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마초연의-166화 (166/306)

166화. 너의 때를 기다려라

마철의 참전 여부는 진즉 마등이 결정해 뒀을 것이다. 그런데 황권은 마철의 참전 여부를 굳이 마초에게 묻고 있었다. 그간의 사정이 짐작이 갔다.

황권을 보며 묻는 마초의 얼굴에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이 묻어났다.

“관중도독께서 참전시키지 말라 하시던가?”

“…그렇습니다.”

평소에 단호하고 솔직한 황권이 어딘가 우물거렸다. 마초는 손사래를 쳤다.

“괜찮으니 소상히 말해 보시오.”

“하오나 복파장군, 이는 집안의 일이니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함부로 논할 것은 아닌 듯합니다. 나중에 따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철도 거기장군부의 교위가 아닌가. 이는 공무에 관한 내용이니 집안 사정에 우선하는 것이오. 망설이지 말고 이야기하시오.”

황권은 낮게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알겠습니다. 복파장군께서 원술을 토벌하시는 동안 홍농 일대에서는 백파적 장백기라는 자가 준동했습니다. 성의 장군과 엄안 교위가 토벌하고 왔는데, 이때 삼공자도 같이 종군했었습니다.”

“철의 첫 출진이었겠군.”

“그렇습니다.”

문제는 거기서 일어났다.

첫 출진으로는 썩 적절한 전투였다. 관내에서 백파적을 토벌하는 것이고, 총지휘를 맡은 성의는 서량의 백전노장이자 마철의 무예 스승이기도 하다. 혹시나 실수가 없도록 빈틈없는 살림꾼 엄안까지 붙여 준 걸로 봐서 마등이 셋째 아들의 첫 출진을 상당히 배려한 모양새였다.

그러나 마철은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난전에서 몸이 굳어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고?”

“그렇습니다. 무공 자체는 어지간히 성취가 있었다고 하는데, 막상 실전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떨고 있었다고 합니다. 삼공자가 지휘를 제대로 하지 못하니 거느린 부곡의 절반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엄안 교위가 제때 구하지 않았으면 아마도…….”

황권은 거기까지 말하고 한숨을 쉬었다.

마초는 고민에 빠졌다.

‘철은 지난 생에서도 장백기 토벌이 첫 출진이었지. 그때는 훌륭하게 해냈다. 문제는… 그게 25살 때였다는 것이다.’

지금 마철의 나이는 18살이다. 7년이나 빨리 전장에 나가게 된 것이다.

‘나 때문이다. 지나치게 빨리 관서를 평정하고 홍농까지 세력권이 닿는 바람에 장백기 토벌도 앞당겨지게 되었다. 철이 충분히 성장하지 못한 상태에서 실전을 치르고 곤욕을 겪게 되었군.’

마초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하는 수 없지. 관중도독께서 결정하신 일이니 그렇게 하도록 합시다.”

“복파장군, 하지만… 이번 원정에 관중도독께서는 나서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근거지를 지킬 사람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삼공자도 앞으로 군문의 일을 배워야 하는데 어떻게든 원정에 데려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장에 내보내기 저어되시면 복파장군의 곁에 참모로 두거나, 아니면 후방의 치중대에 배속시켜서 군무를 익히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황권의 의견도 일리가 있었다. 마철이 한 번 실패했다고 계속 배제한다면 영영 경험을 쌓을 기회를 가질 수 없다. 마등이 격노했다고는 하지만 마초가 슬쩍 비전투 보직으로 데려가는 것까지는 모르는 척 넘어갈 것이다.

하지만 마초는 고개를 저었다.

“전장에는 경험을 쌓으려는 자가 아니라 승리하려는 자가 나가는 것이오. 한 번 기회를 잡지 못했으면 늦더라도 다음 기회를 기다리는 게 맞고, 이는 수장의 아들이라도 예외가 될 수 없소. 철에게는 내가 잘 얘기하리다.”

