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득남하는 마초
다음날 마초는 성도를 떠났다. 그리고 며칠 후, 가맹관에서 곽가를 사로잡고 장안으로 귀환하게 되었다.
돌아가는 길 위에서 나관중이 물었다.
“그 날은 맹획과 밤새 무슨 얘기를 하신 겁니까?”
“그게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기억이 잘…….”
술은 가슴 속에 품은 이야기를 털어놓게 만든다. 술이 있어야만 내밀한 이야기와 진한 감정들을 나눌 수 있다.
문제는 술은 그 모든 것들을 잊어버리게 만든다는 것이다.
“아니 그럴 거면 술은 왜 그렇게 많이 드신 겁니까? 술을 썩 좋아하시는 것도 아니잖아요?”
“으음… 사내들이 그렇지 뭐. 술을 안 마시면 제대로 떠들지도 못하고, 술을 마시고 떠든 얘기는 기억을 하지 못하고. 나는 다시 태어나기까지 했는데도 별 수 없구만.”
마초는 씁쓸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잠시 말없이 말을 달리다 갑자기 손뼉을 쳤다.
“아, 맞아! 아주 중요한 얘기를 했었지!”
“예? 무슨 얘기요?”
“해마다 남중 특산물인 차(茶)를 보내라는 얘기. 지난 생에 촉 땅에서 표기장군까지 하다 보니 좋은 차를 많이 마셨지. 그래서 사실 지금 마시는 차들은 영 성에 차지 않아.”
“고작 그게 답니까? 인생에 대한 조언 같은 건 안 하셨어요?”
“아니, 사는데 꼭 필요한 조언도 해 줬지. 혼인은 착하고 순종적인 여인과 해라. 그게 여의치 않다면 적어도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여인과 무공을 익힌 여인만은 피해라. 절대로! 반드시! 기필코!”
“…….”
마초가 결혼은 유순한 여인과 하는 게 좋다며 한참 동안 열변을 토했다. 묵묵히 듣고 있던 나관중은 웃으며 그런 마초를 달랬다.
“그러고 보니 주공께서 큰 결단을 하셨지요. 이번에는 태양부인께 제가 꼭 얘기하겠습니다. 태양부인께서도 틀림없이 기뻐하실 겁니다.”
“아아, 오 황후 말인가. 아니, 이번 생에는 황후가 아니니 오 부인이라고 해야지.”
유범과 유탄의 동생 유모에게 시집갔다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오현. 원래의 역사에서는 나중에 유비와 재혼해서 황후가 되는 여인이다. 모시던 주군의 후처이니 마초에게도 익숙한 인물이었다.
오현의 오라비 오의와 오반은 유탄의 편에 서서 싸우다 마초에게 사로잡힌 후 귀부했다. 오의는 유범의 편에 서고, 오반은 마초를 따라 장안으로 가서 마가군에 합류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오현의 거취가 문제가 되었다. 오현은 이대로 과부로 생을 마치기에는 너무 유력한 집안의 여인이고, 나이도 너무 젊었으며, 영민한 머리와 현숙한 인품으로 이름이 높았고, 심지어 성도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 절세미인이었다. 유범은 오현을 두고 마초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제수의 사정이 너무 딱하게 됐소. 명망 높은 오씨 가문 출신에 인품이 훌륭하고, 무엇보다 저렇게 젊은데 말이오. 그래서 말인데, 복파장군이 첩으로 들이시면 안 되겠소?”
“안 됩니다.”
마초는 단호하게 유범의 제의를 거절했다. 익주로 떠나기 전날 밤, 양하원이 화사하게 웃으며 건넸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만약 익주 미인과 놀아났다는 말이 내 귀에 들어오는 날에는 상공은 머리 깨진 시신이 됩니다.
비단 아내의 협박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난 생에서 주군 유비의 아내였던 사람을 첩으로 취하는 것이 영 께름칙했다. 그런 상황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겠으나 마초는 그렇지 않았다.
유범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다고 제수가 계속 과부로 삶을 보내게 하는 것도 너무 안타까운 일이오. 오씨 가문의 일원이니 복파장군 같은 인물이 아니면 첩으로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좋은 가문의 총각과 혼인하기에는 과부라는 점이 마음에 걸리는구려.”
