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마초와 관우, 영웅을 논하다
마초와 관우가 서로를 응시하고 있을 때, 시동이 차를 가져왔다. 관우는 다완에서 석 잔의 차를 내려 마초, 서황, 나관중에게 권했다.
그 모습을 훔쳐보던 나관중에게 문득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동작이… 완벽하구나.’
차를 내리는 관우의 모습은 우아해서 한 치의 빈틈도 없었다. 어쩌면 후대에는 저런 동작 자체가 하나의 예법으로 자리 잡을 수도 있으리라.
나관중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 마초를 돌아봤다. 마초도 나관중을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짧은 시간 눈으로 생각을 교환했다.
‘주공, 저렇게 멋지게 차를 내린다는 건…….’
‘평소에 연습한다는 거지. 고작 차 한 잔을 마시면서도 고아하게 하고 싶어서.’
고아하게 살아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자. 마초는 관우에 대해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하여튼 마음에 안 들어.”
“음, 뭐라고 하셨소?”
“음? 핫하하하, 아무것도 아니오. 관공이 내린 차가 향이 썩 좋구려.”
마초는 짐짓 크게 웃었다. 관우는 그런 마초를 바라보다 말했다.
“관모는 항복하지 않소. 그저 수춘성을 지키다 죽을 뿐이오. 허나 오늘은 은공을 모신 자리니 복파장군의 말을 경청하겠소. 하고 싶은 만큼 말씀을 하고 돌아가시오.”
“하하, 오늘 나는 영웅에 대한 얘기를 하러 왔소이다. 관공께서는 영웅에 대해 아시오?”
뜬금없이 무슨 소리인가. 관우의 짙은 눈썹이 조금 치켜 올라갔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요?”
“들어 보시오. 영웅이란 고귀한 존재요. 남들보다 강한 힘을 가지고, 남들보다 큰 뜻을 품는 자요. 그래서 뻔하디 뻔한 세상을 바꾸는 자요. 이런 자들은 평화로운 시기에는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오늘 같은 난세에는 모두가 간절히 영웅을 바라게 마련이오. 자, 관공께서도 생각해 보셨을 것이오. 오늘날 누가 영웅이라 불릴 만하겠소?”
질문을 던진 마초는 엷은 미소를 띤 채 관우를 응시했다.
관우는 지체하지 않고 대답했다.
“관모가 모시는 유현덕 대인은 황실의 후예요. 온갖 사람들을 끌어안는 인덕과 역경에 굽히지 않는 의지를 가진 분이오. 실로 영웅이라는 말에 어울리는 분이오.”
“동감하오. 유 사군은 영웅 중의 영웅이지. 그런데 유 사군만이 영웅이라면 영웅의 기준이 너무 높지 않겠소? 천하에는 다른 영웅들도 있을 것이오.”
관우는 말이 없었다. 마초는 그런 그를 보고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사공 조조는 재주가 높고 큰 뜻을 가졌으니 영웅이라 할 만하오. 강동의 손책도 보통 사람을 크게 웃도는 힘과 뜻을 가졌으니 영웅의 자질이 있다고 들었소이다. 그리고 또 한 명, 관중과 서량을 평안케 하고 천하를 위해 싸우는 이 마초 또한 영웅이오.”
관우는 마초의 속내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묵묵히 듣고 있을 뿐이었다.
마초는 아예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재의 창밖으로 하늘이 보였다. 수춘의 여름 하늘은 흐려서 구름이 잔뜩 껴 있었다.
“그러나 어찌 공업을 세운 자만을 영웅이라 하겠소? 칼이 힘이 되는 난세이니, 군웅들 밑에서 천하를 위해 싸우는 무장들 또한 영웅이올시다. 대표적으로 유 사군 휘하의 장익덕 장군이 있겠소. 또한 아직 무명이나 강동의 주유 또한 영웅으로 이름을 떨칠 인물이오. 조조의 족제 조인도 마찬가지요. 조만간 천하가 그의 이름을 영웅으로 기억할 것이오. 천자의 곁을 지키는 우림중랑장 조운은 성품이 관후하고 위급에서 몸을 아끼지 않으니 그에게도 영웅의 풍모가 있소이다.”
