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관도 전투
198년 4월.
원소가 백마를 침공하며 시작된 전쟁이 4개월 차에 접어들었다. 더 많은 승리를 거둔 것은 조조와 마초의 10만 연합군이었다. 그러나 원소군은 연합군의 두 배에 달하는 20만이었으니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도 조금씩 전진할 수 있었다.
마초가 손책과 싸우기 위해 남쪽으로 병력을 뺀 사이 원소군의 남진이 시작되었다. 원소군은 다시 한번 황하를 넘고, 뒤이어 양구수를 넘고, 또다시 제수를 넘었다. 세 개의 강을 넘은 원소군의 앞에는 황하의 지류 급수만이 남아 있었다. 이 강마저 넘으면 허도까지 단숨에 달려갈 수 있는 벌판이 펼쳐져 있다.
그러자면 급수를 끼고 축성된 요새 도시, 관도를 돌파해야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관도를 지킨다. 사력을 다해 막아라.”
관도를 지키는 조인은 연일 사졸들을 독려했다.
관도가 주 전장이 될 것을 꿰뚫어 본 조조의 안목 덕분에 미리 관도에 십여 개의 요새를 축조할 수 있었다. 서황과 관우가 백마를 탈환하며 시간을 벌어 준 덕분에 수성전 준비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휘하의 병사들은 조조 휘하에서 숱한 전투를 치러 온 정예병이고, 그들을 이끄는 조인 자신도 용병에 능한 장수였다.
‘그러나 원소군의 수가 너무 많구나.’
조인은 요새의 망루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원소군을 보며 신호를 보냈다. 몇만인지 셀 수도 없는 군사들이 빼곡히 들어차서 십여 개의 요새를 전부 포위하고 있었다.
“발석차를 쏴라!”
휘우우웅-
조인의 호령에 맞춰 군사들이 발석차의 밧줄을 잘랐다. 무거운 바윗돌을 날리는 이 병기가 없었다면 관도는 진작에 떨어졌을 것이다. 발석차를 정밀하게 조준할 수 있는 장수는 이 세상에 없다. 그러나 지금처럼 적병들이 까맣게 모여 있는 상황에서는 정밀 조준이 필요 없었다.
콰직!
수십 장을 날아간 바윗돌이 원소군의 대열 중앙에 떨어졌다. 바윗돌에 맞은 군사들은 그대로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시신이 되었다. 뒤이어 새로운 군사들이 전우의 시체를 밟고 자리를 메웠지만, 한 번 발석차가 바윗돌을 날릴 때마다 그 부분의 대열이 흐트러지며 일사불란한 전진을 방해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순우경은 조인의 지휘에 감탄했다.
“조맹덕의 족제 중 명장이 있군. 안타깝구나, 좋은 시절을 만났다면 나라의 동량이 되었을 것을.”
원소, 조조와 서원팔교위 시절부터의 동기인 순우경이다. 워낙 전장 경험이 풍부하니 조인이 병사를 이끄는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뛰어난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조인이 처해 있는 상황은 극히 어려웠다. 조인은 발석차의 탄착군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멀찌감치 서 있는 원소군의 정란에는 닿지 않았다.
“정란을 끝내 아끼고 있군. 요새 앞을 완전히 장악한 뒤 정란을 전진시킬 계획인가.”
정란은 바퀴가 달려 이동할 수 있는 거대한 탑이다. 순우경은 요새 앞의 공간을 완전히 장악한 뒤 단숨에 정란을 요새에 밀착시킬 계획일 것이다. 정란 위에 오르면 성벽과 같은 높이에서 화살을 퍼부을 수 있다. 더 무서운 것은 성벽에 완전히 밀착시키면 성 위의 병사들과 백병전을 벌일 수 있다는 것이다.
“기병대를 준비시켜라. 오늘 저녁에 결전을 벌일 것이다.”
“존명!”
부장들이 군례를 올리고 물러갔다. 공격군이 성벽에 오른 그날 바로 성이 떨어지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공격군이 성벽에 오르기 시작한 날부터 열흘을 넘게 버티는 성이 드문 것도 사실이다.
오늘은 백병전이 벌어지는 첫날이 될 것이다. 조인은 첫날 첫 싸움에서 상대를 크게 격파해서 기세를 잡을 셈이었다.
‘그러나 오늘 이긴다고 해도 며칠을 더 벌 수 있을 뿐. 어서 구원군이 오지 않으면 관도를 지켜 내기 어렵다.’
묵묵히 생각에 잠긴 조인에게 별안간 망루 위의 감시병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앗! 장군!”
“무슨 일이냐?”
“나, 남쪽… 남쪽에…! 왔습니다!”
조인은 감시병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漢) 사공(司空) 조조(曺操).
