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서주의 풍운 (2)
서주 광릉군.
강동의 오군에서 장강을 넘으면 광릉에 닿는다. 서주의 남쪽에 있는 이 고을은 광릉태수 진등이 다스리고 있었다. 그는 본래 서주의 유력 호족으로, 서주목 도겸이 죽은 후 서주를 이어받은 유비에게 귀부하여 광릉태수의 직분을 맡고 있었다.
그리고 광릉 인근의 우이현. 일단의 병마가 광릉을 지나쳐 서주의 중심부를 향해 북상하고 있었다.
“진등은 문무를 겸비한 일세의 호걸이고 인심을 크게 얻고 있으니 싸워서 꺾는 건 어렵다고 했었지. 그렇지 않나, 사마 공자?”
손책은 말 위에서 옆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의 옆에는 화려하게 치장한 여인이 말을 타고 앉아 있었다.
“그렇지요. 그가 광릉에서 농성하면 수만의 대군을 동원해도 꺾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손 장군께서 제가 이른 대로 하신다면 그는 반드시 나올 것입니다.”
자태는 영락없는 여인이지만 목소리는 굵직했다. 자세히 보면 그가 남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손책은 그런 그를 물끄러미 보다 말했다.
“그 여장은 꼭 해야겠나? 하내의 사마가라면 천하에 이름 높은 명문인데, 그 둘째 공자가 광인이라는 소문이 나면 어쩌려고 그러나?”
“정체를 숨기는 데는 이만한 수단이 또 없습니다. 그리고 손 장군께서는 첫째라서 모르시겠지만, 너무 잘난 형을 두면 둘째는 비뚤어지게 마련이라고요.”
사마의는 능청스럽게 받아쳤다. 여장에 완전히 몰입한 듯 입까지 가리며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손책은 피식 웃어 버렸다.
“하긴 우리 강동 손가의 둘째도 정상은 아니지. 그보다 지금쯤이면 동양현의 소식이 들어갔을 테니, 진등이 성 밖으로 나와서 우리를 쫓고 있겠군.”
“그리고 성 밖으로 나오면 그와 마주하게 되겠지요. 손 장군께서 하신 말씀이 틀림없다면 그는 회전을 벌여 진등을 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허나 진등은 일세의 호걸이니 방심은 금물입니다. 만약의 경우 원군을 보낼 준비를 해 두십시오.”
“하하, 사마 공자. 그는 강동 최고의 무장이다. 그에게 원군 따위가 필요할 것 같은가. 공자에게 그가 싸우는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하는 게 한스럽군.”
손책은 사마의를 보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가지고 있군. 그가 그 정도의 인물인가?’
사마의가 잠시 광릉 공략을 맡은 그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손책이 주변 군사들을 돌아보며 호령했다.
“모셔 오너라.”
잠시 후, 일단의 군사들이 한 관리를 끌고 왔다. 우이현의 현령이었다. 그가 다스리던 우이현은 강동군의 진격에 너무나도 쉽게 떨어지고, 자신은 포로가 된 것이다.
손책은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어 현령과 눈을 맞췄다. 그리고 손수 현령을 묶은 밧줄을 풀고 입에 물린 재갈을 꺼낸 뒤 두 손을 모았다.
“시세가 부득이해 아랫사람들이 현령께 무례를 범했소이다. 부디 넓은 아량으로…….”
“퉤!”
현령은 손책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침을 뱉었다. 깎은 듯 잘생긴 얼굴에 피 섞인 침이 묻었다. 손책은 잠시 현령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활짝 웃었다.
“절개가 있는 이로군. 강동군에 썩 어울리겠는걸. 이제부터 나를 따르시오.”
“닥쳐라, 이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 유 사군께서 서주에 베푸신 은혜가 깊거늘 네놈의 창칼에 굴복할 것 같으냐? 네놈이 동양현과 우이현의 백성들을 학살했으니 온 서주가 이 원한을 잊지 않을 것이다!”
“오호라. 아군이 아니라 적인가.”
손책은 씩 웃으며 한 손으로 현령의 어깨를 잡았다.
