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마초연의-149화 (149/306)

149화. 역경루의 침입자

건안 2년(197년) 2월, 역경루.

한때 유주를 제패하고 천하에서 가장 강성한 세력을 자랑하던 공손찬은 자신이 축조한 요새 역경루에 은거해 있었다. 역경루는 참호를 깊게 파고 그 위로 높은 성벽을 세워 높이가 6장(12m)에 달하는 성벽이 열 겹으로 둘러쳐져 있었다고 전해진다. 공손찬은 이 거대한 요새 안에 300만 석의 양식을 비축하고, 성안의 넓은 땅을 활용해 둔전까지 하면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병을 활용한 전투에 능하고 성품이 잔혹해서 북방의 귀신으로 불리던 공손찬이다. 상황이 좋을 때는 자신의 무력을 기반으로 하북에 왕국을 세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주목 원소에게 몇 번 패한 후 상황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원소가 3년 전 새로 영입한 기병대장 여포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강한 자였다. 그가 이끄는 검은 옷의 기병대 함진영은 기병 전술을 특기로 하는 공손찬군을 정면에서 짓밟을 만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역경루에 틀어박혀 때를 기다릴 것이다!”

10년이 지나도 공손찬은 50대 초반이니 충분히 천하의 패권을 노릴 수 있는 나이다. 앞으로 10년간 하북의 원소, 중원의 조조, 관서의 마등, 형주의 유표 같은 군웅들이 치열하게 다퉈서 서로 지치면 역경루에서 힘을 비축한 자신이 대군을 이끌고 나설 생각이었다. 그 와중에 황폐해지는 유주 땅이나 최악으로 치닫는 유주의 민심은 안중에 없었다.

그런 생각으로 지은 요새는 원소군이 아무리 공격해도 꿈쩍하지 않았다. 지난 1년간 국의, 안량, 문추 같은 원소의 맹장들이 숱하게 역경루를 두드렸지만 병사들만 상하고 물러났다.

그러나 오늘은 상황이 조금 달랐다.

“대체 어떤 놈이 쳐들어왔다는 말이냐?”

역경루의 한 누각. 공손찬이 노기를 띤 음성으로 묻자 부하 전해가 대답했다.

“함진영입니다. 남문을 두들겨서 벌써 적병 여럿이 성문을 넘었습니다.”

“침착하라. 역경루의 성벽이 10겹이라는 것을 잊었느냐? 적들이 한두 겹의 성벽을 돌파한다 한들 10겹의 성벽을 뚫고 무사히 성내에 진입할 수는 없다.”

전해는 불안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공손찬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전해가 느끼기에 오늘은 적병의 기세가 사뭇 달랐다.

‘이놈들은 보통 정예병이 아니다. 마치 두려움을 못 느끼는 것처럼 전진하지 않는가?’

잠시 불안에 싸여 있던 전해는 고개를 흔들어 두려움을 떨쳐 냈다. 10겹의 성벽을 가진 역경루가 그리 쉽게 뚫릴 리 없는 것이다.

역경루의 북쪽과 동쪽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다. 서쪽과 남쪽에는 10겹 성벽이 버티고 있고, 심지어 서쪽은 강이 흐르고 있다. 그러니 적이 넘을 만한 곳은 남쪽 성문뿐이다. 이곳만 잘 막는다면 아무리 여포와 함진영이라 할지라도 역경루를 쉽게 범할 수 없다.

공손찬은 전해를 보며 말했다.

“여포라는 놈이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이 역경루의 10겹 성벽은 넘을 수 없다. 지금쯤이면 그 사실을 충분히 알았겠지. 남문으로 가 보자. 오랜만에 여포놈의 낯짝을 한 번 봐야겠다.”

“하지만 주공, 남문에는 여포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남문의 습격을 지휘하는 것은 여포의 부장 고순입니다.”

“뭐라? 허허, 천하제일 용장이라던 여포도 이제 기백이 약해진 것인가. 10겹 성벽을 직접 타 넘을 엄두는 나지 않았던 모양이군.”

공손찬은 혀를 찼다.

‘난세에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서는 용맹이 필요하다. 그러나 용맹으로 이름을 날려 부귀영화를 얻으면, 바로 그 부귀영화에 찌들어 용맹이 시들게 되지.’