장비, 주유, 조인, 조운.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마초는 훗날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무장들을 한참 동안 열거했다. 그리고 몸을 돌려 다시 관우를 마주 봤다.
“바야흐로 영웅의 시대요. 유 사군이 아니더라도 천하에는 이렇게나 많은 영웅이 있소이다. 관공이 아는 사람들 중에서만 봐도 그렇소. 장비, 조운, 서황, 미축과 진등, 그리고 나. 이들 모두가 영웅이오.”
“지금 열거한 사람들이 모두 높은 재주와 큰 뜻을 가진 건 익히 알고 있소. 그래서 복파장군께서는 무슨 말씀이 하고 싶으신 거요?”
“관공은 이들의 대열에 끼지 못한다는 것이오.”
창문을 등지고 선 마초가 관우를 바라봤다.
관우는 이내 시선을 돌렸다. 말없이 차를 입으로 가져가 한 모금을 마셨다. 그리고 관우가 다시 고개를 들자 창밖이 어두워져서 마초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창밖에 먹구름이 껴 태양을 가리고 있었다.
“관모는 본래 칼 쓰던 무부로, 고수를 만나면 일초반식을 청해 배우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아 왔소.”
“아아, 알고 있소.”
“그래서 복파장군께서 오신다고 할 때 내심 기뻤소이다. 천하에 이름 높은 그 창술과 도법을 견식할 기회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소.”
“그러시겠지.”
“그런데 복파장군을 만나 보니 실망스러워 비무를 청할 생각이 나지 않는구려. 복파장군께서는 무엇이 필요하여 관모를 조롱하는 것이오?”
툭.
창틀에 빗방울이 떨어졌다. 한두 방울씩 떨어지던 비는 이내 줄기가 제법 굵어져 빗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나는 그저 사실만을 말할 뿐이니 관공께서는 조롱으로 받아들일 필요 없소. 관공은 용맹한 필부일 뿐, 이 숱한 영웅들의 대열에 끼지 못하오.”
“허허.”
관우의 헛웃음에 은은한 노기가 서렸다.
“이유를 묻겠소.”
“패배할 용기도 없는 겁쟁이가 그걸 몰라서 묻는가?”
탁.
관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9척 장신의 그가 마초의 앞에 서자 창문이 온통 가려져 실내는 밤처럼 어두워졌다. 그저 빗소리만이 울렸다.
“말에는 책임이 따르오.”
“그건 수춘성에서 죽겠다는 자에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이오. 관공이 보기에는 유 사군이 돌아가셨을 것 같소?”
“복파장군.”
“그는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오. 그러니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재기를 모색하고 있을 것이오. 여기서 관공이 조조군의 손에 죽으면 앞으로 유 사군은 어떻게 하라는 말이오?”
“내가 없더라도 주공께는 익덕이 있소. 그는 적장의 목을 주머니 속의 물건 취하듯 하는 호걸이오.”
“내 말을 못 알아듣는가. 관공이 조조의 손에 죽으면 유 사군이 가만히 훗날이나 기약하고 있을 것 같소? 복수의 불꽃으로 스스로의 몸을 태울 것이오. 모르는 척하지 마시오.”
어두운 방 안에서 마초의 푸른 눈만이 번쩍거리며 빛났다. 관우의 수염이 가늘게 떨렸다.
“그대가, 어찌…….”
그것을 짐작하고 있는가. 그런 말이 하고 싶었을 것이다. 마초는 개의치 않고 관우의 말을 잘랐다.
