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신도 전투 (1)
성도의 북쪽 60리, 신도현의 벌판.
남쪽에서 올라온 마초군 1만 8천과 북쪽에서 내려온 유탄군 4만이 마주했다. 200년 전, 마초의 선조 복파장군 마원이 이곳을 정벌한 이후로 익주에서 벌어지는 가장 큰 싸움이었다.
그러니 양측 병사들 태반은 이렇게 많은 수의 군사들이 들판에 집결한 것을 처음 보는 이들이었다. 도합 6만에 가까운 숫자의 인파가 한자리에 모이면 피부에 와 닿는 감각이 달라진다. 날씨는 늦겨울과 초봄의 경계선에 있었지만, 군사들이 뿜어내는 열기로 신도 벌판이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아무도 떠들거나 소란을 피우지 않았지만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자연스럽게 나는 소음이 귀가 멍할 만큼 시끄러웠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 중 이런 대규모 전투가 익숙한 인물은 단 두 명.
“황공형이 잘하고 있군.”
그중의 한 명은 거대한 백마 도철에 올라타 느긋하게 전장을 훑어보고 있는 마초다. 지난 생부터 수없이 많은 대규모 전투를 치러 왔으니 여유가 있었다. 마초는 황권에게 전투 지휘를 일임하고 전장 전체를 돌아보고 있었다.
“황 군사는 이런 싸움이 처음일 텐데 침착하게 지휘를 잘하는군요. 하여튼 복파장군의 사람 보는 눈은 신기하단 말입니다. 파군 시골에서 저런 인재를 어떻게 찾았습니까?”
또 다른 한 명은 마초의 옆에 붙어 있는 장료다. 아직 20대 후반의 청년이지만 하진, 동탁, 여포로 주군을 수차례 바꿔 가며 역사적인 전투에 여러 번 참전한 바 있다. 그런 장료 또한 황권의 빈틈없는 지휘를 보며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하하, 내가 사람 보는 눈 하나는 확실하지. 서황, 법정, 순유, 감녕 모두 내가 강력히 추천해서 중용된 사람들이야. 이제 황공형도 그중의 한 명이 되겠지. 내가 생각해도 대단하군.”
“그런데 저는 왜 참수하려고 했습니까? 실력은 확실히 보였는데.”
“자네는 왠지 배신할 것 같아서.”
“그게 수하한테 할 말입니까?”
마초와 장료가 티격태격하는 동안 황권은 침착하게 병력을 운용하고 있었다. 황권이 며칠 밤을 새 가며 새롭게 잡은 부대 편제와 신호 체계는 단순하고 직관적이라 싸움에 익숙하지 않은 익주병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마초군의 숫자는 유탄군에 비해 적었지만, 이동은 더 빠르고 정연했다. 황권은 유탄군의 궁병대가 앞으로 나오는 것을 보고 즉각 1열을 중보병으로 교체했다.
“쏴라!”
유탄군 전열의 궁병대가 화살을 퍼붓는 것으로 전투가 시작됐다. 그러나 회전의 경험이 없는 탓인지 신호가 약간 성급했다. 첫 화살은 대부분 마초군 1열까지 닿지 못했다. 1열의 중보병들은 일부 멀리 날아온 화살을 방패로 막아내고 순식간에 20장을 돌진하며 상대와의 거리를 좁혔다.
휘이이잉—
동시에 마초군의 2열에서 화살이 날았다. 하늘을 향해 쏴 올린 화살들이 포물선을 그리며 유탄군의 1열에 떨어졌다.
퍽! 퍽! 퍽!
“으아악!”
유탄군의 첫 사격보다 명중률이 훨씬 높아서 화살에 맞은 병사들이 픽픽 쓰러져 갔다. 지휘의 차이가 결과의 차이를 만들고 있었다.
뒤이어 마초군 1열의 중보병들이 유탄군에 근접해 난전이 벌어졌다. 마초군 중보병들은 대열이 흐트러진 유탄군의 1열을 인정사정없이 밀어붙였다. 이윽고 유탄군 1열이 물러나고 2열이 전진해 왔다. 이때 돌격하면 적에게 큰 피해를 입힐 수 있겠지만 황권은 무리하지 않고 1열의 중보병들을 물리고 경보병들을 1열로 올렸다.