동탁이 겪었고, 이각이 겪었고, 공손찬 자신이 지금 겪고 있는 바로 그 문제였다. 여포도 별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였다.

쿵!

공손찬과 전해의 심장이 내려앉는 듯한 큰 소리가 울렸다. 그와 함께 누각이 통째로 흔들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 느낌이 아니라 분명히 누각의 천장이 부르르 떨며 흔들렸다.

“아니, 이게 무슨…….”

“지진이 일어난 것일까요?”

전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리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쿵!

쿵!

쿵!

방금 전보다는 작았지만, 분명히 비슷한 느낌의 소리였다. 공손찬은 황급히 누각의 창을 열어젖혔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한 순간, 경악해서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누각의 바깥에 세워진 수십 장 높이 전각들의 기와지붕을 타고 말을 탄 사내가 서 있었다. 피 같기도 하고, 불꽃 같기도 한 붉은 털을 뽐내는 거대한 준마였다. 그 위에 올라탄 사내는 팔 척 장신의 장한이었다. 투구 대신 작은 관만을 쓰고 있어 영준한 얼굴이 그대로 드러났다.

공손찬은 그의 얼굴을 익히 알고 있었다. 원소의 객장으로 있는 여포였다.

“여…여포…….”

너무 놀라니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적토마를 탄 채 지붕 위에 서 있는 여포는 고개만 돌려 공손찬이 있는 쪽을 돌아봤다. 머리에 쓴 관에 달린 산새의 깃털 두 가닥이 움찔거리며 공손찬 쪽을 향했다.

“거기에 있었나.”

두두두.

여포와 적토마는 그대로 지붕 위를 달렸다. 기와가 부서지며 어지럽게 파편이 튀었다. 튼튼하게 올린 지붕이지만 여포와 적토마의 무게를 감당하기는 어려웠다. 마침내 전각의 지붕이 내려앉는 순간, 여포와 적토마는 그대로 허공으로 솟구쳤다.

쾅!

여포와 적토마는 그대로 옆에 있는 누각의 창틀과 나무 벽을 부수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공손찬과 전해가 있는 바로 그 방이었다.

공손찬은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을 믿을 수 없었다. 떨림이 멈추지 않는 손을 간신히 진정시키고 목소리를 쥐어짰다.

“네, 네놈이 어, 어떻게… 이곳에…….”

“북쪽 절벽을 따라 내려왔다. 이런 험준한 지형을 잘도 찾아냈군.”

여포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방 안을 가득 메운 그의 거체 뒤로 절벽을 타고 병사들이 강하하는 것이 보였다. 어떤 진도 무너뜨린다고 함진영이라는 이름이 붙은, 여포가 자랑하는 부대였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전해가 경악하며 말했다.

“설마 북쪽 절벽을 말을 타고 내려왔다는 말인…….”

퍽!

전해는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여포가 휘두른 무기에 맞아 전해의 목이 날아간 것이다.

모든 것이 끝났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공손찬의 마음이 묘하게 평온해졌다. 그는 벽에 걸린 장검을 뽑아 들어 여포를 겨눴다.

“좋다. 내가 여기서 죽어 대업이 멈추게 된다면 이 또한 천명일지니. 네놈과 단기로 승부를 내겠다. 무인도를 뽑아라, 여포!”

“무인도보다 더 좋은 것으로 상대해 주마.”

여포는 천장을 한 번 올려다봤다. 적토마에서 탄 상태에서도 머리가 닿지 않으니 어지간히 높은 천장이었다. 그러나 관에 꽂은 산새의 깃털이 살짝 눌리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포는 인상을 찌푸리고 적토마에서 내려 공손찬에게 다가갔다.

여포가 다가오자 공손찬은 장검을 뽑아 들고 여포에게 돌격했다. 여포는 방금 전 전해의 목을 날린 그 무기를 오른손에 들고 뒤로 당겼다. 창날의 옆에 초승달 모양의 월아를 달아 찌르기와 베기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무기, 죽은 마휴에게 노획한 것을 본따 만든 방천화극이었다.

퍽!

