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위기 또는 기회
주포는 눈을 의심했다.
광도현을 습격한 적은 정말로 삼백 기밖에 되지 않았다. 전원 기병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무장이나 얼굴을 보면 대부분 익주 사람들인 듯했다. 그렇다면 성도의 관군이 틀림없었다.
‘성도의 관군이라면 절대 우리 남만병들을 몰아붙일 만큼의 실력이 되지 않는다. 대체 어떤 놈이 지휘하고 있기에…….’
상대는 아마 대단한 실력을 가진 기병 지휘관일 것이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주포의 등줄기에 싸늘한 식은땀이 흘렀다.
‘설마 마초가 직접 왔는가?’
주포는 얼른 삼백 기의 선두에 선 장수에게 시선을 돌렸다. 선두에 선 장수는 키가 큰 청년이었는데, 얼굴은 아직 소년 같은 어린 티를 벗지 못하고 있었다. 한인의 의복에 남만족 특유의 화려한 자수를 넣어 한인인지, 남만인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인상착의를 하고 있었다.
사자 투구는 쓰고 있지 않다. 타고 있는 말도 금빛 갈기를 휘날리는 흑색 준마가 아니다. 아무래도 마초 같지는 않았다. 주포는 다시 용기를 얻어서 기세 좋게 소리를 질렀다.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애송이가 있구나. 여기가 어디라고 쳐들어왔느냐!”
“흥.”
맹획은 주포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여기는 광도현. 한인의 주구가 되어 남만인 동포를 억압한 놈들이 이제 한인 고을까지 약탈하고 있는 곳이지.”
“뭣이? 그렇게 떠드는 네놈은 누구냐?”
“맹획이다.”
맹획이라는 말을 듣자 주포의 눈이 커졌다.
‘맹가는 건녕의 내전에서 옹가에 패해 가주가 죽었다. 살아남은 놈들은 서량으로 보내졌을 텐데… 설마 맹가의 꼬마놈이 서량에서 살아남아서 귀환했나?’
그때, 주포의 후방에서 소란이 일었다. 광도현성의 성문 위에서 어지러운 비명이 울렸다. 뒤이어 병사들의 목과 팔다리가 성 아래로 떨어졌다.
“무슨 일이냐!”
“장군, 성벽 위에 적장이 있습니다!”
성벽 위로 올라간 적장은 단 한 명이었다. 광도현성의 수비병들은 그 한 명을 막지 못해서 일방적으로 도륙당하고 있었다. 실눈을 가늘게 뜨고 한칼에 하나씩 어김없이 적병들을 베어 넘기고 있는 장료였다.
“잡아라! 성벽 위에 있는 놈을 먼저 잡아!”
그러나 주포의 의지와는 달리 장료는 잡히지 않았다. 장료가 성벽 위를 순식간에 제압하자 성벽이 낮은 곳을 골라서 병사들이 성벽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성을 타고 올라간 병사들이 성문을 열 것이다.
주포는 잠시 생각한 후 결단을 내렸다. 제압당한 성벽을 구원하는 대신 이대로 군사를 휘몰아 눈앞의 기병대를 몰아치기로 했다.
“어차피 저놈들만 잡으면 성문이 열려도 진입할 병력이 없다. 놈들의 술수에 놀아나지 않겠다!”
주포가 이끄는 남만병들이 300 기병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기병들은 정면으로 주포의 병사들을 상대하지 않고 맹획의 손짓 몇 번에 분열하여 흩어졌다. 흩어진 기병들을 추격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주포가 이끄는 남만병들의 대열이 흐트러졌다.
그러나 주포가 간과한 사실은, 대열이 흐트러진 보병은 맹장의 먹잇감이 된다는 것이었다.
어느새 성벽을 내려온 장료가 뒤에서 남만병들을 들이쳤다. 천 리 파촉 땅에서 가장 용맹하다는 남만병들은 단 1명의 적장을 당해내지 못하고 흩어졌다. 남만병들은 장료를 잡기 위해 창과 극을 내질렀지만 장료는 어느새 창이 닿지 않는 곳으로 피해 있었다. 반면 장료의 칼이 한 번 번득일 때마다 남만병들의 팔이나, 다리나, 목 중의 하나가 허공으로 날았다. 장료의 칼에는 실패가 없었다.
