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맹호과강(猛虎過江)
강동.
서에서 동으로 흘러온 장강은 형주를 지나 양주 파양군에 이르면 방향을 틀어 북동쪽으로 흐른다. 그러니 장강 하류의 이남 지역은 장강의 남쪽이면서 또한 동쪽이 되는 것이다. 이 땅에 강동이라는 이름이 붙은 연유다.
오늘날 상하이 같은 대도시가 들어서며 중국 대륙에서 가장 번화한 이곳이지만 후한대에는 대부분 밀림이 우거진 미개척지였다. 당연히 난세에 접어들자 중앙의 통치력이 가장 먼저 마비되었으니 사람들은 거칠고 지방 호족의 힘이 강했다. 말 대신 배를 타고 다닌다는 점, 그리고 식량과 물산이 풍족하다는 점을 빼면 서량과 비슷한 오지라고 할 수 있다.
본래 장강 일대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군웅은 원술이었다. 그의 근거지는 장강의 북쪽, 회수의 남쪽인 회남의 수춘성에 있었다. 그는 휘하 장수 손책에게 약간의 병마를 떼어 주며 강동의 호족들을 굴복시키라 지시했다.
손책은 원술의 지시를 아주 충실히 이행했다. 강동의 호족들은 손책이 거느린 얼마 되지 않는 병마를 당해 내지 못하고 하나둘씩 굴복했다.
문제는 손책이 임무를 완수한 뒤 원술에게 돌아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이들과 함께 강동의 회계군에 자리 잡고 회계태수를 자칭했다. 그리고 주변의 고을들을 복속시키고 강동에서 자신의 세력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그런 그를 달래기 위해 토역장군이라는 벼슬을 내렸다. 역적을 토벌한다는 뜻이니 아무 무장에게나 붙일 수 있는 장군호가 붙은 잡호장군직이었다.
그렇게 되어 손책은 강동에서 만만치도 않고 대단치도 않은 정도의 세력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가 강동의 호랑이라 불리던 용장 손견의 아들이라는 점, 가는 곳마다 싸워 이기고 명성이 높다는 점, 불과 스물셋의 나이로 강동에서 가장 유력한 인물이 되었다는 점을 보면 만만치 않았다. 그에게 배경이 되어 줄 가문이 없다는 점, 강동이 천하의 중심지에서 너무 멀고 지형이 험하다는 점, 거느린 인마의 수가 적다는 점을 보면 그리 대단치 않았다.
“그래서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손책은 자신의 군막을 찾아온 손님에게 물었다. 건장한 체격에 위엄 있는 외모를 한 30대 남자가 그의 앞에 서 있었다. 남자는 수염을 한 번 쓸어내리고 말했다.
“그저 덕왕촌의 사람들이 지금까지처럼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우리는 도교를 믿는 사람들이니, 조용히 밭을 갈며 원시천존의 뜻을 따라 살고 싶을 뿐입니다.”
“으흠. 원시천존이라.”
손책은 대답 대신 부지깽이를 들어 옆에 놓인 화로를 뒤적거렸다. 화로에 놓인 풀이 타오르며 파란 연기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손책은 가슴을 크게 부풀려 연기를 들이마셨다. 심신이 나른해지고 오감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손책은 왠지 웃음이 나서 피식거리기 시작했다.
“그대들이 알려준 방법대로, 이렇게 삼(大麻)을 태워서 연기를 마시니 꼭 원시천존을 모신 것 같구만. 원시천존은 참으로 자비로운 분이 틀림없나 보군.”
대마의 실을 뽑아서 만드는 삼베는 기원전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널리 쓰여 온 옷감이다. 그러나 고대인이라고 대마로 실만 뽑았던 건 아니었는지, 중앙아시아와 중국 신강의 기원전 유적에서는 원시적인 형태의 대마초 흡연 흔적이 발견된다.
건장한 체격의 남자는 연기에 취해 있는 손책을 보며 티 나지 않게 비웃음을 흘리고 말했다.
“손 장군께서 우리 태평도의 비술에 관심을 보이실 줄은 몰랐습니다. 원래 이러면 안 되지만, 원하신다면 제가 우길 선인께 청해서 더 구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손 장군께만 특별히 말이지요. 대신…….”
“대신?”