‘병력이 열세일수록 무리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복파장군의 말에 따르면 이제 곧 전장에 변수가 생길 터, 그때까지 전력을 온존해야 한다.’
황권은 침착했다. 올올이 뻗친 밤송이 수염은 미동도 하지 않아서 그의 굳은 심지를 말해 주는 듯했다.
그의 생각은 적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장에 변수가 발생했다. 헐레벌떡 뛰어온 전령이 말을 전했다.
“동쪽에서 적의 대군이 근접! 수는 약 1만, 남만병입니다!”
“알았다.”
마초가 예상한 그대로였다. 옹개가 이끄는 남만병들이 크게 우회해서 전장을 중간에 들이친 것이다.
‘주공은 참으로 하늘이 낸 인물이다. 아직 20대 초반일 텐데, 적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안목은 마치 삼십 년이 넘게 전장을 주유한 노장 같구나.’
황권은 속으로 감탄하며 신호기를 올렸다. 남만병에 대한 대응책이 이미 준비돼 있었다.
* * *
옹개는 안장 위에 비스듬히 누워 턱을 괴고 전장을 바라봤다. 그가 탄 짐승은 키가 커서 시야가 탁 트여 있었다.
“서량 놈들은 걸음마를 하면서부터 말을 타서 기마술이 대단하다지? 그러나 정작 기병은 얼마 되지 않는군.”
“마초와 그 수하 몇몇은 서량 놈들이지만 병사들은 태반이 익주 사람들입니다. 괘념치 않으셔도 됩니다, 옹 대인.”
옹개의 옆에서 옹개를 올려다보며 떠드는 것은 월수의 남만족 두령 고정이었다. 그는 남중에서 건녕의 옹개 다음 가는 세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쯤 되면 대등한 동맹군으로 행세할 법도 하건만, 고정은 비굴하리만치 자신을 낮추며 옹개에게 존대하고 있었다. 약한 자에게 강하고, 강한 자에게 약한 천성이 드러난 탓이리라.
옹개는 고정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경계할 건 마초와 그 수하 몇몇의 무용뿐이군. 고 대인, 선봉을 이끌고 마초군의 옆을 치게. 내가 곧 뒤따르겠네. 단 마초나 감녕, 또는 얼마 전 우리 진영을 습격한 장료라는 놈을 만나면 섣불리 싸우지 말게.”
“걱정하지 마십시오! 장료든 감녕이든 목을 베어 옹 대인께 바치겠습니다.”
“고 대인. 싸우지 말라는 내 말이 들리지 않았던가.”
옹개는 고정을 흘긋 내려다보며 말했다. 고정은 갑자기 분위기가 싸늘해지는 것을 느끼고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니, 그, 이를 말씀입니까! 옹 대인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고정은 그렇게 말하고 수하들을 모아 마초군의 측면을 습격하기 위해 진군했다. 거리가 꽤 멀어져서 옹개의 시선이 닿지 않을 때가 되자 고정은 고개를 돌려 옹개를 바라봤다.
“저 빌어먹을 놈. 내 언젠가 저 옹가놈의 목을 따고야 말리라.”
그러나 그런 다짐과는 별개로, 고정은 옹개의 자태가 참으로 늠름하다고 생각했다.
남만족 전사들처럼 벗어부친 상체는 진흙으로 빚은 듯 선명한 근육이 수십 가닥으로 갈라져 있었다. 크고 두터우면서 선명한 근육은 옹개가 지닌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말해 주었다.
