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강동의 호랑이, 관서의 사자 (2)
마초는 도철을 몰아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도철은 당장이라도 뛰어나가고 싶은 듯 보챘지만, 마초는 그런 도철을 달랬다.
“잠시만 가만히 있어라. 저 녀석이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한 수를 나눠야 하지 않겠느냐.”
마초를 향해 달려오는 적장은 붉은 두건을 쓴 청년이었다. 거리가 가까워지니 날카로운 콧날을 가진 미남이라는 것을 식별할 수 있었다. 적장은 보통의 칼보다 두 배는 두꺼운 직도를 뽑아 들었다. 노란 눈이 번쩍 빛났다.
파르르.
마초는 앞으로 뻗은 금마삭을 살짝 흔들었다. 그리고 적장의 직도가 자신을 향해 떨어지는 순간, 금마삭을 옆으로 휘둘러 직도의 칼날 옆면을 때렸다.
퍽!
창대가 칼날 옆면을 치자 적장의 직도가 크게 튕겨 나갔다. 금마삭의 움직임은 강맹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초의 청경은 허저와의 싸움을 계기로 경지에 올라 있었다. 순간의 접촉으로 상대가 가하는 힘의 방향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었다.
위에서 아래로 가해지던 힘을 옆으로 흘리자 직도가 튕기듯 옆으로 튀어 나갔다. 적장의 몸도 크게 흔들렸다. 몇 발짝을 휘청거린 적장은 간신히 균형을 잡고 다시 마초를 향해 자세를 가다듬었다.
마초는 그런 그를 향해 웃음을 보였다.
“만나고 싶었다, 손책.”
잠시 마초를 노려보던 손책도 픽 웃었다.
“이봐, 난 네놈을 만나기 싫었다고. 드디어 허도가 지척인데 네가 왜 거기서 나오는 거야?”
“네 생각 정도는 훤히 읽고 있으니까.”
마초는 도철을 몰아 크게 반원을 그리며 옆으로 돌았다. 손책도 자연스럽게 마초의 반대편으로 돌았다.
“서량에 나와 꼭 닮은 녀석이 하나 있다는 소문은 들었다.”
신흥 군벌의 아들. 거친 변방에서 적수가 없는 용맹. 천하를 노리는 야심. 무모할 정도의 용감한 전법.
두 청년은 자신을 꼭 닮은 상대를 마주 보고 각자의 병장기를 들었다.
“그러니 한 번은 겨뤄봐야 하지 않겠나.”
다닥!
마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책이 다시 한번 내달렸다. 마초는 금마삭을 들어 다가오는 손책의 직도를 후려쳤다.
쩡!
요란한 소리가 울리며 손책의 몸이 뒤로 밀렸다. 손책은 이를 악물었다.
‘큭, 이놈은…….’
체격은 자신과 비슷한 정도다. 그러나 마초의 창끝에는 놀라운 힘이 실려 있었다. 한 번 부딪힐 때마다 자신의 칼은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또는 뒤로 크게 튀었다.
‘청경을 이렇게 자유자재로 쓰는 고수가 있었다니.’
손의 빠르기는 마초에게 뒤지지 않는다. 초식의 완성도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손책이 가하는 힘은 마초에게 닿지 않았다. 마초가 청경을 쓰자 자신보다 훨씬 힘이 센 상대와 맞상대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손책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렇다면 절초 한 방으로 승부를 낸다.’
직도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책은 온몸의 힘을 끌어올려 직도를 쥔 오른손에 집중시켰다가 잠시 느슨하게 풀었다. 그리고 마초의 공격을 한 차례 막아낸 후, 무릎부터 허리, 어깨, 팔꿈치의 관절을 차례로 회전시켰다. 온몸의 관절이 정확하게 맞물려 돌며 만들어 낸 힘은 느슨하게 풀어져 있는 손목으로 향했다.
“흡!”
그리고 손목으로 힘이 전달된 순간, 손책은 온몸의 근육을 쥐어짜며 오른손을 크게 휘둘렀다. 하체에서부터 만들어진 힘이 급격하게 꺾이는 손목을 따라 칼날로 전해졌다. 손목이 꺾이는 속도 그대로 손책의 직도가 빠르게 돌았다. 내려치는 직도가 마초의 금마삭에 닿는 순간, 손책은 손목을 단단히 조였다.
쾅!
이번에는 마초가 휘청거렸다. 마초는 도철을 몰아 재빨리 세 발짝 뒤로 물러섰다. 손가도법 절초 호포(虎咆)에 맞은 금마삭은 두 갈래로 부러져 있었다.
탁.
마초는 씩 웃고 부러진 금마삭을 내던졌다.
“모처럼 재미있었는데 아쉽군. 네가 너무 강하니 손속을 둘 수가 없겠구나.”
“하하, 재미라.”
손책은 낮게 웃고 다시 한번 말을 박차 마초에게 달려들었다. 부러진 창을 버린 마초는 6척 장도, 치란을 뽑아 들었다. 검은 칼날에 물결무늬가 어지럽게 떠올라 있었다. 두 사람이 휘두른 도가 허공에서 부딪혔다.