결국 마철은 원정에 종군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 * *

마초는 오랜만에 본가에 들렀다. 마등은 공무가 바빠 관중도독부에서 기거하느라 집에 없었지만 두 누이동생이 있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오라비를 맞이한 것은 후원에서 무예 수련에 한창인 열다섯 살의 마수였다.

“뭐야, 오라버니잖아.”

처음 회귀했을 때만 해도 붙임성 있고 쾌활하던 마수는 10대 중반이 되자 갑자기 세상 모두에게 가시가 돋쳤다. 그러나 50년의 인생 경험을 가진 마초다. 사춘기에 접어든 누이의 반항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껄껄 웃을 뿐이었다.

“으하하하, 이 녀석아. 오라버니를 봤으면 공손히 인사를 해야지.”

“아, 늙은이 말투. 징그러우니 저리 가요.”

마수는 투덜거리며 자리를 비켰지만, 마초는 그런 누이를 그저 흐뭇하게 바라봤다.

지난 생에서 한수의 습격이 있었을 때 불의의 사고로 죽었던 누이들이다. 한수의 습격을 미리 예측하고 막아내서 죽을 누이들을 살렸으니, 마초의 눈에는 마수가 아무리 반항을 하더라도 예쁘게만 보였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살아서 겪을 수 있다는 게 축복인 것이다.

“오라버니, 오셨습니까?”

뒤이어 공손하게 인사하는 것은 열네 살이 된 마화였다. 마화는 말 타고 칼 휘두르는 일에만 푹 빠져 있는 언니 마수와는 달리 학문에 열중했다. 이미 고금의 서책에 이미 통달해서 젊은 관리들과 토론을 하면 관리들이 한 수 배울 정도였는데, 최근에는 그마저 시들해졌는지 요리와 비단 짓는 일을 배우고 있었다. 마화는 가사에도 재능이 있어서 벌써 두세 살 위의 사족 처녀들보다 낫다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러니 왈가닥인 언니 마수가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나 비교를 당할지는 보지 않아도 알 만한 일이다. 마수에게 가시가 돋쳐 가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리라.

마초는 마화를 보며 씩 웃었다.

“화는 갈수록 요조숙녀가 되어 가는구나. 이것 참, 수가 여러모로 고생이 많겠군.”

“음… 언니에게는 언니만의 고충이 있답니다. 저렇게 무예를 사랑하는데 사내의 몸을 갖지 못했으니 무공이 대성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오라버니는 사내고 또 절세 영웅이시니 잘 모르시겠지만, 이제 곧 여인의 삶을 받아들여야 하는 때가 올 테니까요.”

마화가 쓸쓸한 눈으로 말하는 ‘여인의 삶을 받아들여야 하는 때’란 결혼을 말한다. 여인이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시대다. 마수나 마화처럼 지위가 높고 재능이 있는 여인이라도 어떻게든 혼례를 치르고 어떤 남자의 처나 첩이 되지 않으면 사회의 일부가 될 수 없는 그런 시대였던 것이다.

마초는 겪어 본 적이 없는 고충이었지만, 주변의 여인들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마초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더라도 너무 슬퍼하지는 말거라. 알다시피 아버지는 혼맥 욕심을 부리는 분이 아니니 무리한 혼담을 넣지는 않으실 것이다. 너희들이 원한다면 앞으로 십 년, 아니 그 이상이라도 하고 싶은 일을 더 하거라. 이 오라비가 잘 말해 보겠다.”

“고맙습니다, 오라버니. 그래서 말인데…….”

“무엇이냐? 말해 보거라.”

“혹시…….”

“어허, 뜸 들이지 말고 말하래도.”

“허도의 조자룡 장군은… 혼인 생각이 없으신 거죠?”

마초는 마화를 보고 기가 막혀서 뒷목을 잡았다.

“그건 왜 묻느냐? 혹시 얼굴도 모르는 조자룡에게 혼담이라도 넣어 달라고 할 셈이냐? 아서라, 아직 네 나이가 열넷에 불과하지 않느냐?”