“유 익주께서 적당한 혼처를 물색해 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우리 집안의 며느리였으니 익주 호족과 재혼하는 게 쉽지 않소. 복파장군께서 장안에 제수의 거처를 마련하고 재혼할 때까지 돌봐 주시면 안 되겠소? 그에 필요한 재물은 내가 넉넉히 챙겨 드릴 것이오.”
“으음…….”
그리하여 장안으로 향하는 마초의 행렬에 오현도 합류하게 되었다. 장안에 도착하면 여기저기 혼담을 넣어 볼 셈이었다.
나관중은 오현의 이야기를 하며 웃었다.
“오 부인이 지난 생에 황후였던 걸 태양부인께서 어찌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주공께서는 태양부인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절세미인 첩을 들이는 것도 거절한 것으로 하시지요.”
“그래, 돌아가면 자네가 잘 얘기해 보라고.”
마초는 처음으로 나관중이 든든하게 느껴졌다.
‘역시 그때 이 녀석을 구해 내길 잘했어.’
처음 나관중과 만난 지 어느덧 4년이 지났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나 교류했지만, 그중에서도 나관중은 특별했다. 그는 마초가 회귀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고, 본래 이 시대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마초 입장에서도 편견이나 계산 없이 온전히 속내를 내비칠 수 있는 사람은 나관중이 유일했다.
* * *
며칠 후 마초 일행은 장안에 닿았다. 떠날 때는 없었던 황권, 감녕, 포원, 동화, 등지, 등방, 엄안, 왕평, 오반 등 수많은 인물이 함께했다. 맹획과 올돌골이 빠진 빈자리를 그리워할 틈도 없이 정신없는 인사이동이 시작되었다.
새로 영입한 인물들로 인해 마초의 소원도 이루어졌다.
“드디어… 서황이 문관직을 떼는구나!”
서황은 다시 거기장군부 편장군으로 돌아와서 마가군 전체의 연병을 맡아 보게 되었다. 동화, 등지, 등방이 그가 있던 자리를 채웠다.
군사장군 법정은 조금 더 문관직에 머무르기로 했다. 순유와 같이 추진하던 일이 있으니 몇 달 안으로 그것만 마무리하고 군사로 돌아오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그의 빈자리는 일단 부군사장군 황권이 메우기로 했다.
감녕은 위수독으로 위수의 수군을 통괄하게 되었다. 장강 유역에서 나고 자란 그는 위수가 어떤 강인지 알지 못했다. 처음 마초가 관서 수군의 총대장 자리를 주겠다고 했을 때는 짐짓 기뻐했던 그다. 그러나 부임 첫날 위수의 실체를 본 순간 감녕의 기대는 무참히 깨졌다.
“이런 제길, 이건 그냥 시냇물이잖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저래 봬도 저 강이 전국시대의 진나라를 키운 강이라고. 게다가 전략적으로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
“아니 시냇물에서 무슨 수군을 조련합니까?”
마초는 거대한 장강에 비하면 아담한 크기의 위수를 보고 툴툴거리는 감녕을 달랬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 위수를 제압하는 것이 먼저다. 위수는 황하로 흘러드니, 위수를 평정하면 황하로 진출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하북의 원소와 충돌한다면 황하를 끼고 싸울 것이다. 그때 황하를 통해 수군을 활용할 수 있는지 없는지가 전황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중원의 조조와 충돌한다면?
‘그때는 황하를 장악하는 게 더욱 중요하지.’
왕평은 마초의 새 당번병이 되었다. 맹획 대신 아장 마대가 왕평의 상급자로 같이 마초를 보필하게 되었다. 왕평이 매일 하고 있는 글 읽기는 조금씩 성과가 있어서 이제 간단한 글자는 외울 수 있게 되었다. 마초는 그런 왕평을 보며 흐뭇해했다.
“좋아. 이대로 삼 년만 공부하면 군문의 어떤 문서든 읽고 쓰는 데 문제가 없겠군.”
