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일렁이는 영웅들 (1)
허도.
서찰을 다 읽은 조조는 고개를 들어 앞을 봤다. 병졸들이 사공부의 화단을 꾸미고 있었다. 작업을 지휘하는 것은 건무장군 하후돈이었다.
“이놈들아, 똑바로 줄을 맞춰 심지 못해. 내일 사공께서 사열하신단 말이다.”
“예이, 예이.”
병졸들은 건성건성 대답하며 줄을 맞춰서 꽃을 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니 조조도 기가 막혔다.
“…내일 사열하러 온다는 사공이라는 사람이 혹시 나냐?”
“그렇소, 맹덕 형님.”
“아니, 그게 무슨 헛소리야? 내가 지금 여기 이렇게 있는데 내일 사열은 왜 준비해?”
“오늘은 사공으로 온 게 아니라 건무장군 하후돈의 손님으로 온 거 아니오? 손님이면 손님답게 조용히 좀 계시오. 일각이면 작업이 끝나니까 그때, 형님 상대를 해 드리리다. 야 이놈들아, 서두르지 못해!”
한참을 그렇게 병사들을 닥달한 하후돈은 작업이 마무리될 때쯤 손수레 하나를 끌고 와서 오장에게 넘겼다. 수레에는 큰 독이 두 동이 실려 있었다.
“한 동이는 술이고 한 동이는 고기다. 고생들 했으니 나눠 먹어라. 저잣거리를 잘 찾아보면 오수전이 통하는 가게가 있을 테니 용돈이나 좀 쓰고.”
그렇게 말하며 동전까지 몇 닢 쥐여 주니 병사들은 연신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하며 물러갔다. 하후돈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 조조의 옆에 걸터앉았다.
“형님이 어쩐 일로 오셨소? 군문의 살림은 이 하후돈이 어련히 알아서 하고 있는데.”
“원양(하후돈의 자). 묘재(하후연의 자)에게서 서신이 왔다.”
“뭐랍니까?”
“마초가 수춘성을 얻었다는구나. 약속한 첫날, 관우와 단둘이 무예를 겨뤘고 마초가 이겨서 관우가 항복했다고 한다. 천자가 조서까지 내렸으니 관우는 이제 조정의 편장군이다. 그리고 당분간 마초를 위해 움직이겠지.”
“어허…….”
하후돈은 혀를 찼다. 조조가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마초를 잘못 본 듯하다.”
“으음? 형님은 애초부터 마초를 높게 보지 않았소? 20년 일찍 태어났으면 원본초나 형님을 앞서갔을 수도 있다면서요?”
“그놈은 그 정도가 아니다. 지금도 천하에서 가장 위험한 놈이다.”
마초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하던 조조다. 그러나 이제는 조조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져 있었다.
“으흠, 무예 때문이오? 관우를 이긴 게 진짜라면 마초가 천하제일인이나 마찬가지겠지만…뭔가 좀 석연찮은데 말이오. 관우가 그렇게 허망하게 질 놈이 아닌데?”
“놈이 힘을 썼든 꾀를 썼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관우를 휘하에 뒀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는가?”
그런 그릇을 가진 자가 천하에 또 있을 것 같은가.
조조는 다시 하후돈을 향해 말했다.
“원양.”
“예, 형님.”
“내년에는 원소와 큰 싸움이 있을 것이다. 그 싸움이 끝나면 마초를 친다.”
“알겠습니다.”
“묘재와 자효, 그리고 다른 장수들은 원소와의 싸움에 동원할 것이다. 너는 새롭게 우리 땅이 된 수춘성의 수비를 맡아라. 그곳에서 훗날 마초를 칠 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리하지요. 그런데 마초가 수춘성의 재보를 모두 털어 갔다니 휑하게 비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뭔가를 새롭게 만들기 좋은 상황이지. 유능한 부장을 붙여 줄 테니 그곳에서 호표기를 키워라. 지금 천 명 정도인 호표기를 앞으로 삼천까지 늘린다. 그들이 나중에 마초를 치는 칼이 될 것이다.”
