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개봉대전 (2)
곽원은 하북철기를 뒤로 물렸다. 결국 적진을 돌파하지 못하고 저지당한 것이다. 하북철기가 물러난 자리에는 무수한 청주병의 시신이 쌓여 있었다.
청주병을 지휘하던 조인은 묵묵히 시신을 내려다보다 고개를 들어 퇴각하는 곽원을 바라봤다. 주변에서 작은 승리에 흥분한 젊은 부장들이 조인을 향해 외쳤다.
“장군! 곽원이 도망치고 있습니다. 지금 추격하면 목을 얻을 수 있습니다.”
“명을 내려 주십시오!”
부장들은 열의에 차 있었다. 그러나 조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만둬라. 청주병이 비록 용맹하다고 하나 보병이고, 저들은 철기다. 방어전에서는 버틸 수 있었지만, 추격전을 벌이는 건 무리다.”
“하지만 곽원이 퇴각하는 방향에는 마가군의 복병이 있지 않습니까? 지금 잡지 않으면 마가군이 공로를 가로챌 것입니다.”
“그 또한 병가에서 늘 있는 일이다. 작은 공에 연연하지 말고 우리의 임무에 집중한다.”
조인은 부장들의 말을 물리치고 군영을 정돈하게 했다. 잠시 볼멘소리를 하던 부장들은 이내 각자의 위치로 돌아가 군영의 피해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군영이 정돈되자 조인은 부장들을 모아 놓고 일렀다.
“이 전쟁은 큰 싸움이고, 우리보다 상대의 전력이 강하다. 이럴 때는 작은 승리에 들떠서 자리를 이탈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총력을 쏟아붓는 것은 오직 한 번, 결정적인 승기를 잡았을 때다. 알겠느냐.”
한편, 퇴각하던 곽원을 향해 조조군 우군에서 한 무리의 병마가 쏟아져 나왔다. 일사불란한 동작으로 순식간에 진형을 갖추고 곽원을 향해 전진하는 모양을 보니 많은 경험을 쌓은 부대였다. 밤송이 수염을 한 거구의 사내가 선두로 나와 외쳤다.
“마가군의 황권이다. 적장 곽원은 싸움을 피하지 말라.”
“황권? 어디서 굴러먹던 놈이길래 감히 이 곽원을 몰라보고 덤비느냐? 천하의 조인이라도 이 몸을 쉽게 쫓지 못하거늘, 감히 네놈 따위가!”
곽원은 멋들어지게 기른 콧수염을 부르르 떨며 황권에게 달려들었다. 그 또한 북방에서 어지간히 이름을 날리던 인물이다. 비록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재정비를 위해 퇴각하지만, 무명인 황권 따위에게 손을 접고 싶지는 않았다. 일신의 무용에 자신이 있으니 분풀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때, 황권의 옆에서 한 장수가 나와 곽원을 향해 말을 달렸다. 평범한 체격에 쭉 찢어진 실눈을 한 장수는 등에 멘 장검을 뽑아 곽원을 겨눴다.
“곽원이라면 원소의 휘하 중에서도 손꼽히는 맹장이렷다. 그대를 베면 장군직은 물론이고 식읍까지 받겠는걸.”
“아니, 이런 건방진…….”
깡!
장료는 곽원의 말을 끝까지 듣는 대신 다짜고짜 칼부터 휘둘렀다. 곽원은 철창을 들어 장료의 장검을 막았다.
그런데 검을 막은 철창에 전해지는 힘이 생각보다 너무 약했다.
‘허초인가?’
곽원에게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장료는 검이 막히자 씩 웃으며 역동작으로 검을 빼서 횡으로 재차 휘둘렀다. 첫 베기는 힘이 실리지 않은 허초였다. 실초는 첫 수보다 더욱 빨랐다.
곽원은 간신히 몇 수를 막아냈다. 그런데 합을 더할 때마다 장료의 칼이 점점 빨라졌다. 어디까지 빨라질 셈인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버티던 곽원은 여섯 합째에 마침내 장료에게 머리를 내주게 되었다.
깡!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황급히 몸을 숙여 머리가 잘리는 것은 피했다. 장료의 검은 투구 끝의 가지를 쳤다. 턱 끈이 끊어져 투구가 하늘 높이 날았다.
“우우욱…….”
곽원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간신히 말을 몰아 장료의 옆으로 빠져나갔다.
“마가군에는 용맹한 놈들이 숱하게 많다더니, 저놈은 대체 어디서 온 놈이냐?”
곽원이 한탄하는 동안 장료는 무섭게 말을 달려 쫓아왔다. 싱글거리는 웃음을 띤 채였다.
그런데 추격하던 장료가 별안간 눈을 부릅떴다.
휭!
장료가 말 위에서 몸을 크게 틀었다. 장료의 몸이 있던 자리로 화살처럼 빠른 단창이 지나갔다. 곽원은 멀리서 단창을 던진 장수를 보고 탄성을 터뜨렸다.
“오오, 장준예! 어서 이 몸을 구하라!”
후미에 있던 장합이었다. 말 안장에 여섯 자루의 단창을 꽂고 있었다. 한 자루를 던진 장합은 두 자루를 동시에 뽑아 들고 장료를 향해 다가왔다.
