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백마 전투(2)
백마진, 원소군 진영.
장합은 고개를 들어 잔뜩 흐린 하늘을 올려다봤다.
“비가 오려는가.”
그렇게 중얼거리는 그는 키가 무척 컸다. 거의 9척에 달할 정도였다. 팔다리도 그만큼 길었다. 반면 얼굴은 미남과는 거리가 있는 각진 인상에 몸은 가늘고 깡마른 편이라, 유독 큰 키가 당당하기보다는 껑충해 보였다.
동료 장수 고람이 그런 장합을 보고 타박을 줬다.
“준예(장합의 자), 나이도 한참 젊은 놈이 무슨 늙은이 말투냐? 비가 오면 오는 거지.”
“고람 장군. 이 계절에 비는 흔한 게 아닙니다. 그리고 비가 오면 많은 것이 바뀝니다.”
“흠, 뭐가 바뀐다는 거냐?”
“겨울비를 오래 맞으면 병이 돌기 쉽습니다. 빗속에 가죽신을 신고 오래 있으면 발이 썩는데, 추운 날에는 그 속도가 더욱 빠르니 미리 예방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군사들은 매복하고 있으니 더욱 그렇습니다. 매복해서 대기하는 병력을 반으로 줄이고 교대로 휴식하게 해야겠습니다.”
“그걸 모르는 장수가 어디 있는가? 그렇다고 매복을 줄이다니, 그렇게 병졸들을 챙긴다고 그놈들이 알아주기라도 한다던가? 그저 빨리 전쟁을 끝내서 집에 보내 주는 게 병졸들을 위하는 길이라고.”
14년 전,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을 때 열여섯의 나이로 병졸로 군문에 들었던 장합이다. 이제 시간도 많이 흐르고 자신은 어엿한 장수가 되었지만 어린 나이에 겪었던 병졸의 삶을 잊을 수 없었다. 괜히 불퉁거리는 고람과 언쟁을 하기보다는 무시하기로 했다.
그리고 비가 오면서 달라지는 것은 하나 더 있다.
“만약 비가 많이 와서 진흙탕이 되면 기병이 달리기 어렵지요. 적의 주력은 금철기라는 중장기병대이니 그 위력을 발휘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으하하, 그건 맞지. 이곳으로 달려오는 마가군 선봉장이 서황이라는 놈이지? 아무래도 운이 다했나 보구나.”
고람은 부푼 기대를 굳이 숨기지 않았다. 원소가 직접 발탁한 그는 아직 안량과 문추만큼 명성은 높지 않았으나 실력만큼은 그에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맹장이었다. 이번 기회에 마가군의 서황 같은 이름난 무장을 잡고 이름을 떨치고 싶은 것이다.
‘서황… 대단한 장수라고 들었다. 그러나 오늘은 우리에게 운이 따르는군.’
서황은 중장기병을 앞세워 벌써 국의를 베고 파죽지세로 백마까지 진격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백마에는 장합 자신과 고람, 그리고 안량과 문추가 물샐틈없는 포위망을 만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비가 내려 기병까지 달리기 힘들게 된다면 살아서 돌아가기 어려울 것이다.
* * *
투두두둑.
음력 1월에 때아닌 장대비가 내렸다. 백마현으로 진입한 마가군 선봉대는 기다리고 있던 원소군과 난전을 벌이게 되었다. 선봉장 서황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군기로 신호를 보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전령을 보내도 닿지 않는군.”
이래서야 정상적으로 지휘를 할 방법이 없다. 서황은 별수 없이 몸소 대부를 들고 난전의 사이로 뛰어들었다. 눈앞을 가로막는 부대를 빠르게 물리치고 물러나서 전열을 가다듬을 시간이 온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 계속 싸우는 둥 마는 둥 하고 물러나던 원소군이 이번에는 독하게 맞붙기 시작했다.
“으하하하! 서황은 어디 있느냐! 이 고람이 상대해 주마!”