“제가 설마 얼굴도 모르는 천 리 밖의 무장을 두고 그런 생각을 품겠습니까? 요즘 어머니께서 자꾸 사족 규수들과 어울리게 하시는데, 그 언니들이 하나같이 조자룡 장군을 흠모하더군요. 오라버니가 조자룡 장군의 의형제니 어떤 사람인지 좀 알아봐 달라고 부탁을 받았습니다.”

“이상한 여자들이구만. 그런데 어쩌다 이곳 장안까지 조자룡의 소문이 퍼지게 된 거냐?”

“요즘 저잣거리에서 이야기꾼들이 조자룡 장군의 이야기를 많이 공연합니다. 이야기꾼들이 하도 멋지게 꾸며 주다 보니 장안의 처녀들 중에 조자룡 장군을 흠모하지 않는 이를 찾기가 더 어렵습니다.”

마화는 장안의 최신 유행인 조자룡의 무용담에 대해 한참 설명했다. 이야기꾼들이 공연한다는 무용담은 3할의 사실에 7할의 과장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중 3할의 사실은 의외로 정교해서 조자룡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는 내용들이 많이 포함돼 있었다.

그러니 이야기를 퍼뜨린 장본인이 누구인지는 뻔한 일이다.

“나관중, 이놈이 찾으라는 소금 광산은 안 찾고 엉뚱한 짓을 하고 있었구나!”

나관중은 관우, 조운, 제갈량이 관계되면 이성을 잃는다. 그러니 그냥 내버려 두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초는 마화와 친하다는 사족 처녀들이 좋아할 만한 조운의 사소한 신변잡기 몇 가지를 알려줬다. 그 정도면 누이동생의 면이 설 것이다.

그렇게 마수와 마화와의 회포를 푼 후, 마초는 아우 마철과 마주 앉았다.

“형님.”

마철은 머리를 깊이 숙여 마초에게 인사했다.

관중도독 마등의 삼남, 마철은 외모에서 강족 혈통의 특징이 나타났다. 당당한 체격에 높은 콧대와 움푹 들어간 눈두덩, 선명한 푸른 빛 눈동자. 외모만 보면 영락없는 한인이었던 둘째 마휴는 물론 첫째 마초보다도 더욱 강족 혼혈의 특징이 강하게 나타났다.

마초는 오랜만에 만난 아우 마철을 웃는 얼굴로 위로했다.

“이야기는 들었다. 홍농에서 꽤 고생했다고?”

“면목이 없습니다. 형님과 아버지를 실망시켜 드렸습니다.”

마철은 얕은 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어지간히 주눅이 들었는지 한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이기고 지는 것은 군문에서 늘 있는 일이다. 나 또한 나보다 강한 상대를 만나서 져서는 안 되는 싸움을 진 적이 있지 않느냐.”

“강하고 약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저는· ··겁을 먹어서 제대로 싸우지도 못했습니다.”

전투가 시작되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손발이 떨린다.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해서 연습한 초식이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형님도, 돌아가신 둘째 형님도 제 나이 때, 이미 훌륭한 무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마가의 사내로서 자격이 없나 봅니다.”

그때를 회상하는 마철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마초는 낙심한 아우를 향해 당겨 앉았다.

“사람마다 다 자신이 타고난 때가 다른 법이다. 너에게 아직 그때가 오지 않았을 뿐이지. 패왕 항우는 서른도 되지 않아 때를 만나 뜻을 펼쳤으나 결국 악명만을 남겼고, 태공망 여상은 늙도록 무위도식하다 칠십에 비로소 때를 만나 천하를 평안케 하지 않았더냐?”

지난 생에서 마초 자신이 만났던 때는 30대 중반이었다. 서른여섯의 마초는 서량 10군의 맹주가 되어 중원 최강의 세력을 가진 조조에게 도전했고, 패했다.

