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마초연의-167화 (167/306)

167화. 개전

건안 3년(198년), 1월 1일.

황하 남쪽의 백마현에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원소군이 황하를 넘는다면 이곳이다. 경계에 흐트러짐이 없도록 하라.”

백마의 수비대장 유연은 늦은 밤까지 군영을 돌며 병사들의 경계 상태를 점검하고 있었다.

그가 주둔한 백마는 조조와 원소가 대치하는 최전선이다. 날씨가 좋을 때 망루에 오르면 황하 너머로 원소군 병사들이 보일 만큼의 거리다.

원소군이 황하를 넘어 첫 공격을 개시하는 곳은 이곳의 백마진이나 서쪽의 연진 나루가 될 것이다. 그중에서도 연진보다는 백마진일 확률이 높았다. 막 징집된 신병들도 짐작하고 있는 사실이었으니 유연의 군영에는 짙은 불안감이 깔려 있었다.

‘이제 곧 겨울이 끝난다. 봄이 오면 원소가 공격을 개시하거나, 아니면 사공이 황하를 넘어 원소를 선제공격할 것이다.’

음력 2월이면 날씨가 풀리니 앞으로 남은 시간은 한 달. 유연은 토성과 목책을 보강할 생각에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때, 백마 토성의 성벽 위를 순찰하던 유연의 눈에 낯선 신형이 들어왔다.

“어느 부대의 누구냐?”

성벽 위에는 평복 차림의 거한이 서 있었다. 유연의 말을 들은 거한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온통 칼자욱으로 뒤덮인 얼굴을 한 거한이 유연을 보며 입꼬리를 한껏 올리고 웃었다.

“선등군 대장, 안량.”

“뭣이…….”

선등군이라면 가장 먼저 성벽을 오른다는 원소의 정예부대다. 그리고 안량이라면 원소군의 선봉을 놓친 적이 없는 하북의 맹장이다. 유연은 이를 악물고 허리춤의 칼을 뽑아 들었다.

그러나 안량의 돌진이 더 빨랐다.

퍽!

안량의 수극이 유연의 배를 꿰뚫었다. 거구의 안량이 내닫는 속도는 말처럼 빨랐다. 유연은 손을 써 볼 새도 없이 안량의 수극에 배를 꿰인 신세가 되었다.

“끅…….”

칼을 쥔 팔뚝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유연의 눈에 토성에 걸린 갈고리와 밧줄들이 들어왔다. 안량이 이끄는 검은 옷의 병사들이 밧줄을 타고 백마의 토성을 오르고 있었다.

“백마의 수비대장이라는 게 겨우 이 정도인가. 어쨌든 이놈을 잡았으니 제일 전공은 내 몫이군.”

안량은 유연의 시신에서 수극을 뽑아낸 뒤, 침을 퉤 뱉었다. 선등군 병사들이 야음을 틈타 속속 토성의 성벽 위로 올랐다.

“성벽을 빠르게 제압하라. 우리 말고도 군공을 노리는 놈들이 많으니.”

안량은 그 말을 남기고 성벽 아래를 내려다봤다. 육중한 철갑을 두르고 거대한 낫처럼 생긴 대극을 든 보병대가 어느새 백마진을 건너 토성의 아래로 접근하고 있었다. 그 선두에는 전신은 물론 말에까지 철갑을 두르고 1장이 넘는 대극을 어깨에 멘 장수가 서 있었다.

“이번에도 내게 전공을 뺏기겠구나, 문추.”

안량이 먼발치의 문추를 향해 씩 웃자 입 주위의 칼자욱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문추는 얼굴을 온통 가리는 투구를 쓰고 있어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 * *

온 천하가 새해를 맞는 날, 안량과 문추의 백마 습격으로 전쟁이 시작되었다.

“백마성이 하룻밤 사이 원소군의 손에 떨어지고 유연이 전사했습니다. 원소 휘하의 상장 안량과 문추가 선봉에 섰다고 합니다.”