“장합, 자는 준예. 승부를 겨루고 싶으면 나에게 오라.”
“재미있는 놈이군. 안문의 장료다.”
장료는 씩 웃으며 장합을 향해 다가갔다. 유독 눈이 좋은 그는 장합이 말을 타는 자세만 봐도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방 장군이나 서 장군에게 뒤지지 않는 놈이군. 저런 맹장이 아직 이름을 날리지 못했나.’
마치 장료 자신과 비슷한 신세다.
장료는 비스듬히 옆으로 말을 달렸다. 장합은 창을 잘 던진다. 정면으로 달려 들어가면 창을 던지기 좋은 과녁이 될 테니 비스듬히 이동해서 조준을 힘들게 만들 생각이었다.
장합은 두 자루 단창을 들고 장료가 이동하는 방향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두두두!
그리고 말에 채찍질해서 달려 들어갔다. 장료가 이동할 방향으로 미리 달리다 보니 한순간 장료와 속도가 일치하는 순간이 왔다. 장합은 그때를 놓치지 않고 벼락같이 오른손, 왼손의 단창을 차례대로 던졌다.
단창 하나는 장료의 가슴께를 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조금 뒤에서 말의 목을 노리고 날아왔다. 피하기 힘든 속도였다.
장료는 등자를 딛고 한껏 몸을 숙여 위로 날아오는 두 번째 단창을 피했다. 그리고 등자에 매달린 불안한 자세로 곡예 하듯 칼을 휘둘러 아래로 날아오는 세 번째 단창을 쳐냈다.
퍽!
단창을 쳐낸 장료가 자세를 회복했을 때, 장합은 어느새 장료의 코앞까지 돌진해 있었다. 껑충한 키의 장합이 네 번째 단창을 역수로 들고 장료를 찍었다. 장료는 칼을 세워 단창을 받아내며 그대로 장합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퍽!
장료가 투구 쓴 머리로 장합을 들이받자 장합의 머리가 크게 젖혀졌다. 장합은 일격을 당하면서도 손에 쥔 단창을 빙글 돌려 장료의 뒤통수를 노렸다. 눈이 좋은 장료도 볼 수 없는 시야의 사각이었다.
퍽!
다시 한번 파열음이 울렸다. 단창의 자루는 장료의 뒤통수를 후려치고 그대로 부러졌다. 크게 휘청거린 장료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피가 얼굴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장합은 어느새 다섯 번째 단창을 꺼내 들었다. 눈 사이로 흐르는 피 때문에 인상을 찌푸린 장료는 장합이 찌르는 단창을 끝까지 보며 검을 휘둘렀다.
퍽!
장합의 단창이 두 조각이 나서 하늘로 날았다. 장합은 반 토막만 남은 단창의 자루를 던져 버리고 장료에게서 멀어졌다.
“안문의 장료라고 했나. 대단하군.”
“암, 대단하고말고. 이제 곧 장군이 되실 몸이라고.”
장료는 피를 닦아내고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웃을 수 없었다.
‘이런 제길, 상처가…….’
강동군과의 싸움에서 장흠에게 입은 배의 금창이 벌어져서 피가 흘러나왔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무리하게 공을 노리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혹시 여포나 장비를 만나게 되면 얼른 자리를 피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제 막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장합이 설마 이렇게 강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곤란한 것은 장합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발출한 다섯 자루 단창은 전부 장료에게 막히고 이제 한 자루밖에 남지 않았다.
장합과 장료는 잠시 서로를 노려보며 대치했다. 장료는 곁눈으로 우군 본대의 움직임을 훔쳐봤다. 조홍이 이끄는 본대는 난전을 벌이느라 구원군을 보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배의 상처에서는 다시 한번 피가 흘러나왔다. 이제 곧 겉으로 티가 날 것이다.
“에이, 곽원의 목은 포기해야겠군. 목숨을 걸기에는 판돈이 너무 작아.”
장료는 미련 없이 칼을 거뒀다. 장합도 더 질척이지 않고 마지막 여섯 번째 단창을 갈무리했다.
그렇게 곽원을 구출해서 돌아가려던 장합은 문득 생각난 듯 장료를 보며 물었다.
“마가군에 그대만한 무장이 얼마나 있는가.”
“으응? 글쎄… 한 서너 명 있으려나?”
장료는 두루뭉술하게 대답했다.
사실은 사실이었다. 방덕, 서황, 감녕까지 세 명의 맹장이 더 있다. 관우는 객장이니 제외하고, 마초는 일단 마가군의 무장이기는 하지만 사실상 수장이나 다름없는 특수한 신분이니 포함시켜야 할지 애매하다. 그러니 서너 명이 된다.
“그렇게 많은가. 그렇다면 마가군보다는 다른 곳이 좋겠군. 알았네.”
장합은 뜻 모를 말을 남기고 사라져 갔다.
* * *
우군에서 조인의 청주병이 하북철기의 돌격을 막아내는 사이, 좌군에서도 움직임이 있었다.
