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천리행 (1)
조조와 마초의 10만 연합군이 개봉 벌판에서 한 번 큰 싸움으로 20만 원소군을 패퇴시켰다.
개봉대전이라 불리는 이 싸움 이후, 전쟁의 모습은 크게 변했다. 조조군은 기세를 몰아 곧바로 관도를 탈환하고, 끝내 연진과 백마까지 탈환했다. 원소는 악전고투 끝에 황하 이북의 여양까지 물러났다.
그러자 이번에는 원소군이 요새를 쌓기 시작했다. 황하를 사이에 두고 겨울을 난 뒤 장기전을 하려는 것이다.
원소의 출병 요청을 받아 참전했던 병주목 여포는 개봉대전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말머리를 돌렸다. 여느 때처럼 최소한의 노력으로 짧게 싸움을 끝낸 그는 병주와 기주의 접경에 있는 태원군에 주둔하며 연일 첩들의 몸을 탐하며 지내고 있었다.
“그래도 최근에는 나를 건드리느라 바빠서 부하들의 아내는 건드리지 않는다지?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태원성에서 가장 높은 전각.
두혜는 창밖으로 펼쳐진 태원의 풍경을 바라보며 술잔을 들었다.
평음현에서 마가군의 군량 수송대를 습격한 여포에게 납치된 지 벌써 두 달이 지났다. 매일같이 여포의 노리개 역할을 하느라 부서질 듯 아픈 몸을 달래주는 건 술뿐이었다. 당시 여포가 같이 빼앗아 온 서량 마가군의 소주가 빈속을 훑으며 찌르르한 쾌감을 남겼다.
잠시 소주의 감촉을 즐긴 두혜는 이내 손을 뻗어 탁상에 놓인 고기를 집어 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술만 마시면 몸이 상하지. 몸이 건강해야 언제든 살아날 수 있으니까 틈날 때마다 먹어 둬야 해. 백매(妹)도 이리 와.”
“됐다.”
“그러지 말고 이리 와. 나랑 같이 먹어.”
“됐다고 하지 않느냐!”
동백은 자신에게 고기를 권하는 두혜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자신보다 열 살쯤 많아 보이는 이 여인은 항상 정신이 또렷하고 침착했다. 매일 여포에게 붙들려 원치 않는 정사를 하면 정신이 무너질 만도 하건만, 두혜는 기가 꺾이지 않고 자유의 몸이 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자신과는 달리 강하고 침착했다.
동백은 그래서 두혜가 싫었다.
“나는 동 상국의 손녀다. 네까짓 게 감히 이래라 저래라…….”
“알았어, 알았어. 이대로 계속 얘기하다가는 나도 화가 나겠다. 더 이상 얘기하지 않을 테니 백매도 그만해.”
두혜는 쓴웃음을 지으며 동백을 살살 달랬다. 한동안 씨근거리던 동백은 구석에 가서 쭈그리고 앉아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동백이 입을 연 것은 한참 후였다.
“나는 동 상국의 손녀다.”
“그래, 알고 있어. 그보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남을지를…….”
“그런 내가 어디서 살 수 있다는 말이냐.”
동백의 목소리는 공허했다.
설령 여포가 패망하고 누군가에게 구출된다 한들, 동백에게는 살아갈 곳이 없었다. 천하의 그 누구도 동탁의 손녀를 떠맡고 싶어 하지는 않을 것이다.
잠시 동안의 침묵을 깨고 두혜가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백매가 살아갈 방법이 있을 거야.”
“무슨 방법 말이냐?”
“복파장군 마초. 서량 마가군의 후계자. 나는 그 사람의 부름을 받고 중원으로 가는 길에 여포에게 납치당했어. 이제 곧 서량 마가군이 여포와 큰 싸움을 벌이겠지. 그 싸움에서 복파장군이 이길 때까지만 버티자. 복파장군은 나를 위험에 빠뜨렸으니 내 청 하나쯤은 들어주겠지.”
“…흥, 난 또 무슨 대단한 방법이라도 있는 줄 알았네. 결국 마초에게 부탁해 보겠다는 건가?”
동백은 여전히 불퉁거렸다. 그러나 두혜의 진심이 전해졌는지 말투는 방금 전보다 많이 순해져 있었다.
“복파장군은 내 청을 거절하지 않을 거야. 안 들어주면 미인계라도 쓸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도 사내라면 넘어갈 수밖에 없을 테니.”
두혜는 나이도 적지 않고 겪은 풍상도 많았지만, 여전히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리고 항상 긍정적이었다. 동백은 그런 두혜를 보며 피식 웃음이 났다.
“됐다. 마음만이라도 고맙다. 아까… 심하게 말한 것은 미안해, 저저(姐姐).”
“오호. 내가 동 상국의 손녀, 위양군 아씨에게 언니 대접을 받는 건가?”
동백은 빙글빙글 웃는 두혜를 마주보기 민망한지 딴청을 피웠다.
“저저는 원래 하동의 대호족 집안 딸이었다고 하지 않았나. 어쩌다 어렵게 살게 된 거지?”