남쪽에 한 무리의 병마가 나타났다. 그 가운데 선 거대한 군기에는 조조의 이름이 씌어 있었다. 조인은 별다른 표정의 변화 없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병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사공이 오셨다. 모두 힘을 내라.”
“사공이 오셨다!”
“으아아아! 사공!”
관도의 요새 안에 열광적인 환호가 퍼져나갔다. 다시 조조의 군사들 쪽으로 고개를 돌린 조인의 눈에 한 무리의 병마가 떨어져 나오는 게 들어왔다. 조조군과는 다른 큼지막한 비색 군기를 올리고 있었다.
“저들은…….”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초(馬超).
마가군이었다. 선두에는 비색 전포를 두르고, 사자 모양 투구를 쓰고, 거대한 백마 도철에 올라탄 마초가 달리고 있었다. 등자에 발을 걸고 긴 마삭을 머리 위로 세운 중기병들이 그 뒤를 따랐다.
“얼마 전 손책에게 크게 이겼다더니, 벌써 전장을 수습하고 달려왔나.”
조인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마초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명장으로 천하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 마초다. 지난 원술 토벌전에서는 그다지 정예병이라고 볼 수 없는 근황병을 이끌면서도 큰 공을 세웠다. 이번에는 자신이 직접 조련한 군사들을 이끌게 되었으니 어떻게 싸우는지 직접 보고 싶었다.
“금철기!”
마초가 달리면서 호령했다. 금철기들은 일제히 창을 내려 겨드랑이에 끼고 정면을 겨눴다.
“돌격!”
짧은 지시를 남기고 마초가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목표는 원소군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대군을 본 원소군 병사들은 황급히 대열을 정돈했다. 그러나 달리기 시작한 도철은 미처 병사들이 대열을 갖추기도 전에 원소군의 본대에 충돌했다.
퍽!
“으아아악!”
마초의 금마삭이 선두에 선 백부장을 꿰뚫었다. 창에 꿰인 백부장이 허공에 붕 떠올랐다. 마초는 사람이 꿰인 창의 무게를 버티기 위해 금마삭을 왼쪽 겨드랑이에 단단히 끼웠다. 도철은 그 무게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원소군 진영을 밀어붙였다.
퍽! 퍽! 퍽! 퍽!
마초의 금마삭이 향하는 곳에 위치한 병사들이 급히 양쪽으로 갈라지며 피했다. 양옆에 서 있던 병사들이 밀려 넘어지며 자연스럽게 대열이 흐트러졌다. 도철은 원소군 병사들이 피하며 만들어 준 길을 그대로 달렸다. 미처 피하지 못한 자와 용감하게 맞서 보려던 자가 연이어 넷이나 금마삭에 꿰뚫렸다.
우직!
다섯 명의 체중이 실리자 끝내 버티지 못하고 창대가 부러졌다. 마초는 미련 없이 창을 던지고 장도 치란을 뽑아 들었다. 5척이나 되는 긴 칼이 번득이자 칼의 사정거리 안에 있던 말과 사람과 병장기가 전부 두 조각으로 쪼개지고 마초의 주변으로 지름 10척의 공터가 생겼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선두에 선 마초가 한바탕 적진을 휘젓는 사이 어느새 달려온 금철기가 무너진 원소군 대열에 금마삭을 박아 넣었다.
퍽! 퍽! 퍽! 퍽! 퍽!
원소군의 보병들은 금철기의 긴 창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창보다 무서운 것은 말의 크기와 무게였다. 보병들은 그대로 말발굽에 짓밟혀 죽어 나갔다. 더 무서운 것은 도주하는 아군이었다. 금철기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등을 보이고 도망치는 원소군 병사들 때문에 대열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원소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하던 전황이 마초와 금철기가 가세하자 순식간에 뒤집히기 시작했다. 순우경은 그 모습을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마초… 어찌 사람이 저렇게 싸울 수 있다는 말인가?”
5년 전, 원소에게 병마를 빌린 마초는 순우경과 함께 호타하를 넘어 흑산적 장연을 쳤다. 그때도 혼자 힘으로 전황을 바꾸는 대단한 무장이었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두고 마중절영, 인중마초라고 불렀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보다 한층 더 강해져 있었다.
이제 무예는 입신의 경지에 이른 듯했다. 빌린 군사들을 이끌던 그때와는 달리 자신이 직접 조련한 중기병을 이끌고 있었다. 그냥 무거운 갑옷을 입은 기병들이 아니었다. 단단한 등자를 써서 말을 자신의 몸처럼 다루고, 긴 창으로 두세 명을 한 번에 꿰뚫어 대열을 부수는 막강한 기병대였다.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순우경조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강력한 돌격기병이었다.
돌격해 오는 마초를 바라보며 부장 한맹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직접 대열의 선두에 서는 것은 필부나 하는 짓이다. 마초만 잡으면 적은 와해된다! 사자 투구를 노려…….”
퍽.