“현령께서는 관직 생활이 상당히 순탄하셨나 보군. 은혜니, 원한이니, 그런 한가로운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
우드득.
손책이 현령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자 기묘한 소리가 나며 어깨가 뒤틀렸다. 현령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고통을 참으며 손책을 계속 쏘아보았다.
“크, 크윽… 이놈…….”
“은원에 사로잡힌 인간은 아무것도 이룰 수 없소. 큰일을 하려면 은원에서 해방되어야 하지. 앞으로 내가 은혜보다, 원한보다 더 강한 것으로 서주를 다스릴 테니 고혼이 되어 지켜보시오.”
콱.
손책이 현령의 어깨를 쥔 손을 완전히 닫았다. 어깨뼈가 으스러진 현령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고통스러운 신음을 뱉었다.
손책은 일어나서 고개를 돌렸다. 포로로 잡힌 수백의 관원들과 수천의 백성들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손책은 그들의 눈에 자신이 원하는 것이 떠올라 있는 것을 보자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주위를 돌아보며 말했다.
“전부 죽여라. 백성의 시체는 성 밖에 쌓고, 관원의 시체는 성벽에 내걸어라.”
관원과 백성들의 눈에 떠오른 공포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부러진 어깨뼈의 고통으로 바닥을 뒹굴던 현령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잠깐, 손책! 아니 손 장군! 내 목숨만 거두면 될 것을, 어찌하여 저항하지 않는 이들을 죽이는 것이오!”
“아직도 모르겠는가. 그대가 나의 적이 되기를 선택하지 않았나. 내 편에 서면 살고, 나와 맞서면 죽는다. 이런 간단한 이치도 깨닫지 못하다니.”
손책은 방금 전 학살을 지시한 사람이라고 믿어지지 않는 화사한 웃음을 띠고 등을 돌렸다. 그의 등 뒤로 병사들의 창검이 번뜩이며 관원과 백성들의 비명 소리가 울렸다.
항복하면 산다. 저항하면 죽는다. 손책이 고수하는 원칙이었다. 목적은 하나,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에 대한 공포를 심어 주는 것이다.
‘은원보다 공포의 힘이 더 강하다는 것인가. 마초나 유비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골치 아픈 자로군.’
사마의는 그런 손책을 보며 입을 가리고 웃었다.
* * *
광릉성 외곽.
피와 먼지를 뒤집어쓴 광릉태수 진등은 이를 악물고 전방을 노려봤다. 작은 개울을 사이에 두고 강동군 수십 기가 보였다. 그 중간에는 작은 수레가 있었는데, 수레에 앉은 사람은 큼직한 피리를 불고 있었다.
진등이 있는 쪽은 들불이 번져 아비규환이었다. 그러나 불이 개울을 건널 수는 없으니, 개울 건너편의 피리를 부는 사내와 그를 호위하는 수십 기는 마치 다른 세상에 있는 듯 평온해 보였다. 사내가 연주하는 피리의 선율은 전쟁터에 어울리지 않게 아름답고 서정적이었다.
진등은 한동안 피리를 부는 사내를 노려보다 입을 열었다.
“강동의 손랑은 군사를 부리는 게 귀신같다고 하더니 허명이 아니로군. 그대가 손책인가.”
피리의 선율이 잦아들었다. 피리를 불던 사내는 차분하게 후주를 넣어 곡을 마무리한 뒤 진등과 눈을 마주쳤다.
“그렇지 않습니다. 소장은 주유, 자는 공근. 그저 손 장군의 수하일 뿐입니다. 진 태수에게 예를 갖추라는 손 장군의 명을 받아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주유는 보는 사람의 혼이 빠져나갈 듯한 미남자였다. 진등은 그런 그를 보자 헛웃음이 나왔다.
“그럴싸한 얼굴로 잘도 이런 짓을 하는구나. 그대가 광릉의 들판을 전부 태웠으니 백성들은 올겨울을 나기 힘들게 되었다. 오늘 보여 준 그대의 군재라면 나를 회전에서 격파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을 터. 꼭 들판을 태웠어야 했는가?”
