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재와 불씨
포박당한 손권이 고개를 들어 마초를 올려다봤다.
“기구할 게 뭐가 있습니까. 때가 되면 죽는 거지요.”
올해 18세니까 죽기에는 너무 젊다. 그러나 손권의 눈은 침착했다. 눈매가 약간 처진, 크고 깊은 눈이었다.
마초는 손권을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그 나이에 늙은이 같은 소리를 하는군. 네 형은 아마 폐인이 됐을 것이다. 어쩌면 곧 죽을지도 모르지. 내가 원망스럽지 않느냐.”
“형님의 칼이 조금만 깊게 들어갔으면 포박당하는 것은 복파장군이었을 것입니다. 전장이란 원래 그런 곳인데 원망할 게 뭐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네 형이 원망스럽지는 않으냐. 수많은 장수들을 희생시키고, 너까지 화살받이로 세워서 자기만 도망쳤지 않느냐.”
“그 또한 전장의 일입니다. 형님은 강동군 전체의 목숨을 책임지는 수장이고, 저는 죽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강동군의 장수입니다. 목숨을 바쳐 수장을 지키는 것은 장수 된 자의 당연한 의무입니다.”
“옳은 말이다. 어린 나이에 제법이구나.”
마초는 주변을 바라보며 지시했다.
“손 공자의 포박을 풀고 군막 안으로 모셔라. 주안상이 준비되면 내가 손 공자와 독대하겠다.”
“주공, 하지만 강동군의 더러운 술수로…….”
“그만. 이제 싸움이 끝났으니 나와 손 공자는 더 이상 다툴 일이 없다.”
마초는 주변의 말들을 일축하고 손권에게 군막을 내줬다. 포박이 풀린 손권은 마치 당연히 받을 대접을 받는다는 듯 무덤덤한 태도로 군막으로 들어갔다. 마초는 손권이 편하게 쉴 수 있도록 목욕물까지 들이게 했다.
잠시 후 술과 안주가 준비되었다. 마초는 손권이 먼저 허기를 달랠 수 있게 시간을 준 뒤 군막 안으로 들어갔다. 18세의 포로는 어지간히 허기가 져 있었는지 순식간에 음식을 먹어 치웠다. 반면 술은 거의 손을 대지 않은 상태였다.
‘관중에게 듣기로 이놈은 늘그막에 술독에 빠져서 나라를 말아먹었다더니, 의외로 술은 마시지 않았군.’
혹시나 실수가 있을까 봐 조심하는 모양이었다. 마초는 웃으며 말을 붙였다.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군. 마가군의 진중에는 좋은 술이 있다는 소문을 듣지 못했나.”
“안 그래도 군졸들이 알려 주더군요. 비서랑 나관중 선생이란 사람이 술을 잘 담그니 맛을 좀 보라고.”
“그래서 마셨느냐?”
“취하면 안 되는 자리니 안 마셨습니다. 복파장군이 저보고 죽으라 하시면 그때 한 잔 청하겠습니다.”
손권의 대답은 씩씩했다. 마초는 속으로 감탄하며 손권에게 말했다.
“중모(손권의 자), 너에 대하여 들은 바가 있다.”
“뭘 들었습니까?”
“무예에 능하지만, 학문도 즐긴다. 호랑이 사냥을 할 정도로 용감하다. 사람을 아끼고 선비들을 잘 대접한다. 그리고 현령으로 있을 때는 공금을 마음대로 횡령했다는 것도.”
무덤덤하던 손권의 표정에서 처음으로 동요가 나타났다.
“복파장군이 그걸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다 아는 수가 있지. 공금을 쓰다 여범에게 어지간히 미운털이 박혔다지?”
“으음…….”
손권이 인상을 찌푸렸다. 마초가 이런 세세한 정보를 어떻게 알고 있는지 궁금한 눈치였다.
‘그야 내가 명색이 한의 표기장군이었으니까. 오나라 왕이 누군지 정도는 알고 있지.’