옆으로 휘두른 방천화극의 일격에 공손찬의 장검과 두 팔과 몸통이 동시에 갈라져 하늘로 날았다. 가슴 아래로만 남은 공손찬의 몸은 몇 발짝 비척거리며 걷다 이내 바닥에 쓰러졌다.

머리와 어깨만 남은 공손찬의 상반신은 바닥에 떨어진 뒤에도 잠시 숨이 붙어 있었다. 공손찬은 폐가 온전치 않을 텐데도 용케 소리를 끌어올려 유언을 남기려 했다.

“10년만… 버텼다면… 내가… 패업을…….”

콰직!

여포는 공손찬의 머리를 발로 밟았다. 피가 높이 튀었지만 팔 척 장신인 여포의 얼굴까지는 닿지 않았다.

한때 북방을 호령하던 백마장사 공손찬은 자신이 지은 역경루의 최상층에서 머리가 으깨진 시체가 되었다. 잠시 후 절벽에서 줄을 타고 내려온 성렴과 위월이 여포가 있는 방으로 합류했다. 여포는 그들에게 역경루의 수습을 맡긴 후, 부녀자들이 있는 내실로 찾아 들어갔다. 공손찬의 첩과 며느리, 딸들 중 미색이 뛰어난 자가 있는지 확인해 볼 참이었다.

* * *

건안 2년(197년) 3월, 허도.

원소가 여포를 앞세워 공손찬의 세력을 멸했다는 소식이 닿았다. 이제 원소의 하북 제패는 기정사실이 되었다. 기주와 청주에서는 이미 원소가 왕이나 다름없는 권력을 행사하고 있고, 공손찬이 버티는 유주마저도 원소의 손에 떨어지게 된 것이다. 병주 또한 마찬가지였다. 흑산적 장연이 죽고 주인이 없어진 병주로 곧 여포가 진격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아니, 이미 진격하고 있다는 말도 있지. 이거야 원, 봉효가 없으니 어느 정보가 참인지 알기 어렵구만.”

사공 조조는 입으로 그렇게 엄살을 부리며 눈과 손으로는 연신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다 쓴 종이를 놓고 잠시 고민하던 조조는 이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양손으로 종이를 치켜들었다.

“이제 겨우 첫 장을 다 썼군. 문약(순욱의 자), 이것을 좀 봐주게.”

조조의 맞은편에 앉은 30대 중반쯤의 젊은 선비는 상서령 순욱이었다. 그는 우뚝한 코와 흰 피부를 가진 대단한 미남이었다. 앉은 자세는 꼿꼿하여 넓은 어깨가 도드라졌고, 아래로 갈무리한 다리도 유독 길었다. 눈빛과 표정은 차분하지만, 활력이 넘쳤다. 수염은 많지 않았다. 맞은편의 조조와 완전히 대조되는 외모였다.

순욱은 조조가 쓴 종이를 들고 읽기 시작했다.

“…병법이란 속이는 것이다. 힘이 있으면서도 없는 척하고, 군사를 내면서도 내지 않는 척하며, 가까이 있어도 먼 것처럼 하고, 멀어도 가까운 것처럼 해야 한다. 상대가 강하면 방비하고, 쉬려 하면 바쁘게 만들고, 친하면 멀어지게 한다.”

“방비가 없는 곳을 공격하고, 헤아리지 않는 곳으로 나아간다. 이는 병법에 있어 승리하는 것이니 미리 알게 해서는 안 된다.”

조조는 손자병법에 주석을 달아 해설서를 만들고 있었다. 오늘날 전해지는 손자병법은 전부 조조가 주석을 단 판본을 기준으로 재편집한 것이다. 이는 조조의 판본이 후대까지 그 가치를 인정받았음을 보여준다.

손자병법의 총론 13편 중 첫 장인 시계편의 원고가 오늘 완성되었다. 조조가 오늘 순욱을 부른 까닭은 이 원고의 검수를 맡기려는 것이었다.

“그래, 자네가 보기엔 어떤가? 쓸 만한가?”

“사공. 제가 어찌 사공이 집필한 병법서에 한 글자를 더하고 뺄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만한 재주가 없습니다.”