숭산, 조조의 군막.

모사 정욱이 전황에 대해 보고하자 상석에 앉은 조조가 인상을 찌푸렸다.

“안량과 문추가 동시에 밀고 들어왔나. 본초(원소의 자)가 초반부터 강수를 두는군.”

“뿐만이 아닙니다. 그 뒤를 받치기 위해 계교 전투의 승장, 국의도 백마에 합류했습니다.”

국의는 공손찬의 기병대를 계교에서 격파한 장수다. 원소 휘하의 장수들 중 전공을 따지자면 단연 첫손에 꼽을 만한 거물이다.

“안량에 문추에 국의라. 본초답지 않게 초반부터 과감한데, 중덕(정욱의 자) 자네 생각은 어떤가?”

“초반에 기세를 잡아서 최대한 황하 이남에 전선을 형성하겠다는 뜻이 아닐까 합니다.”

“일리가 있네.”

정욱의 말에 조조도 고개를 끄덕였다.

조조와 마초의 10만 연합군과 원소의 20만 대군이 벌이는 전쟁이다. 하루아침에 승패가 날 리 없다.

그럼에도 초반부터 맹공을 퍼붓는다는 것은 최대한 전선을 남쪽으로 밀어붙이겠다는 것이다. 황하를 끼고 싸우는 지리적 이점을 조조에게 주지 않겠다는 뜻이라는 게 정욱의 생각이었다.

“우리 쪽에서도 걸맞은 장수를 뽑아 응전해야겠지. 묘재(하후연의 자).”

“예, 사공.”

“그대가 선봉에 서서 원소군을 요격하라. 자효(조인의 자)가 후방에서 묘재의 뒤를 받친다.”

“존명!”

“존명.”

하후연과 조인이 공수하며 대답했다. 조조는 정욱과 하후연, 조인만을 남게 하고 군의를 파했다.

군막에 조조와 세 사람만이 남았다. 조조는 장난기 넘치는 눈빛으로 하후연을 보며 말했다.

“묘재, 어떻게 싸울 생각이냐?”

“그야 뻔하지 않습니까? 소장이 귀속군을 휘몰아 안량이든, 문추든 다 박살을 내겠습니다.”

“으흠, 그래. 너는 우직하고 용감하니까, 네가 간다고 하면 다들 그럴 것이라 생각하겠지.”

“사공께서는 무슨 다른 생각이 있으십니까?”

하후연이 묻자 조조가 껄껄 웃었다.

“본초 이놈이 머리를 쓰는구나. 원소군은 단일한 세력이고, 우리는 마초와의 연합군이다. 너는 연합군의 가장 큰 단점이 뭐라고 생각하느냐?”

“연합군의 단점이라… 소장은 미욱하여 잘 모르겠습니다.”

“연합군은 공세를 취할 때는 아무 문제가 없다. 허나 수세에 몰리면 모든 것이 다 문제가 되지.”

연합이란 결국 이득을 위해 뭉친 느슨한 집단. 승전에 대한 기대감이 연합을 뒷받침할 때는 모두가 한마음으로 싸운다. 그러나 패전에 대한 불안감이 깔리기 시작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상대적으로 더 적은 손실을 보기 위한 눈치 싸움이 시작된다. 외부의 적보다 같은 연합원과의 득실을 비교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되면 연합은 와해되는 것이다. 조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사공께서는 원본초가 초반부터 강한 공세를 펼치는 목적이 따로 있다고 보시는군요. 우리와 마가군의 연합을 흔드는 것이 진짜 목적이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황하의 나루터? 그까짓 것들은 몇 개라도 줘 버리면 그만이다. 어차피 한두 달에 끝날 전쟁이 아니야. 우리는 황하 이남의 적당한 곳에서 원소군과 대치할 것이다.”

조조는 그렇게 말하며 벽에 걸린 지도로 다가가 한 점을 짚었다.

