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좌전에 이르기를
수춘성.
회수 남쪽의 비옥한 평야 지대를 낀 큰 성이자 원술의 본거지이다. 원술이 중나라를 세우고 황제를 참칭한 뒤 이곳은 중나라의 수도가 되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수춘성의 수비대장 양강에게도 회남윤이라는 그럴싸한 직함이 달려 있었다. 그저 평범한 장수였던 양강은 원술 밑에서 열심히 일하다 일약 수도 방위 사령관의 자리에 오르게 되자 어깨가 으쓱해졌다.
그러나 그것도 오늘까지였다. 수춘성의 내성에서 전령들의 보고를 받고 있는 양강은 정신이 혼미했다.
“급보! 남문이 뚫렸습니다! 누군가 폭우를 틈타 남문에 침입해서 성문을 열었습니다!”
탕!
양강은 탁상을 내리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네놈은 바깥이 보이지 않느냐? 사람이 몸을 가누기도 힘든 폭풍이 몰아치고 있단 말이다! 그런데 이 비바람을 뚫고 적군이 남문을 뚫었다는 말이냐?”
“장군, 그것이…….”
“소상히 고하라. 남문으로 1만 대군이라도 들어왔다는 말이냐!”
“남문을 뚫은 적은 한 명입니다. 그자가 단신으로 남문을 열었습니다!”
양강의 입이 떡 벌어졌다.
“아니, 그게 무슨… 조조놈이 우금과 악진을 보낸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그놈들이 아무리 맹장이라도 어떻게 단신으로 남문을 뚫을 수 있다는 말이냐?”
“장군, 남문의 적은 조조군이 아닙니다!”
“뭣이? 그렇다면 누가……?”
지금은 수춘성에는 원술이 없다. 원술은 군사들을 이끌고 친정을 하러 나가 있었다. 그 틈을 타서 조조군의 우금과 악진이 수춘성을 공격하기 위해 우회 중이라는 첩보가 들어왔다. 그래서 양강은 조조의 세력권 방향인 북문과 서문에 대한 경계를 단단히 하고 기다리던 참이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단신으로 남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그 정체가 우금과 악진은 아니다. 양강은 폭우를 뚫고 남문으로 달려가면서 자꾸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남문에 도착했을 때, 그 불안감은 현실이 되었다.
“대, 대체 저자는 누구냐?”
거대한 수춘성의 남쪽 성문을 열어젖히고 단 한 명의 사내가 서 있었다. 폭우가 쏟아지고 폭풍이 몰아쳐서 병사들은 제자리에 서 있기도 힘들었다. 세찬 강바람에 여기저기 발을 헛디디며 비틀거려야 했다. 그러나 검게 윤곽만 보이는 사내는 마치 땅에 뿌리가 박힌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두두두둑.
하늘에서 세차게 떨어지는 비가 양강의 투구를 때렸다. 윤곽만 보이는 사내는 천천히 양강을 향해 다가왔다. 키가 무척 커서 9척의 장신이었다. 복부 언저리에서 뭔가가 부자연스럽게 흔들렸다.
“좌전에 이르기를.”
사내는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침착하게 하는 말은 빗소리를 뚫고 한 마디 한 마디 또렷하게 들렸다. 양강은 그 와중에도 사내의 복부에서 뭔가가 흔들리는 것이 신경 쓰였다.
“도성이 백 치를 넘으면 나라에 해가 된다(都城過百雉 國之害也) 하였으니.”
사내는 화려하고 거대한 수춘성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양강은 사내를 향해 소리쳤다.
“전쟁터에서 갑자기 춘추좌씨전을 인용하는 놈이 있다니, 대체 어디서 온 미친놈이냐?”
“나는…….”
번쩍.
순간 번개가 치고 주변이 일시적으로 밝아졌다. 양강은 그제야 사내의 복부에서 흔들거리는 것의 정체를 깨달았다. 배까지 내려올 만큼 길고 아름다운 수염이었다.