“영웅이란 대의를 위해 살고 죽는 자요. 이 수춘성에서 싸우다 죽는 데 무슨 대의가 있소? 그대는 그저 영웅처럼 보이고 싶은 자일 뿐이오. 열 배나 되는 적을 상대로 굴하지 않고 훌륭하게 싸우다 죽으면 마치 영웅처럼 보이겠지. 가히 힘만 센 필부가 생각할 만한 일이오.”
마초는 관우의 앞을 빠져나와 넓은 방 안으로 걸어갔다. 관우는 그런 마초를 제지하지 않았다.
“관공, 영웅과 필부는 크게 다르지 않소. 그저 살면서 세 번, 또는 다섯 번 정도 오는 시험의 순간에 영웅답게 대처하는 자가 영웅인 것이오.”
이를테면 서주에서, 당양에서, 적벽에서, 한중에서. 그리고 이릉에서.
“그러나 관공은 이런 이치를 전혀 모르고 있소. 그러니 매 순간 영웅이고 싶어 하는 것이오. 그대는 시세가 부득이해 항복해야 할 때도 영웅이고 싶어 하오. 아니, 심지어 차를 마실 때도 영웅이고 싶어 하지. 이게 바로 영웅이 되고 싶은 필부의 행동이오.”
그는 그랬다. 마초가 귀부했을 때, 황충과 같은 관직을 받았을 때, 오랜 공신인 미방이 실수를 했을 때, 손권의 혼담 제안을 받았을 때, 그리고 3만의 포로를 먹일 양식이 없을 때.
마치 강박증에 걸린 것처럼, 매 순간 영웅이고 싶어 했던 자를 향해 마초가 말했다.
“필부에 대한 얘기는 여기까지 하겠소. 나는 오늘 영웅에 대한 이야기를 하러 온 것이니 말이오. 영웅이란 누구인가? 말했다시피 오늘날 영웅 중의 영웅이라면 유 사군이 있소. 그런데 매번 패하는 그가 왜 영웅이겠소?”
관우가 팔짱을 끼었다. 뭔가 심경에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
“말해 보시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패배자였소. 초년에는 돗자리를 깁고 짚신을 팔아 생계를 삼았고, 문식은 노식 선생 문하에 들었으면서도 배움이 얕을 정도며, 무략은 그저 고향에서 건달패 몇 명 거느릴 정도를 크게 넘지 못했소. 작은 벼슬을 받았을 때는 뇌물이 없어서 죄인의 몸이 되었고, 큰 땅을 얻었을 때는 조조처럼 강한 자에게 굽히지 않다가 다시 떠돌이 신세가 되었소. 그렇게 패하고 또 패하는 자가 어째서 영웅인가? 답은 관공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오.”
거기까지 말한 마초가 흘긋 나관중을 돌아봤다. 나관중은 멍한 표정으로 마초의 말을 듣고 있었다.
마초는 그런 그를 보며 티 나지 않을 정도로 웃음을 지었다.
“유 사군은 패할 때마다 다시 일어섰소. 불굴(不屈), 그것이 영웅의 조건이외다. 영웅은 지지 않는 자가 아니오. 지고 나서 다시 일어나는 자요.”
그 뒤로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관우가 창을 가린 뒤로 여전히 어둡던 방 안이 조금씩 다시 밝아졌다. 비가 그치고 구름이 걷히는 모양이었다. 마초는 햇빛과 함께 조금씩 드러나는 관우의 윤곽을 보며 말했다.
“죽음으로써 패배의 고통에서 도망치려는 자는 영웅이 아니라 용맹한 필부일 뿐이오. 그러니 관공, 오늘 나에게 패하고 몸을 굽히시오. 그리고 어딘가에 있을 유 사군과 합류하여 다시 일어서시오. 영웅처럼 보이는 삶에 연연하지 말고, 패배를 딛고 다시 일어서는 진짜 영웅의 삶을 사시오.”
이제 방 안으로 다시 환한 빛이 쏟아졌다. 비와 구름은 물러가고 눈부시게 푸른 하늘, 창천이 드러났다. 회남의 하늘은 맑게 개어 있었다.