사실은 지난 생에서 동맹국이자 적국이었던 오나라의 수장 손권이니 시시콜콜한 정보들까지 다 마초의 귀에 들어왔던 것이다. 몇몇 기억이 희미한 사항들은 <삼국지>를 거의 외우고 있는 나관중이 교차해서 확인해 주었다.
“세간에서는 나를 두고 네 형과 꼭 닮았다며 많이들 비교한다. 내 생각에도 그와 나는 닮은 구석이 많은 것 같다. 그래서 네가 더욱 남 같지 않구나.”
마초는 짐짓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진짜로 손권이 남 같지 않았다.
‘남보다 못한 놈이지. 배신이나 하고 말이야.’
그런 마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손권은 조금 당황한 듯했다.
“글쎄요, 복파장군께서 적장인 저를 그렇게 여기실 줄은 몰랐습니다.”
“오늘은 일이 틀어져서 서로 목숨을 노리게 되었지만, 이제 싸움이 끝났으니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느냐. 그런데 볼모 노릇이나 하면서 시간을 죽이기는 네가 가진 재주가 아깝다. 그렇다고 너보고 나를 섬기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게 봐주시는 건 고맙습니다만, 일이 이렇게 됐는데 제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네 나이 아직 열여덟이다. 공부를 더 해 보는 건 어떠냐?”
“공부라면…….”
“이제 곧 장안에 태학이 다시 설 것이다. 관중도독부에서 태학을 재건하는 것을 폐하께서 승인하셨다. 태학에서 몇 년간 공부를 하거라.”
볼모의 대우라기에는 지나치게 파격적이다. 손권은 마초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복파장군, 진심입니까?”
“그렇다. 강동군이 언제 또 중원을 노릴지 알 수 없으니 형식상으로는 볼모다. 그러나 나는 네가 뭘 하든 상관하지 않으마. 강동을 대표하는 선비로서 태학에서 공부를 하고 천하의 젊은이들과 교류하거라.”
“몇 년이 지나 공부를 마친 뒤에는 어떻게 합니까?”
“네 뜻대로 하거라. 다만 조조의 족제 하후돈이 이번 싸움에서 죽었으니 조정으로 가는 건 좋지 않을 것이다. 강동으로 돌아가는 것도 좋겠다만, 만약 네 아우 손익이 강동군을 이어받은 상태라면 네 존재가 불편할지도 모르지. 장안에 남으려면 남고, 아니면 서량 어느 고을의 태수직 같은 적당한 외직을 알아봐 주마.”
볼모란 싸움을 막기 위해 잡는 것이다. 싸움을 해버리면 볼모는 존재 가치가 없어진다.
존재 가치가 없는 볼모에게 하는 것치고는 실로 파격적인 대우였다.
손권은 마초의 눈을 보며 생각했다.
‘이 자가 나에게 이런 호의를 베푸는 이유는 뻔하다. 만약 숙필(손익의 자)이 강동군을 이어받을 경우, 형인 나를 통해 강동군의 세력을 분열시키겠다는 것이다.’
삼남 손익보다는 차남 손권이 정통성에서 앞설 수밖에 없다. 만약 손권이 태학에서 공부하고 북방의 선비들과 인맥을 쌓아서 명사가 된다면 강동군의 후계자 손익에게는 부담이 될 것이다.
어쩌면 자신은 여기서 죽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자칫하면 마초의 후원을 받으며 북방에서 명사가 돼 있는 자신의 존재 자체가 강동군을 내분에 빠뜨릴 위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위험하다고 해서 평생 아무것도 안 하고 살아야 하는가?’
손권은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마초를 보고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복파장군의 말씀대로 장안의 태학에서 공부하겠습니다. 죽을 목숨을 살려 주시고 이런 기회까지 주시니 참으로 은혜가 깊습니다.”
“이제 싸움이 끝났으니 은혜니, 원한이니 그런 얘기는 하지 말거라. 태학에서 공부를 마치면 그때는 알아서 해라.”
결정이 나자 마초와 손권은 술을 몇 잔 나눴다. 마초는 늦지 않게 별도로 마련한 군막에 손권을 보내서 편히 쉬도록 했다.
뜻밖에 목숨을 건지고 태학에서 공부하게 된 손권은 혼자 침상에 누워 생각에 잠겼다.