“이곳, 관도가 적절하겠군. 자효, 너는 이제부터 관도에 주둔하며 여러 개의 요새를 쌓아라. 이곳이 원소와 대치하는 전선이 될 것이니 너의 임무가 참으로 막중하다.”

“알겠습니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조인. 그러나 하후연은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은 듯 조조를 보며 물었다.

“사공, 그러나 관도는 너무 남쪽이 아닙니까? 원소가 관도까지 오려면 황하뿐 아니라 양구수와 제수까지 건너야 합니다. 세 개의 강을 원소에게 내 줄 생각이십니까?”

하후연의 표정이 자못 심각했다. 조조에게는 여전히 장난기가 넘쳤다.

“묘재, 원소가 강을 세 개나 건넌 뒤 오랫동안 대치를 하면 그 뒤에는 어떻게 되겠느냐?”

“그야…….”

“보급선이 길게 늘어진다. 원소의 군량고도 황하 이남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거기까지 말하자 하후연의 눈이 번쩍 띄었다.

“사공께서는 그때 강수를 두시려는 겁니까.”

“그렇다. 원소가 황하 이남에 군량고를 뒀을 때, 그리고 계속 이득을 봐서 우리가 선제 공격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게 됐을 때, 내 수는 그때 보여 줄 것이다.”

정욱과 조인과 하후돈은 서로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공께서는 실로 하늘이 낸 분이십니다.”

“그런 칭찬은 내 시를 읽고 나서 하거라. 병법이야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일 뿐이니.”

조조는 아무렇지 않은 듯 한껏 자기 자랑을 한 뒤 조인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러니 자효, 너의 역할이 참으로 중요하다. 관도에 십여 개의 요새를 쌓아라. 원소의 공세를 몇 달이고 견뎌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묘재, 이제 너의 역할을 알겠느냐? 짐짓 강맹한 기세로 백마로 쳐들어가 적당히 이득을 취할 수 있으면 취하라. 그러나 절대 무리하지 말고 상대의 기세가 만만치 않으면 바로 빠져서 손실을 최소화하라.”

“그리하겠습니다.”

조인과 하후연이 각각의 지시를 받은 후, 정욱이 조조에게 물었다.

“사공, 그러면 원소군의 강수를 받아내는 역할은…….”

“우리의 연합 세력인 마가군이 하게 되겠지. 서량의 젊은 사자가 고생을 좀 하겠군.”

조조는 마초를 떠올리며 웃음을 지었다.

* * *

숭산, 마가군의 군막.

원소군의 안량, 문추, 국의가 황하를 넘어 백마를 함락시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원소가 초반부터 강수를 뒀습니다. 일견 황하 이남에 전선을 형성하겠다는 의도로 보일 수 있지만, 진짜 목적은 우리를 초반부터 수세에 몰리게 해서 조조와의 연합에 균열을 내는 것입니다.”

순유가 설명하자 마초는 쓴웃음을 지었다.

“내 생각도 순 별가의 생각과 같습니다. 연합군이라는 게 공세를 취할 때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수세에 몰렸을 때는 모든 것이 다 문제가 되니까요. 원소는 반동탁연합군의 맹주였던 인물이니 이런 이치를 꿰뚫어 보고 있을 겁니다. 그러나…….”

‘누구는 연합군 맹주 안 해 본 줄 알아?’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마초 자신도 지난 생에서 서량 10군의 맹주로서 조조와 싸워 본 경험이 있는 것이다. 중요한 건 원소의 속내를 순유가 간파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쨌든 우리에게 순 별가가 있으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이렇게 적의 계략을 간파하고 있으니 원소가 꾀를 쓴다 한들 걱정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과찬이십니다.”

순유는 그답게 짧은 대답으로 겸양을 표했다. 마초는 그런 순유를 보니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떠올랐다.

