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산을 넘는 사람들
익주 한중군, 한중태수 장로의 치소가 있는 남정현.
한중군 종사 양백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이런 미친놈들…….”
한중은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다. 자연스럽게 말을 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지금 남정성의 성벽 위에서 한중 평야를 내려다보는 양백의 눈앞에는 수천을 헤아리는 기병들이 보이고 있었다. 작달막한 말을 탄 흉노 기병이었다.
흉노 기병들은 한중 평야를 제집 안방처럼 내달리며 활을 쏘아붙였다. 이들은 병졸 하나하나가 전부 명궁이니, 한중을 수비하는 천사군 병사들은 흉노의 화살이 날 때마다 덧없이 쓰러져 갔다.
원래 양백의 계획은 이렇지 않았다.
관중도독 마등이 서황을 앞세워 한중으로 출병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장로는 수하들을 모아 군의를 열었다. 장안에서 한중으로 오는 길은 몇 갈래가 있는데 하나같이 험준한 산길이었다. 그 중 서황이 택한 길은 포수라는 강을 따라 내려오는 포야도였다.
“예상대로다. 진창도는 너무 길게 돌아가는 길이고, 낙곡도는 너무 험준해서 보급을 받을 수 없다. 장안에서 대군이 출병한다면 강을 따라 보급선을 띄우고 내려올 수 있는 포야도가 정석이다.”
그러나 포야도를 따라 한중으로 진입하려면 험준한 기곡을 지나야 한다. 기곡에 천사군을 매복시키면 서황이 제아무리 뛰어난 장수라지만 뚫어낼 방법이 없다. 그러니 장로를 따르는 천사군은 기곡에서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흉노 기병들이 한중 평야에 나타난 것이다. 기곡 결전을 준비하던 천사군은 뒤를 찔린 모양새가 되었다.
“설마 말을 끌고 자오곡을 통과하는 미친놈들이 있을 줄은…….”
양백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일생을 한중에서만 살아 온 그는 흉노를 본 적도 없었다. 막상 눈앞에서 작달막한 말을 타고 백발백중의 솜씨로 활을 쏘는 그들을 보니 흉노를 토벌한 조조나 원소, 동탁은 대체 어떤 괴물들인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한중 평야가 쑥대밭이 되고 남정성이 떨어지는 것을 막으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기곡에 집중시킨 천사군 병력을 빼내야겠지.”
그렇게 되면 명장 서황은 기곡을 뚫어낼 것이다.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었다.
흉노 기병을 이끄는 장수는 선우 어부라의 아들 표였다. 표는 대열의 중앙에서 유유히 전장을 주시하고 있는 문관의 곁으로 다가가 투구를 벗었다. 머리카락을 바싹 밀어 번들번들한 머리에서 땀이 주르륵 흘렀다.
“과연 순 별가가 말한 대로 되었습니다. 참으로 신통하군요.”
순유는 잔잔히 웃으며 표에게 대답했다.
“이제부터가 중요합니다. 표 두령께서는 민가의 약탈을 금하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이번 원정이 성공하려면 그게 핵심입니다.”
표는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이번 원정의 책략을 입안한 순유는 흉노의 조랑말을 제법 능숙하게 타고 있었다.
‘평범한 체격, 부드러운 인상… 아무리 봐도 그저 책상물림 같은데.’
그런 순유가 본대를 서황에게 맡기고 단신으로 흉노 기병들과 함께 자오곡을 넘는다고 했을 때는 아무도 그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러나 순유는 군문의 일을 정확히 계산하는 지혜와 두둑한 배짱을 가진 사내였다. 그가 입안한 책략대로 흉노 기병들이 자오곡을 넘자 한중의 방어선은 크게 흔들렸다.
서황이 기곡을 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서황은 한중 평야로 진입하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남정성으로 달렸다. 남정성은 너무도 쉽게 포위되었다. 흉노 기병들이 사전에 남정성 일대의 군사 거점을 끊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유탄을 돕기 위해 낙성으로 출병했던 천사군은 본거지 한중이 공격을 받자 급히 회군하게 되었다. 순유는 회군 소식을 듣자 남정성 안으로 서찰 한 통을 보냈다.
‘오늘 관서와 한중의 사이가 틀어져 불행히도 힘을 써서 다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옛 성인의 말을 생각하매, 작은 나라와 큰 나라가 각각 바라는 대로 하고 싶다면 마땅히 큰 나라가 아래가 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우리 관서군의 장수들이 남정성 안으로 들어가 장 사군께 가르침을 얻고자 합니다. 부디 장 사군께서는 굽어 살피시어 작은 나라와 큰 나라의 다툼에 백성들이 화를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순유는 천사도의 경전인 도덕경의 구절을 인용하여 서찰을 썼다. 결론은 약탈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 강화 협상에 나오라는 것이었다.
장로는 결국 성문을 열었다. 종교 지도자인 그에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약탈로부터 신도들을 지켜야 그의 권력 기반이 유지된다. 종교인으로서의 순수한 신념도 영향을 미쳤으리라.
