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마초연의-180화 (180/306)

180화. 군량을 찾아서

여양현, 원소군 본진.

대장군 원소의 군막은 나무로 만든 가건물에 화려한 비단 천을 아낌없이 써서 지어져 있었다. 마치 옥좌처럼 높은 곳에 위치한 상석이 있고, 금색의 휘장이 드리워져 있으니 도저히 야전 기지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금색 비단으로 몸을 감싸고 상석에 위엄 있게 앉아 있는 원소의 모습은 마치 친정을 하러 나온 천자 같았다.

관도에서 철군한 순우경은 즉시 원소를 찾았다. 젊은 시절 같이 벼슬길에 들었던 동기였지만 이제는 주종이 된 몸이다. 순우경 자신 또한 나름대로 출세가도를 달려 온 몸이었기에 시기나 질투는 들지 않았다. 그저 원소가 너무나도 성공한 것뿐이다. 지금 원소는 천하의 모든 사람 중 가장 강한 사람이었다.

원소의 앞에 부복한 순우경이 말했다.

“대장군. 관도를 얻지 못하고 돌아왔으니 죄를 청합니다.”

“허허, 순우 장군. 어찌 대장군의 명을 어기고 살아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이오?”

“대장군, 순우경을 참해서 군령의 지엄함을 보이십시오.”

하북을 평정한 후 원소의 주변에는 간신배가 부쩍 늘었다. 곽도와 봉기가 대표적으로 그런 자들이었다. 쥐 같은 인상의 곽도와 돼지 같은 인상의 봉기가 저마다 한마디씩 하며 원소의 명을 지키지 못한 게 얼마나 큰 죄인지 떠들어 댔다.

“그만. 병가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늘상 있는 일. 순우 장군이 아니었으면 아군이 어찌 하북을 일통할 수 있었겠는가? 그대들은 자중하라.”

원소의 목소리는 낮고 힘이 있었다. 원소가 말하자 곽도와 봉기는 또 다시 손을 모으고 원소의 성품이 얼마나 관후한지 한참 동안 떠들었다. 상석의 원소는 곽도와 봉기의 아부를 듣다가 그만하라고 저지시켰다.

그러나 원소의 심기는 사실 전혀 언짢지 않았다. 누군가는 반드시 원소의 덕을 찬양해야 했다. 이 사실은 자리에 모인 모두가 다 알고 있었다.

순우경은 부복한 채 낮은 한숨을 토했다.

‘대장군은 변했다. 젊은 시절의 영민하고 소탈한 모습은 다 거짓이었던가. 어쩌면 그는… 그저 참고 있었을 뿐이다.’

원소는 누구보다 권세에 대한 열망이 강한 자였다.

그러나 또한 권세를 얻기는 힘든 자였다. 얼자, 천민 첩의 자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모습을 꾹 눌러 숨기며 일생에 걸쳐 청류파의 기백 있는 선비를 연기했고, 그 결과 명문 사족들의 지지와 하북의 실질적인 기반을 양손에 쥐고 최강의 군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권세를 얻었으니 귀하게 되는 것도 좋겠지. 그러나 아직 이르다. 조조와 마초를 꺾기 전에는 절대 안심할 수 없다.’

“순우 장군은 고개를 들라.”

앞으로의 일을 걱정하던 순우경은 원소의 명이 떨어지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원소는 마치 천자라도 된 것처럼 인자한 얼굴로 순우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용안이라는 말에 어울리는 위엄 있고 잘생긴 얼굴이었다.

“마초가 나이를 먹더니 제법 대장부가 됐다고 들었다.”

“그렇습니다. 이제는 천하에 짝을 찾기 힘든 무장입니다.”

“하하, 순우 장군도 나이가 들었군. 내 마초의 예봉을 꺾을 방법을 이미 강구해 두었거늘, 어찌 그런 약한 소리를 하는가?”

원소는 두 팔을 크게 벌리며 과장된 몸짓으로 껄껄 웃었다.

“대장군, 그렇다면 드디어… 마가군의 보급선을 끊기 위해 출정하는 것입니까?”

“그렇다네. 저수. 설명해 보라.”

원소가 돌아보자 감군 저수가 나섰다.

“마가군의 수는 총 5만, 이들이 먹을 양식은 관중에서 황하를 통해 동쪽으로 수송됩니다. 이제까지 군량 수송의 주기로 미루어 볼 때, 열흘에서 스무날 사이에 또 한 번의 대규모 수송이 있을 것입니다.”

“군량의 수송은 누가 맡는가.”

“홍농태수 장기입니다. 하급 관리였던 시절부터 곽사를 잡을 때 큰 공을 세운 자로 알려져 있는데 과연 수완이 보통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마등과 마초도 보급을 매우 중시하기 때문에 대규모 군량 수송이 있을 때는 항시 이름난 장수들이 붙어서 호위한다고 합니다.”

