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마초연의-153화 (153/306)

153화. 근황병 다시 일어서다 (2)

천자를 뵙는 예법은 따로 있다. 그러나 평복 차림으로 근황도독부에 나타난 천자 유협은 번잡스러운 예를 모두 생략하고 자리에 끼어 앉았다.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닌 듯, 황보숭은 유협에게 상석을 내주고 익숙한 태도로 자리에 앉았다.

“원술은 스스로 천자를 참칭한 역적이다. 짐은 곧 역적 토벌의 조서를 낼 것이다. 이는 사공 조조의 건의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유협의 말을 들은 마초가 직설적으로 되물었다.

“조서는 누구에게 내려갑니까?”

“사공 조조, 서주목 유비, 형주목 유표, 그리고 근황대도독 황보숭이다.”

유협은 원술과 땅을 맞대고 있는 유력한 제후들의 이름을 전부 열거했다. 게다가 조정 내 근황파의 수장인 황보숭에게도 같이 조서를 내려서 원술 토벌에 참여시킬 셈이었다. 마초는 고개를 끄덕였다.

‘묘안이군. 황보 대도독이 이끄는 근황병을 하나의 세력으로 천하에 공인받게 하려는 것인가.’

원술은 가진 땅은 넓으나 군사적 업적은 거의 없다. 즉, 싸움만 하면 졌다. 원술의 휘하에는 군사적 업적을 쌓아 줄 강력한 무장이 없고, 전장을 아우를 만한 유능한 군사도 없었다. 그러니 원술을 토벌하는 것뿐이라면 조조 혼자 나서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조조 단독으로 원정에 나서자니 유비가 후방을 노리는 게 부담스럽겠지.’

그러니 조조와 유비가 공동 작전을 하게 한다. 그 정도면 원술을 치는 데 부족함이 없는 인선이다. 유협은 여기에 황보숭을 더했다. 자신의 측근인 황보숭이 조조, 유비와 같은 자격으로 근황병을 이끌고 참전하게 만들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형주목 유표에게까지 조서가 내려간 것은… 사공 조조의 의중이 반영된 것입니까?”

“그렇다네. 유표는 원소와 조조 중 어느 진영에 설지 결정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지. 그러나 아무래도 원소 쪽에 설 것이라는 의심이 드네. 병법에 ‘멀리 있는 자와 사귀고 가까이 있는 자를 때리라(遠交近攻)’는 말이 있는데, 원소는 유표 입장에서 멀리 있고 또 강성하니까. 그러니 이번 참전을 계기로 원소와 유표 사이에 틈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공의 진언이 있었네.”

만약 유표가 원술 토벌에 참여한다면, 이를 계기로 유표를 반 원소 연합으로 끌어들인다.

만약 참여하지 않는다면, 피아를 분명히 하고 유표를 견제할 생각일 것이다.

‘원래의 역사에서 유표는 원소의 편을 들기는 했지만 거의 움직이지 않았지. 아마 누구의 편을 들더라도 크게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유표가 가진 한계였다. 유표는 군벌 출신이 아니라 그저 조정의 관리였을 뿐이다. 정치력 하나로 형주를 장악하고 일약 군웅의 자리까지 올라섰지만, 원정군을 내보내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유표가 형주 군부에 그 정도의 영향력이 있는지 장담하기 어려웠다.

‘어쨌든 일이 이렇게 됐으니 원술은 올해를 넘기기 어렵겠군. 그러면 이런 정세 속에서 우리 마가군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마초는 잠시 생각한 후 유협을 보며 말했다.

“폐하. 마가군에도 역적 토벌의 조서를 내리심이 어떻습니까? 이 기회에 근황에 뜻을 둔 제후들을 전부 모아서 하나로 결속하는 것입니다.”

“그대와 관중도독의 충심은 짐이 잘 알고 있는데 굳이 조서를 내서 답변을 받을 필요가 있겠는가? 게다가 관중에서 회남까지는 너무 먼 길이니 괜히 원군을 보낸다고 사람과 물자만 소모하지 않을까 걱정이네.”

