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지키려는 자, 빼앗으려는 자
원소군이 안량과 문추를 앞세워 백마를 침공하며 시작된 전쟁은 마가군의 서황과 관우가 백마를 탈환하며 일진일퇴의 공방으로 변했다.
백마를 다시 빼앗긴 원소는 연진으로 목표를 변경, 수하의 숙장 순우경과 곽원을 보내 연진에 도하 거점을 만들고자 했다. 이들을 막아내는 것은 조조군의 하후연과 우금, 악진이었다. 원소군과 조조군은 황하를 사이에 두고 연진에서 승패를 주고받으며 대치했다.
“전황이 예상보다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네. 관운장의 무위가 그렇게까지 뛰어날 줄은 나도 몰랐으니 말이야.”
숭산, 조조의 군막.
사공 조조는 자신을 찾아온 손님에게 전황을 설명했다. 오늘 전략을 논의하기 위해 온 손님은 연합을 이룬 마가군의 대장 마초였다. 조조는 그런 마초를 보며 만면에 웃음을 띠고 말했다.
“관운장은 자네에게 단기접전에서 패하고 투항했다고 했지. 그러면 자네는 대체 어느 정도의 고수라는 말인가?”
“그야 뭐… 그날 여러 번 겨뤘는데, 사실 관운장이 더 많이 이겼소.”
“그런가? 구체적으로 전적이 어떻게 되는가?”
“너무 자세히 묻지는 마시오.”
마초는 무예의 길고 짧음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러나 관우와 비무했던 날의 결과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4승 17패는 너무하잖아.’
다섯 번을 겨루면 한 번을 이기고 네 번을 지는 정도. 아직 관우와는 그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그날은 땅을 딛고 겨뤘으니 말 위에서 겨룬다면 차이가 훨씬 줄어들기는 할 것이다.
서황과 관우의 활약으로 전선이 다시 백마와 연진으로 옮겨진 후, 후방의 관도에서 축성을 시작한 조인은 크고 작은 요새 수십 개를 만들어 방어 체계를 구축했다. 이제 원소군이 황하를 넘는다 한들 관도를 쉽게 돌파하기는 어렵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역시 병력 수의 차이는 감당하기 어렵지. 우리는 결국 연진을 내 주고 관도로 물러나야 할 걸세.”
“그렇군. 하지만 그 정도까지는 조공의 계산 범위 안이 아니오?”
“사실대로 말하자면 내 계산보다 훨씬 잘 풀리고 있네. 국의와 안량과 문추와 고람이 서전에 전부 출진할 줄 누가 생각했으며, 그들이 전부 패배할 줄 누가 생각했겠는가.”
마초는 조조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글쎄, 보통 사람이라면 헤아리지 못했겠지만 조공은 보통 사람이 아니지요.”
“무슨 말인가?”
“원본초가 서전에 강수를 둘 것이라 짐작하지 않았소? 그래서 하후연에게 꾀병까지 부리게 해서 예봉을 피하게 하고, 원본초의 강수는 우리 마가군이 받아내도록 계책을 쓴 것을 알고 있소.”
“으흠, 티가 났나?”
조조는 마초를 보며 껄껄 웃었다. 그렇게 겉으로는 여유를 가장하며 속으로는 계산하고 있었다.
‘그저 관우의 무위 때문에 얻어걸린 승리가 아니었나. 이놈은 원소의 속내를 꿰뚫어 보고 그에 맞춰 초강수를 준비했구나. 이런 통찰력을 가진 건 이놈 본인일까, 아니면 이놈의 군사 순공달일까.’
그러나 마초의 생각인지, 순유의 생각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마초가 이 전장의 흐름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앞으로 쓸데없는 계산은 그만두고 싸움에나 최선을 다하시오. 비록 상장을 잃었다 하나 원본초의 군세는 무려 20만이오. 우리 둘이 힘을 합쳐야 간신히 대적이 가능하다는 말이오.”
“그래서 연진에서는 우리 군이 앞장서서 싸우고 있지 않나.”
“그러셔야지. 그래야 나에게 조금이나마 속죄가 되지 않겠소?”