“하하, 이름난 장수라.”

원소는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크게 웃었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름난 장수를 보내야겠군.”

“대장군, 그 말씀은…….”

“병주에 연통을 넣어라. 병주목이 나설 때가 됐다.”

저수가 손을 모아 존명의 뜻을 표했다. 부복한 채로 고개만 들고 있던 순우경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병주목은 흑산적 잔당을 토벌한 뒤 이제까지 힘을 비축하고 있었다. 그자가 나선다면 마가군의 군량 수송로를 끊는 건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 쉬울 것이다. 군사들은 먹지 않으면 싸울 수 없으니 마가군의 예봉도 꺾이겠군. 대장군은 그자를 가장 적절한 위치에 활용하기 위해 이제까지 기다린 것이다.’

마가군의 군량 수송로에 대한 파악이 끝났다. 이제 원소는 마가군의 보급을 끊을 것이다. 성공한다면 싸움의 흐름이 일거에 바뀔 수 있는 계획이었다.

그것을 위해 병주목 여포가 나설 것이다.

* * *

관도.

요새에 입성한 마초는 오랜만에 만난 손님을 반갑게 맞았다.

“벌써 5년 만인가. 자네 이름이 자응이라고 했었지?”

“아이고, 은공께서 기억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자응은 상산 의종의 일원으로 상산도위 하후란의 휘하에 있는 자였다. 5년 전 상산에서 만났을 때는 용감하게 방덕과 권법 승부를 겨루다 일격에 쓰러진 바 있다.

“그런데 자네가 무슨 일인가?”

“하후 도위께서 보내셨습니다. 우리들은 장군께 큰 은혜를 입었으니 조금이나마 은혜를 갚고 오라고 말입니다.”

자응이 전해 주는 하북의 사정은 이러했다.

원소는 이번 전쟁에 20만 대군을 동원했다. 20만 명이 먹을 하루치 군량만 수천 석에 달한다. 이런 막대한 전쟁 물자를 수송하기 위해서는 전장 인근의 고을에서 곡식을 전부 징발해 전장으로 보내고, 곡식을 전부 징발당한 전방의 고을에는 인근에서 조금씩 징발한 곡식을 보내 채우는 방법을 쓴다.

지금 원소군의 군량을 대는 곳은 상산과 거록 일대였다. 상산과 거록의 양식을 수레를 통해 황하 인근의 조가현으로 옮긴 뒤, 그곳에서 다시 백마, 연진, 관도로 배분한다.

“조가현이라면 강줄기가 이어지지 않은 곳이군. 아직 배가 아니라 수레를 이용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황하의 하류는 원소의 영역이다. 발해, 남피 같은 고을에서 배를 이용해 황하를 거슬러 온다면 훨씬 효율적으로 군량을 수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응이 가져온 정보에 따르면 원소는 아직 수레를 이용한 수송을 고집하고 있었다.

“배에 비해 수레가 갖는 장점은 단 한 가지, 빠르다는 것뿐이다. 원소는 장기전이 아니라 단기 결전을 바라고 있군.”

그렇다면 조만간 총공세가 시작될 것이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마초는 이내 씩 웃으며 자응을 바라봤다. 뭔가가 생각난 것이다.

“자네가 전해 준 정보가 큰 힘이 됐네. 하후 도위도 원소에게 인수를 받았으니 입장이 곤란했을 텐데 고맙게 됐군.”

“그야 뭐, 저희 같은 강호의 사람들은 충의보다 은원이 우선 아닙니까. 하후 도위도 한참 고민하다가 결국 티 나지 않게 알려 주고 오라고 하더군요.”

“그래,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자네가 정체를 들키면 하후 도위가 엄청나게 난감해질 걸세. 괜히 여기저기 다니지 말고 이대로 허도로 가게. 당분간 우림중랑장 조자룡의 집에 식객으로 머무르게.”

마초는 그렇게 자응을 단속해서 조운에게 보냈다. 그리고 얼마 후 열리는 연합군의 군의에 참석했다.

군의가 열리는 내실에는 조조와 조인을 비롯해 조조군과 마가군의 핵심 인사들이 전부 앉아 있었다.

“오오, 복파장군!”

마초가 들어서자 환호성이 터졌다. 피차 감정이 좋은 사이는 아니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함께 싸우는 전우다. 맨 앞에서 돌격하여 관도 전투를 승리로 이끈 마초에게 조조군의 중신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축하를 보내 왔다.

“자, 이제 그만들 하시오. 승전 또한 지난 일이니 이제 앞으로의 일을 논합시다.”

마초가 말하자 조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효, 먼저 지금 상황에 대해 말해 보라.”

조인이 조조의 말을 받아 설명했다.