‘원소군의 저수나 전풍도 만만치 않은 인물들이고, 무엇보다 원소 본인이 모략에 능하다. 그러나 순공달은 관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군사. 이 사람이 내게 있는 것이 참으로 다행이다.’

문제는 원소의 이런 속내를 조조는 짐작하느냐는 것이다.

“조맹덕은 이런 이치를 짐작하고 있을까요? 순 별가는 어찌 보십니까?”

“조조와 원소는 반동탁연합군의 일원으로 함께 싸웠던 사이입니다. 아마 조맹덕 또한 원소의 목적을 짐작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마도 원소가 두는 강수를 슬쩍 피해 가려 할 것입니다. 그 강수를 받아내는 역할은 우리에게 맡기고 말이지요. 그러나 어쨌든 전쟁이 시작되었으니 우리도 백마에 군사를 보내야 합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순유가 묻자 모두의 시선이 마초에게 집중되었다.

마초는 좌중을 돌아보며 씩 웃었다. 긴 전쟁의 첫 번째 전투에 대비해서 미리 생각해 둔 인선이 있었다.

“하북의 상장이 상대라면 우리는 관서의 상장을 내보내야겠지. 서공명을 보낼까 하오.”

마가군의 양 날개로 이름이 높은 방덕과 서황, 그중 마초의 선택은 서황이었다.

서황이 마초의 앞으로 나와 두 손을 모았다.

“소주공, 있는 힘을 다하여 적을 격파하겠습니다.”

“그대가 선봉의 임무를 맡아 고생해 주게. 데려가고 싶은 부장이 있는가?”

“조조군에서는 하후연이 출진한다고 하니, 우리도 그만큼의 기동력을 갖춘 부대가 필요합니다. 철리길 두령의 강족 기병대가 함께 간다면 좋겠습니다.”

“옳은 말일세. 철리길 두령의 생각은 어떻소?”

“우리가 싸움터를 마다하는 것을 보셨습니까.”

철리길이 굳은 의지를 드러냈다. 마초는 고개를 끄덕이고 서황에게 내쳐 물었다.

“아마도 우리 둘의 뜻이 크게 다르지 않을 듯하네. 어떻게 편성하면 좋을지 그대의 의견을 말해 보게.”

“부대 운영을 맡길 만한 참군으로는 등지를 청합니다. 소장의 곁을 지킬 만한 아장으로는 왕평이 적합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서황이 생각한 인선은 마초가 생각하던 인선과 완전히 일치했다. 마초는 크게 웃었다.

“하하하, 그대의 생각이 내 생각과 완전히 같소! 그렇게 결정하겠소.”

마초는 그대로 군의를 파했다. 제장들이 나간 후 군막에는 마초와 순유, 그리고 선봉대로 결정된 서황과 철리길, 등지, 왕평 등이 남았다.

“원소는 강수를 뒀고, 조조는 그것을 슬쩍 피해 가려고 할 것이다. 아마 하후연은 싸우는 척 변죽만 울리고 진짜 위험한 싸움에는 뛰어들지 않을 것이다. 그대들은 이것을 명심하여 하후연을 믿다 낭패를 보는 일이 없도록 하라.”

서황이 힘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까지 전부 물러간 후, 군막에 혼자 남은 마초는 원소와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벌써 5년 전인가. 그때는 그자가 내 덕을 톡톡히 봤지.”

마초가 상산 전투에서 흑산적을 대파한 덕분에 원소는 별 문제 없이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 골칫거리였던 유주의 공손찬은 마초의 개입으로 인해 원소의 객장이 된 여포의 힘을 빌려 손쉽게 제압했다.

그 원소와의 싸움이 이제 시작되었다. 원소는 첫수부터 강수를 뒀다. 여기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그렇다면 나는 초강수를 둔다.”

마초는 벽에 걸린 전장의 지도를 바라보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계획대로 된다면 서황이 이끄는 선봉대는 초강수가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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