마초는 빙글빙글 웃으며 조조에게 면박을 줬다. 잠시 다른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면박을 주고, 또 다른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면박을 주는 게 몇 번이나 이어지자 조조도 슬슬 화가 치밀어 올랐다.
“맹기, 군문이란 본래 속임수가 횡행하는 곳이라네. 내가 자네와 원수진 것도 아니니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할지나 얘기해 보세.”
“흠, 조공이 내 원수라면 좀 더 면박을 줘도 된다는 뜻이오?”
마초는 피식피식 웃으며 몇 번이나 더 조조를 도발했다. 조조가 머리 끝까지 화가 나서 인내심이 한계에 달하는 게 보이자 그제서야 정색하고 말했다.
“당분간 황하의 전선은 조공의 군사들로 막아 주시오. 나는 남방의 일을 경계해야겠소.”
“남방? 그게 무슨 소린가?”
“손책이 강동을 떠나 회남의 구강에 주둔하고 있소. 그곳에서 회수를 따라 북상하면 허도가 지척이오.”
마초의 입에서 손책의 이름이 나오자 조조의 얼굴이 심각하게 변했다.
“손책은 나에게도, 원소에게도 가담하지 않고 있지. 자네는 그가 원소의 편에 서서 우리의 뒤를 칠 것이라 보는 것인가?”
“손책은 누구의 편에 서서 이해득실을 따질 위인이 아니오. 그저 그 자신의 의지로 허도로 진격해 천자를 탈취하려 할 것이오.”
지난 생에서도 손책은 조조와 원소가 싸우는 틈에 허도를 급습해 천자를 노리려는 계획을 세웠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대담한 행동이었다. 심지어 그때는 회남을 얻지 못하고 강동에 있었으니 훨씬 먼 거리를 이동해야 했지만, 지금 그는 장강을 넘어 구강에 주둔하고 있으니 그 거리도 훨씬 짧아졌을 것이다.
‘그때는 미처 실행하지 못하고 암살당했지.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당시 그의 암살에 누가 개입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죽은 오군태수 허공의 식객에게 암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어쩌면 광릉태수 진등이나 사공부 군사좨주 곽가가 개입했을 수도 있다는 게 마초의 추측이었다.
‘그런데 진등은 이미 죽었고 곽가는 나를 암살하려다 실패해서 실각했다. 설령 그들의 개입이 없었더라도 손책이 이미 강동 땅을 벗어나 있으니 암살의 위협이 미치기는 어려울 것이다.’
조조는 뭔가를 깊이 생각한 후 입을 열었다.
“만약 자네 말처럼 손책이 허도를 노릴 생각이라면… 그때는 모든 일이 앞뒤가 맞아 들어가기는 하네. 그가 어째서 강동의 옥토를 뒤로 하고 구강에 주둔하고 있는지, 어째서 나와 서주의 영토를 분할 할 때 회수 이남만으로 만족하고 물러났는지.”
손책은 조조와의 영토 협상에서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회수 이남의 고을들만으로 만족한다고 했다. 회수 이북의 하비, 낭야, 팽성 같은 큰 고을들을 전혀 탐내지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그는 허도로 향하는 진격로가 되어 줄 회수만이 필요했던 게 아니었을까.
‘그때는 그저 남방에 할거하는 게 목적이라 그렇다고만 생각했다. 아니,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마초의 말을 듣고 보니 생각할수록 이상했다. 손책은 영토 협상에서 어수룩한 모습을 보였다. 그가 영토 대신 원한 것은 두둑한 금이었는데,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건지 하도 터무니없는 액수를 불러서 조조가 거절했던 바 있다.
그렇게 옥신각신하다 금 대신 가져간 것이 2천 마리의 말이었다. 손책의 말로는 그 말들을 교주에 내다 팔아서 산호와 진주로 바꿔 올 테니 그때는 비싼 값에 사들이라는 것이었다.
조조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만약 자네의 말이 맞다면 지금쯤 말 2천 마리가 기병 2천 기로 바뀌어 있겠군. 그러나 아무래도 이상하네. 나도 과감한 걸로 따지자면 천하의 누구 못지않다고 자부하네만 이건 너무나도 무모한 짓일세. 손책이 거느린 병마를 다 합쳐도 2만이 넘지 않을 것이고, 설령 허도를 급습한다 한들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1만을 넘지 않을 걸세. 고작 그 정도의 병마로 한 방에 천하를 노린다는 게 말이 되는가?”