‘이런 꾀를 쓸 줄은 몰랐군. 마초는 지략이 있는 자로구나. 그러나 그는 짐작하지 못할 것이다.’
“그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부터, 우리 형제들이 어떤 각오로 살아가고 있는지.”
손권은 소리 내어 읊조렸다.
“마초, 너의 뜻대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반드시 북방의 명사가 되어… 강동을 위해 죽을 것이다.”
손책이 재기하든, 손익이 승계하든 상관없다. 기필코 살아남아서 언젠가 결정적인 도움을 줄 것이다. 손권은 그때까지 자신의 속내를 숨기고 있을 생각이었다.
한편, 손권이 나간 군막에서 마초는 나관중과 마주 앉았다.
“주공, 손중모는 어떻게 보셨습니까.”
“담력이 있는 놈이더군.”
“그야 오나라 황제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니 범상한 인물은 아니겠지요. 그가 우리가 생각한 대로 움직여 줄까요?”
“아마 그럴 걸세. 아직 젊은 녀석이니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반드시 명사가 되어 강동을 위해 죽을 것이다!’ 같은 생각.”
마초는 그렇게 말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손권, 너도 지금은 그런 순수한 열정을 가지고 있겠지. 그러나 너는 아직 권력의 속성을 모른다.’
권력은 순수한 열정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만약 손책이 살아남는다면 손권은 허도 원정에서 혼자 살아서 마초의 후원을 받으며 부귀영화를 누리는 꼴이 된다. 손익이 승계한다면 문제는 더 커진다. 둘째 손권이냐, 셋째 손익이냐를 두고 격렬한 정통성 논쟁이 일어날 것이다.
“이런 식의 모략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 하지만 강동군이 먼저 지저분하게 싸움을 걸었으니 나도 지저분하게 상대해 주마.”
마초의 후원을 받는 손권의 존재 자체가 강동군에 부담이 될 것이다. 마초는 그렇게 읊조린 뒤 벽에 걸린 지도로 시선을 돌렸다.
강동군과의 싸움이 끝났다. 이제 황하의 전선으로 복귀해야 할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 * *
양주 구강군.
외딴 곳에 위치한 한 저택으로 주유가 들어섰다. 시비들의 안내를 받아 정자에 당도하니 손책이 기다리고 있었다. 강동의 호랑이라 불리던 호걸은 따듯한 햇살을 받으며 그저 앉아 있었다.
펄럭.
바람이 불자 손책의 옷자락이 크게 휘날렸다. 전장을 달리던 건장한 몸은 곧 죽을 사람처럼 야위어 있었다.
“백부.”
주유는 고통스럽게 목소리를 짜냈다. 볼이 쑥 들어간 손책이 주유를 보며 쓸쓸하게 웃었다.
“공근.”
손책의 입에서는 쉰 목소리가 났다. 마초를 습격했다 실패한 날, 화로에 있던 불씨를 삼켰는지 목이 심하게 상해서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이게 무슨 꼴이냐.”
“미안하구나.”
“집어치워라.”
주유는 눈물이 흐르려는 것을 간신히 억누르고 손책의 앞에 마주 앉았다. 손책이 힘없이 웃었다.
얼굴 반쪽은 여전히 미남이었다. 그러나 다른 반쪽은 화상으로 인해 피부가 떨어져 나가서 붉은 근육이 꿈틀거리는 게 그대로 보였다. 피부 대신 진물이 흘러 근육을 덮었다. 안구도 크게 드러나 있었다.
손책의 무릎에 나비가 한 마리 날아와 앉았다. 손책은 반쪽밖에 남지 않은 얼굴로 평온한 표정을 지으며 나비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아무래도 살기는 어렵겠다.”
주유는 대답하지 않았다.
“상처에서 또다시 벌레가 생겼다. 불씨를 삼킨 이후로 토악질이 나와서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있다.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게 느껴지는구나.”
주유는 계속 말이 없었다.