“알겠습니다. 원소가 백마에서 상장들을 잃었지만, 여전히 공세가 강합니다. 순우경과 곽원이 각기 삼만 명 정도의 군사들을 이끌고 교대로 관도를 공략하는데, 둘 다 군사를 부리는 실력이 만만치 않습니다.”

“순우경은 나와 같이 서원팔교위를 하던 숙장이니 당연할 것이고, 곽원도 북방에서 이름을 떨치는 장수라고 들었다.”

“뿐만이 아닙니다. 적진에 맹장이 한 명 있습니다.”

“맹장이라. 누구인가?”

“검은 탈을 써서 얼굴을 가리고 다니기에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무예가 입신의 경지에 오른 자입니다. 기동이 대단히 빠르고 신출귀몰하여 아군의 치중대와 영채에 여러 차례 피해를 주고 있습니다. 이 자가 계속 야습을 하는 바람에 요새의 보수가 늦어지고 있습니다.”

“검은 탈로 얼굴을 가린다고? 그래서 이름도 모르는 적장이 아군을 괴롭히고 있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자가 호랑이 가죽을 두르고 검은 탈을 쓰고 다니니 병사들은 도올(檮杌)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도올은 호랑이의 몸에 사람의 얼굴을 가졌다고 하는 상상 속의 동물이다. 지극히 흉폭해서 물러설 줄 모른다고 전해진다.

“오호라.”

인상을 찌푸린 조조와는 달리 마초는 입꼬리를 한껏 올리며 웃음을 지었다. 뭔가 짚이는 곳이 있었던 탓이다.

“조 장군. 그자의 용맹이 대체 어느 정도인가? 그대가 직접 나선다면 그자도 당해낼 수 없지 않겠나?”

“겨뤄 보지 못했으니 뭐라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다만 살아남은 병사들의 말을 들어 보면 일신의 무예가 소장보다 아랫줄은 아닌 듯합니다.”

조인이 딱히 자존심을 세우는 성격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천하에서 열 손가락에 꼽힐 만한 검술의 달인이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 조인이 직접 싸워 보지도 않고 자신과 대등하거나 그 이상일 수도 있다고 인정한 것이다.

그런데, 그 정도의 무위를 가지고 있다면 도올이라는 자도 이미 이름이 알려졌어야 하지 않는가?

“어디 보자. 천하에 그 정도의 무위를 지닌 자가… 여포는 병주에 있으니까 아닐 것이고, 관운장도 아니고, 당연히 나도 아니고. 아, 도저히 모르겠는걸.”

마초는 도올의 정체를 짐작했지만, 짐짓 모르는 척 막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사실 도올의 정체에 대해서는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짐작하고 있었다. 다만 그가 원소군에 가담했다는 불편한 사실을 굳이 입에 올리고 싶지 않은 듯했다. 마초는 조조군의 막료들이 도올의 정체에 대해 말하는 것조차 불편해하는 모습을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서주에서 도올에게 어지간히 심하게 당했나 보군.’

조조가 논의를 정리했다.

“어쨌든 상대가 맹장을 앞세워 아군의 진영을 교란하고 대군이 교대로 쳐들어오니 관도를 지키기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게다가 조만간 총공세가 있을 것이다.”

마초가 조조를 바라보며 물었다.

“총공세라. 조공께서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이오?”

“간자를 통해 들어오는 정보가 있지. 최근 원소군의 군량 보급선이 바뀌었네. 상산과 거록의 군량을 수레로 수송해서 조가현에 모으고 있다고 하더군. 황하를 두고 굳이 수레로 군량을 나른다는 건, 군량을 대량으로 쓸 일이 곧 생긴다는 뜻. 원본초는 단기 결전을 준비하고 있을 걸세.”

조조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마초가 상산 의종의 자응을 통해 얻은 정보와 일치했다. 마초는 조조의 정보력에 새삼 감탄했다.

그러던 중 마초와 조조의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만약, 그렇게 대량으로 모아 놓은 군량이 불타 버리기라도 하면…….”

“원본초는 단기 결전을 포기할 수밖에 없겠지.”

마초는 무모할 정도로 공격적인 전술을 즐겨 사용한다. 조조 또한 마찬가지다.

두 사람은 이내 의견 일치를 봤다. 마초가 먼저 말했다.

“좋소. 조가현에는 우리 마가군이 가겠소. 원소군의 군량을 태워서 싸움을 장기전으로 만들 것이오.”

“생각 같아서는 내가 가고 싶지만, 이번에는 자네에게 양보하지.”

조가현까지는 그저 벌판이다. 하지만 적의 눈에 들키지 않으려면 먼 거리를 크게 우회해야 한다. 빠른 속도로 이동할 수 있는 마가군 기병대가 제격이었다.

닷새 후, 마초는 2천 기병을 이끌고 관도의 요새를 나섰다. 목표는 원소군의 군량이 모여드는 조가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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