“반대로 생각해 보시오. 고작 그 정도의 병마로 한 방에 천하를 노리려면 가장 적합한 때가 언제겠소?”
“하.”
그것은 지금뿐이다. 조조도, 마초도 황하 전선에 묶여서 남방에 대한 경계가 소홀해지는 지금이 적은 수의 병마로 천하를 노릴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인 것이다.
“맹기, 자네는 어째서 손책이 그렇게 행동할 것이라 확신하는가?”
그것은 당연히 미래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해도 믿어줄 리 없다. 마초는 씩 웃으며 말했다.
“조공도 말하지 않았소? 그와 내가 닮았다고.”
젊고, 용감하고, 영리하고, 난폭하고, 매력적이고, 대담하고, 무모하다. 서량과 강동, 천하의 반대편에서 자란 두 청년은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내가 그라면 그렇게 할 것이오. 그는 강동에 눌러앉아서 천하의 대세가 바뀌기를 기다릴 인물이 아니오. 반드시 자기 손으로 천하를 잡으려 할 것이니, 나는 구강의 움직임을 주시하다가 그가 허도로 움직이는 것을 막겠소.”
마초는 단호했다. 가만히 그 모습을 보던 조조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네. 그러면 황하 전선은 당분간 우리 군이 더 맡아 보도록 하지.”
“뿐만이 아니오. 손책이 회수를 거슬러 허도를 노린다면 수춘성을 지나야 하오. 수춘성의 수비도 강화해 주시오. 일이 발생하면 우리 군이 열흘 만에 수춘에 도착할 수 있지만, 만약에 대비해서 손책이 공격해도 보름은 버틸 수 있어야 할 것이오.”
“아아, 그래.”
조조는 겉으로는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이 친구야. 그곳에서는 지금 내 심복이 호표기를 기르고 있다네. 바로 자네를 치기 위해서.’
수춘성을 지키는 것은 자신의 심복 하후돈이다. 젊고 유능한 부장까지 붙여 줬으니 어지간한 공세는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보름이 아니라 서너 달이라도 버틸 만한 능력이 있었다.
* * *
구강군 단도현. 토역장군 손책의 치소.
“으으으음…….”
눈을 부릅뜨고 눈앞의 바둑판을 노려보는 손책을 보며 맞은편의 여범이 잔잔히 웃었다.
“장군, 군자가 바둑에 능하다고 큰 자랑거리는 아닐 것입니다. 굳이 승패에 집착하실 필요 있겠습니까? 이제 그만 두시지요.”
여범은 서른 살이 안 돼 보이는 젊은 선비였다. 화려한 옷차림과 자신감 있는 태도를 보면 꼭 명문가의 공자 같았지만, 굵게 못이 박힌 손이 그가 그저 문약한 서생이 아님을 말해 주었다. 실제로 그는 몰락한 집안의 후손이었으나 돈 많은 장인을 둬서 귀족 사회에 다시 들어온 몸이며, 문무를 겸비하고 일 처리가 엄정하여 명성이 높은 관리이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회남 일대에 적수가 없다는 바둑의 최고수였다. 그러니 어려서부터 무예와 병법에만 힘쓰느라 잡기를 가까이하지 않았던 손책이 대적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확실히 자형(여범의 자)의 말이 옳소. 바둑의 승패에 집착하는 것은 군자의 도리가 아니오. 그러나…….”
거기까지 말한 손책은 검지와 중지로 흰 돌을 쥐고 한껏 들어 올린 후 반상에 착수했다.
딱!
“나는 싸울 만해서 싸우는 것이오. 수가 보이는 걸 어쩌라는 말이오? 으하하하하!”
손책은 요란하게 한 수를 두고 호쾌하게 웃었다. 그런 그를 보며 잠시 쓴웃음을 짓던 여범은 반상을 내려다본 후 이내 눈이 커졌다.
“아니, 이 수는…….”