강화 협상은 남정성 안에서 열렸다. 한중에서는 장로, 양백, 염포, 그리고 관서에서는 서황, 순유, 표가 참석했다.
장로가 입을 열었다.
“이대로 한중을 떠나겠다는 것이오?”
순유는 여전히 잔잔한 미소를 지은 채 장로에게 답했다.
“물론입니다. 두 가지만 보장해 주시면 한중에서 떠나겠습니다.”
“뭐가 필요한지 말씀하시오.”
“첫째, 군량과 비단을 좀 내어 주십시오. 촉금 삼만 필 정도면 흉노 기병들을 달랠 수 있을 것입니다.”
순유의 말을 듣자 염포가 불쑥 끼어들었다. 근엄한 표정을 한 무게감 있는 사내였다.
“이것 보시오, 순 별가. 이 증서가 뭔지 아시오?”
“무엇입니까?”
“관중도독부의 마초 장군이 전임 한중태수께 촉금 십만 필을 빚졌다는 증서올시다. 우리가 이제까지 독촉도 하지 않고 있었거늘, 삼만 필을 더 가져가겠다는 말이오?”
“하면 지금 십삼만 필로 고쳐 쓰십시오. 복파장군이 나중에 갚을 것입니다.”
“뭣이?”
흥분한 염포를 장로가 제지했다. 현실적인 힘의 차이 앞에 명분을 내세우는 건 무의미했다.
“좋소. 두 번째 조건은 무엇이오?”
“저희들은 이대로 한중을 통과해 가맹관으로 남하할 계획입니다. 그러다 보면 낙성으로 출병했다 회군하는 천사군과 마주치겠지요.”
“그래서, 그들과 충돌하지 않도록 통행증이라도 써 달라는 말이오?”
“그뿐만이 아닙니다, 장 사군. 그들과 같이 한중으로 돌아오는 부대가 있지요?”
순유가 말하자 장로는 움찔했다.
‘순유… 이 자가 혹시 조조군이 익주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순 선생, 어디까지 알고 있소?”
장로의 물음에 순유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 또한 마초가 보낸 서찰을 통해 대강의 일을 파악했을 뿐, 정확한 내막은 알지 못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익주에서 조조의 부하들이 암약하고 있으며, 그들이 장로의 천사군과 함께 행동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잘은 모릅니다. 다만 장 사군, 관서에서는 더 이상 한중의 일에 참견하지 않을 테니 이번 기회에 사공부와 연을 끊으십시오. 그리고…….”
순유는 여전히 잔잔한 미소를 띤 채 말했다.
“우리가 곽가를 잡는 걸 도와주십시오.”
* * *
그 무렵 방덕과 법정은 익주의 중심부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강족 아단부의 족장 철리길이 두 사람과 함께 했다.
방덕이 말 위에서 옆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순 별가가 한중을 점령하지 않고 바로 가맹관으로 향하겠다고 했다는 말이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법정이 말을 달리고 있었다. 법정이 말 위에서 대답했다.
“그렇소, 방 장군. 출병하기 전 별가 대인과 논의하기로, 양동작전을 통해 자오곡을 넘어서 한중을 들이칠 생각이라 하였소. 한 달 안에 남정성의 문을 열고 장로와 강화 협상을 맺은 후 바로 가맹관으로 남하하겠다고 하더이다.”
“순 별가가 보통 인물이 아닌 것은 짐작하고 있소만… 법 군사가 보기에는 어떻소? 그런 일이 가능할 것 같소?”
방덕이 묻자 법정이 씩 웃었다.
“별가 대인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걸 좋아하지 않기로서니 방 장군까지 그렇게 말씀하시면 어찌하오? 그분은 천하를 아우를 만한 준걸이오. 이제 곧 한중에서 승전보가 전해질 것이오.”
“으흠. 그런데 그만한 능력이 있으면 지금 한중을 점령하는 게 낫지 않겠소?”
“한중은 실로 닭의 갈비살 같은 땅이오. 물러나자니 그 비옥한 평야와 요새 같은 입지가 아깝고, 취하자니 백성들이 천사도 신도라서 민심을 얻기 어렵고 막대한 통치 비용이 들어가는 땅이지요.”
“그러니 깨끗이 단념하는 게 낫다는 건가?”
“어차피 익주의 내전에서 유범 중랑장이 승리하면 한중을 그대로 두지 않을 것이오. 유탄이 한중 세력을 끌어들였고, 심지어 장로의 모친과 사통했다고 하지 않소? 한중 정벌 같은 골치 아픈 일은 유범 중랑장에게 맡기고 우리는 익주와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는 것에만 전념하는 게 낫소이다.”
법정이 설명하자 방덕도 이내 납득한 표정이었다.