“뭐 얼마나 유능한 부장을 붙여 주시려고… 그보다 형님, 호표기는 천하 용장을 잡기 위해 만든 부대입니다. 호표기 없이 원소와 싸우시려는 겁니까?”
“원소의 밑에 천하 용장이 누가 있겠느냐?”
“그야…….”
지금 천하 용장이라고 할 만한 무장은 네 명.
관우는 마초의 휘하로 들어갔다.
장비는 유비와 함께 사라져서 어디 있는지 모르는 상태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천하 용장, 마초는 우리의 연합군이다.”
“하지만 여포가 있지 않습니까? 원소는 틀림없이 여포를 앞세워 진격해 올 것입니다.”
“여포가 나타나면 누가 가장 먼저 뛰어나가겠느냐?”
“그야… 마초가 상대하겠군요.”
“그래, 여포에게 아우를 잃어 원한이 깊다고 하니 마초가 여포를 상대할 것이다. 그 둘이 싸우면 하나는 죽고 다른 하나도 크게 상할 테니, 이번 싸움에서는 천하 용장이 만들어 내는 변수보다 다른 게 더 중요하다.”
그것은 하북을 차지한 원소의 압도적인 물량을 견뎌 내는 것이다. 소수 정예끼리의 싸움이 아닌 대국적인 전략이 승부를 가를 것이다. 조조의 생각은 그랬다.
“알겠습니다. 원소와 싸우는 한편으로 우리는 호표기를 늘려서…….”
“원소를 꺾은 후, 마초를 잡는다.”
조조는 하후돈에게 계획을 설명하고 일어났다.
십상시와 동탁, 그리고 이제는 하북을 통일한 원소와 싸워야 하는 조조다. 강한 상대와 싸우는 것은 신물이 날 정도로 많이 겪었다.
‘그러나 어쩌면… 마초가 최악의 적이 될지도 모르겠군.’
조조는 그렇게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머릿속에서 이 심란한 기분을 노래하는 수십 가지 시구와 함께 이 난국을 타개할 수백 가지의 전략이 떠올랐다.
* * *
강동, 회계군.
“손 장군,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서주 원정에서 진등과 유비를 격파하고 회수 이남의 땅을 얻은 장군의 기개는 모두가 찬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기껏 강동을 평정한 지 몇 달도 되지 않은 시점입니다. 장강을 넘어 회남의 구강으로 근거지를 옮긴다면 장군을 중심으로 느슨하게 결속된 강동 호족들이 필시 다른 마음을 품을 것입니다.”
손책을 말리는 꼬장꼬장한 인상의 중년 사내는 종사 장소였다. 손책은 웃으며 그런 장소를 달랬다.
“자포(장소의 자) 선생의 걱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닙니다. 하지만 자꾸 그러시면 제 입장이 난처해집니다. 이 책을 한 번만 믿어 주십시오. 우리는 어렵더라도 지금 장강을 넘어야 합니다.”
손책이 사석에서는 아버지와 격이 같다는 뜻으로 중부(仲父)라 부를 정도로 신임하는 장소다. 손책은 웃는 얼굴로 설득했지만, 장소는 여전히 강하게 간언했다.
“강동은 실로 하늘이 내린 옥토입니다. 땅은 넓고 물산은 풍족하며, 거대한 장강이 있으니 굳게 지키면 원소나 조조가 아무리 강성해도 넘보지 못할 것입니다. 어째서 회남으로 옮기려 하십니까?”
“강동이 바로 그런 땅이기 때문입니다.”
손책은 단호했다.
“강동과 강남은 땅이 넓고 물산이 풍족하나 사람이 모자랍니다. 인구가 부족해 미개척지가 태반이니 이곳에 눌러앉으면 매양 호족을 포섭하고 이민족의 반란을 토벌하는 일로 수십 년을 보낼 것입니다. 예, 자포 선생의 말도 맞습니다. 우리가 이곳에 할거하면 능히 백 년을 버틸 수 있겠지요. 분명히 후대에는 강남이 천하를 먹여 살리는 중심이 될 것이고, 우리는 강남 개발을 시작한 시조로 역사의 찬사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손책이 말을 한 번 끊자 강동군 중신들의 시선이 그에게 모였다. 장소, 장굉, 여범, 주치, 정보, 황개, 한당, 주유, 태사자, 그리고 말석의 여몽까지 모두가 손책을 보고 있었다.