너무 빨랐던 것일까, 너무 늦었던 것일까.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곧 너의 때를 만날 것이다. 그러니 땅을 보지 말고 고개를 들어라.”

“형님···….”

“철, 네가 임기응변은 떨어지지만, 우직하게 혼자 하는 일은 곧잘 하지 않느냐. 난전은 임기응변이 중요하니 네가 썩 잘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러나 천하에 필요한 것은 난전에 능한 무장들만이 아니다. 남들의 말에 신경 쓰지 말고 네가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거라.”

셋째 마철은 진중하고 부지런하다. 그러니 언젠가 훌륭하게 성장할 것이다. 다만 아직 그 때가 오지 않은 것뿐이다.

마초는 따뜻한 말투로 마철을 위로했다.

“조급할 필요 없다. 이 형은 운이 좋아서 때를 일찍 만났으니 나가서 네 몫까지 싸우고 오마. 너는 너의 때가 왔을 때를 기다리거라.”

“아버지도, 어머니도, 방 장군도 제게 실망했을 겁니다. 형님은 제게서 뭘 보셨길래 제게도 때가 올 거라고 보시는 겁니까?”

“시끄럽구나. 괜히 복잡하게 머리 굴리지 말고 신위천장군 마초가 하는 말이니 그냥 믿어라. 아무렴 내가 허튼소리를 하겠느냐?”

마초는 아우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나는 미래를 본 적이 있다. 너는 훌륭한 사내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줄 알고 흔들리지 마라.”

마철은 한참 동안 마초를 바라봤다. 마초의 믿음은 굳건해서 눈빛이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마철은 그제야 한숨을 쉬었다. 땅이 꺼지는 것 같은 긴 한숨이었다. 억눌렸던 한숨을 토해 놓으니 뭔가 빠져나간 것처럼 몸이 후련하게 느껴졌다.

* * *

후한 건안 2년(197년), 12월.

누구도 개전의 선언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 전쟁이 시작될지 모두가 알고 있었다.

마초가 이끄는 5만의 마가군이 함곡관을 지나 동쪽으로 향했다. 방덕과 서황, 장료와 감녕, 순유와 황권, 이감과 등지, 마대와 왕평, 철리길과 월길, 그리고 나관중 등 마가군의 주력이 전부 출동했다. 이들은 재건 공사가 한창인 낙양에 집결해서 숨을 고른 후 숭산으로 향했다.

조조가 이끄는 사공부의 5만 군사도 허도를 나섰다. 현재의 군량 사정에서 동원할 수 있는 최대한의 병력이었다. 조조가 자랑하는 맹장들은 수춘을 진수하는 하후돈을 제외하고 전원이 동원되었다. 허도를 나선 조조군은 창검을 번뜩이며 숭산으로 향했다.

관동과 관서의 10만 대군이 원소와의 싸움을 위해 숭산에 집결한 것이다.

그리고 업성.

“하북의 용장과 강병들이여.”

성벽 아래에 집결한 대군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대장군 원소가 성벽 위에 나타난 것이다. 금빛 갑주를 갖춰 입은 원소는 투구를 벗고 잘생긴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일생일대의 성공을 눈앞에 둔 자 특유의 자신감이 넘치고 있었다.

“조가와 마가가 허수아비 천자를 끼고 감히 제후들을 호령하며 천하를 어지럽힌 지 여러 해. 드디어 우리가 썩은 것을 바로잡고 천하를 평안케 할 때가 왔다.”

원소가 드러낸 의지는 들불처럼 군사들에게 번졌다. 업성의 성벽 아래 모인 군사들은 저마다 필승의 각오와 함께 주먹을 불끈 쥐었다.

기주와 유주, 청주, 병주.

거의 피를 흘리지 않고 하북 4주를 제패했다. 그런 원소군의 동원력은 중원의 조조와 관서의 마등을 아득히 웃돌고 있었다.

“우리는 이제 황하를 넘는다. 20만의 대군으로 조조와 마초를 단숨에 짓밟고 허도로 진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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