어차피 우리 편인 걸 다 알고, 현실적으로 군사를 보낼 수 있는 거리도 아닌데 굳이 조서를 낼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 또한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번 싸움에는 참전하는 것이 좋다. 어차피 조조군과 유비군이 동시에 참전하면 원술 따위가 버텨낼 리 없다. 그들에게만 군공을 줄 수는 없지.’

원술의 패망은 당연지사. 그렇다면 마가군도 한 몫 거들고 군공을 챙기고 싶었다. 원술의 영지가 멀리 있으니 실질적인 경제적 이득은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나 천자의 조서를 받아 역적을 토벌했다는 것은 향후 중요한 정치적 자산이 될 것이다.

그리고 마초에게는 또 하나의 목적이 있었다.

‘원술의 근거지 회남은 수로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어서 관중이나 서량과는 지형이 전혀 다르다. 군사들이 이번 기회에 남방의 싸움을 경험하면 훗날 천하를 놓고 중원에서 싸울 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마가군의 용장들이 지금 이곳에 있습니다. 보급선의 문제가 있으니 대군이 움직이기는 힘들겠지만, 소수의 기병대라도 불러온다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마가군 기병의 무위는 폐하께서도 직접 보시지 않았습니까?”

“그대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짐이 굳이 반대할 이유가 있겠는가. 관중도독에게도 조서를 내겠네. 그러나 무리할 필요는 없네.”

유협은 마초의 속내를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한 언제 자신을 위협할지 모르는 조조보다는 장안에서 자신을 구출해 준 마가군 쪽이 믿음직했다.

연회는 천자 유협이 동석한 채 다시 이어졌다. 황보숭과 조운, 마우, 충소는 그렇다 치고 종요까지 이 상황이 익숙한 듯 천자와 술잔을 주고받았다. 아무래도 이들은 모두 천자의 신임을 받는 측근들인 모양이었다.

마초는 그 모습을 보고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차피 죽을 목숨을 내가 살리거나, 아니면 내가 직접 천거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상서복야 종요는 무려 영천 호족이 아닌가? 이 자를 포섭한 걸 보면 소년 천자가 수완이 보통이 아니구나.’

원래의 역사에서도 유협은 영민한 군주가 될 자질을 몇 차례 내보였다. 다만 그를 둘러싼 가혹한 환경 때문에 그 자질을 꽃피우지 못했을 뿐이다.

그리고 이제 마초에 의해 역사가 바뀌었다. 주체적으로 결단을 내린 경험과 마가군이라는 든든한 후원자, 근황병이라는 작지만 실질적인 힘까지 손에 쥔 천자는 원래의 역사보다 훨씬 더 영민하게 자신의 영역을 만들어 갔다.

그렇게 되니 조조의 일성이 자꾸 마음에 남았다.

‘자네의 대의는 천자가 자네 뜻대로 움직여 줄 때만 가능한 것일세. 정치란 그렇게 이상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야.’

마초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조… 그대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나는 정치를 잘 모른다. 그저 서로의 죽은 형제를 두고 맹세한 저 소년의 진심을 믿을 뿐.’

그리고 어떤 난관이 있더라도 나의 대의를 관철할 뿐.

‘나는 찬탈을 할 생각도, 권신이 될 생각도 없다. 모든 일이 끝나면 그저 조용히 살고 싶을 뿐이다. 큰 욕심이 없으니 나중에 천자와 대립할 일도 없다.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천자를 꺾으면 그만이다.’

마초는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은 그저 자신의 대의를 밀고 나갈 때인 것이다.

* * *

연회 자리는 밤이 깊어서야 파했다.

천자 유협은 근황도독부의 후원에서 가만히 별을 바라보고 있었다. 초여름의 밤하늘에는 곧 쏟아질 것처럼 많은 별이 떠 있었다. 이제 궁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지만 가끔씩 쐬는 바깥 공기가 참 좋았다. 조금이라도 더 머물고 싶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십니까.”