관우는 여전히 방 안에 우뚝 서 있었다.
마초는 나관중을 보며 눈짓을 했다. 나관중은 눈치를 채고 세 가지 물건에 손을 뻗었다. 비단 전포, 비단 주머니, 그리고 칼인지 창인지 알 수 없는 길고 두꺼운 물건이었다. 나관중이 낑낑거리며 제대로 들지 못하자 옆에서 보던 서황이 같이 들어 관우의 앞에 놓인 탁상으로 물건을 옮겼다. 세 가지 물건이 관우의 앞에 놓였다.
“영웅이 되려는 자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준비했소. 이 비단 전포는 관공이 보통의 무장이 아니라 천하 용장이라는 사실을 알려줄 것이오. 비단 주머니에는 관공에게 항복을 권하고 관직을 내린다는 천자의 조서가 들었소. 조조나 내가 아니라 폐하의 신하가 된다는 명분을 줄 것이오. 마지막으로 자루가 긴 칼은 우리 비서랑 선생이 관공에게 필요할 것이라고 우겨서 준비했는데… 좋은 쇠를 82근이나 썼으니 나쁘지는 않을 것이오. 이는 조건 없이 드리는 것이니 사양치 마시오.”
마초는 그렇게 말하고 몸을 돌렸다.
“관공께서 내게 투항한다면 세 가지를 약조하겠소. 첫째, 관공은 조정의 한수정후 편장군이니 조조나 나의 휘하에 드는 것이 아니오. 둘째, 하비성에 남아 있는 유 사군의 가족들을 관공이 모실 수 있도록 하고 그 대우를 이전과 같이 하겠소. 셋째, 유 사군의 소식이 들리면 언제라도 돌아가시오. 스무날이 지나면 우리 마가군은 물러나고 다시 조조군이 수춘 공략에 나설 것이니 이 조건은 그때까지만 유효하오. 나머지는 관공의 선택에 달렸소.”
더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이대로 조조군과의 싸움을 길게 끌면 한 황실을 존중하지 않는 원소만 이득을 본다거나, 나중에 서주를 침탈한 원수 조조와 손책에게 복수하는 데 마가군이 힘을 빌려줄 수 있다거나.
그러나 관우에게 그런 현실적인 말은 통하지 않는다. 이제 남은 것은 관우의 선택일 뿐이다. 마초는 나관중, 서황과 함께 수춘성을 나섰다.
수춘성을 뒤로 한 채 먼저 입을 연 것은 평소 과묵한 서황이었다.
“영웅의 조건. 미오성에서 비서랑 선생이 했다는 말이 그겁니까?”
“하핫, 그렇다네. 내가 하는 말 치고는 너무 간지럽지?”
마초는 쑥스럽게 웃었다. 그러나 서황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좀 놀랐습니다. 소주공께서는 뭐랄까… 사람의 심리를 잘 꿰뚫어 보시는군요. 관운장은 틀림없이 마음에 큰 격동이 있었을 겁니다.”
‘그야 당연하지. 저자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미래를 알고 있으니.’
마초는 서황의 칭찬에 약간 민망했다. 미오성에서 같이 맹세한 동지들은 자신이 회귀한 내막을 대강 알고 있는데, 평소 괴력난신을 잘 믿지 않고 합리적인 성품의 서황은 아직까지도 반신반의하는 모양이었다.
쿵.
그때 일행의 등 뒤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뭐지?”
뒤를 돌아보니 수춘성의 성문이 열리고 있었다. 큰 소리는 빗장을 여는 소리였던 모양이다. 천천히 열린 성문 사이로 한 사내가 걸어 나왔다.