그런 옹개를 태우고 있는 것은 남중의 특산물, 코끼리였다. 옹개는 이번 원정에 십여 필밖에 되지 않는 귀한 전상(戰象)을 끌고 왔다. 전상은 워낙 유지비가 많이 들고 보급과 운용이 어렵기 때문에 실전용으로는 영 좋지 않다. 옹개가 전상을 끌고 온 목적은 선전이었다. 코끼리로 마초군 상장을 짓밟는 모습을 보여 주면 자신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익주의 모두가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옹개는 거대한 흰 코끼리, 백상의 안장 위에 편한 자세로 누워 전장을 감상하고 있었다. 고정은 툴툴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어쨌든 자신은 남만병들을 이끌고 마초군의 옆을 들이쳐야 했다.
고정이 통과하는 곳은 아직 파종이 시작되기 전의 논이었다. 한참 마초군을 향해 접근하고 있을 때, 문득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랜, 만, 이다.”
콰드득!
뒤이어 끔찍한 타격음과 함께 병사들의 비명 소리가 울렸다. 논두렁에서 몸을 일으켜 세운 신장 9척 5촌의 거인, 올돌골에게 습격을 받은 것이다. 올돌골이 양손에 든 창과 도끼를 휘두를 때마다 고정이 이끄는 병사들의 몸이 터져 나갔다. 남만병 중에서도 정예에 속하는 이들이었지만 올돌골의 압도적인 체격 앞에서 용맹이나 무공 따위는 무의미했다.
“이런 빌어먹을, 저 덩치 큰 놈이 여기 있었나! 모두 저놈을 잡아라!”
고정은 사색이 되어 외쳤다. 맹씨와 옹씨가 벌였던 건녕의 내전에서 혼자 수백 명의 목을 벴던 올돌골이다. 옹씨 편에서 싸웠던 고정은 그의 용맹한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 그 올돌골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올돌골의 뒤를 따라 논두렁 이곳저곳에서 남만병들이 일어났다. 건녕 내전에서 맹씨의 편에 섰다가 패한 후, 마가군이 이각을 칠 때 원군을 보낸다는 명목으로 서량으로 쫓겨났던 이들이었다.
아직 파종이 시작되지 않은 논 위에서 남만병과 남만병의 싸움이 시작됐다. 그러나 고정이 이끄는 남만병들은 올돌골이 이끄는 남만병들을 당해낼 수 없었다. 이들은 마초를 따라 관중과 서량에서 여러 차례 싸움을 겪으며 단련된 병사들이었다. 게다가 선봉에 올돌골이 서 있으니 고정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일단 물러나라! 서쪽의 저수지로 이동한다!”
고정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병사들을 서쪽의 저수지로 이동시켰다. 지금 위치하고 있는 논두렁은 이동이 불편하니 수적 우위를 활용하기 어렵다. 그러니 개인의 용맹에서 앞서는 올돌골의 부대가 선전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저수지 옆에는 넓은 벌판이 있다. 그곳에서 수적 우위를 활용해서 포위하고 섬멸해 주마.’
잠시 후 고정은 저수지에 도달했다. 그런데 저수지에 배가 한 척 떠 있었고, 배 위에는 몇 사람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전쟁터가 된 신도현에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었다. 고정은 눈살을 찌푸리며 아장을 불러 말했다.
“이 와중에 술판을 벌이다니 괴이한 놈들이구나. 지금부터 이곳은 전쟁터가 될 테니 썩 꺼지라고 전해라.”
아장은 그 말을 전하기 위해 배 가까이 다가갔다. 그때 배 위에 있던 사내들 중 한 명이 일어섰다.
딸그랑.
사내는 방울 소리를 울리며 배에서 날아올라 땅을 딛었다. 그는 말을 전하기 위해 다가간 아장을 맨손 일격으로 쓰러뜨리고 고정을 향해 내달렸다. 붉은 비단옷을 입은 미남자였다. 방울 소리가 어지럽게 울렸다.
고정은 방울 소리를 듣자 자신에게 돌진하는 사내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감녕, 네놈이…….”
퍽!
미처 말을 끝맺기도 전에 타격음이 울렸다. 감녕이 고정과 고정이 탄 말을 몸통으로 들이받은 것이다. 고정은 그대로 말에서 떨어져 땅바닥을 우당탕 굴렀다. 고정이 간신히 몸을 일으켰을 때는 이미 눈앞에 감녕이 와 있었다. 감녕은 싱긋 웃으며 고정에게 말했다.