주포의 작전은 대실패였다. 주포는 이를 악물고 후방으로 말머리를 돌려서 장료를 향해 돌진했다. 마지막 남은 희망은 자신이 직접 생사결을 벌여 승리하는 것이었다.
“저 맹가 꼬마는 미끼였군. 네놈이 대장이로구나. 나는 남중의 주포다. 이름이 무엇이냐?”
“나는…….”
장료가 이름을 대려고 하는 순간, 주포는 잽싸게 활을 꺼내고 화살을 메겼다. 목표는 장료의 말이었다.
탕!
주포가 팽팽하게 당긴 시위를 놓았다. 화살은 정확히 장료가 탄 말을 꿰뚫었다. 요란한 흙먼지가 피어오르며 달리던 말이 땅바닥을 굴렀다.
그러나 장료는 말과 같이 쓰러지지 않았다. 주포가 활을 꺼내는 순간, 다음 수를 예측하고 말 위에서 몸을 날린 것이다.
“어디에 있는 거냐!”
주포는 활을 던져 버리고 다시 칼을 뽑아 들었다. 장료의 말이 쓰러지며 만든 흙먼지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겨우 흙먼지가 잦아들 무렵, 주포의 등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장료.”
퍽!
장료가 자신의 이름을 대는 것과 동시에 주포가 탄 말의 뒷다리 두 쪽이 하늘로 날았다. 뒷다리를 잃은 말은 속절없이 뒤로 쓰러졌다. 말이 쓰러지자 말 위에 탄 주포도 뒤로 미끄러지듯 쓰러졌다.
뒤로 쓰러진 주포의 눈에 하늘 대신 검은 것이 들어왔다. 장료가 치켜든 칼날이었다.
퍽!
칼날이 턱을 꿰뚫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주포의 정신이 끊어졌다.
대장이 죽자 주포가 끌고 온 남만병들도 속수무책으로 흩어졌다. 병사들을 지휘해서 남만병을 흩어 버린 맹획이 장료의 곁으로 다가왔다.
“흥, 복파장군의 말이 맞았군. 장료 장군이라면 삼백 기로 이천 남만병을 이길 수 있을 거라더니.”
“뭐야, 너도 날 의심했었냐?”
장료는 칼날에 묻은 피를 닦다 말고 맹획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흥, 그럴 수밖에. 장료 장군은 불과 작년에 복파장군과 칼을 맞대고 싸우지 않았던가? 게다가 여포군 출신이고.”
“아, 그놈의 과거사. 이제 꼬맹이까지 내 과거를 들추는구나. 그러는 너도 복파장군을 처음 만났을 때 대들었다고 하지 않았나?”
장료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맹획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맹획은 장료의 뒷모습을 보며 물었다.
“장료 장군. 복파장군에 대한 충성은 진심인가?”
“아아, 그래. 진심이지.”
“어째서인가? 그대는 그저 솜씨를 비싸게 사 주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상관없지 않나?”
“으하하하!”
장료는 별안간 멈춰 서서 하늘을 보며 크게 웃었다. 그리고 맹획에게 다가와 어깨동무를 하고 말했다.
“이봐, 꼬맹이. 내가 지금이라도 조조군 같은 데 가면 크게 한몫 잡을 수 있는 건 사실이야.”
“흥, 그런데 왜 가지 않지?”
“비서랑 선생이 말리더군. 거기 있는 것보다 여기 남는 게 훨씬 낫다고. 그 말에 일리가 있어서 가지 않기로 했지.”
조조의 육촌 형제들 중에는 천하의 맹장들이 있다. 그러니 항장 출신인 장료가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설령 조조가 천하를 반 넘게 제패한다고 한들, 사방장군 이상의 작위를 얻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마땅한 인척이 없으면서 항장이라도 거리낌 없이 중용하는 마초의 휘하에 있는 것이 낫다.
이것이 나관중이 장료를 설득한 논리였다.
“그러니까 다시는 나에게 그런 불손한 언동을 하지 마라. 네놈이 감녕과 맞선 기백이 가상하니 한 번은 참는다.”