‘지금 싸우는 부대는 고람군인가.’
서황은 굳이 투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신의 위치를 노출시키면 끊임없이 적들이 덤벼 올 것이다. 지금은 전열을 수습해서 빨리 물러나는 게 더 중요했다.
‘당장 한 번의 싸움을 이기는 게 문제가 아니다. 비가 와서 금철기가 달리기 어렵게 되면 자칫 큰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이번 싸움은 운이 따르지 않는구나.’
전장에서 실력만큼 중요한 게 운이다. 설마 음력 1월에 폭우가 쏟아질 것을 누가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큰 공을 세울 자신이 있었기에 더욱 아쉬웠지만 서황은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그런데 조용히 전열을 수습하던 서황의 등 뒤에서 불쑥 한 무리의 군사들이 나타났다.
“서 장군, 여기서 또 보는군.”
“안량.”
원소가 자랑하는 선등군 대장, 안량이었다. 안량은 칼자욱 가득한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웃고 있었다.
“며칠 전에는 실례가 많았다. 이제 마음껏 싸울 수 있겠구나!”
안량은 말을 달려 서황에게 뛰어 들어갔다. 서황은 대부를 단단히 잡고 안량이 찔러 오는 수극을 쳐냈다.
깡!
대부와 수극이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수극을 휘둘러 오는 기세가 얼마 전 싸웠을 때와는 전혀 달랐다.
‘과연, 전력을 다하니 대극군의 문추에게 뒤지지 않는 실력이군.’
서황은 침착하게 손을 놀리며 안량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자신 또한 마초를 제외하면 패한 적이 없는 몸이다. 안량의 무공은 분명 고강했지만 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쉽게 결판을 낼 수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안량은 거구에 어울리지 않게 몸이 날래고 손이 빨랐다. 두 장수는 뒤엉켜 이십여 합을 싸웠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전장에서도 모두의 이목을 끌 만큼 격렬한 싸움이었다.
그때 서황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고람이 안량과 싸우는 서황을 발견했다.
“서황, 네 이놈. 거기 있었느냐!”
“끼어들지 마라, 고람! 이놈은 내 사냥감이다!”
“안량 장군, 거 좋은 건 다 같이 먹읍시다.”
고람은 대도를 휘두르며 서황에게 돌진해 왔다. 그 또한 어지간한 고수인지 서황과 안량이 주고받는 치열한 수 사이에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자신의 대도를 끼워 넣었다.
묵묵히 싸움을 지켜보던 아장 왕평은 고람이 끼어들자 크게 외쳤다.
“감히 승부를 방해하느냐! 장군, 제가 돕겠습니다!”
“오지 마라.”
서황은 크게 대부를 휘둘러 안량과 고람을 떼어 놓고 말을 몰아 몇 발짝 물러났다. 그리고 왕평을 보며 손짓을 했다.
“이곳은 물이 흘러 들어오는 저지대라 오래 머무를수록 불리하다. 자균, 너는 금철기를 이끌고 서쪽 능선을 타라.”
“하지만 장군, 적장이 두 명이나 되지 않습니까?”
“나는 그리 쉽게 당하지 않을 것이다. 걱정하지 말고 이동하라.”
“하오나…….”
“어서 움직여라.”
“큭!”
왕평은 결국 서황에게 군례를 올리고 등을 돌렸다. 왕평이 병사들을 이끌고 서쪽 능선을 향해 달려가자 서황의 주변에는 백여 기의 호위병만 남게 되었다.
“마가군에서 그나마 머리를 쓰는 장수가 서황이라기에 나름 지용을 겸비한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 보니 무모하기가 짝이 없구나. 네놈 혼자서 우리 둘을 당해 낼 셈이냐?”
“설마 너희들 손에 죽겠느냐.”