까아앙!
맑은 쇳소리가 하늘에 울렸다.
마초가 휘두른 치란은 아무것에도 부딪히지 않은 것처럼 깔끔한 곡선을 그렸다. 그리고 그 곡선 위에 있던 손책의 직도는 반으로 잘렸다. 부러진 칼날이 하늘로 솟구치고, 손책의 손에는 반토막이 난 직도가 남게 되었다.
“아니, 이런…….”
손책이 노란 눈을 부릅뜬 순간에도 마초의 표정에는 여전히 여유가 있었다. 마초는 등자에서 한 발을 빼서 도철의 배를 찼다. 도철이 땅을 딛고 앞으로 튀어 나갔다.
퍽!
도철은 손책이 탄 말의 목줄기를 물고 그대로 몇 걸음을 달렸다. 손책의 말 또한 강동 제일의 준마였지만 도철의 흉폭한 질주 앞에 저항하지 못했다. 도철은 그대로 상대의 말머리를 입에 물고 바닥에 처박았다.
쾅!
“이히힝!”
말의 구슬픈 비명과 함께 손책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수춘성에서 하후돈을 벴던 명도가 두 조각으로 잘렸다. 회남에서 예주까지 천 리 길을 달려 온 준마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에 처박혔다.
마초는 거대한 백마의 잔등 위에서 땅을 굴러 일어난 손책을 내려다봤다. 사자 투구가 빛을 받아 반짝 빛났다.
“대단한 담력이다, 손책. 그러나 이기고 지는 것은 병가의 상사. 이길 수 없는 상대를 만났을 때, 잘 지고 다시 일어나는 것도 영웅의 자질이다. 자, 어떻게 할 테냐?”
마초는 자신과 꼭 닮은 이 무모한 청년이 싫지 않았다.
‘아니, 닮은 건 맞지만 사실 지난 생의 나보다는 한 수 위의 인물이다. 그는 아우를 황제로 만들었고… 나는 아우를 죽게 했지.’
손책은 그랬다. 복잡한 이해관계로 얽힌 강동 호족들을 하나로 묶어 내서 결국 아우 손권이 오나라를 세울 수 있는 기틀을 쌓았다. 그의 군사적 업적은 평생 강동의 군소 군웅들만을 상대로 싸웠기에 폄하되기도 하지만, 정작 강동에서 세력이 가장 미약했던 것은 원술 휘하의 일개 장수였던 손책 자신이었다.
원래의 역사에서 마초와 손책은 모두 한 번의 실패를 딛고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마초는 조조에게 패한 후, 가족과 전우들을 다 잃고 명성만 남은 빈껍데기가 되었다. 손책은 그보다 훨씬 전에 암살을 당해 유명을 달리하게 된다.
그렇게 그는 세상에 자신을 다 보여주지 못하고 죽었다. 그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실패를 딛고 다시 일어나는 영웅의 자질을 갖추고 있었을까.
마초는 자신과 같은 시대를 살다 간 이 청년이 순수하게 궁금했다. 목숨까지 빼앗고 싶지는 않았다.
“어떻게 할 것 같은가.”
손책은 마초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마초는 장도를 겨눈 채 태연하게 대답했다.
“글쎄, 마지막까지 이겨 보겠다고 발버둥치지 않을까?”
“으하하하!”
손책이 크게 웃었다. 보면 볼수록 마초와 자신은 닮았다. 그러니 이토록 정확하게 자신의 속내를 꿰뚫어 보고 있을 것이다.
“그래, 마초. 이제부터 비열하게 이겨 주마.”
손책이 마초를 보며 노란 눈을 빛냈다. 그런데 마초는 ‘비열하게 이기겠다’는 선언을 듣자 어딘가 심기가 불편한 듯했다.
“아, 이것 참.”
마초는 한숨을 내쉬며 치란을 들어 허공에 세웠다. 그리고 강동군 진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마초가 생각하는 바로 그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닮았다 닮았다 했더니 진짜 무섭도록 닮았구만.”
멀리서 강동군의 장수 하나가 마초를 향해 활을 당겼다. 물소의 뿔로 만든 수우각궁이었다. 마초는 날아오는 화살을 침착하게 보다가 치란을 눈앞에 세웠다.
깡!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태사자가 날린 도끼날 모양의 부형시는 치란에 닿자 두 조각으로 쪼개졌다. 화살이 향하던 곳에는 정확히 마초의 인중이 있었다.
마초가 태사자의 기습을 막아내자 손책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아니, 어떻게…….”
“이런 생각을 너만 했겠냐?”
마초는 그렇게 대꾸하고 손을 들어서 수신호를 했다.
“흥패.”
“예, 복파장군.”
“저자가 활을 쏘지 못하게 막아라.”
“알겠습니다.”
마초의 지시를 받은 감녕이 요란하게 방울 소리를 울리며 달려 나갔다. 마초를 저격한 태사자는 감녕이 달려 들어오는 걸 알면서도 자신보다 손책의 안위에 더 관심이 많은 듯했다. 태사자가 두 번째 화살을 메겨 마초에게 겨눴다. 이번에는 탄속이 훨씬 빠른 유엽전이었다.