손책의 눈썹이 꿈틀했다. 손책은 한껏 조소를 띠며 자리에서 일어나서 남자에게 다가갔다. 당황한 남자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손 장군?”
쾅!
손책은 남자의 머리를 잡고 그대로 탁상에 처박았다. 탁상이 부서지며 피가 어지럽게 튀고 남자의 얼굴이 땅에 부딪혔다. 코가 으깨지는 소리가 나며 이빨 여러 개가 허공으로 날았다.
“컥…컥…….”
“엄백호. 뭔가 착각하고 있구나.”
손책은 버둥거리는 엄백호를 한 손으로 너무나도 쉽게 눌렀다. 엄백호는 손책보다 훨씬 큰 체격에 나름대로 무공을 익힌 몸이었다. 그러나 엄백호의 머리를 쥔 손책의 손아귀 힘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 억셌다.
“네놈이 직접 찾아온 용기는 높이 산다. 기껏해야 네놈 아우 엄여나 보낼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그런데 너는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다. 나는 네놈과 거래를 하기 위해 이곳, 오군까지 온 게 아니다.”
“커억, 손 장군…….”
“닥치고 들어라. 네놈들을 죽이는 것도, 살리는 것도 내가 결정한다. 우길 선인께 청한다고? 네놈과 그 우길이라는 놈의 목이 아직 머리에 붙어 있는 건 내가 네놈들을 살려 두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감히 내게 요구하지 마라. 내가 요구하는 것에 토를 달지도 마라.”
엄백호는 땅에 처박힌 얼굴을 힘겹게 들어 손책과 눈을 맞췄다.
깎아 놓은 듯 잘생긴 청년이었다. 그러나 마치 호랑이의 그것처럼 사나운 눈매가 그의 미모를 가렸다. 노란 눈동자에서 숨이 막힐 것 같은 압박감이 느껴졌다.
도교 신자들이 모여 사는 덕왕촌의 촌장 엄백호는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해야 이 작은 폭군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인가?
“컥, 손 장군.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인이 무엇을 해야 이 은혜를 갚을 수 있겠습니까?”
“가서 우길이라는 놈에게 전해라. 이런 요사스러운 술법으로 사람들을 홀리는 건 적당히 하라고. 네놈들이 나를 강동의 지배자로 인정하고 공물을 바친다고 하니 일단은 살려 두겠지만, 혹시라도 엉뚱한 짓을 하는 날에는 강동 땅에서 태평도의 씨를 말릴 것이다.”
엄백호는 속으로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러나 입에서는 속마음과 전혀 다른 말이 나왔다.
“여,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저 장군께서 명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잠시 후, 손책이 손아귀에 힘을 풀고 일어났다.
“잘 선택했다. 그 뜻을 잊지 마라. 나는 아직 너희들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도 명심하라.”
“물론입니다.”
손책은 군막을 나갔다. 손책의 시중을 들던 여인이 재빨리 다가와 엄백호의 상처를 살피고 약초를 펴 바르기 시작했다. 그런 그에게 옆에 있던 주유가 쓴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엄 대인께서 이해하십시오. 손 장군이 말은 저렇게 하지만 덕왕촌에 무리한 요구를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주유는 손책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20대 초반의 젊은이였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그의 목소리는 마치 여러 사람이 입을 모은 듯 소리가 풍부했다. 고급스러운 옷차림과 단정한 몸가짐이 그가 명문가의 자제임을 말해 주었다.
그리고 그는 대단한 미남자였다. 영준하거나 수려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한 번 보면 그 이목구비가 머릿속에 각인돼서 잊히지 않는, 죽을 때까지 한 번 만날 수 있을까 싶은 비현실적인 외모의 소유자였다.
‘이 사내가 주랑인가. 짝을 찾을 수 없는 미남이구나.’
옛날 춘추시대의 절세미남 송옥이 이랬을까. 이미 강동의 여인들 중에 주유를 모르는 이가 없었다. 이름보다 주랑이라는 애칭으로 더 유명해져 있는 그였다.