서황은 안량의 도발을 일축하고 다시 대부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2대 1의 싸움이었지만 서황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땅이 물러지고 시야가 가려지는 폭우 속에서는 금철기도, 강족 기병대도 제힘을 발휘하기 어렵다. 기병 전력을 온존하기 위해 고지대로 이동시키고 그동안 투장을 벌이며 시간을 벌어 볼 참이었다.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후미에 난전에 능한 정예 보병대를 배치했다. 그들이 구원하러 올 때까지 버티면 된다.’
그것이 서황의 계획이었다.
“흠, 이거 보통 놈이 아닌데.”
안량의 표정이 슬슬 짜증스럽게 바뀔 때, 멀리서 접근하는 한 떼의 병마가 접근했다. 하나같이 긴 극을 들고 철갑을 두른 병사들이었다. 그들의 정체를 확인한 고람이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이런 제길! 대극군이다! 안량 장군, 문추 장군이 왔소이다!”
“뭣이? 문추 이놈이 또 어디서 놀다가 공적만 쌓으려고…….”
“우리가 다 잡은 서황을 문추 장군에게 뺏길 수 없소. 빨리 잡읍시다!”
“이게 왜 우리가 잡은 거냐? 내가 잡은 거지.”
안량과 고람은 입으로는 티격태격하지만, 손으로는 절묘하게 합을 맞추기 시작했다. 서황이 상대의 공세가 강해졌다고 느꼈을 때, 어느새 투구로 얼굴을 가린 문추가 전장에 도착했다.
“기다리게 했군. 못 다한 승부를 내기 위해 왔다.”
“3대 1이라. 꽤 곤란해졌군.”
서황은 문추를 보며 태연하게 대꾸하고 병사들에게 수신호를 했다. 서황을 호위하던 백여 기가 일제히 퇴각하기 시작했다. 서황도 대열의 최후미에서 같이 달렸다.
“네 이놈, 감히 도망갈 셈이냐!”
“투장에 셋씩이나 덤비는 주제에 말이 많구나.”
서황은 작은 공에 연연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3대 1이 되어 승산이 사라지자 미련 없이 말머리를 돌렸다.
그때, 서황이 가던 길목에서 한 기가 뛰어나와 쏜살같이 달려왔다. 키가 껑충한 장수였다. 장수는 서황과의 거리가 이십여 장으로 좁혀지자 손에 들고 있던 단창을 던졌다.
퍽!
단창은 화살처럼 빠른 속도로 날아서 서황이 탄 준마의 목을 그대로 관통했다. 치명상을 입은 준마는 사람의 비명 소리 같은 끔찍한 소리와 함께 제 자리에서 굴렀다. 말을 잃은 서황은 그대로 튕겨지 듯 앞으로 날아가 바닥에 떨어졌다.
쿵!
“큭…….”
등으로 떨어져서 치명상은 면했지만, 온몸이 부서지는 듯한 고통이 찾아왔다.
그러나 한순간의 방심이 죽음을 부를 수 있는 전장이다. 서황은 애써 고통을 참고 일어났다. 단창을 던져 자신의 말을 맞춘 키 큰 장수는 어느새 두 번째 창을 꺼내 들고 있었다.
“장합, 적장을 죽이지 마라!”
“왜냐면 내가 죽여야 하니까!”
키 큰 장수, 장합은 고람과 안량의 비명 같은 외침을 뒤로 하고 묵묵히 단창을 들었다. 두 번째 단창을 겨눈 장합과 서황의 눈이 마주쳤다.
“그대가 장합인가. 안량, 문추, 고람에 장합이라. 나 하나를 잡겠다고 많이도 왔군.”
“원 대장군의 뜻이다. 큰일을 도모할 때 적당한 수준이란 없다. 오직 총력을 다할 뿐. 이는 병법의 이치이니 그대도 알고 있겠지.”
“알고 있다. 그러나…….”
서황은 뒤를 흘긋 돌아봤다.