탕.
활시위가 허공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유엽전이 날았다. 가만히 서 있던 도철은 화살이 시위를 떠나는 순간 옆으로 살짝 움직였다. 그리고 마초는 치란을 들어 옆으로 휘둘렀다.
펑!
치란의 칼등에 맞은 화살은 그대로 허공에서 터져 나갔다. 나뭇조각이 허공에 꽃잎처럼 흩날렸다. 몇몇 조각들은 마초의 사자 투구에 닿았지만, 전혀 타격을 주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그 사이 감녕의 화살이 날았다. 손책을 구원하는 것에만 집중하던 태사자는 결국 감녕의 화살에 말을 잃었다. 바닥을 구르고 일어난 태사자가 옆의 군졸이 가져온 예비마에 올라탔을 때, 감녕은 태사자의 지척까지 접근해서 사각철간을 뽑아 들었다.
깡!
감녕의 철간과 태사자의 수극이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주변의 어떤 병사들도 끼어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감녕이 완력을 앞세워 밀어붙이면 태사자가 정교한 초식으로 받아넘기는 식이었다. 쉽게 승패가 날 것 같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황권이 큰 소리로 호령했다.
“전군 돌격! 감녕 장군의 뒤를 따라라!”
“우와아아!”
황권은 본대를 전진시켰다. 월길이 이끄는 강족 기병대도 함께였다. 이제껏 싸움에 투입되지 않고 계속 기회만을 기다리던 마가군의 중군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마가군의 중군은 약 1만 3천. 3천의 기병과 1만의 보병으로 이루어져 있다. 손책이 본진 습격을 위해 이끌고 온 기병대가 2천이니 6배가 넘는 병력 차가 있었다.
“쏴라!”
태사자가 이끄는 궁기병대는 위력적이었다. 수우각궁의 긴 사거리를 이용해서 치고 빠지며 마가군을 괴롭히고자 했다. 그러나 그 지휘관인 태사자는 감녕과의 투장 때문에 부대 지휘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그들이 상대하는 적은 궁기병을 상대하는 것에 이골이 나 있는 서량병들이었다.
“물러서지 마라! 구강의 장흠이 여기 있다!”
“내가 바로 여강의 진무다!”
손책을 따라 달려 온 강동군의 무장들은 저마다 병장기를 뽑아 들고 분전했다.
그러나 1만 3천 대 2천의 싸움에서 누가 이기고 질지는 명확했다. 싸움이 한창 달아올랐을 때, 후방으로 크게 우회한 마대의 부대가 강동군의 뒤에서 나타나며 강동군은 포위당하게 되었다.
“어떠냐, 손책.”
도철 위에 앉은 마초는 땅을 딛고 선 채로 자신과 대치하고 있는 손책을 보며 말했다.
“너는 졌다. 이대로 계속 싸우면 네 병마는 전멸한다. 네가 자랑하는 강동의 맹장들도 이 자리에서 전부 죽을 것이다.”
손책은 노란 눈을 형형하게 빛내며 마초를 노려봤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마초의 말이 맞았다. 유일한 희망은 항상 선두에 서는 마초를 직접 기습하여 투장으로 승부를 내는 것이었다. 그것을 위해 남들이 보면 비열하다고 할 만한 태사자와의 협공도 준비했다.
그런데 마초는 이런 상황을 예상이라도 한 듯 손책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게다가 일신의 무용으로도 당해 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맨몸으로 겨루면 해 볼 만하겠지만 저 거대한 백마에, 쇠를 잘라내는 장도까지 휘두르고 있으면 도저히 방법이 없다.’
손책은 긴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군.’
깡.
손책은 부러진 직도를 땅에 내던졌다. 그리고 마초를 쏘아보며 대답했다.
“손가의 사내는 항복하지 않는다.”
“그러면 죽겠다는 건가?”
“강화 협상을 청한다.”
“하하하하!”
마초는 하늘을 보며 크게 웃었다.
“항복이 아니라 강화 협상이라. 이것 참 여러모로 대단한 놈이군. 좋아, 받아들이마.”
마초가 수신호를 했다. 황권은 눈을 의심하며 재차 확인했다. 다시 한번 틀림없다고 신호를 보내자 황권은 그제야 신호기를 올려 군사들을 불러들였다.
“공격 중지!”
“강화 협상이다!”
여기저기 소교들의 외침 소리가 울렸다. 강동군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던 마가군 병사들은 포위 대형 그대로 뒤로 물러났다.
싸움이 잦아드는 걸 확인한 마초는 손책을 향해 말했다.
“강화는 네가 제안했으니 협상의 세부 사항은 내가 정하지. 시간은 한 시진 뒤, 장소는 내 군막이다. 그리고…….”
거기까지 말하고 잠시 쉰 마초는 손책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진중에 있는 네 아우를 데려와라. 앞으로 마가군에 볼모로 둘 것이다. 이게 강화의 조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