뒤이어 하늘을 찢는 듯한 천둥소리가 울렸다. 사내가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소리는 천둥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 * *
“물렀거라! 신위천장군 행차시다!”
도철의 말고삐를 잡은 마대가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근황병의 병사들은 일제히 자리를 비켜서 길을 열었다. 병사들의 시선은 거대한 백마 도철에 타고 있는 마초에게 집중되었다.
“오오, 저분이 바로 신위천장군이군요. 생각보다 엄청 젊으시네요.”
“정확히 말하자면 근황부도독 복파장군이시지.”
“화공이 그림으로 그려도 저렇게 멋지지는 못하겠소. 저 백마에, 번쩍거리는 사자 투구에, 게다가 비색 전포는 폐하의 하사품이라지요?”
“근데 무장이라기는 너무 좀… 저렇게 고운 얼굴로 싸움을 할 수 있을까요?”
“어허, 하여튼 신병들이란. 저분이 바로 근황병을 이끌어 하내 전투에서 장수를 쓰러뜨린 마초 장군이시다! 게다가 곽사도 마초 장군이 벴다는 소문이 있다고.”
“그뿐인가? 눈 깜빡할 새 서량을 평정하고, 익주에서도 열 배나 되는 적을 깨뜨리셨다지 않나. 그야말로 관서 제일의 인물일세. 오죽하면 관서의 사자라고 불린다고 하지 않나?”
근황병들은 저마다 마초를 보며 입방아를 찧었다. 신병들은 마초의 화려한 모습을 찬탄하고, 고참병들은 마치 자신이 마초와 등을 맞대고 싸우기라도 한 것처럼 하내 전투의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앞서가는 마대는 어깨가 으쓱해지고 턱이 들리는 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하하하, 역시 형님은 천하 영웅이십니다! 병사들도 형님의 위명을 다 알고 있군요!”
“넌 그게 즐겁냐?”
“물론이지요. 이 마대, 신위천장군의 칼날이 될 것입니다!”
“…됐다. 말을 말자.”
마초는 한숨을 푹 쉬었다. 내년이면 스물이 되는 마대지만 15세 병이 영 고쳐지지 않았다. 자신의 성장에 집중해야 할 시기에 자신보다 더 위대한 누군가를 숭배하는 데 정신이 팔려있는 모습을 보니 마초도 슬슬 회의가 들었다.
‘같이 당번병을 시킨 맹획은 무럭무럭 커서 벌써 독립까지 시켰다. 왕평은 글만 읽을 줄 알면 빠른 속도로 명장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 녀석은…….’
얼마 되지 않는 자신의 피붙이고 무공에는 분명히 재능이 있으니 내심 기대가 컸다. 그러나 아무리 전쟁터마다 데리고 다니며 가르쳐도 마대는 별로 어른스러워지지 않았다. 이제는 마초도 마대에 대해 반쯤 포기한 상태였다.
“뭐 언젠가는 정신 차리겠지. 그보다 출병이 길어지지 않도록 빨리 원술을 잡아야 한다.”
마초의 원래 계획은 이랬다.
조조, 유비, 근황병의 연합군이 원술의 본거지 수춘성을 들이쳐 올해 안으로 함락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마초는 거기에 마가군도 참전하여 군공을 나누고자 했다. 곧바로 마등에게 서찰을 보내 재가를 받고, 함곡관에 주둔하는 마가군 2천을 급한 대로 끌어다 연합에 합류시켰다. 이로써 수춘성으로 출진하는 연합군은 세력은 조조, 유비, 근황병, 마가군까지 4로가 되었다.
“그리고 정작 나는 근황부도독 자격으로 참전하느라 마가군이 아닌 근황병 쪽에 와 있지만. 황보숭 대도독의 부탁이니 거절할 수도 없고.”
