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마초연의-161화 (161/306)

161화. 유비, 떠나다

서주 하상현.

장강을 넘은 강동군은 광릉성, 동양현, 우이현을 연이어 함락시키고 북진했다. 강동군의 학살을 참지 못한 광릉태수 진등이 회전에 나섰다 주유에게 패하자 다른 고을의 군사들은 감히 강동군을 가로막지 못했다. 강동군의 수장 손책은 일단의 병마를 이끌고 또 다른 큰 강, 회수까지 넘어 하상현에 이르렀다. 이제 서주목의 치소가 있는 하비성이 지척이었다.

“하, 진짜 오셨군.”

수하 두 사람만을 거느리고 정자에 있던 손책은 일어나서 손님을 맞았다.

손님은 3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사내였다. 역시 두 사람만을 좌우에 거느리고 있었다. 갑주를 걸치고도 가볍게 걷는 품새가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무장이었다. 그런데 그의 뚜렷한 이목구비와 유달리 큰 귀에서 묘한 귀티가 흐른다고 생각되는 건 선입견 탓일까.

“반갑습니다, 유 사군(史君, 주목이나 주자사에 대한 경칭). 손책입니다.”

서주목 유비는 대답하지 않았다. 포권하는 손책에게 고개만 까딱해 보이고 먼저 호상에 앉았다. 그를 따라온 두 사내가 좌우에 시립했다.

손책은 예의 없는 유비의 태도에 쓴웃음을 지으며 맞은편에 앉았다.

“각자 수하 둘씩만을 거느리고 회담하자고 먼저 청했습니다만 설마 진짜로 나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이 손모가 한 수 배웠습니다.”

유비는 묵묵히 그런 손책을 쳐다만 보고 있었다. 손책은 웃으며 탁상 위에 놓인 술병에서 술을 한 잔 따라 유비에게 내밀었다. 술을 좋아하는 유비를 위해 나름대로 의전이라고 준비한 향기로운 술이었다.

“유 사군께서는 천하에 이름이 높은 영웅이시니 일찍부터 뵙고 싶었습니다. 제가 열 살 남짓할 무렵 이미 강동까지 유 사군의 존성대명이 퍼져 있었습니다. 탁군의 대협이 홀연히 일어나 황건적을…….”

“쥐새끼 같은 놈이 어디서 돼먹지 못한 짓거리를 배워 왔구나. 누가 그렇게 가르치더냐?”

휘이이잉.

해가 질 때가 되니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분위기도 얼어붙어서 손책 뒤에 시립한 두 사람에게서 서늘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정작 욕을 먹은 손책은 그저 피식거리며 웃고 있었다.

“글쎄요, 일단 돌아가신 아버지는 아니고. 그저 강동에서 거친 녀석들과 어울리다 보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내가 오늘 온 것은 네놈 창자를 백문루에 널기 전에 어떤 놈인지 확인하고 싶어서다. 이제 너에게 남은 길은 두 가지다. 내 손에 뒈지거나, 스스로 뒈지거나.”

“만약 유 사군께 잡힐 상황이 되면 스스로 뒈져야겠군요. 어떻게 살지는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지만, 어떻게 죽을지 정도는 내가 선택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손책은 여전히 여유가 있었다. 분노를 숨기지 않던 유비는 계속된 도발에도 손책이 여유 있는 모습을 보이자 가만히 그런 손책을 마주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뭐 궁금한 거 없습니까? 어떻게 그렇게 싸움을 잘하느냐, 어떻게 그렇게 쉽게 여러 고을을 얻었느냐, 아니면 왜 보자고 했느냐, 이런 것들.”

“백성들은 왜 학살했느냐?”

“핫. 그게 궁금합니까?”

“닥치고 대답이나 하거라.”

“내게 조맹덕이 보낸 사람이 하나 붙어 있소. 그가 그러더군요. 백성들을 마구잡이로 죽이면 유 사군을 성 밖으로 끌어낼 수 있다고.”

유비의 눈썹이 꿈틀했다.

“조맹덕이라. 역시 그놈이 뒤에 있었나.”

“짐작하셨겠지요. 그래서 오늘 만나자고 한 겁니다. 유 사군, 지금 서주의 주력은 관운장을 따라 수춘성에 가 있고, 남은 전력 중 그나마 정예들은 나와 싸우기 위해 이곳 하상현에 모여 있습니다. 그러면 하비성에 남은 구 도겸계 인사들에게는 이만한 기회가 또 없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유비는 손책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렇게 잔머리를 굴리고 있었나. 범 같은 아비에게서 개 같은 새끼가 나왔군.”

“인정합니다. 어쨌거나 유 사군이 원정을 나와 있는 사이, 하비성은 이미 구 도겸계 인사들에 의해 조맹덕의 손으로 넘어갔을 겁니다. 아마 조표 정도가 앞장서서 그렇게 했겠지요.”

“그래?”