주유는 엄백호의 손을 잡고 눈을 마주치며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설명했다. 강동의 유력자라는 게 대부분 탐관오리다 보니 손책이 첫 대면에서는 일부러 거칠게 대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만큼 민심을 얻는 걸 중요시하니 덕왕촌에는 아무 해가 없고 오히려 손책의 보호 하에 들어가서 이득만 볼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엄백호는 주유의 얼굴을 코앞에서 보며 옥음을 듣자 정신이 혼미해져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남색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그다. 그러나 주유의 미모는 그런 성적 지향마저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여인들 사이에는 주유 앞에 서면 성욕조차 사라지고 경건한 마음만 든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과연 그런 소문이 나돌 만한 절세의 미남자였다.
엄백호는 겨우 힘을 짜내어 말했다.
“알겠습니다, 주유 장군. 덕왕촌에 가서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참으로 고맙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약소하지만…….”
주유는 엄백호의 손에 남방의 귀한 향신료를 잔뜩 안겼다. 항복하러 온 사람에게 주기는 너무 비싼 물건이었다.
“손 장군께서 전하는 것입니다. 이제 강동군과 덕왕촌이 한 식구가 되었으니까요.”
“아, 알겠습니다.”
“우길 선인께도 잘 말씀드려 주십시오. 손 장군이 강동을 쥐면 강동 백성들이 태평도를 믿을 것이고, 천하를 쥐면 천하 만민이 태평도를 믿을 것입니다. 정히 손 장군이 껄끄러우시면 이 주유에게 따로 말씀하셔도 됩니다.”
주유는 따뜻한 목소리로 엄백호를 달랬다. 엄백호는 연신 고개를 숙이고 군막을 빠져나갔다. 손책이 나간 반대편이었다.
잠시 후 주유도 군막을 나왔다. 군막 밖에서는 두 장수가 웃통을 벗고 씨름판을 벌이고 있었다. 먼저 나간 손책은 병사들 사이에 섞여 앉아 그 모습을 같이 지켜보고 있었는데, 병사들처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한쪽을 응원하고 있었다.
“자명(여몽의 자), 이 멍청아! 너에게 걸었다고! 내가 가르쳐 준 대로 하란 말이다!”
“주공, 시끄러우니 조용히 좀 해 봐요!”
씨름판에는 9척 장신의 거한과 앳된 소년이 서로 허리춤을 맞잡고 겨루고 있었다. 누가 봐도 소년이 이길 방법이 없어 보였지만 좌중에서 손책만은 소년의 승리에 돈을 건 듯했다. 소년은 손책에게 퉁을 놓으며 계속 거한의 허리를 붙들고 힘을 썼다.
쿵!
그러나 허사였다. 거한이 한 번 힘을 쓰자 소년의 몸이 땅에 나동그라졌다. 병사들이 일제히 팔을 들어 올리며 환호하는 가운데, 오로지 손책만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오, 저 돌머리. 내가 그렇게 머리를 쓰라고 얘기했는데!”
“으하하, 손 장군은 자명이한테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리셨나 보오.”
“그렇게 내기마다 져서 봉록이 남기는 하오?”
병사들의 농에 손책이 씩씩거리며 외쳤다.
“시끄러워, 이놈들아! 두고 보라고! 언젠가 자명이가 머리만 제대로 쓰게 되면 강동 제일의 무장이 될 예정…이긴 한데, 그래도 씨름으로 유평(주태의 자)을 이기는 건 어려우려나?”
소년 자명의 자질에 대해 역설하던 손책의 목소리가 갑자기 잦아들었다. 얼마 전 귀부한 9척 장신의 거한 유평이 너무나도 강한 탓에 자명에 대한 확신이 흔들린 탓이다.
잠자코 그 모습을 보던 주유는 손책의 옆에 앉았다.
“엄백호가 돌아갔다.”
“그래. 공근(주유의 자), 네가 엄백호를 죽이면 안 된다고 해서 나도 엄청나게 노력했다.”
“노력한 게 그 정도냐?”
“괘씸하잖아. 교묘한 속임수로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는 무리들이다. 생각 같아서는 전부 다 잡아 죽이고 싶지만… 네가 하도 안 된다고 하니 참는 거다.”
주유는 손책을 보며 피식 웃었다.
“엄백호는 오군의 군벌이면서, 또한 태평도의 도사이기도 하지. 아직 태평도와 척을 질 때가 아니다. 태평도는 강동 백성들에게 영향력이 크니까.”