9척의 키와 아름다운 석 자 수염, 붉은 얼굴에 누에처럼 짙은 눈썹. 녹색 비단에 금색 용을 수놓은 전포를 두르고, 한 손에는 창처럼 자루가 긴 대도를 쥐고 있었다. 대도의 칼날은 폭이 넓고 뒤로 휘었는데 날과 자루 사이에 용의 머리가 장식되어 있었다. 지금부터 한참 후대인 송나라의 양식으로 만든 언월도였다.
“과, 과, 과…….”
“관공.”
청룡언월도를 든 관우를 보자 말을 잇지 못하는 나관중을 대신해 마초가 대답했다. 관우는 수염을 한 번 쓸어내리며 마초를 바라봤다.
“복파장군의 말이 모두 옳소.”
“듣던 중 반가운 소리요.”
“그러나 무부에게는 무부의 방식이 있는 법. 관모가 끝내 떨치지 못한 허물이 하나 있으니 복파장군께서 물리치지 마시길 바라오.”
그를 옭아매고 있던 강박의 사슬이 끊어진 것일까. 관우의 얼굴은 평온했다.
그런데 마초는 뭔가 불안감을 느끼고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으음, 그게 설마…….”
“천하 영웅이신 복파장군께 비무를 청하오. 복파장군께서 한 수를 가르쳐 주신다면 관모는 복파장군의 말에 따르겠소. 만약 관모가 배울 만한 수가 없다면 우리의 인연을 여기까지로 하겠소.”
“아, 사람 쉽게 안 변해. 고쳐 쓰는 거 아니야.”
마초는 주변 사람들에게만 들릴 만한 소리로 한탄했다. 칼싸움에 대한 관우의 집착은 역사가 바뀌어도 여전한 것인가?
“그… 내가 옛날 영포나 팽월과 같이 싸움을 잘하는 건 사실인데, 아마 장익덕과 앞뒤를 다툴 만큼은 될 거요. 그러나 어찌 미염공의 절륜함에 비견할 수 있겠소?”
원래도 천하에 이름을 떨쳤던 마초다. 지금은 회귀했으니 신체의 나이는 20대지만 그 안에는 40년이 넘는 수련을 쌓은 고수가 들어가 있다. 그러니 마초는 반칙을 쓰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상황이 이러니 마초는 굳이 무예의 길고 짧음을 뽐내고 싶지 않았다. 무예는 그저 난세를 끝내기 위한 수단일 뿐인 것이다.
그리하여 관우를 살살 달래서 포기시키려 해봤지만, 관우의 뜻은 완강했다.
“관모의 법칙은 일곱 번 수를 나눠 한 수를 배우면 패배로 인정하는 것이오. 그러니 복파장군께서는 부디 사양하지 마시오.”
“일곱 번? 그게 무슨 소리요?”
“말 그대로, 일곱 번 중 한 번이라도 복파장군이 이기면 패배를 인정하겠다는 것이오.”
그쯤 되자 마초도 눈꼬리가 올라갔다.
“그대는 이 마초를 뭘로 보고 그런 방자한 소리를 하는가?”
마초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말에서 내렸다. 장도를 쥐고 관우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청룡언월도를 쥔 관우가 희미하게 웃는 것처럼 보였다.
관우는 병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너희들은 장막을 치고 물러서라. 장막 안에서 복파장군을 상대하겠다.”
잠시 후, 두 사람의 비무를 위한 장막이 펼쳐졌다. 병사들은 관우와 마초의 병기에 두텁게 천을 감고 재를 묻혀서 가져왔다. 일정 이상 재가 묻으면 한 판을 내주는 규칙으로 비무할 때 쓰는 물건이니, 정말로 몸을 상하게 하지 않고 솜씨만을 겨룰 작정인 모양이었다.
장막 안에서 청룡도를 세운 관우에게 미소가 떠올랐다. 마초는 관우가 즐거워하는 걸 보자 헛웃음이 나왔다.
“관공은 참 한결같구려.”
“무슨 소리요? 복파장군께서는 오늘 관모를 처음 보신 게 아니었소?”