장료는 맹획에게 그 말을 남기고 사라져 갔다. 맹획은 휘적휘적 걸어가는 장료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몸을 돌렸다.
* * *
“이런 빌어먹을!”
낙성의 유탄은 손으로 서안을 내리치며 길길이 날뛰었다. 오늘 밤 전령들이 가져오는 소식 중에는 좋은 소식이 하나도 없었다.
“급보! 마초가 부교를 만들어 도하를 하고 있습니다!”
“급보! 마초를 저지하러 나간 장임 장군이 신원 불상의 적장에게 붙잡혔습니다!”
“냉포 장군이 전사! 유괴 장군과 등현 장군은 생사 불명!”
“도하에 성공한 마초가 군량고를 불태웠습니다! 군량고를 지키던 양회 장군은 전사했다고 합니다!”
유탄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마초는 예상을 깨는 움직임을 보였다. 불과 오천 병력만을 이끌고 4만 대군이 주둔한 낙성을 먼저 쳤다. 마초가 밤에 부교를 띄워서 낙수를 건넌다는 위험천만한 기동을 보이자 유탄은 당연히 최정예인 동주병을 내보내 도하 중인 마초군을 격멸하려고 했다.
“부교를 잡고 이동하는 마초군과 배를 탄 동주병이 붙으면 승패는 뻔하다!”
병법을 아는 자라면 누구나 선택할 만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마초군에 물싸움을 엄청나게 잘하는 군사들이 있었다. 군사들은 무슨 조화를 부렸는지 배를 상류로 옮겨 와서 동주병과 싸웠고, 창술의 달인인 장임을 간단히 제압하며 승리했다. 결국 물 위의 싸움으로 마초가 동주병들을 끌어들인 모양새가 된 것이다.
이대로라면 마초는 한 번의 야습으로 동주병들을 와해시키고, 유탄군의 이름난 장수들 다수의 목을 얻고, 군량고까지 불태운 뒤 돌아갈 것이다. 최악의 결과였다.
‘장수는 다른 사람으로 대체할 수 있고, 물자는 다시 징발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대패해서 사기가 꺾이는 것을 어찌한다는 말인가?’
유탄군은 가뜩이나 여러 세력이 모인 연합군이었다. 연합군이 다 모이기도 전에 서전에서 마초의 신묘한 용병술에 대패했다는 소문이 퍼지면 사기가 급격하게 떨어질 것이다.
유탄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때, 팽양이 유탄의 곁으로 와서 귓속말했다.
“…가 와 있습니다. 공자를 뵙기를 청합니다.”
“그래?”
유탄은 반색했다. 지금 그를 찾아온 사람이라면 이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유탄은 부리나케 군의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가 찾아간 것은 낙성 외곽에 있는 군막이었다. 군막에는 익숙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유탄 공자께서 심려가 크시겠소.”
한중에서 온 곽가였다. 옷 위에 갑옷을 입고 있어서 더 이상 흐트러진 매무새는 보이지 않았다. 유탄은 쓰러지듯 자리에 앉으며 곽가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곽 군사, 저 마초란 놈 때문에 우리 계획이 다 어그러지게 생겼습니다. 부디 계책을 내려 주십시오.”
“하하, 계획이 어그러지면 다시 계획을 세우면 되는 일. 어찌 그렇게 걱정하시오?”
“곽 군사께서 마초는 필부의 손에 죽을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걸 실패해서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다음 계책을 좀 내어 달라는 말입니다.”
유탄을 떼를 쓰듯 곽가에게 매달렸다. 그는 이 흰 얼굴의 서생이 어지간히 아니꼬웠으나 다른 방법이 없었다. 기껏 사공부에 줄을 대 놨으니 이렇게 궁지에 몰렸을 때 활용할 참이었다.
곽가는 크게 웃은 뒤 말했다.
“안 그래도 내게 마초를 잡을 계책이 있소이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정면승부.”
곽가가 눈을 빛냈다. 유탄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찌푸려졌다.
“아니, 마초는 군사 부리는 솜씨가 범용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정면 승부로 잡겠다고요?”