“그나마 유평(주태의 자)도, 자명(여몽의 자)도 살아 돌아온 게 다행이다. 자의(태사자의 자)도 계속 남아 주겠다고 하고 말이야. 숙필(손익의 자)의 나이가 올해 열일곱에 불과하지만, 영리한 녀석이니 잘해 나갈 것이다.”
주유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기억하느냐? 우리가 함께 영웅이 되어 천하를 얻자고 맹세했었지. 그게 아마 아홉 살 때였던가.”
“열 살 때다.”
“아아, 그런가.”
손책은 씩 웃었다. 평온한 표정이었다.
“미안하다. 져 버렸다.”
“백부.”
“졌으면 다시 일어나야 하는데 그러지도 못하게 됐다. 너에게 무거운 짐만 지우고 죽어 버리게 됐구나. 공근, 그러니 네게 할 말이 있다.”
“해 봐라.”
“강동군의 수장이라는 자리가 생각보다 무겁다. 숙필이 그 무거운 자리를 어떻게 수행하는지 네가 잘 지켜봐라. 처음에는 너무 크게 도와줄 필요 없다. 삼 년쯤 지나면 녀석이 강하의 황조와 싸워야 할 때가 올 거다.”
“무슨 소리가 하고 싶은 거냐.”
“삼 년 정도 지켜보라는 말이다. 숙필이 황조와 싸우는 걸 봐서 괜찮다 싶으면 네가 잘 도와주고, 영 아니다 싶으면 그때는 네가…….”
“닥쳐라. 그따위 소리를 듣자고 온 게 아니다.”
주유는 손책의 말을 끊었다. 아름다운 두 눈이 노기로 가득 차 있었다. 손책은 반쪽밖에 남지 않은 얼굴로 친구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러면 왜 온 거냐? 놀리러 왔냐?”
“내가 할 말이 있다.”
“해 봐라.”
주유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백부. 패배는 내 책임이다.”
“무슨 소리야. 마초에게 덤비다 장수들과 병사들을 잃은 건 나 아니냐.”
“내가 너를 말렸어야 했다. 아니, 내가 대신 갔어야 했다. 그랬다면 이런 일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잘난 척하기는.”
“하지만 엎질러진 물은 주워 담을 수 없는 법. 나는 다시 일어나서 그날의 맹세를 지킬 것이다. 지금의 패배는 너무나도 아프지만, 나는… 굴하지 않고 다시 일어설 것이다.”
불굴.
주유의 말을 들은 손책은 한동안 말없이 주유를 바라봤다. 그가 다시 입을 연 것은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역시, 네가 주군이 되고 내가 무장이 되는 게 나을 뻔했다. 그날 내가 제비를 잘못 뽑았어.”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사실이잖아? 하하하!”
손책은 쉰 목소리로 즐겁게 웃었다. 지나치게 뜨거운 청춘을 사느라 끝내 스스로를 태워 버린 청년은 다 타버린 지금에서야 비로소 편안해진 듯했다.
“피리나 불어 봐라.”
“음악도 모르면서 피리 연주는 왜 들으려고 하냐?”
“시끄러워. 내가 주공이니까 불라면 불어 봐.”
그렇게 잠시 티격태격한 끝에 결국 주유는 피리를 꺼내 연주를 시작했다. 아름다운 선율이 정자를 울렸다.
손책은 주유의 연주를 들으며 무릎에 앉은 나비를 바라봤다. 나비의 날갯짓 사이로 황개와, 장흠과, 진무와, 능조와, 동습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라져 갔다. 그리고 그에게 붉은 두건을 물려준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버지, 나는…….”
손책은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순간 가락이 잠시 흔들렸지만, 주유는 연주를 계속했다.
연주가 끝나고 잠시 동안 적막이 흘렀다. 피리를 갈무리한 주유가 무릎걸음으로 손책에게 다가갔다. 긴 손가락을 들어 감지 못한 눈을 감겼다. 고통스러운 주유의 표정과는 대조적으로, 눈을 감은 손책의 표정은 편안해 보였다.
이렇게 괴로운데도 굴하지 않아야 영웅이 되는 것일까.
주유는 원망스러운 마음에 눈을 감은 친구의 멱살을 잡았다. 그리고 이내 흐느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