마초가 다가와서 물었다. 유협은 마초와 몇 마디 정담을 나누다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익주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생각하시는 대로입니다. 조조가 수하들을 보내 신을 암살하려 했습니다.”

“역시 그런가. 조조가 뒷공작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관서와 익주를 전부 근황파 제후들이 차지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을 테니까.”

“게다가 신의 목숨도 그만큼 가치 있다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그의 수하들이 아주 집요하게 신을 노렸습니다.”

“그런 어려움을 뚫고 용케 살아 돌아왔구나.”

“폐하, 일전에 아뢰지 않았습니까. 신은 영웅입니다. 조조 따위에게 죽지 않습니다.”

“하하하, 짐이 잠시 잊고 있었노라.”

마초와 유협은 그 나이 때의 평범한 젊은이들처럼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었다.

몇 마디 한담을 나누고 나서 마초가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

“당분간은 조조와 맞서지 마십시오. 그는 지모가 많은 자입니다.”

원래의 역사에서는 조조의 권력이 지금보다 훨씬 강했다. 그 상황을 타개하고자 소년 천자는 장인인 동승을 시켜 조조 암살 계획을 꾸몄다. 그리고 그 계획이 실패하면서 돌이킬 수 없는 정치적 타격을 입게 된다.

유협은 말이 없었다. 그저 한숨을 쉴 뿐이었다. 마초는 그런 유협을 달래듯이 말했다.

“낙양으로 석공들을 보내 공사를 앞당기겠습니다. 낙양이 재건되면 신과 신의 아비가 조정에 입조하겠나이다. 그때까지만 참아 주소서. 지금은 조조가 천자를 끼고 제후들을 호령하고 있지만, 그 권세는 결코 영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유협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사공부.

본래대로라면 나라의 수리 사업과 토목공사를 맡아 보는 사공의 치소다. 그러나 사공 조조의 권한은 거기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는 대장군 원소를 예우하기 위해 자신의 관직을 사공에 머무르게 하고 있을 뿐, 실질적으로 조정의 군사, 인사, 재정을 모두 통괄하는 최고 권력자였다. 자연스럽게 사공부의 일도 나라의 모든 영역에 걸쳐 있었다.

그 사공부의 내실에 한 사내가 부복해 있었다. 마초에게 잡혔다 풀려난 곽가였다. 곽가는 거대한 내실의 한가운데 혼자 엎드려 있고, 그의 머리가 향하는 상석에는 조조가 있었다. 양옆으로 앉아 있는 이들은 사공부의 관리들 중에서도 조조의 최측근들이었다.

한참 동안 부복한 곽가의 뒤통수를 내려다보던 조조가 이내 입을 열었다. 차가운 목소리였다.

“꼴 좋구나, 봉효.”

뚝.

곽가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흘러 바닥에 떨어졌다. 죽음 앞에서도 의연하던 그였지만 진노한 조조를 대하자 온몸에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곽가는 힘겹게 입을 떼서 조조에게 대답했다.

“사공.”

“이제 나는 어쩌란 말이냐? 내가 여자각과 허중강의 유족들에게 뭐라고 해야 하느냔 말이다. 내 수하가 싸우다 죽었는데, 누구와 왜 싸웠는지도 말하지 못하게 되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곽가의 얼굴에서 흐르던 식은땀은 이제 몸 전체에서 흘렀다. 부복한 자리가 축축해질 만큼 많은 양의 땀이 바닥으로 흘렀다. 크지도 않은 몸에서 저만한 양의 땀이 흐를 수 있는지 놀라울 지경이었다.

“이제 관서에서 손을 떼라. 관리하던 정보선은 전부 정중덕에게 넘겨라. 나는 그대의 재주를 믿을 수 없다.”

“존명.”

“병법을 처음부터 다시 공부하라. 내가 근래 손자병법에 주석을 달고 있으니 그 작업이나 돕도록 하라.”

탁.