“목숨은 빼앗지 않겠다. 살아남아서 수하들에게 항복을 권유해라.”
“뭣이? 네놈 뜻대로 될 것 같으냐?”
고정은 이를 악물고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 감녕에게 휘둘렀다. 감녕은 슬쩍 몸을 젖혀 칼을 피하고 주먹을 들었다.
뻑!
감녕의 주먹이 고정의 턱을 돌리자 절굿공이로 쌀을 찧는 것 같은 소리가 울렸다. 고정은 일격에 턱이 부서지며 혼절했다. 고정이 허수아비처럼 팔다리가 기묘하게 꺾이며 쓰러지자 당황한 것은 감녕이었다.
“아니, 잠깐. 죽으면 안 되는데? 이봐!”
감녕이 황급히 고정의 머리를 받쳐 들었다. 숨은 끊어지지 않았지만, 턱이 다 부서져서 말을 못 하게 되었다. 그러니 항복 권유를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감녕은 땅을 치며 한탄했다.
그때 감녕의 뒤에서 한 사람이 나타났다.
“흥, 전투 전부터 술을 퍼 마시니 손발이 흐트러지지.”
맹획은 감녕에게 핀잔을 주고 병사들을 지휘해 고정의 병사들을 치게 했다. 논 쪽에서는 올돌골, 저수지 쪽에서는 맹획과 감녕에게 협공을 받으며 우두머리까지 잃은 고정의 병사들은 뿔뿔이 흩어져 퇴각하기 시작했다.
맹획은 패주하는 적군을 길게 추격하지 않았다. 적은 수의 병력으로 많은 적을 상대하려면 논두렁에 계속 머무르는 게 유리했다.
그러나 마음이 동요하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맹획은 고개를 들어 멀리 남만병들의 진을 바라봤다. 저 진중에는 건녕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과 따르는 이들을 서량으로 쫓아낸 장본인이 있을 것이다.
* * *
선봉으로 나선 고정의 부대가 패주했다. 고정은 매복하고 있던 적군에게 붙잡혔다.
“쓸모없는 놈.”
백상의 안장 위에 누워 있던 옹개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상체의 근육이 꿈틀거렸다. 옹개는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매복한 적은 누구라더냐?”
“일전 맹씨의 편을 들어 싸우던 덩치 큰 놈과 파군의 금범적 감녕입니다. 그리고 키가 8척에 장도를 잘 쓰는 젊은 놈이 하나 있는데, 아무래도 맹씨의 꼬맹이 같다고 합니다.”
“맹씨의 꼬맹이? 그놈이 벌써 전장에 나올 나이가 됐나?”
옹개의 눈썹이 꿈틀했다. 5년 전, 자신을 노려보던 어린 소년의 모습이 떠오른 탓이다.
‘기분 나쁜 놈이었지. 용케 죽지 않고 살아남아서 고향으로 돌아왔군.’
그 소년이 대단한 자질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 맹씨의 핏줄이라는 것이다.
‘맹씨 집안은 건녕에서 명성이 높다. 만약 그 핏줄이 장성한 청년이 되었다면 꽤나 불편한 존재가 되겠지.’
옹개는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마진, 고승. 전상들을 전부 준비시켜라.”
“예? 옹 대인, 적의 복병이라 봐야 고작 일이천입니다. 전상은 마초의 본대와 맞닥뜨렸을 때 쓰시려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쓸 것이다. 잔말 말고 준비해라.”
옹개는 수하들의 물음을 일축하고 전상들을 전부 동원하게 했다.
상대가 맹씨의 핏줄이라면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맹씨가 철저히 짓밟히는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병사들의 동요를 막으려는 것이다.
“맹씨들은 아주 골치 아픈 기질이 있지. 밟아도 순종할 줄 몰라.”
옹개는 인상을 찌푸리며 내뱉었다.
“어디 코끼리에 밟히고도 다시 일어날 수 있나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