“복파장군. 저는 아직 한참 부족한데 글만 읽고 있어도 되겠습니까? 기왕이면 맹획 아장에게 하셨던 것처럼 무예나 지휘를 가르쳐 주시는 게…….”
“시끄럽고 글이나 열심히 배워라. 너는 글만 배우면 대성할 수밖에 없는 재목이다.”
사실 맹획이나 마대와는 가진 재능이 비교가 되지 않는다. 왕평은 글도 모르는 채로 장군이 돼서 흥세 전투에서 큰 승리를 이끌며 강대한 위나라에 치명타를 안긴 인물이다. 글을 익히게 해서 일찍부터 승진을 시켜 준다면 훗날 천하에서 손꼽히는 무장이 될 재목이었다. 마초는 그런 왕평을 제대로 한 번 키워 볼 생각이었다.
‘맹획도 떠나고 마음이 허전했는데 잘 됐지. 앞으로는 이놈을 괴롭히… 아니, 육성하는 데서 재미를 찾아야겠어.’
지금 마가군에는 숱한 명장들이 있는데, 마초의 지난 생을 기준으로 그중, 역사서에 가장 굵직한 족적을 남긴 인물은 마초 자신과 장료, 그리고 서황이다. 마초는 내심 왕평에게 그 이상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렇게 복파장군으로서의 공무를 정리한 마초는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갔다. 익주로 떠날 때 임신 초기였던 양하원은 어느새 만삭이 되어 있었다. 워낙 강건한 체질이라 그런지 배가 부른 상태에서도 거동에 힘이 있었다.
“흐음. 그래서 절세미인 오씨를 첩으로 들이라고 유 익주가 권했는데 상공이 거절했다고요?”
“그렇소. 비서랑에게 들은 대로요. 내가 밖에서 팔불출 소리를 들을지언정 부인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것에는 한 치의 물러섬도 있을 수 없는 것이오.”
“뭔가 수상한데.”
“수상하긴 뭐가 수상하다는 거요?”
“혹시 오 부인이 지난 생에서 알던 사람인 거 아니에요? 지난 생에서 친한 사람의 아내였으면 취하기 꺼려질 텐데.”
“그, 그게 무, 무슨 말…이오!”
마초는 자기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자신도 모르는 새 식은땀이 흘러 턱에 맺혔다.
‘여편네가 무슨 방술 같은 걸 쓰나?’
양하원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런 마초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피식 웃었다.
“됐어요. 첩은 들이고 싶으면 들이세요. 다만 조금만 더 기다려 봐요.”
“으응? 그게 무슨 말이오?”
“상공. 내가 정말 투기가 심해서 첩을 들이지 못하게 닥달했다고 생각하시나요?”
마초는 투기가 심한 것은 사실이지 않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간신히 집어삼켰다.
“…부인이라면 뭔가 깊은 뜻이 있을 것이라 짐작은 했소.”
“깊은 뜻까지는 아니고… 우리가 2년이 넘도록 아이가 없었으니까요. 상공이 적자가 없는 상태에서 첩을 들이고, 첩이 아들이라도 갖게 된다면 앞으로 큰 분쟁의 씨앗이 됩니다. 나는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경계했을 뿐이에요. 그러니 내가 아들을 낳을 때까지만 기다려 주길 바랐어요. 내가 아니라 마씨 가문을 위해.”
양하원은 씁쓸하게 웃었다. 마초는 그저 묵묵히 듣고 있었다.
“그리고 문제가 또 하나 있어요.”
“무엇이오?”
“뱃속의 아이가 발길질을 하는 걸 보니 느낄 수 있어요. 사내아이입니다. 그리고… 쌍둥이에요.”
“쌍둥이라고? 정말이오?”
“틀림없어요. 하나가 아니라 둘입니다.”
현대에는 축복으로 여겨지는 쌍둥이지만 고대에는 임신 이상을 일으키기 쉽기 때문에 걱정의 대상이 되었다. 양하원은 쓸쓸한 표정으로 마초를 보며 말했다.