유사시 자신을 구원하러 오기로 한 정예 보병대가 이제야 달려오고 있었다. 분명히 보병이고, 땅바닥은 진흙탕이지만 보병대가 달리는 속도는 마치 기병처럼 빨랐다.
“그대들은 오늘 뜻을 이루지 못하겠군.”
서황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여유가 있었다.
장합은 서황을 구하기 위해 달려오는 보병대를 바라봤다. 투구의 양옆에 흰 덮개를 귀처럼 늘어뜨리고 있어서 식별하기 쉬운 병사들이었다. 무장은 가지각색이었는데 방패와 칼을 든 도순수들이 가장 많았다.
‘달리는 속도를 보니 정예병이군. 그러나 숫자가 고작 일천도 되지 않는다. 서황은 저 정도의 병사들을 믿고 자신감을 보이는 것인가?’
장합의 옆으로 어느새 안량, 문추, 고람이 다가왔다. 하북의 네 기둥, 하북사정주라 불리는 맹장들이 서황 하나를 잡기 위해 전부 나선 것이다. 기세 좋게 쏘아붙인 것은 안량이었다.
“서황, 퇴물이 된 국의 하나 잡았다고 우쭐했더냐? 네놈의 수급은 하북사정주의 필두인 이 안량이 거둘 테니 그렇게 알아라.”
“그런데 저놈들은 뭐지?”
고람은 눈을 가늘게 뜨고 멀리서 다가오는 보병대를 쳐다봤다. 묵묵히 말이 없던 문추가 대꾸했다.
“백이병(白耳兵)이다. 유비의 수하가 오나 보군.”
“뭣이?”
“뭐라?”
유비는 휘하의 정예병을 뽑아 흰 투구 가리개를 쓰게 하고 백이병이라 명했다. 이들이 서주에서 조조군을 격퇴하며 쌓은 무용담은 하북에도 전설처럼 퍼져 있었다.
문제는 백이병과 서황의 호위병을 합쳐도 일천 남짓에 불과하고, 하북사정주가 이끄는 원소군은 일만에 달한다는 것이었다.
“잠깐, 마가군 사이에 끼어 있는 유비군 부대라… 그렇다면 이거 생각지도 못한 대어가 또 한 마리 걸렸나?”
안량의 눈이 반짝 빛났다.
잠시 후, 서황을 구원하기 위해 백이병이 도착했다. 진흙 길을 달려오느라 다들 엉망이 되어 있었지만 하나같이 눈빛이 살아 있었다.
백이병의 선두에 선 장수는 지친 말에서 내렸다. 그는 9척의 장신에 배까지 내려오는 긴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투구 대신 녹색 두건만을 쓰고 있어서 짙은 눈썹과 붉은 얼굴이 드러났다. 빗속에서도 똑똑히 보이는 녹색 전포가 휘날렸다.
장수는 안량, 문추, 장합, 고람의 앞으로 뚜벅뚜벅 나아갔다. 안량은 그런 그를 보고 얼굴을 한껏 일그러뜨리며 웃음을 지었다.
“오호, 그 수염을 보아하니 서주의 용장이라는 관우 장군이 아니신가? 마초에게 패해 계집아이처럼 소리를 지르며 항복했다는 소문이 이미 하북에 자자하네.”
“좌전에 이르기를.”
관우는 안량, 문추, 장합, 고람을 차례대로 응시한 후 지그시 눈을 내리깔았다.
“남에게 무례를 많이 저지르면 반드시 자신에게 되돌아온다(多行無禮 必自及也) 하였느니라. 너희들은 전장의 법도를 지키지 않았으니 나를 원망치 말거라.”
쿵.
관우가 82근 청룡도로 땅을 짚었다.
마치 그것이 신호인 것처럼 빗줄기가 더욱 굵어졌다. 말을 탄 하북의 네 장수와 그 앞에 홀로 땅을 딛고 선 관우의 어깨 위로 비가 세차게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