“아아, 민란이 일어나서 쫓겨났어. 소작인들을 너무 심하게 수탈했거든.”
두혜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동백은 그 모습을 보며 헛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남 얘기처럼 말해도 돼?”
“사실은 사실인걸. 그러고 보니…….”
두혜는 문득 고향에서 알던 사람을 떠올렸다. 동백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뭐?”
“만약 복파장군이 백매를 돌봐 주지 않겠다고 해도 나에게는 한 가지 방법이 더 있네.”
“그게 정말이야?”
“그래. 나는 중원에도 아는 사람이 한 명 있어. 제법 힘 있는 사람이야. 그는 절대 내 청을 거절하지 못해. 그러니까 백매, 우리 조금만 더 살아 보자. 내가 방법을 찾을게.”
두혜는 문득 옛날 생각에 빠져들었다.
하동 출신의 옛 지인. 그에게라면 미인계까지 쓸 필요도 없다. 그를 다시 만나서 두혜 자신이 뭔가 부탁한다면 그는 절대로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동백은 옛 지인을 생각하는 두혜의 눈동자가 마치 꿈꾸는 것 같다고 느꼈다.
* * *
198년 7월, 개봉대전으로부터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 마초의 군막으로 선비 차림의 한 사내가 찾아왔다.
“손건, 자는 공우라고 합니다. 서주목 휘하에서 종사 벼슬을 하고 있습니다.”
“아아, 손 선생. 만나 뵙고 싶었소이다.”
마초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손건을 맞이했다.
손건은 유비 휘하에서 수차례 어려운 외교 협상을 성공시킨 인물로, 유비가 한중왕이 된 후에는 공신으로 대우받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복락을 누릴 운명은 아니었는지 마초가 유비에게 귀부했을 무렵에는 이미 수명이 다해 장례가 치러지고 있었다. 그래서 마초도 손건을 직접 만난 적은 없었지만, 마초 자신과 친분이 있었던 장비, 간옹, 제갈량 같은 인물들이 하나같이 그를 인걸이라 평가하니 마초도 자연스럽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유 사군께서 답변을 주셨소?”
“그렇습니다. 다만 남들의 이목이 있으니 유 사군이나 장익덕 장군이 직접 오지 못함을 이해해 달라고 전하셨습니다.”
아무래도 이번 생에는 유비와 만나는 게 쉽지 않은 모양이다. 마초는 차라리 잘 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유비를 만나면 또 지난 생의 일들이 떠올라 복잡한 마음이 들 것이다. 이번 생의 인연에 집중하려면 보지 않는 게 낫다.
“유 사군께서 여남으로 가시겠다면 직접 오고 말고가 대수겠소. 약속한 문서는 여기 있소이다.”
마초는 반쪽으로 잘린 비단 두루마리를 내밀었다. 손건은 마초가 내민 두루마리를 자신이 가진 반쪽과 맞춰 본 후 깊이 고개를 숙였다. 두 장을 합치니 여남군을 비롯한 예주 일대의 지형과 인구수, 병력 등을 상세히 기록한 문서가 된 것이다.
“복파장군의 은덕을 잊지 않겠습니다. 유 사군께서는 곧 여남으로 떠나실 것입니다. 원가와 친분이 있는 예주 호족들을 규합해서 조조의 후방을 노린다는 명분으로 이미 원본초의 허락도 득한 상태입니다.”
“손 선생이 중간에서 고생이 많았겠소. 먼저 여남에 기반을 닦고 계시오. 전쟁이 끝나면 천자께 상표하여 여남을 다스릴 수 있는 적당한 관직이 유 사군에게 돌아가도록 하겠소.”
유비를 여남으로 보내는 것은 단순히 지난 생의 은의를 갚는 일이 아니다. 원소군의 핵심 전력 중 하나를 이탈시켜서 전쟁의 승리를 가져오는 행동이기도 하다. 실제로 원래의 역사에서 관도대전이 일어났을 때 조조는 예주의 반란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 조인이 달려가서 진압하지 않았다면 상당히 곤란해졌을 것이다.
‘게다가 지금 조맹덕은 조인을 후방으로 뺄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하후돈은 손책에게 죽었고, 서황과 장료는 내 밑에 있으니.’
여남으로 떠난 유비가 원가의 깃발을 올리는 대신 독립 세력화를 선언하면 원소는 또 한 번 타격을 입을 것이다.
그렇게 손건을 보낸 후, 마초에게 또 다른 한 사람이 찾아왔다. 이미 예상하고 있던 일이라 마초는 담담하게 그를 맞았다.
“관공.”
“복파장군. 오늘은 어려운 말씀을 드려야겠소.”
“언제 찾아오나 기다리고 있었소. 유 사군에게로 떠나려는 것이지요?”
관우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초는 그런 그를 보며 씩 웃었다.