“겸양이 지나치면 예가 아니라 했네. 자네만 한 인물이 천하에 없다는 건 자네가 더 잘 알고 있을 것이야. 그러니 솔직하게 말해 주게. 괜찮은가?”

“천하의 명저입니다. 설령 이윤과 여상이라 할지라도 사공의 헤아림을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으하하하! 이 사람아, 그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

조조는 어린아이처럼 소리 내어 웃었다. 잠시 그 모습을 보던 순욱은 피식 웃음이 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참으로 꾸밈없는 사람이다.’

실로 그랬다. 조조는 여위고, 키가 작고, 수염만 텁수룩해서 미남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중년의 사내였다. 만성적인 격무 탓에 언제나 안색이 좋지 않고 눈 밑이 검었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 밝게 웃었다. 그가 웃기 시작하면 주변 사람들 모두가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또한 눈물도 많았는데, 그가 울기 시작하면 주변 사람들 모두가 슬픔에 잠겼다. 그가 분노할 때는 천하의 용장과 재사라도 그의 눈치를 보며 침을 삼키게 되었다.

한참을 어린아이처럼 깔깔거리며 웃은 조조는 다시 심각한 표정으로 순욱을 쳐다봤다.

“봉효가 없더라도 자네가 있으니 병법서는 어떻게든 완성할 수 있겠어. 하지만 그래도 역시… 가야겠지?”

“저는 반대합니다.”

“이 사람아, 그렇게 매정하게 굴지 말라고. 봉효가 자네에게 많이 대들긴 했지만, 자네가 아량을 좀 보여주면 안 되나?”

“그런 사사로운 이유가 아닙니다. 사공은 지금 천하에서 가장 중요한 분입니다. 마초처럼 흉폭한 자를 만나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찌하시렵니까?”

“내가 예전에 말하지 않았던가? 젊은 시절에는 나도 창술을 꽤 잘했다고.”

“사공. 그것은 필부의 용맹일 뿐입니다. 사공께서 무공을 지녔다 한들 지금에 와서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순욱의 말은 조목조목 옳았다. 조조는 그런 순욱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그래서, 우리 순령군은 끝까지 나를 말릴 생각이군.”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 같나?”

“듣지 않으시겠지요.”

“으하하하!”

조조는 다시 손뼉까지 치며 웃었다. 눈물까지 글썽이며 웃던 조조는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문약, 이번 한 번만은 나를 이해해 주게. 낙양에 가서 마초를 만나고 와야겠네. 그놈이 나보고 직접 와서 봉효를 데려가라고 하니 어찌하겠나? 호위는 단단히 하고 갈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

그뿐만이 아니다. 조조는 뛰어난 인물을 보면 사족을 쓰지 못한다. 틀림없이 마초가 너무 궁금해서 대면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것이다.

‘마초는 마등의 아들이니 사공의 밑으로 올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그걸 알면서도 뛰어난 인재 앞에서 정신을 못 차리는 게 조조다. 등용할 수 없다면 적어도 교류라도 하고 싶어 하는 게 분명했다.

순욱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결단하시는 것은 사공입니다. 한 번 결단을 내리시면 저는 그 이상 왈가왈부할 수 없습니다.”

“무슨 소리, 자네의 뜻을 거스르면서 내가 어찌 대업을 이룰 수 있겠는가? 나의 덕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니 너무 서운하게 생각지 말게.”

조조는 은근한 말투로 순욱과 한참 동안 정담을 나눴다. 순욱은 향기로운 차 석 잔을 마시고 일어났다.

순욱이 나간 후, 조조는 손자병법서의 원고를 한참 들여다보다 혼잣말을 했다.

“이윤과 여상이라.”

순욱은 자신의 원고를 보고 이윤과 여상 같은 재주라고 평했다.

상나라 탕왕을 보필한 명재상 이윤.

주나라 무왕을 보필한 전략가 여상.

둘 다 왕이 될 만큼의 재주가 있었지만, 신하로 남은 인물이다. 순욱은 자신에게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손자병법을 들여다보던 조조는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되뇌었다.

“문약이 생각을 바꿔야 할 텐데.”

만약 그렇지 않으면 그와의 인연은 비극으로 끝날 것이다. 그런 일은 피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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