그렇게 되어 마가군 2천은 방덕이 이끌고 있었다. 근황대도독 황보숭은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 듯 마초에게 근황병을 물려주고 싶은 눈치였다.
“하지만 주공은 서량 마가군 후계자로서의 입장도 있으니까요. 그렇게 쉽게 천자의 휘하로 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옆에서 듣고 있던 나관중이 말했다. 마초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지. 황보 대도독은 내가 관중도독이나 거기장군 같은 아버지의 관직을 물려받아 관서에서 세력을 이루는 것보다 근황대도독이 되어 천자의 측근으로 남기를 바라는 것 같지만 말이야.”
마초는 회귀한 후부터 관직의 고하 따위는 상관하지 않았다. 부귀영화라면 지난 생에서 질릴 만큼 누려 봤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고 그저 난세만 끝낼 수 있으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황보숭의 뜻을 그대로 따라 주기에는 무리가 많았다. 마초도 한실 부흥의 뜻은 분명히 갖추고 있었고, 천자와 사적으로 유대감이 끈끈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어쨌든 군벌이니 자신이 거느린 세력에게 더 큰 보상을 안기기 위해서라도 무작정 충신 흉내만 낼 수는 없었다.
“황보 대도독이 준 병법서도, 추천장도 아주 잘 써먹기는 했는데… 하여튼 세상에는 공짜가 없구만.”
황보숭은 마초가 천자의 편에 서도록 은근히 압력을 넣고 있었다. 어쨌든 황보숭이 앞뒤를 못 재는 꽉 막힌 사람은 아니니 마초도 적당히 웃어넘기고 있었다.
그렇게 동남쪽을 향해 행군하던 근황병의 진지로 반가운 얼굴이 찾아왔다. 법정이었다.
“효직이 어인 일로 왔는가? 장안에서 마무리하지 못했던 일들을 챙겨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예상보다 빠르게 끝났습니다. 관중도독께서 제가 낸 초안을 그대로 승인하셨으니 이제 천자께 상표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 전에 복파장군께서도 한 번 봐주십시오.”
“글쎄, 아버지께서 승인하셨는데 굳이 내가 본다고 뭐가 있겠나?”
마초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호기심이 일어 법정이 건네는 문서를 받아 순식간에 읽었다.
“장안에 태학(太學)을 다시 세운다.”
“그렇습니다. 교육이야말로 천하를 경영하는 근본이니, 천하가 안정되려면 나라에서 젊은 선비를 길러야 합니다. 당고의 금 이후로 태학생과 청류파들이 쓸려나간 지 어언 30년입니다. 이제 태학이 부활할 때가 됐습니다.”
천자 유협도 천하가 안정되면 태학을 다시 세우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굳이 천하가 안정되지 않은 지금 막대한 재원을 들여서 태학부터 세우려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허도는 어차피 임시 수도입니다. 낙양은 이제 재건이 시작되었으니 도시가 되려면 아직 오륙 년을 더 기다려야 합니다. 만약 지금 태학을 세운다면, 그 입지로 적합한 곳은…….”
“장안뿐이지.”
“그렇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오륙 년이 지나 낙양이 수도의 기능을 되찾게 되면 장안에 태학을 세울 명분이 사라집니다. 태학을 우리 손에 쥐고 싶으면 지금 바로 해야 합니다.”
이제 겨우 비축되기 시작한 관중도독부의 재원을 다 털어서 태학 설립에 투자한다.
관중 재건 작업을 위해 군사에서 문관으로 차출된 법정이, 문관이 되고 나서 한 달 만에 낸 계책이었다. 그 대담한 발상에 순유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선비라면 누구나 태학을 재건하고 싶을 것이다.
중요한 건 마등과 마초 부자의 승인이었다. 먼저 마초는 이 말을 듣자마자 무릎을 쳤다.
“힘들게 문관들을 잡으러 다닐 필요가 없겠군. 그냥 태학으로 부르면 되잖아!”