“한 가지만 물어봅시다. 관공은 이번 전쟁의 첫째가는 영웅이오. 계속 내 곁에 있으면 곧 조정에 입조하여 고관이 될 것이고, 아니면 고향 하동을 다스리며 부귀를 누릴 수도 있소이다. 그런데 어째서 빈털터리가 된 유 사군에게 기어이 돌아가려는 것이오?”
“신하 된 자가 두 마음을 품지 않음은 하늘이 정한 법도요(臣無二心 天之制也). 나는 주공과 함께 죽기로 맹세했으니 저버릴 수 없소이다. 이제 공을 세웠으니 떠나는 것을 허락해 주시오.”
배신을 해 보지 않은 사람이 없는 시대.
관우는 이 난세를 살아가며 미련하게 한 길을 갔다. 그리고 이천 년 동안 섬겨지는 신이 되었다.
후대의 소설가는 그가 데운 술이 식기 전에 적장의 목을 베고, 칼로 뼈를 긁어내는데 태연히 바둑을 뒀다고 꾸며냈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범용한 인물을 신으로 만들 만큼 대단한 일인가.
그가 신성을 획득한 것은, 역사에 남은 그의 삶이 의(義)보다 이(利)를 무겁게 여길 수밖에 없는 후대의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어떤 영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 아닐까.
“하여튼 관공은 못 말리겠군. 좋소. 여남으로 떠나 유 사군과 합류하시오. 단, 나에게도 조건이 있소.”
“말씀하시오.”
마초는 관우를 보며 짓궂은 웃음을 지었다.
“관공께 비무를 청하오. 관공께서 한 수를 가르쳐 주신다면 마모는 관공의 말에 따르겠소. 만약 마모가 배울 만한 수가 없다면 관공의 청을 물리치겠소. 비무는 내가 하고 싶을 때까지 하겠소.”
근엄한 표정의 관우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마초는 어느새 천을 씌우고 재를 묻힌 병장기를 준비해 두고 있었다. 두 사람은 처음 만난 날처럼 비무를 위해 장막 안으로 들어갔다.
장막 안에서 관우는 병장기를 물리며 말했다.
“복파장군, 병장기를 바꿔 주시오.”
“음? 관공이 쓰는 언월도를 준비했는데 마음에 들지 않으시오?”
“복파장군께 필요한 것은 언월도를 상대하는 법이 아닐 것이오. 방천극과 대도를 가져다주시오.”
관우는 자신의 애병 대신 여포가 쓰는 병장기를 청했다. 개봉 전투에서 여포와 대결하며 여포의 수를 본 적이 있다. 관우는 자신이 가상의 여포가 되어 대결해 줄 셈이었다.
그리고 한 시진 후.
땀에 푹 젖은 두 사람이 장막에서 나왔다. 관우가 먼저 말을 꺼냈다.
“복파장군의 성취가 실로 놀랍소. 작년에 겨룰 때와는 완전히 다른 수준이 되었소이다.”
마초가 오랫동안 쌓아 온 수련의 성과는 지난 일 년 사이 급격하게 나타났다. 장료, 허저, 그리고 장비와의 대결은 불에 기름을 부은 것처럼 마초의 무공을 드러나게 했다. 처음 회귀했을 때 힘과 체중이 부족했던 신체는 한 해가 지날 때마다 달라져서 25세가 된 지금은 훌륭하게 완성되어 있었다.
마초는 땀에 젖은 얼굴로 피식 웃었다.
“글쎄, 다시 스물한 번을 겨뤄서 11승 10패라. 관공이 익숙지 않은 병기를 쓴 것을 감안하면 썩 만족스럽지는 않소.”
그러나 관우는 고개를 저었다.
“첫 번째, 열 번째, 스무 번째 대결에서 보여 준 세 가지 수는 실로 놀라웠소. 실전에서 그 수를 처음 보는 상대라면 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오.”
일 년 전, 수춘성에서 겨뤘을 때는 4승 17패로 명확한 열세였다. 지금은 11승 10패로 서로 승패를 장담하기 어려운 경지까지 왔다. 관우가 언월도를 들고 승부에만 전념한다면 모르겠지만 마초도 명마 도철을 타면 더욱 강해진다.
게다가 관우가 보여 준 여포의 수는 마초 자신도 놀랄 정도로 여포와 닮아 있었다.
‘설마 가상의 여포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이는 여포와 겨루고 살아남은 사람, 그러면서 여포 수준의 용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사람은 천하에 관우 한 명뿐이다. 오늘 가상의 여포와 겨룬 경험은 여포와 목숨을 걸고 투장을 벌일 때 엄청난 자산이 될 것이다.
“관공은 나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하지만 나야말로 관공께 많은 신세를 졌소. 내가 원수를 갚으면 오늘의 일을 잊지 않을 것이오.”
마초와 관우.
각자의 오만함으로 인해 서로를 미워했다는 일화가 전해지는 두 사람은 헤어지기 전 굳게 손을 맞잡았다.
마초는 은원을 위해 북쪽으로, 관우는 충의를 위해 남쪽으로 천 리 길을 떠나야 한다. 각자 가는 길은 다르지만 두 사람 모두 언젠가 다시 만날 것이라 짐작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