“지금쯤 하비성은 안에서 문이 잠겼을 것이고, 낭야 방면으로도 조맹덕의 군사들이 진격하고 있을 겁니다. 팽성은 이미 떨어졌을 것 같군요.”

“아아, 그런가. 빌어먹을 떠돌이 생활이 또 시작되겠군.”

유비는 남의 일처럼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리고 손책이 따라 놓은 술잔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그대로 술병을 들어 병째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꿀꺽, 꿀꺽, 꿀꺽.

팔척 장사의 발목도 잡아챌 만한 한 병 술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유비는 한 치도 흐트러짐 없는 동작으로 술병을 내려놓고 뒤에 서 있는 장한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렇다는데, 어쩌냐? 익덕아.”

장한, 장비는 한숨을 푹 내쉬고 대답했다.

“떠날 수밖에 없지 않겠소, 대형. 어디로든 갑시다. 우리가 싸움은 잘하니까 다시 불러 주는 곳이 있겠지요.”

“그럼 서주는 어쩌냐?”

“어쩌긴, 매년 이어지는 조조의 공세를 막아낸 게 벌써 3년째요. 슬슬 한계에 달한 것을 대형도 잘 알지 않소. 일단 우리가 살아남아야 다음 기회도 있는 법이오. 아니 그래서 내가 그렇게 원술 토벌군을 보내지 말라고…….”

“천자가 조서를 냈는데 나보고 어쩌라고?”

그렇게 장비와 옥신각신하던 유비는 갑자기 손책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근데 저 어린놈의 새끼는 죽이고 가는 게 낫지 않겠냐? 저거 아무래도 후환이 될 것 같은데.”

“그건 어렵겠소. 딱 보니 손책이 끌고 나온 두 사람 모두 대단한 고수요. 내가 저 친구들하고 한참 싸우고 있으면 그동안 대형이 손책을 상대해야 하는데…….”

“하는데?”

“대형 실력으로는 무리요.”

장비는 단호하게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유비는 뭐라 투덜거리다 손책의 뒤에 선 사내를 보며 물었다. 유비와는 구면인 태사자였다.

“자의(태사자의 자), 강동까지 가서 찾았다는 주군이 고작 이런 놈팽이냐? 내 제의를 뿌리쳤으면 조자룡이처럼 허도에서 높은 벼슬이라도 하던가, 대체 이게 무슨 꼴이냐?”

“유 사군.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손 장군은 소장의 주군이자 은인입니다. 지금은 일이 이렇게 되었지만 천하에는 두 분이 모두 필요합니다.”

태사자는 정중하게 유비에게 포권하며 대답했다. 태사자 옆에 있던 주태는 한 발짝 물러났다.

과연 천하 용장인 장비라도 쉽게 상대하기는 어려워 보이는 인물들이다. 잠시 인상을 찌푸리고 그들을 살펴보던 유비는 다시 장비에게 물었다.

“너 솔직히 말해. 이길 수 있는데 피하는 거지?”

“여기서 손가놈 모가지를 따면 뭐가 달라집니까? 하비, 낭야, 팽성을 조맹덕에게 전부 뺏기게 생겼는데 백이병도 없이 무슨 수로 되찾겠소? 그냥 지금 있는 군사들이라도 보전해서 빨리 도망치는 게 상책이오. 그래야 어디 가서 객장 노릇이라도 제대로 하지 않겠소?”

“이런 제기랄, 알았다.”

유비는 장비의 말에 수긍한 뒤 손책을 바라보며 물었다.

“네놈은 왜 나에게 이런 걸 알려주는 거냐?”

“이번 일로 조맹덕만 너무 재미를 보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유 사군이 빨리 물러나 주시면 우리가 하비성에 입성할 겁니다. 하비성에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사람들이 있거든요.”

“하, 그게 누구냐?”

“조표, 그리고 구 도겸계 호족들.”

손책은 그렇게 말하며 씩 웃었다. 장비가 조용히 유비 옆으로 다가와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이자는 조표에게 학살의 책임을 덧씌우려는 거요.’

“무슨 소리야? 학살은 손책 이놈이 했잖아?”

‘알아보니 이자는 현 하나마다 마을 하나씩을 골라서 개미 새끼 한 마리 남기지 않고 학살했는데, 전부 구 도겸계 호족들의 봉지였소. 조표 일당이 제 한 몸 살겠다고 자기들 봉지를 진격로로 팔아넘겼다고 해 버리면 욕은 그들이 대신 먹지 않겠소?’

손책은 장비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옷소매가 터져 나갈 듯 두꺼운 팔뚝에 올올이 뻗친 밤송이 수염을 한 이 사내는 보기와는 달리 머리 회전이 대단히 빨랐다.

“장 장군께서 지용겸비의 명장이라는 말이 사실이었군요. 좋습니다. 이대로 철군하시면 유 사군께서는 전력을 보전해서 다음을 기약하실 수 있고, 이 손모도 빨리 싸움을 끝내고 조표 일당의 목숨으로 민심을 무마시킬 수 있어서 좋습니다.”