지금 소년이나 청년의 나이대인 유능한 인재들을 태학으로 불러 모은다. 통과되기만 한다면 문관 수집을 위해 발품을 파는 수고를 엄청나게 줄여줄 수 있는 묘안이었다.
마초, 순유, 법정이 입을 모아 간언하니 마등도 딱히 반대하지 않았다. 마초는 이번 원정에서 군공을 세우고 나서 천자에게 태학 설립을 요구할 참이었다.
“만약 나중에 낙양으로 이전하게 되더라도 상관없다. 그때쯤이면 조조를 꺾었거나, 아니면 적어도 낙양의 조정에 우리도 입조해 있을 테니까.”
원래의 역사에서라면 조조나 다른 군웅의 사람이 되었을 젊은 선비들을 장안으로 모은다. 마초가 잘 접근하면 그들 중 다수를 등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일이 순조롭게 풀리는 듯 보였다. 그런데 동남쪽으로 향하는 근황병이 예주 진국에 도달했을 때 전장에 중요한 변수가 발생했다. 방덕의 옆에 있던 이감이 근황병 쪽으로 달려와서 마초에게 보고했다.
“주공. 원술이 이곳 진국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수춘성에 있어야 할 자가 왜 이곳으로 온다는 것인가?”
“진국을 다스리는 진왕 유총과 전쟁을 치르려나 봅니다. 이례적으로 친정을 하기 위해 나섰다고 합니다.”
원술은 가문의 후광, 그로 인한 귀족 사회에서의 영향력, 좋은 근거지 등 군웅으로서 여러 장점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으니, 바로 군사적 능력의 부재였다.
이 시기의 군웅은 누구나 군사적 업적을 기반으로 크게 성장한다. 원소, 조조, 유비, 손책 모두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유표도 객장들을 적절히 활용해서 군사적 성과를 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원술만은 제대로 된 군사적 업적이 없다. 그는 싸웠다 하면 졌고, 그러다 보니 수하들을 보호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지 못했고, 이는 계속해서 원술의 발목을 잡았다.
“그러니 이번 전쟁에서 직접 원정군을 지휘해 승리를 거두고, 그걸 기반으로 내부를 단속하려는 모양이었나 보군. 원술이 이길 수 있는 상대는 유총 정도가 유일할 테니까.”
원래의 역사에서 원술은 유총을 암살하는 데 성공하고, 그것이 원술의 유일한 군사적 업적으로 남는다. 다만 지금보다 몇 달 후의 일이었는데, 다른 군웅들의 사정이 정신없이 빠르게 돌아가다 보니 원술도 초조했는지 유총 정벌을 먼저 결행한 모양이었다.
이감의 보고를 들은 마초는 급히 나관중과 법정, 마대를 불러 모았다.
“일이 생각보다 더욱 쉽게 풀리고 있다. 원술은 지금 군사를 이끌고 우리의 바로 앞, 진국으로 나와 있는 상태다.”
“잘 됐습니다. 수춘성이 평지에 지어진 성이라 방어가 취약하다지만 그래도 규모가 큰 대성이니 떨어뜨리는 게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같이 행군하고 있는 근황병, 마가군, 조조군이 연합해서 원술과 회전을 벌일 수 있겠군요.”
“그래. 우리에게 큰 공을 세울 기회가 왔다네. 첫 회전에서는 보나 마나 우리 연합군이 대승할 것이다. 문제는 도망치는 원술을 추격하는 건데, 추격은 마가군의 특기지. 잘하면 우리가 원술을 잡을 수 있겠군.”
“그리고 어쩌면… 주인을 잃은 수춘성으로 바로 달려서 수춘을 얻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 설마 유비군이 벌써 수춘성을 공격하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야.”
마초의 눈이 자신만만하게 빛났다. 아무래도 이번 원정에서는 좋은 일만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