“나는 후대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강동에 눌러 앉아 천하의 형세가 변하기를 기다리는 것은 내 방식이 아닙니다. 나는 직접 천하를 노릴 것이고, 그러자면 강동이 아닌 회남에 있어야 합니다.”
장강 이북, 회수 이남의 땅을 회남이라 한다. 수로가 촘촘히 얽혀 있어 중국에서 손꼽히는 곡창 지대다. 손책은 진작부터 회남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북쪽 경계선이 장강이 되는 것과 회수가 되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단순히 회남의 물산을 얻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회남을 얻으면 회수를 거슬러 올라 언제든지 북방을 노릴 수 있다. 그러나 장강 이남으로 밀려나면 상황이 달라진다. 가령 북방 세력이 회남의 합비 같은 곳에 요새라도 하나 쌓으면 어떻게 되겠나? 회남은 온통 개천에 논이니 군사를 움직이기 극히 어려운 땅이다. 북방이 안정되기만 하면 강남에서 십만대군을 동원해도 회남의 요새 하나를 돌파하기 어렵게 된다는 말이다.’
용맹함과 굳은 의지, 자신의 편에 선 사람에게 발산하는 매력과 자신의 적들에게 공포를 심어주는 요령.
그 모든 장점보다도 역사상의 손책이 가진 최고의 장점은 대국적인 식견이 아닐까.
손책이 단호한 의지를 드러내자 장소도 더 이상 반대하지 못했다.
“장군의 뜻이 그러시다면 저희들이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다만 후방을 튼튼히 하는 것 또한 가볍게 여겨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믿을 만한 상장에게 강동의 고을을 진수하도록 하십시오.”
“하하, 공근이라면 그 일을 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강동군에 상장이라고 할 만한 인물은 두 명, 주유와 태사자가 있다. 태사자는 북방 출신의 기병대장이니 중원을 노리려는 손책의 곁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주유뿐이다.
모두가 주유가 남을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외모만큼이나 군사를 부리는 솜씨도 신묘하다는 무장이며, 손책의 어린 시절 친구이기도 하다. 주유는 자리에 모인 중신들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올리고 손책을 향해 말했다.
“소장은 그저 병가의 일을 할 뿐입니다. 청컨대 주공께서는 장자포 선생의 벼슬을 올려 강동의 정무를 보게 하십시오.”
“좋은 생각이오. 공근의 말대로 장자포 선생을 회계태수 군사중랑장으로 천거하는 표를 올리겠소. 자포 선생, 부디 물리치지 마십시오. 이제부터 저는 회남의 일에 집중할 테니, 강동의 일은 공근과 함께 선생께서 맡아 주십시오. 밖의 일을 공근이, 안의 일을 선생이 총괄한다면 강동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허허, 장군…….”
장소는 헛웃음이 나왔다.
자신은 본래 중원의 명사다. 그런데 이 손책은 그런 자신에게 근거지인 강동을 통째로 맡기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회계태수는 지금 손책이 가진 관직 중 가장 큰 실권직인데 그것을 장소에게 넘기는 것이다.
‘강동의 혼란을 막으려면 이 정도의 강수를 둬야 하는 건 맞다. 그러나 그것을 진짜로 실행하는가. 나를 믿고.’
노란 눈동자를 하고 강동의 호랑이라 불리는 이 청년은 배포가 큰 것인가, 겁을 모르는 것인가.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난세의 사인으로서 군웅을 섬기려면 이만한 인물을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
“장군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장소는 정중하게 읍을 했다. 손책은 환하게 웃으며 그런 장소에게 맞절을 했다. 높은 콧대와 길죽한 눈매에는 한 점의 그늘도 찾아볼 수 없었으니,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의 손에 죽은 사람이 벌써 수천을 헤아린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도 없을 것이다.
* * *
업성.
원소가 다스리는 기주목의 치소는 이제 대장군부로 불리고 있었다. 현재 승상의 자리는 공석이니 실권직 중 최고의 지위라 할 만한 자리는 대장군인데, 이는 당연하게도 중국 최강의 제후인 원소에게 돌아갔다. 북방의 유주, 기주, 청주를 평정하고 병주 동부까지 세력권에 넣은 원소에게는 더 이상 적수가 없어 보였다.