“아아, 그게 참… 그럴 만한 사정이 있소. 그대가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그때 한 번 겨뤄줄걸.”
그랬으면 저 사내와 친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마초와 관우는 각자의 무기를 들고 장막 안에서 서로를 마주 봤다.
“자, 그럼.”
* * *
한 시진이 지났다.
장막 안에서는 이렇다 할 큰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가끔 병장기가 부딪히고 힘을 겨루는 것은 분명했으나 장막 밖의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자세히 알 수 없었다.
침착하게 장막을 응시하던 서황도 초조해져서 팔짱을 낀 손에 핏줄이 솟았을 때, 드디어 장막이 열렸다.
“아, 힘들다. 죽을 만큼 힘들다.”
땀에 흠뻑 젖은 마초가 먼저 장막을 나왔다. 온몸이 재투성이였다.
“약조를 했으면 지켜야지, 왜 스무 번이나 겨루는 거요?”
병사들이 건네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은 마초는 장막 안의 관우를 향해 소리를 버럭 질렀다. 관우의 얼굴에도 땀이 맺혀 있었고, 비단 전포에도 마초만큼 재가 잔뜩 묻어 있었다.
“정확히 스물한 번이오. 참으로 즐거웠소이다. 관모의 청을 뿌리치지 않은 복파장군의 은덕을 잊지 않겠소.”
관우는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초는 계속 투덜거리며 나관중과 서황을 향해 돌아왔다.
“소주공.”
“어, 어떻게 됐습니까?”
“뭘 어떻게 돼? 관가 놈이 계속 더 하자고 해서 이때까지 상대해 줬지. 아 진짜…….”
“그러면 승패… 승패는요?”
“그건 관가놈한테 물어봐.”
마초는 정말로 피곤한지 씩씩거렸다. 땀을 닦은 관우는 청룡언월도를 들고나와 바닥에 짚었다.
쿵.
“백이병.”
관우가 낮은 소리로 호령하자 진도와 그가 이끄는 백이병들이 일제히 군례를 올렸다. 관우는 그런 백이병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오늘 본관은 복파장군과 단기로 승부를 겨뤘고, 졌다.”
“으… 으응?”
“음.”
놀란 것은 나관중과 서황이었다. 백이병들은 미동도 하지 않고 관우의 말에만 집중했다.
“그러니 우리는 앞으로 복파장군께 몸을 의탁한다. 성문을 열어라.”
“존명!”
나관중의 입이 떡 벌어졌다. 서황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육중하게 닫혀 있던 수춘성의 문은 관우의 지시가 떨어지자 일사불란하게 열렸다.
“과, 관공이 지다니… 나의 관공은 그렇지…….”
“무슨 헛소리야!”
땀에 절어 있는 마초가 소리를 빽 지르자 나관중이 시무룩해졌다. 그 모습을 보던 서황이 말했다.
“소주공, 관운장을 꺾으셨습니까. 소주공이라면 그래도 이상하지는 않습니다만.”
“꺾기는 뭘 꺾어. 서로 승패를 주고받았지. 솔직히 말하자면… 아니, 됐네. 하지만 말이야.”
인상을 쓰고 말하던 마초가 갑자기 씩 웃었다.
“첫판은 내가 이겼다네.”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승부를 이기셨군요. 스물한 번을 겨뤘다고 하셨지요? 전체 전적은 어떻게 됩니까?”
서황이 묻자 마초는 갑자기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건 나중에 천천히 알려주지. 일단 오늘은 오늘 온 목적에 집중하자고.”
마초와 서황, 나관중은 다시 관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관우는 백이병들을 향해 선언하고 있었다.
“오늘 우리가 목숨을 보전하게 된 것은 온전히 복파장군의 은덕이다. 그러니 우리는 복파장군이 우리를 필요로 할 때 죽기로 싸울 것이다.”
“존명!”
백이병들의 눈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관우는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은혜를 갚은 뒤, 주공을 다시 뵈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