좌군에는 하후연과 방덕의 궁기병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이런 대평원의 전투에서 최고의 위력을 발휘하는 병과다. 하후연과 방덕은 교대로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원소군 우군 쪽에 화살을 퍼부은 뒤 도망가며 피해를 누적시키고 있었다.
원소군의 우군을 담당하는 심배는 화살비를 맞으면서도 조금씩 상대와의 거리를 좁혀 갔다. 마침내 거리가 50장까지 줄어들자 심배가 객장으로 있는 고순을 보며 말했다.
“고 장군! 출진하시오!”
여포 대신 함진영을 이끌고 우군에 배속되어 있던 고순은 그대로 조조군 좌군을 향해 말을 달렸다. 온몸을 검은 갑주로 감싼 함진영 기병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그대로 한 번 충돌이 일어나자, 대부분 경기병으로 이루어진 방덕과 하후연의 군사들이 함진영의 충격력을 막지 못하고 숱하게 쓰러져 갔다.
“온후께서 직접 조련하시는 천하제일의 기병이다. 감히 맞서겠느냐!”
고순은 전장이 쩌렁쩌렁 울리게 소리를 질렀다. 과연 그만한 자신감을 내비칠 만한 위력이었다.
방덕은 인상을 찌푸린 뒤, 활을 메겼으나 이내 내려놓았다. 난전이 되니 장애물이 너무 많아서 좀처럼 깔끔하게 적장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방덕은 일단 함진영을 길게 포위하기 위해 병사들을 지휘하는 일에 전념했다. 마음이 전해진 듯, 하후연도 마찬가지 행동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고순이 이끄는 함진영과 싸울 준비를 끝냈을 때, 원소군의 본진에서 한 무리의 기병들이 화살처럼 쏟아졌다. 목표는 조조군의 좌군과 본대 사이였다. 그 모습을 본 방덕이 중얼거렸다.
“우리가 싸우는 사이, 별동대로 본대를 포위하고 들이칠 셈인가? 그러나 우군 쪽을 뚫으려던 곽원은 실패했다. 과연 저 별동대만 달려가서 본대를 포위한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지.”
기껏해야 3천 정도로 보이는 병력이었다. 본대를 기습하는 기병대라면 당연히 가장 강한 부대겠지만 조조군 본대의 수는 그 열 배가 넘는다.
‘잠깐, 지금 원소군에서 가장 강한 부대라면…….’
방덕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저 부대의 선봉에는 미오성에서 그와 화살을 나눴던 인물이 달리고 있을 것이다.
* * *
관에 꽂아서 길게 늘어뜨린 산새의 깃털 두 가닥.
피처럼 붉은 빛깔의 거대한 말.
초승달 모양의 월아가 달린 방천화극.
여포가 이끄는 병주병들은 조조군의 좌군을 지나쳐서 본대를 향해 그대로 돌진했다. 선두에 선 여포는 이따금 그의 앞을 가로막는 용감한 군사들을 그대로 짓밟아 곤죽으로 만들었다.
총대장 조조는 멀찌감치에서 자신을 노리고 달려오는 여포군의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본초가 과감하군. 빠른 기병으로 기습을 해서 내 목을 한 번에 얻어 보겠다는 건가.”
“사공, 여포는 그 사람됨이 심히 강용합니다. 피하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럴 필요 없네. 이럴 줄 알고 마초가 미리 안배해 두지 않았나.”
조조는 흥미롭다는 듯 여포를 바라보다 이내 영을 내렸다. 본대의 좌측에 위치하던 마가군 중보병대가 여포를 막기 위해 움직였다.
살육을 벌이며 다가오던 여포는 자신의 눈앞을 막는 마가군 중보병대에 그대로 충돌했다. 방천화극이 가는 곳마다 군사들의 팔다리가 어지럽게 날았다. 뒤이어 여포가 이끄는 병주의 기병들이 달려들었다. 여포가 직접 지휘하니 일반병들도 함진영 못지않게 강맹했다.
“조조의 목을 얻어 돌아갈 것이다. 방해하지 마라.”
전진하는 여포의 뒤로 길게 시체의 길이 늘어섰다. 여포가 군사들의 숲을 헤치며 100장을 나아갔을 때였다.
“조조의 목을 탐내는 마음은 나도 같네만.”
한 장수가 여포의 앞을 막았다.
여포는 관에 꽂은 산새의 깃털 두 가닥을 위아래로 움직이며 상대를 훑었다. 붉은 얼굴에 긴 수염, 용을 수놓은 녹색 전포, 손에 쥔 낯선 양식의 언월도. 여포 자신만큼 눈에 띄는 모습을 한 장수였다.
“아직은 때가 아니니 그대에게 줄 수 없음을 이해하게.”
타닥.
적토마가 발걸음을 멈췄다.
주변의 군사들은 싸움을 멈추고 숨을 죽였다. 두 사람을 둘러싸고 거대한 침묵의 원이 만들어졌다.
우두둑.
여포는 목을 양쪽으로 꺾은 후, 방천화극을 어깨에 걸치고 상대를 향해 천천히 나아갔다.
맞은편의 관우도 청룡언월도를 비껴들고 천천히 말을 몰아 여포에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