방덕과 법정, 철리길은 서량의 농서군을 거쳐 익주 답중으로 남하했다. 얼핏 봐서는 지나치게 크게 돌아가는 길이지만, 목적지가 성도라면 익주 안에서의 동선을 가장 짧게 가져갈 수 있는 지름길이기도 했다.
대신 험준한 산을 넘어야 했다. 강족 기병대가 아니라면 좀처럼 진군하기 어려운 길이다. 답중까지 도착하자 그때부터는 행군이 조금 쉬워졌다. 백수라는 강을 따라 난 길로 내려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백수를 따라 계속 남하하면 가맹관이 나온다. 익주 중부의 비옥한 평야를 지키는 요새다. 방덕과 법정의 남하에 대비하여 인근의 병력들이 가맹관으로 속속 집결했다.
방덕과 법정, 철리길은 군의를 열었다. 산을 넘어 정찰을 마치고 온 월길도 함께 했다.
법정이 먼저 입을 열었다.
“가맹관을 지키는 장수는 부금이라는 자요. 장재는 형편없는 모양이지만, 험준한 가맹관을 지키는 데 대단한 맹장은 필요치 않소. 그저 굳게 문을 닫고 지키기만 하면 되니 말이오.”
“우리가 산악 행군에는 능하지만, 공성은 또 다른 문제요. 무슨 방법이 없겠소?”
철리길이 묻자 법정이 월길 쪽을 돌아봤다.
“복파장군께서 서찰을 보낼 때 미리 안배해 두신 일이 있지요. 월길 두령, 그 사람은 만나고 왔소?”
“아, 말도 마십시오. 산길이 어찌나 험하던지.”
월길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적들은 우리가 백수를 따라 남하해서 가맹관을 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지요. 그러나 법 군사가 일러준 대로 산을 넘어 보니 한 가지 방법이 생겼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방덕이 묻자 월길이 지도를 펼쳤다.
“여기서 정남쪽으로 마천령이라는 큰 산이 있습니다. 이 산을 넘는 샛길을 아주 힘들게 찾았습니다.”
“이봐, 길을 찾은 건 고생했네만… 산을 넘어 봐야 바로 적의 요새가 나오지 않는가? 이 지도대로라면 마천령을 넘는 순간 우리는 몰살을 당하게 되네.”
방덕은 손을 뻗어 지도의 한 점을 가리켰다. 강유관이라고 씌어 있었다.
“그래서 제가 이 강유관의 수비대장을 만나고 왔지요. 그는 원래 동주병 출신인데, 이감 행령군이 이미 포섭해 뒀다고 하더군요.”
“그래? 그 수비대장이 누구인가?”
“맹달이라는 사람입니다.”
월길의 말을 받아 법정이 계획을 설명했다.
가맹관으로 남하하는 척하며 강족 기병들이 마천령을 넘는다. 이때 월길이 찾아낸 샛길을 이용한다. 마천령을 넘으면 강유관이라는 요새가 나오는데, 아군이 도착하면 강유관의 수비대장 맹달이 성문을 열어젖힐 것이다.
방덕은 계획을 듣다 문득 옛날 일이 떠올랐다.
“이건 비서랑 선생이 마궁수 시절에 해 준 이야기와 비슷하군.”
법정이나 철리길은 내막을 잘 모르지만, 방덕은 마초가 회귀한 것과 나관중이 과거로 전생한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 법정이 말하는 진격로는 나관중이 이야기했던 미래의 전쟁에서 일어났던 일과 흡사했다.
법정이 그 말을 듣고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어떤 장수가 촉을 정벌할 때 마천령을 넘어 강유관에 도달했다고 한 적이 있소. 그런데 강유관의 수비대장이 지레 겁을 먹고 성문을 열어젖혀서 운 좋게 성공했다고 하더군.”
“과거에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오? 내가 기억하는 어떤 역사서 속에도 없는데… 대체 어떤 장수가 이런 작전을 했었다는 말이오?”
법정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방덕은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과거의 일이 아니라 미래의 일이니 법정이 아무리 지식이 해박하다 한들 모르는 게 당연하리라.
“위나라의 등애라는 장수가 했다고 하더군. 돌아가면 서책을 잘 찾아보시오.”
방덕은 법정을 놀리듯이 그 말을 남기고 군사들을 점고하기 위해 군막을 나섰다.
월길이 샛길을 찾아 내지 않았다면, 이감이 강유관 수비대장을 매수해 두지 않았다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보급도 없이 험준한 산길을 가야 하니 철리길 휘하의 강족들이 아니라면 어려웠을 것이다. 법정처럼 신뢰할 수 있는 군사가 곁에 있지 않았거나, 마초가 이 모든 일을 안배하지 않았다면 역시 어려웠을 것이다.
방덕은 동료들의 실력에 새삼 감탄하며 왼손으로 활을 굳게 쥐었다.
“그러니 나도 내 몫을 제대로 해내야겠지.”
무사히 강유관을 넘으면 너른 익주 평야가 나온다. 그곳에서 낙성의 유탄과 성도의 유범이 결전을 벌이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