“그래. 우리 강동군이 기댈 곳은 오로지 강동의 민심뿐. 나 또한 어느 시점까지는 참을 테니 걱정하지 마라.”
어느 시점.
그것은 손책이 강동 전체를 완전히 틀어쥐는 시기를 말한다. 손책은 그때가 오면 혹세무민의 죄를 물어 엄백호는 물론, 그 위에 있는 태평도 교단의 총수 우길을 제거할 생각이었다.
주유는 잔잔한 미소를 띠고 그런 손책을 바라봤다. 이 혈기 넘치는 청년은 자기 사람에게는 간이라도 빼 줄 것처럼 살갑게 군다. 그리고 자기 사람이 아닌 자에게는 항우 못지않은 폭군이었다.
씨름판을 구경하던 병사들의 시선은 어느새 주유에게 옮겨 가 있었다. 그의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병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주유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심지어 얼굴을 붉히는 자들도 있었다.
해가 저물기 시작하자 씨름판은 폐하고 저녁 식사 시간이 됐다. 그날 밤, 저녁 식사가 끝난 후 손책은 휘하 강동군의 장수들을 군막으로 불러 모았다.
여몽과 주태, 장흠과 진무, 동습과 능조.
모두 20대의 젊은 청년들이었다. 키가 작고 동안인 여몽을 제외하면 하나같이 체격이 건장하고 인상이 험악했다. 손책에게 귀부하기 전에는 하나같이 장강의 무법자였던 인물들이다. 엄숙해야 할 군의 자리지만 다들 제멋대로 퍼질러 앉아 한껏 편한 자세로 손책을 바라보고 있었다.
“좋아. 모두에게 긴히 할 얘기가 있다.”
좌중의 시선이 손책에게 꽂혔다. 손책은 여섯 명의 부하들과 하나씩 눈을 맞추며 말했다.
“이번 출행은 단순한 훈련이 아니다. 강동군에서 가장 빠른 부대들만 모아서 최고속도로 기동하는 것을 연습한 것이다. 우리는 일단 회계로 돌아가서 태사자와 합류한다. 이후 부대를 정비해서 이 진용 그대로 다시 한번 출진할 것이다. 너희들 중 어디로 출진하는지 짐작하는 녀석이 있나?”
침묵이 흘렀다. 개중 그나마 학식이 있는 편인 장흠이 대답했다.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자랑이다.”
잠자코 있던 여몽이 끼어들었다. 젊은 무법자들이 모인 강동군에서도 가장 어리고 가장 무식하다는 그였지만 이상하게 군의 자리에 오면 눈이 더 빛났다.
“주공. 이제 강동에는 이 정도 진용을 갖춰서 출진할 곳이 없습니다. 유요, 왕랑, 허공을 주공이 전부 쓸어버리지 않았습니까. 마지막으로 남은 엄백호에게는 오늘 귀부를 받으셨지요.”
“자명이는 아주 가끔 똑똑한 소리를 하는구나. 그래, 이제 강동에는 우리 적수가 없다. 우리가 출진할 곳은 강동이 아니다.”
무법자들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손책은 싱긋 웃고 말을 이었다.
“우리는 장강을 넘어 서주로 간다. 그곳에서 한바탕 큰 싸움을 벌일 것이다. 우리의 상대는 유비. 항상 십 분지 일의 병력으로 황건적과 원소, 조조와 맞서 싸워 온 자다.”
손책은 마치 소풍이라도 가는 사람처럼 신나서 말했다. 주유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주태는 여전히 표정이 없었고, 셈이 빠른 장흠은 뭔가 생각하더니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진무와 동습은 주먹을 불끈 쥐며 투지를 내보였다. 능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몽은 설렘으로 손발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장강을 넘는다.’
큰 공을 세우려면 결국 가야만 하는 길이다. 수년간 매일 꿈꿔 온 일이기도 하다.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고개를 들었을 때 손책과 눈이 마주쳤다. 손책의 노란 눈이 번쩍거리는 빛을 내고 있었다.
“중원에 보여주자. 강동군이 어떻게 싸우는지.”
“존명!”
제멋대로 앉아 있던 강동군 장수들은 어느새 정렬해 있었다. 일제히 손책을 향해 손을 모아 군례로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