진등이 힐난하자 주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진 태수는 일세의 호걸이시니 이 정도의 급박한 계책이 아니면 아군이 위험했을 것입니다.”
“집어치워라, 패역한 놈.”
진등은 눈살을 찌푸렸다.
손책이 강동군을 이끌고 장강을 넘었다는 소식이 들어온 게 불과 며칠 전이다. 처음에는 병법의 정석대로 광릉성에서 농성하다 손책의 뒤를 치려고 했다.
그런데 손책의 군사들은 진등이 지키는 광릉성을 무시하고 그대로 북상했다. 손책이 광릉 근처의 동양현과 우이현을 약탈하고 백성들을 학살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진등은 더 참지 못하고 성문을 열고 손책을 요격하기 위해 나섰다.
서주의 내부 정보를 가지고 서주 공략을 제안하러 온 하내 사마가의 둘째 공자, 사마의는 손책에게 이렇게 제안했었다.
‘진등이 성을 굳게 닫고 지키면 광릉을 얻기 힘듭니다. 그는 서주의 이익만을 위해 움직이는 자이니, 인근 고을의 사람들을 잔륙하여 진등이 참지 못하고 나오게 하십시오.’
손책이 그 의견을 채택해 가는 곳마다 학살극을 벌이니 과연 사마의가 말한 대로 진등이 성문을 열고 나오게 되었다.
군사를 부리는 일에 어지간히 자신이 있던 진등이다. 자신에게 익숙한 광릉성에 의지한다면 수만의 대군도 막아 낼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성문을 열고 나온 진등을 맞이한 것은 귀신같은 솜씨로 군사를 부리는 적장이었다. 적장은 광릉의 들판을 통째로 태우는 화공으로 진등의 진격로를 강제한 뒤 길목마다 복병을 놓았다. 진등을 따라 광릉을 지키던 용맹한 단양병들은 화염과 매복 앞에서 짚단처럼 쓰러져 갔다.
그 적장, 주유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기고 지는 것은 군문에서 늘 있는 일. 광릉은 진 태수의 지휘하에 조조에게 입은 피해를 복구하고 단단한 요새로 변하던 중이었지요. 우리의 진격이 3년, 아니 2년만 늦었어도 큰 낭패를 봤을 겁니다.”
진등은 주유의 찬사를 듣자 헛웃음이 나왔다. 주유의 의견은 진등 자신의 분석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상대방의 의견도 같은 것으로 봐서 아무래도 강동군에 대한 진등의 평소 생각이 맞는 듯했다.
‘그렇다면 손책은 싸움으로는 누구도 당해 내기 어려운 맹장이 맞겠군. 역시 암살밖에 답이 없었나.’
광릉의 안전에 가장 큰 위협은 장강 너머의 손책이다. 그는 극히 용맹하지만 또한 조심성이 없어서 몸가짐이 경솔하니, 조금만 시간이 더 주어졌으면 그에게 원한을 가진 강동 호족들을 매수해서 암살을 꾸며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시간은 진등이 아니라 손책의 편이었다.
“나를 꺾은 것으로 자만하지 마라. 유 사군은 천하의 조맹덕에게도 굴하지 않고 서주를 지켜 내신 분이다. 너희들이 그분을 꺾고 서주를 취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진 태수. 강동군은 지지 않습니다. 이제 곧 서주의 주인이 바뀔 것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주유는 수레에서 내렸다. 부장 능조가 주유의 옆으로 다가와서 진등이 잘 볼 수 있도록 거대한 두루마리를 펼쳐 들었다. 투항을 권고하는 손책의 격문이었다.
“유 사군은 하북 출신으로 서주목이 된 외지인이고, 진 태수께서는 본래 서주에 기반을 두신 분이지요. 그러니 진 태수의 뜻은 오로지 서주를 지키는 것에 있을 것입니다.”
“하, 유 사군을 배신하고 너희들에게 붙으라는 것인가.”