“집안에 쌍둥이를 출산하다 몸을 상해서 돌아가신 분들이 둘이나 됩니다. 그러니 잠시만 기다려 봐요. 혹시 내가 잘못되면 첩을 들이지 말고 정실을 다시 맞이하세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초의 목소리가 커졌다.
다시 태어나서 다시 선택한 아내다. 지난 생에 자신의 불찰로 죽게 만들었던 과오를 절대 되풀이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런 아내를 난산으로 잃는 것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정작 그렇게 무거운 이야기를 풀어 놓은 양하원은 다시 처녀 시절로 돌아간 듯 장난기 넘치는 눈으로 마초를 놀리기 시작했다.
“내가 죽으면 누구와 혼인할 건가요? 예쁜 여자? 어린 여자? 지위가 높은 여자?”
“그야 유순한…이 아니라! 쓸데없는 소리 말고 부인은 몸조리에나 전념하시오.”
“그러지 말고 알려 줘 봐요. 만약 그렇게 되면 누구하고 혼인할 건데요?”
“안 하오.”
“만약 한다면 누구냐고요.”
“그렇다면… 그대를 가장 닮은 여인.”
젊은 부부는 그렇게 입에 발린 말들을 주고받으며 만삭의 몸으로 굳이 사랑까지 나눴다.
그리고 한 달 후.
양하원은 쌍둥이 사내아이를 출산했다. 마초는 산파가 문을 열자 쌍둥이는 내버려 두고 바로 아내부터 부둥켜안았다. 그런데 상황이 생각했던 것과 조금 달랐다.
“뭐야? 멀쩡하잖아? 부인은 일부러 나를 속인 거요?”
“아니, 나도 이렇게 멀쩡할 줄은…….”
강골이라 그런지, 무공을 수련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쌍둥이를 출산한 후의 몸 상태는 양하원 본인조차 당혹스러울 만큼 멀쩡했다. 양하원은 이틀째 되는 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산파의 조언을 무시한 채 출산 후 열흘을 넘기지 않고 다시 사랑을 나눴다.
그리고 새벽, 홀로 자리에서 일어난 마초는 절영을 타고 어딘가로 길을 나섰다. 외딴곳에 차려 둔 작은 사당이었다. 이곳에는 세상에서 마초만이 기억하는 이름들이 모셔져 있었다.
“영아, 현아… 부디 좋은 곳으로 가거라.”
지난 생에 기성의 성벽 위에서 목숨을 잃은 마초의 두 딸이었다.
첫째 딸의 생일이 딱 이때쯤이었다. 그리고 지금, 마초와 양하원 사이에서 지난 생과 다르게 아들 쌍둥이가 태어났다. 그러니 다시는 지난 생의 딸들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마초는 길게 제사를 지냈다. 자식을 잃은 슬픔은 아무리 잊으려 해도 쉬 잊히지 않았다.
“영아.”
마초는 나직하게 큰딸의 이름을 불렀다. 아내를 빼닮아 키가 큰 큰딸의 모습이 눈에 어른거리다 이내 흐릿하게 변했다.
“현아.”
둘째의 이름을 부르자 눈에 맺힌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자신을 닮아 푸른 눈을 가진 아이였다.
마초는 사당을 불태웠다. 사당이 타는 연기는 마치 두 딸을 화장하는 것처럼 보였다. 마초는 호상을 깔고 앉아 하염없이 그 연기를 쳐다봤다. 두 눈에서는 소리 없는 눈물이 계속 흘렀다.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자식들은 잊고 앞으로 존재할 자식들에게 집중하기 위해, 시간을 거슬러 돌아온 사내는 길고 고통스럽게 두 딸을 떠나보냈다.
이윽고 사당이 다 타고 재만 남았을 때, 잿더미를 바라보던 마초의 입에서 혼잣말이 나왔다.
“이제 다음 달이면 그를 만나게 되겠군.”
누가 아버지와 아우들을, 아내와 자식들을 죽게 만들었는가.
가장 원망스러운 사람은 마초 자신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원망스러운 사람이 누구인지도 분명했다.
바로 다음 달에 그와 만날 약속이 잡혀 있다.
“조조.”
마초는 또박또박 두 글자를 발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