조조는 부복한 곽가의 옆에 손자병법서의 원고를 내던졌다. 명백한 강등이었다. 곽가는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죽간 꾸러미로 된 원고를 들고 내실을 나섰다. 정욱이 얼른 일어나 그런 곽가의 옆에 섰다.

“봉효, 그만하길 천만다행일세. 앞으로 당분간 쥐 죽은 듯 지내게.”

“정 공.”

곽가는 식은땀으로 번들거리는 얼굴로 쓴웃음을 지으며 조조가 던진 손자병법서를 들여다봤다.

“시계편(始計篇)인가. 이제 당분간은 손자병법서에 파묻혀 근신해야겠군.”

그때, 손자병법 시계편의 마지막 문장이 곽가의 눈에 들어왔다.

* * *

곽가가 나가고 나서도 무거운 분위기는 바뀌지 않았다. 조조의 옆자리에 앉은 순욱이 입을 열었다.

“사공, 원술 토벌의 건에 대해서도 논의하셔야 합니다.”

“원술 따위를 잡는 데 무슨 논의인가.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원술의 목을 가져올 수 없는 자가 누가 있겠나. 그 문제는 내일 얘기하세.”

“알겠습니다. 원술보다 더 큰 문제는 서주입니다. 이번에 서주의 유비와 공동으로 원술을 토벌하면 이후 서주를 취할 명분이 사라집니다. 어쩌면 후방에 유비의 위협을 그대로 둔 채 원소와 싸워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 문제는 조금 더 고민해 보세.”

조조는 그렇게 그날의 논의를 정리하고 백관들을 물리쳤다.

그리고 텅 빈 사공부의 내실에서 호롱을 켜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가 틈날 때마다 작업하고 있는 손자병법서였다.

한 시진 가까이 지났을 때, 내실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키가 크고 긴 수염을 기른 선비였다. 조조는 돌아보지도 않고 손자병법서에 놓인 서안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백달인가.”

“그렇습니다, 사공.”

사마랑, 자는 백달. 하내 사마가의 장남이었다. 조조는 사마랑을 앉게 한 뒤 물었다.

“그가 뭐라고 하던가.”

“좋은 대답을 했습니다. 유비가 원술을 치기 위해 움직이면 적당한 시기에 그가 유비의 뒤를 칠 것입니다.”

“잘 됐군. 자네가 애써 준 보람이 있군.”

“사공께서 밝게 헤아려 주신 덕분입니다.”

조조는 붓을 놓았다.

“그나저나 그 친구도 대단하군. 유현덕의 명성을 들어서 알 텐데 흔쾌히 붙어 보겠다니. 마초도 그렇고 그 친구도 그렇고, 요즘 젊은 놈들은 물불을 안 가린단 말이야.”

“그는 나이는 어리지만 강동의 호랑이라고 불리는 영웅입니다. 충분히 유현덕과 대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좋아. 서주 땅은 내가 폐허로 만들었으니 아깝지 않지만, 문제는 유현덕이다. 그가 서주를 기반으로 명성을 계속 쌓는 걸 내버려 두면 나중에 아주 곤란해지겠지. 이번 기회에 유현덕을 제거하도록 하세.”

유비군의 무력을 전담하는 건 관우와 장비다.

천자가 조서를 내려 원술을 치게 되면, 둘 중의 하나는 원술을 치기 위해 원정을 떠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조조의 계책은 그사이 다른 군벌을 끌어들여서 서주를 들이치는 것이었다. 그 계책을 위해 하내의 사마가가 강동 땅에서 암약하고 있었다. 순욱도, 곽가도, 자신의 친족들도 모르는 새 진행되는 일이었다.

사마랑이 물러간 후, 조조는 다시 손자병법서로 시선을 돌렸다. 시계편의 마지막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방비가 없는 곳을 공격하고, 헤아리지 않는 곳으로 나아간다. 이는 병법에 있어 승리하는 것이니 미리 알게 해서는 안 된다(攻其無備, 出其不意, 此兵家之勝, 不可先傳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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