“큰 뜻을 이루기 위해 작은 명분을 버리는 것 또한 군자의 길입니다. 태수께서 유 사군을 존경하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장이 보기로 태수께서는 서주가 조맹덕의 손에 넘어갔다면 그 휘하에 들어 서주를 지키는 길을 택하셨을 겁니다. 아닙니까?”
“정확히 봤군. 그래, 내가 유 사군을 좋아하고 조맹덕을 싫어하는 건 작은 일이다. 그러나 서주를 지키는 건 큰일이지. 조맹덕이 이겼다면 나는 그의 편에 섰을 것이다. 서주가 가장 중요하니까.”
진등의 얼굴이 평온해졌다. 패배를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주유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말했다.
“좋습니다. 작은 의리에 집착하지 말고 큰길을 가십시오. 지금은 실리를 따져 서주를 지킬 때입니다.”
“그래서, 너희들에게 귀부하라?”
“그렇습니다.”
“훗… 후하하하!”
진등은 별안간 하늘을 보며 크게 웃었다. 한참을 껄껄거리고 웃은 그는 여전히 평온한 눈으로 주유를 바라봤다.
“이봐, 주랑. 유비와 조조를 만나 본 적이 있나?”
“없습니다.”
“그러니 그런 소리가 쉽게 나오는군. 그들은 천하 영웅이라 너희 주인과는 다르다.”
여유롭던 주유의 눈매가 꿈틀했다.
“무슨 뜻입니까?”
“세상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는 말이다. 유비와 조조는 서주를 지킬 만한 그릇이다. 그러나 그것은 유비와 조조기에 가능한 것, 네가 섬기는 강동의 애송이는 서주를 지켜 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여기서 항복하면 조만간 너희들이 다시 장강 너머로 쫓겨났을 때 피바람이 불 것이다.”
주유는 가만히 진등을 응시했다. 진등의 얼굴에 죽음을 각오한 사람의 결기가 떠올라 있었다.
“내 선택은 죽음이다. 너희들은 곧 유 사군에게 패할 것이기에, 그것이 서주를 지키는 방법이다.”
주유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아름다운 얼굴에 안타까움이 떠올랐다.
개울 너머에 있는 진등의 등 뒤에 어느새 강동군 병사들이 다가왔다. 그 선봉에는 아직 앳된 얼굴의 소년 장수가 서 있었다. 주유는 소년 장수를 향해 영을 내렸다.
“진 태수를 베라.”
“존명!”
주유의 명을 받은 여몽이 곧바로 말을 몰아 진등을 향해 달렸다. 진등은 창을 들어 그런 여몽에게 맞섰다.
“오냐, 쉽게 목을 내어 주지는 않으리라!”
손책과 주유가 아끼는 여몽이지만 진등이 지닌 일신의 무예 또한 만만치 않았다. 싸움은 팽팽하여 쉽게 결판이 나지 않았다.
개울 건너에서 두 사람의 싸움을 지켜보던 주유는 조용히 혼잣말을 했다.
“우리가 아직 중원에서는 무명이니 진 태수의 걱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오.”
퍽!
진등이 내지른 창이 여몽이 든 방패를 직격했다. 여몽은 방패에 창날이 박힌 것을 확인하자 그대로 힘을 쓰며 진등을 밀어붙였다.
“큭!”
창이 방패에 휘둘리게 되자 진등은 창을 버리고 칼을 뽑았다. 그러나 여몽이 들고 있는 수극이 진등의 목을 노리는 게 더 빨랐다.
퍽.
무심한 소리와 함께 진등의 목이 떨어져서 바닥을 굴렀다. 여몽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에서 내려 진등의 목을 들고 개울을 건넜다.
여몽이 개울을 건너와 진등의 목을 바치자 주유는 잘린 목을 보며 조용히 읊조렸다.
“그러나 진 태수, 그대의 걱정은 틀렸소이다. 우리는 이 싸움에서 이길 것이고, 이제 곧 중원에 손 장군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게 될 것이오.”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주유는 마지막 말을 속으로 삼키고 진등의 잘린 목을 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