건설 중인 황도, 낙양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마초와 조조는 말없이 서로에게 군례를 올리고 등을 돌렸다.

진중으로 돌아온 마초는 고개를 들어 북쪽을 바라봤다.

이제부터 북쪽으로 천 리 길을 떠나야 한다. 그 길의 끝에 여포가 있을 것이다.

* * *

병주 상군.

병주목의 치소가 있는 병주의 중심 도시다. 그러나 원소에게 병주목의 인수를 받은 여포는 좀처럼 이곳에 머무는 날이 많지 않았다.

병주목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황하를 사이에 두고 조조와 원소의 전쟁이 발발했기 때문이다. 원소군 연합의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던 여포는 수시로 원소의 출병 요청을 받았기에 원소의 근거지 기주와 인접한 태원군에 주로 머물고 있었다.

다른 객장이라면 그런 원소의 요청에 꼬박꼬박 응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포는 마음 내키는 대로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죽이고 싶으면 죽였다. 원소의 출병 요청을 받았을지라도 군량이 모자라거나 날씨가 궂으면 출병을 취소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한 번 출병해서 제대로 싸움을 벌이면 지는 법이 없었다.

“그러니까 원본초가 병주 땅까지 내주며 포섭했겠지요. 게다가 원본초의 근거지 하북은 천하에서 기병이 달리기 가장 좋은 땅이니, 여포의 무위는 실로 대단했을 겁니다.”

법정은 상군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성의도 법정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오랜 벗 정은도 여포에게 죽었소. 나나 그 친구나 비록 대단한 이름은 얻지 못했으나 일찍부터 관중도독을 따르며 서량에서 잔뼈가 굵은 몸. 그런 정은을 일격에 참살했다 하니 여포의 용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짐작하고 있소.”

“허나, 전쟁은 개인의 용력으로만 이뤄지지 않는 법이지요.”

거기까지 말한 법정은 성의에게서 고개를 돌려 다시 상군성을 바라봤다. 천만이 이끄는 저족 부대가 서문 쪽으로 화살을 퍼붓는 사이, 한 무리의 결사대가 용감하게 동문 쪽을 오르고 있었다. 엄안이 이끄는 공성부대였다.

“비등한 싸움에서 여포를 잡을 수 없다면, 아예 이기는 싸움판을 만들어 놓고 싸우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 상군성을 떨어뜨리면 아군은 이기는 싸움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으음… 법 군사의 말이 옳소.”

성의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방덕, 서황 같은 젊은 장수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후방을 단속하는 일에만 전념하던 성의다. 지금 조조와 원소, 마초와 여포가 중원에서 벌이는 전쟁은 성의가 끼어들기에는 벅찬 무대였다. 마가군도 정병의 대부분인 5만 명을 중원의 전쟁터에 보냈다. 남은 병력으로는 장안을 수비하는 것도 벅찰 지경이었다.

그렇게 조용히 있던 찰나, 장안에 남아 있던 젊은 군사 법정이 마등에게 한 가지 계략을 헌책하며 관중도독부가 들썩였다.

“복파장군과 조맹덕이 개봉에서 원소군을 크게 깨뜨렸으니, 원소는 필히 여포의 기병을 활용해 전황을 뒤집으려 할 것입니다. 여포가 기주로 출병했을 때를 틈타 비어 있는 여포의 근거지를 들이치면 이길 수 있습니다.”

마등은 처음에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으음… 효직의 말이 옳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여포군의 동태를 정확히 탐지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여포가 머무르는 태원성은 남쪽 방면에서의 습격에 대해 대비가 철저하다 하니, 복파장군이 비록 용맹하다 하나 섣불리 도모하기 어려울 것이다.”

“여포군의 장수 하나를 매수했습니다. 그를 통해 여포군의 정보를 얻어낼 것입니다. 또한 태원 수비군의 남쪽 방면에 대한 경계를 순간적으로 느슨하게 만들 수 있는 계책이 있습니다.”

“계책이 무엇인가?”

“장안에서 제가 출병하는 것입니다. 병주를 가로질러, 여포가 없는 순간에 서쪽에서 태원을 들이치면 서쪽의 저를 막기 위해 남쪽 방면의 수비가 흐트러질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찰나의 틈을 노려 마초가 태원 남쪽의 영채들을 돌파하고 태원성을 포위하는 것이다.

법정의 계략은 무모할 정도로 대담했다. 그러나 성공한다면 일거에 전세를 결정지을 수 있는 기책이기도 했다. 성공한다면 여포는 하북으로 출병해 있는 동안 순식간에 근거지를 잃을 것이고, 일개 떠돌이로 전락할 것이다.

마등은 법정의 계략을 듣고 마가군의 다른 장수를 떠올렸다.

“꼭 복파장군과 얘기하는 것 같군. 효직, 만약 복파장군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뭐라고 했을 것 같나?”

“실은 이미 서신을 통해 복파장군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래? 복파장군은 뭐라고 하던가?”

마등 또한 마가군의 군무를 마초에게 전적으로 맡긴 지 오래이니 마초의 의견이 궁금했던 것이다.

법정이 대답했다.

“그대의 뜻이 나의 뜻과 같다. 이런 답을 받았습니다.”

“맹기답군.”

마등은 씩 웃으며 법정의 계략을 승인했다.

“군사장군 법정의 계책을 채택한다. 이번 싸움은 젊은이들의 손에 맡겨 보도록 하지.”

“존명!”

그렇게 해서 장안성의 군사들이 병주를 습격하는 전략이 세워졌다.

상군성의 물자와 병력은 모두 태원으로 이동한 상태였다. 텅 빈 상태에서 습격을 받은 상군성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 오반이 가장 먼저 성벽을 올라 마가군의 깃발을 꽂았다. 뒤이어 천만이 돌입하자 성 안의 수비병들은 추풍낙엽처럼 쓸려나갔다. 표가 이끄는 흉노 기병들이 뒤를 끊어 태원 방면으로 향하는 전령들을 잡아냈다.

싸움이 끝나고, 상군성에 입성한 법정은 곧바로 마초에게 연통을 넣었다.

이제 곧 여포가 기주 방면으로 출병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기주의 전장에서 조조군을 상대하다 이 소식을 들었을 때, 병주는 더 이상 여포의 것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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