오늘 대장군 원소는 그를 찾아 온 특별한 손님을 만나고 있었다.
“현덕은 천하에 이름 높은 영웅이 아닌가. 이렇게 모시게 되어 영광이오.”
단정한 외모, 가볍고 날랜 몸놀림, 남들보다 큰 귀. 원소의 앞에는 유비가 앉아 있었다.
유비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매번 깨지기만 하는 영웅이 어디 있답니까. 명공은 이 비를 너무 놀리지 마십시오.”
“저 간악한 조아만(아만은 조조의 아명)이 서주에서 그대의 백성들을 학살했다지. 너무 괘념치 마시오. 아만이 권세를 부릴 날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제 곧 새로운 천하가 열릴 것이오.”
원소는 잘생긴 얼굴에 은은한 미소를 띠고 말했다. 목소리는 앞에 있는 사람을 빨려들게 하려는 듯 낮고 달콤했다.
그러나 유비는 여전히 퉁명스러웠다.
“하여튼 먹여 주고 재워 주신다니 고맙습니다. 당분간 갈 곳이 없으니 신세를 좀 지겠습니다.”
“현덕 같은 영웅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니 이 원모가 오히려 영광이외다. 그, 갈 곳이 없다는 얘기 말인데.”
원소는 씩 웃으며 유비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내가 보기에 현덕은 결국 자신의 공업을 이뤄야 하는 사람이오. 당분간 편히 쉬고 계시면 현덕이 몸을 둘 만한 적당한 땅을 알아보겠소. 내 약조하리다.”
수하가 아니라 객장으로 예우하며, 곧 독립된 제후의 자리를 내어 주겠다. 실로 파격적인 대우였다.
‘그러나 현덕,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라네.’
원소의 휘하에는 또 한 명의 객장, 여포가 있다. 몇 년간 무위도식하다 순식간에 유주의 공손찬을 멸하고 지금은 병주 평정에 나서 있다. 여포를 객장으로 받으면서 내걸었던 조건은 이제 다 달성되었다. 남은 것은 약속대로 여포에게 병주목의 자리를 부여하는 것이다.
전투에는 귀신같이 강하지만 항상 통제가 되지 않는 여포다. 지금까지는 그가 지닌 무력의 덕을 크게 봤지만, 조조와의 싸움이 끝나고 천하의 주인이 가려지면 귀찮은 존재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때, 병주 어느 고을의 태수로 유비를 집어넣으면 어떨까.
‘두 마리 호랑이가 먹이를 두고 겨루게 되겠지. 아무래도 천명은 나에게 있는 모양이군.’
원소는 속으로 즐거운 상상을 하며 겉으로는 관인후덕(寬仁厚德)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그의 앞에 있는 유비는 땅이나 관직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원소는 그의 무심한 태도를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 젊다는 건가. 이제 곧 마흔이니 여유 부릴 나이는 아닌데… 재미있는 친구로군.’
“원공, 그보다 내게 병마와 치중을 좀 내어 주십시오.”
“하하하, 병마와 치중이라. 4년 전, 장연과 한창 싸울 때 그대와 비슷한 요구를 했던 객장이 있었지. 그래, 병마와 치중을 드리면 무엇을 하시려오?”
“조조와 다시 한 판 붙어 보렵니다.”
가족도, 근거지도, 수하들도 다 버리고 북방으로 쫓겨 온 사내는 아직 눈빛에 힘이 있었다.
원소는 그런 그를 보며 흡족하게 웃었다.
“내년 초에 황하를 건널 것이오. 그때 아만을 만나게 해 드리리다.”
큰 싸움을 앞두고 홀연히 나타난 객장이 결정적인 승리를 안겨 주는 것, 이는 하늘이 새로운 시대의 패자로 자신을 선택했다는 증거가 아닐까.
장연을 칠 때는 마초가, 공손찬을 칠 때는 여포가 있었다. 원소는 조조와의 싸움을 앞두고 나타난 객장을 보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