“그것뿐이냐?”

“지금 철군하시면 앞으로 서주에서 어떤 백성도 억울하게 죽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약조 드리지요.”

손책의 눈은 진지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유비는 낮은 한숨을 쉬었다. 그에게서 자신이 아는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제 아버지 손견과 똑같은 표정을 하고 있군.’

저런 표정을 하고 있으니 아마 약속을 지킬 것이다. 손견이 그랬던 것처럼.

“손책.”

“예, 유 사군.”

“언젠가는 내 손으로 네놈의 목을 베겠다. 조조를 베면 다음은 네 차례다.”

“각오하고 있겠습니다.”

“천하에 의기 있는 자가 나 하나만은 아닐 것이다. 백성의 죽음에 분노할 줄 아는 이들이 네 목숨을 노릴 것이니, 부디 당하지 말고 살아남아라. 내가 네놈 목을 취할 때까지.”

유비는 그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책은 마주 일어나 포권하며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가십니까?”

“이 쥐새끼 같은 놈이 다 알면서 뭘 물어?”

유비는 끝까지 욕을 입에서 떼지 않았다. 손책은 그런 유비를 보니 그저 웃음밖에 나지 않았다.

‘본래 저잣거리의 왈패라더니 진짜였군. 생각보다 더 경박하고, 상스럽고…….’

그리고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유비가 사라진 뒤, 손책은 묵묵히 자리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서주를 잃고 떠돌이가 된 유비의 행선지는 어느 곳인가.

“여남은 지금 마땅한 주인이 없고, 형주는 무장이 가면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지. 그러나 저 사내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이다.”

유비는 아마도 하북으로 가서 원소의 객장이 될 것이다. 이번 사태의 흑막인 조조에게 가장 빠르게 복수할 수 있는 길이니까.

“아마 내년쯤이면 황하를 사이에 두고 원소와 조조가 큰 싸움을 벌이겠지. 원소는 여포에 유비를, 조조는 마초를 끌어들였나. 그리고 나는…….”

손책은 고개를 들어 정자 아래를 내려다봤다. 남쪽으로 길게 흐르는 회수가 보였다.

“…저 회수를 얻었구나.”

회수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수춘성이 있다. 그리고 수춘에서 다시 영수라는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예주의 여러 고을들이 나온다.

그 중에 허도가 있다.

“허도에는 천자가 있지. 전쟁통을 틈타 누군가 허도를 급습해서 천자를 취한다면, 단숨에 천하 제일의 강자로 떠오르지 않겠나.”

손책은 도도하게 흐르는 회수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 * *

유비, 장비, 그리고 또 한 명의 수행원은 조용히 정자를 내려와 진으로 돌아왔다.

한참 동안 손책과 조조의 욕을 하던 유비는 문득 생각난 듯 또 한 명의 수행원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런데 자네는 나에게 오자마자 떠돌이 신세가 됐군.”

“각오했던 일입니다. 심려치 마십시오.”

또 한 명의 수행원은 젊은 청년이었다. 당당한 체격에 단정한 외모, 사치스럽지 않지만 세련된 옷차림이 그가 귀하게 자란 명문가 출신임을 말해 주었다.

유비는 씩씩하게 답하는 청년을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이 사람아, 떠돌이 생활이란 게 그렇게 쉽지가 않아. 특히 자네처럼 넉넉히 살던 사람에게는 말이야. 원한다면 언제든지 떠나도 좋네. 아, 조조와 손책에게만 가지 말고.”

“하하, 그러면 마등에게 가는 건 괜찮습니까?”

“음… 마등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유비가 진지하게 답하자 청년은 피식 웃어 버렸다.

“오늘 만나 보니 손백부는 대단히 영리한 사람입니다. 좋은 관계로 만났으면 친밀하게 교류하고 싶을 정도더군요. 그러나 주공, 저 또한 서주 사람입니다. 손백부는 이제 조조 다음 가는 서주의 원수입니다.”

“그래도 그놈은 뭐라도 성공하고 있잖아, 그 젊은 나이에. 나는… 좀 멍청한 걸까? 곧 마흔인데 매번 가는 곳마다 실패하는구나. 겨우 모은 사람들이 또 이렇게 뿔뿔이 흩어졌잖아. 제기랄.”

신세 한탄하는 모습이 저렇게 멋진 사내가 또 있을까. 며칠 전부터 유비를 섬기기로 한 청년은 잔잔히 웃으며 그런 유비에게 말했다.

“주공께서는 곧 성공하실 겁니다.”

“이제까지 계속 실패만 했는데, 왜 갑자기 성공해?”

“이제까지는 제가 없었으니까요. 이 노숙이 그렇게 만들겠습니다.”

노숙, 자는 자경.

손책의 학살에 비분강개하여 유비군에 투신한 서주의 젊은 부호는 새 주군을 앞에 두고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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