“그렇소. 마침 지금 놈이 얼마 안 되는 병사만을 이끌고 낙수를 건너 우리 진영까지 쳐들어 와 있소. 공자께서는 마초가 지척에 있는 이 상황을 가장 큰 위기라고 받아들이시겠지만, 이는 또한 가장 큰 기회이기도 하다는 말이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천하의 장임이 이끄는 동주병도 마초에게 참패했는데, 무슨 병사들로…….”
유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군막의 벽이 환해졌다. 바깥에서 켠 횃불들이 천으로 된 군막에 비친 것이다.
곽가와 유탄은 군막을 나왔다. 군막 앞에는 한 무리의 군사들이 도열해 있었다. 대낮처럼 횃불을 밝혀 놓아서 군사들이 잘 보였다.
“이게 대체…….”
유탄은 넋을 잃고 곽가가 끌고 온 군사들을 쳐다봤다.
숫자는 약 오백, 전원이 기병이었다. 하나같이 건장한 체구에 굳센 표정을 한 장한들이었다. 번쩍거리는 검은 갑옷은 노란 무늬로 장식되어 있었다.
넋을 잃고 병사들을 바라보는 그들의 앞으로 건장한 체구의 두 사내가 나섰다. 허저와 여건이었다.
“출진 준비가 끝났습니다.”
“고생 많으셨소.”
곽가는 여건과 허저를 치하한 후 유탄을 돌아보며 말했다.
“공자께서 어지간히 놀라신 모양이구려. 기병대를 처음 보시오?”
“아니, 그건 아니지만…….”
유탄은 침을 꼴깍 삼켰다.
그 또한 무공을 익힌 사내였으니, 검고 노란 갑옷을 입은 눈앞의 기병들이 어느 정도의 무사들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단순한 병사들이 아니다. 하나하나가 선봉장이 될 수 있는 고수들만으로 이루어진 부대다.’
이 정도의 기병을 육성하는 데 들어간 노력과 비용이 어느 정도일지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곽가는 그런 유탄을 보며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사공부에서 막대한 힘을 쏟아 육성한 기병대요. 본래 다른 놈들을 잡을 목적으로 내가 건의해서 만들고 있는 부대올시다. 마초를 잡는 것이 이들의 마지막 훈련이자, 첫 번째 임무가 될 것이오.”
“대, 대체… 이런 기병대까지 만들어서 잡아야 하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여포입니까?”
“하하, 중원은 넓고 천하에는 여포만 있는 게 아니오. 동쪽 땅에 만 명을 대적할 수 있는 무사들이 있소.”
곽가는 유탄의 질문에 대답을 슬쩍 흐리며 크게 웃었다.
이들을 한중으로 몰래 옮겨 오느라 이만저만 힘이 들었던 게 아니다. 그러나 일단 오백이나 되는 최정예 기병들이 옮겨 왔고, 선봉에는 허저가 설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익주 내부의 어떤 싸움에서도 승리할 자신이 있었다.
난세의 전장은 혼란스럽다. 천하 용장들이라면 혼자 힘으로 얼마든지 변수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곽가는 서주에 침공했을 때 그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의 전법과 계략이라면 어떤 맹장이라도 잡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서주목 유비의 휘하에는 그 수준을 초월한 인간이 있었다. 혼자서 만 명을 상대하며 전쟁의 승패를 뒤집을 수 있는 천하 용장이 정말 존재했던 것이다.
‘게다가 두 놈이나 있었지.’
천하 용장들이 만들어 내는 변수를 지우고, 조조에게 아주 확실한 승리를 선사하기 위해 육성한 기병대.
곽가는 기병대를 돌아보며 외쳤다.
“지금 낙성에 마초가 와 있다. 너희들의 첫 번째 임무다. 마초를 사냥해라.”
으르렁대는 듯한 낮은 함성이 울렸다. 유탄은 기병대의 검고 노란 갑옷을 바라보다 곽가에게 물었다.
“대단한 기병이군요. 마초는 강을 건너왔으니 필시 대부분 보병일 터. 이들이 선봉에 서면 이미 오랜 시간 작전을 해서 피로한 마초군이 와르르 무너질 것입니다.”
“공자의 생각이 내 생각과 같소.”
“그런데 곽 군사, 이 부대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이름이라. 아직 세상에 나가기 전이지만 생각하고 있는 이름이 있소.”
곽가는 씩 웃었다.
“호표기(虎豹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