분명히 열 집이 넘는 우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손책의 한 수는 여범이 생각지도 못한 중앙의 급소를 절묘하게 파고들었다.
‘손 장군의 실력은 나에게 비할 바가 아니었다. 방금 전에도 세 판이나 내리 졌는데, 설마 네 판째에 나를 이길 방법을 찾아낸 것인가?’
손책의 묘수를 본 여범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이번에는 여범에게서 악수가 나왔다. 그렇게 수십여 수가 더 진행된 후, 회남 최고수 여범은 결국 돌을 던졌다.
“손 장군의 솜씨가 실로 놀랍습니다. 한 수 배웠습니다.”
“핫핫하하! 이제 자신이 없어요! 질 자신이요!”
손책은 한 번 이겼다고 있는 대로 시끄럽게 떠들며 여범의 어깨를 두들겼다. 그렇게 세 판을 내리 지고 네 판째에 대역전승을 일군 손책은 다섯 번째 대국에서 심기일전한 여범에게 불계패를 당한 후에야 바둑판을 옆으로 밀었다. 처음 약속했던 다섯 판의 대국이 전부 끝난 것이다.
“하하, 모처럼 쉬는 날인데 자형 덕분에 즐겁게 보내게 됐소. 세상에 재미있는 게 참 많군요. 바둑도, 음악도, 사냥도 어찌나 재미있는지.”
손책은 그렇게 말하며 신이 나서 고급 취미들이 얼마나 즐거운지 얘기했다. 여범은 그 말을 들으며 그저 웃을 뿐이었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손 장군은 살면서 여유를 누려 본 적이 없지. 바둑도 그저 명사들과 교류하기 위해 배운 것일 뿐.’
그런 것치고는 놀라운 재능이다. 여범은 즐거워하는 손책과 잠시 한담을 나눈 뒤 본론을 꺼냈다.
“오늘 저를 부르신 건 그저 바둑이나 두자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장군께서 곧 결행하실 것이라 알고 있습니다.”
“이것 참, 자형은 못 속이겠구려.”
손책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 여범을 바라봤다.
“그렇소. 조조와 마초가 북쪽의 원소를 상대하기 위해 황하에 군사를 집중시킨 지금이 기회요. 나는 강동과 회남의 병마를 이끌고 허도로 진격해 천자를 봉대하고자 하오.”
만약 성공한다면 천자는 손책의 보호 아래 놓이게 된다. 그리고 조조와 마초는 천자의 조서를 받아 역적을 친다는 명분을 잃는다. 만약 허도 습격에 성공한다면, 그리고 조조와 마초의 공격에서 허도를 방어한다면 손책은 천자를 모신다는 명분을 얻게 된다. 그렇게 되면 실리를 가진 원소와 함께 단숨에 천하 양강이 되는 것이다.
여범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실로 무시무시한 계획입니다. 장군 같은 영웅이 아니고서야 누가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하하, 칭찬을 듣자고 자형을 부른 게 아니오. 자형, 만약에 말이오.”
손책은 여범을 바라보며 노란 눈을 반짝 빛냈다.
“내가 이번 출진에서 돌아오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소?”
“강동에는 중심을 잡아 줄 인물이 필요합니다. 장군의 혈육 중 적당한 이를 내세워 후사를 이을 것입니다.”
적당한 이란 손책의 동생이자 손견의 다른 아들을 말한다. 손책에게도 아들이 있었지만, 아직 갓난아이이니 후사를 논할 수는 없는 것이다.
“적당한 이라면 둘째 권과 셋째 익이 있지. 자형이 보시기에는 둘 중의 누가 낫겠소?”
“삼공자가 낫습니다.”
“권보다 익이라는 말인가. 이유가 있소?”
“강하의 황조 때문입니다. 만약 장군께서 잘못되시면 황조가 쳐들어올 것입니다. 장군께서 순리대로 황조를 쳐서 억눌러 놓고 돌아가신다면 이공자를 지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황조를 치기도 전에 중원을 직접 노리려 하시니, 만약 일이 잘못된다면 황조와의 전면전을 벌여야 할 것입니다.”
“으흠, 일리가 있군.”