“커… 컥…….”
100장이나 되는 거리를 날아온 화살이 한맹의 몸통을 꿰뚫었다. 한맹이 숨이 끊어지기 전 시선을 돌린 곳에는 짧은 턱수염을 기른 장수가 말 위에 앉아 유유히 다음 화살을 재고 있었다.
“우리 소주공은 어릴 때부터 참 손이 많이 가는군.”
방덕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음 목표물을 노렸다. 마초가 돌진하는 길 근처에 있는 장수들을 저격해서 지휘 체계를 마비시키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그런데 벌써 셋이나 잡아서 다음 표적이 마땅치 않군.’
방덕은 쓴웃음을 짓고 이미 메긴 화살을 원소군 병졸 하나에게 쏘아붙인 후, 활을 집어넣고 휘하의 기병들에게 호령했다.
“활을 넣어라! 돌격한다!”
방덕이 편곤을 빼 들고 독려하자 방덕이 이끄는 궁기병들도 이내 근접 무기를 뽑아 들었다. 이제는 만도보다 편곤을 쓰는 이들이 더 많았다. 활을 들었을 때 위력적인 궁수였던 마가군 기병대는 활 대신 편곤을 들자 강력한 섬멸전용 경기병으로 바뀌었다.
퍼억!
방덕이 휘두르는 편곤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주변 병사들의 투구와 갑옷을 뭉갰다. 갑주를 잘 갖춘 상대를 만날수록 칼보다 둔기가 더 효과적이다. 하북의 풍부한 자원을 등에 업고 단단한 갑옷으로 무장한 원소군이었지만 상대는 서량 기병이었다. 갑주를 무시하고 타격을 주는 편곤을 휘두르며 돌진하니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마초와 금철기가 원소군의 대열을 뭉개는 사이 방덕의 경기병들은 패주하는 원소군들을 사냥했다. 흐트러진 원소군을 향해 이번에는 마가군 보병대가 들이닥쳤다. 일방적인 살육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들 틈새로 한 무리의 별동대가 나섰다. 하나같이 건장한 체격에 험악한 인상을 한 병사들로 이루어진 보병대였다.
“조조군에게 군공을 양보하지 마라. 우리는 정란을 잡는다.”
딸그랑.
별동대 대장 감녕은 그 말을 남기고 자신이 먼저 달려 나갔다. 허리춤에 매달린 방울이 요란하게 울었다. 감녕이 이끄는 금범군은 장강 제일의 무법자들답게 앞을 가로막는 원소군 병사들을 그대로 밀어붙이며 순식간에 정란에 접근했다.
선두에 선 감녕은 바로 정란 쪽으로 달려갔다. 사각철간을 들어 정란의 수레바퀴를 후려치자 요란한 폭음이 일었다.
쾅!
사각철간에 맞아 한쪽 수레바퀴가 부서진 정란이 내려앉았다. 정란은 점점 크게 기울더니 결국 수십 명의 병사들과 함께 바닥으로 쓰러졌다.
우당탕!
“으아아악!”
“크아악!”
여기저기서 원소군 병사들의 비명 소리가 새어 나왔다. 기껏 발석차의 사거리를 피해 전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나타난 보병대가 정란에 붙어서 쓰러뜨리니 그동안의 노력이 무용지물이 되었다.
미처 손 쓸 틈도 없이 대열이 와해되자 순우경은 결단을 내렸다.
“전군 퇴각한다.”
“장군, 하오나 지금 퇴각하면 관도는…….”
“포기한다.”
순우경은 전장에서 실컷 날뛰는 마초, 방덕, 감녕을 노려보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오늘이 바로 관도를 얻을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때맞춰 도착한 마초의 구원군 때문에 물거품이 되었다. 수적으로는 우세하니 피해를 감수하고 잡으면 마초의 군사들은 어떻게든 저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뒤이어 조조의 본대가 들이닥치면 당해 낼 방법이 없다.
“패배가 확실하다면 조금이라도 일찍 퇴각해서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 장수가 해야 할 일이다.”
퇴각하는 길에 순우경은 5년 전을 떠올렸다. 상산 전투에 참가했던 약관의 마초를 보고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만약 마초가 10만 대군을 이끈다면… 천하의 주인이 마초의 손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마초는 아직 10만 대군을 얻지 못했다. 천하를 다투기에는 너무 늦게 태어난 것인지도 모른다. 순우경은 달리는 말 위에서 중얼거렸다.
“비록 오늘은 졌지만, 하루아침에 끝날 전쟁이 아니다. 대장군께서 이미 다음 수를 준비해 놓고 계신다. 관도는 반드시 이 손으로 빼앗아 주마.”
관도 점령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원소는 또 다른 수를 두려 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절대 실패할 리 없는 강수다. 그 계획을 아는 순우경은 여러 번의 전술적 패배에도 불구하고 아직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