“삼공자는 나이는 어리지만 용맹하여 장군과 같은 풍격이 있으니 전시의 군주로 적합합니다. 이공자 또한 훌륭한 재목이지만… 전쟁을 이끄는 것보다는 안을 튼튼히 하는 데 어울리는 인물입니다. 이 시국에는 맞지 않습니다.”
“둘째 권이는 현령으로 있으면서 현의 공금을 유용해서 자형에게 지적을 받았지. 혹시 그런 면 때문에 권보다 익이 적합하다고 생각하시는 거요?”
“그건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째서요?”
“지금은 난세이고, 우리는 먼 변방의 군벌입니다. 이런 곳을 다스리려면 올곧은 자보다는 탐심이 많더라도 권세에 대한 열망이 있는 자가 어울립니다. 그런 면에서 이공자도 적합한 인물이라고 봅니다. 다만…….”
“다만?”
“지금 강동의 주인에게는 군재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만약 장군께서 계속 건재하시다면 이런 논의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3년만 더 건재하시다면 저는 이공자를 택할 것입니다. 그 안에 장군께서 강하의 황조를 꺾어 놓을 테니까요. 그러나 당장 잘못되신다면… 삼공자를 택할 것입니다.”
“자형의 의견은 그런가. 알았소.”
여범은 달콤한 말을 꾸며내는 사내가 아니다. 손책이 묻는 지극히 민감한 주제에 그저 솔직하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그 정도의 신뢰가 싹터 있었다.
손책은 만약 일이 잘못되었을 경우의 후사에 대해 여범의 의견을 충분히 들은 뒤, 여범을 돌려보내고 후원으로 내려갔다. 후원에서는 이미 거나하게 술판이 벌어져 있었다.
“어어, 책이 왔냐? 바둑 두다 죽은 줄 알았다.”
“공복 아재.”
황개, 자는 공복. 아버지 손견의 대에서부터 손가를 따르던 장년의 무장은 근육질의 상체를 드러내고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연신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래, 여자형이 뭐라더냐?”
“캐묻지 좀 마시오. 내 입장 곤란하게.”
손책은 그렇게 황개를 타박하고 자리 사이에 끼워 앉았다. 연회라고 부르기 민망한 조촐한 술판이었다. 그러나 술판을 벌이고 있는 이들의 면면은 조촐하지 않았다.
황개, 정보, 한당, 태사자, 능조, 장흠, 진무, 주태, 여몽. 그리고 손권과 손익.
며칠 후면 구강의 병마를 이끌고 허도로 출진할 결사대가 마지막 휴일을 즐기고 있었다. 손책은 잠시 그들과 한담을 나눈 뒤 말했다.
“구강에 남을 사람을 정했다.”
자리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손책에게 향했다.
하루종일 동네 청년처럼 편안한 태도로 휴일을 즐기던 손책은 딱 한순간만 강동군의 수장이 되어 모두에게 선언했다.
“덕모(정보의 자) 숙부. 그리고 숙필(손익의 자). 이렇게 두 사람이 남는다.”
“존명.”
“존명!”
모든 강동군 장수들이 공수하며 손책에게 군례를 올렸다.
구강에 남는 두 사람은 만약 손책이 전사했을 경우의 후계자와 그 후견인이다. 오늘은 그에 대한 인선을 발표하는 자리기도 했다. 엉망인 몰골로 술을 마시던 강동군 장수들은 딱 한순간만 주종으로 돌아가서 손책에게 예를 표했다.
“자, 그러니…….”
손책은 이내 다시 밝은 표정으로 돌아와 좌중을 돌아봤다.
“이대로 다 같이 모이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겠군. 많이들 먹자고.”
“그런 것치고 음식이 좀 부실한 것 아니냐?”
“거 우리가 언제부터 부귀영화를 누렸다고. 닭고기는 그만 좀 드시고 자명이한테 양보하시오. 많이 먹고 키가 커야 하니 말이오.”
손책은 다시 한번 황개를 타박했다. 황개는 크게 웃고 대신 여몽이 발끈했다. 마치 아무도 긴장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그러나 지독하게 위험한 싸움이다. 전부 다 살아남지는 못할 것이다.
손책은 그런 생각을 하며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전우들의 모습을 눈 안에 담아 두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