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마초연의-133화 (133/306)

133화. 무르익는 전운 (1)

익주 한중군.

한수라는 강을 끼고 있다고 해서 한중이라고 불린다. 익주의 북부에 위치한 이곳은 크고 작은 산으로 둘러싸인 요새 같은 지형이었다. 방어하기 편하면서도 익주, 관중, 형주를 잇는 요지에 위치해 있고, 산 아래에는 너른 분지가 펼쳐져 있어 양곡과 물산이 풍부한 곳이라 예로부터 중국 대륙 서부의 패권을 쥐려는 자들이 가장 먼저 탐내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지금 이곳을 지배하는 것은 장로였다. 그는 천사도(天師道)라고 불리는 한 도교 교단의 교주인데, 지금으로부터 4년 전 한중태수 소고를 죽이고 자신이 태수가 된 후, 한중에 천사도가 지배하는 사실상의 종교 왕국을 세우고 그 지배자로 군림하고 있었다.

천사도는 입교하려는 자들에게 다섯 되의 쌀을 납부하게 해서 교단을 운영하는 재원으로 삼는다. 그래서 세간에서는 장로가 이끄는 천사도를 오두미도라고 부르고, 종교에 대한 인식이 안 좋은 이들은 장로를 미적(米賊, 쌀 도둑놈)이라고 지칭하기도 했다.

쌀 도둑놈이라는 오명과 달리 장로의 수완은 좋았던 모양이다. 천사도 교단을 활용해서 백성들에게 복지와 의료 혜택을 제공하니 한중의 민심은 장로에게 향했다. 과거 탐관오리 소고가 수탈할 때보다 형편이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원래의 역사에서 장로는 한중에 기반을 잡고 이십 년이 넘게 안정적으로 통치했으며, 십 년차가 넘은 후에는 인근의 파군에 세력을 뻗쳐서 익주의 정세를 뒤흔들기도 했다.

장로가 한중을 통치한 21년째가 되던 214년, 장로에게 천하를 노려볼 기회가 찾아온다. 원정을 통해 영토 확장을 꾀하기에는 세력이 작고 군사력이 부족했던 장로에게 이름난 무장이 한 명 귀순해 온 것이다. 한때 서량 10군의 맹주로 천하의 판세를 뒤흔들었으나, 눈앞에서 아내와 아이들을 잃고 단신으로 한중까지 도망쳐 온 젊은 무장, 마초였다.

장로는 마초를 앞세워 세력을 확장해 볼 참이었다. 처음에는 그에게 자신의 딸을 줘서 사위로 맞으려 했다. 그러나 장로의 수하들은 그런 장로를 말렸다.

“마초는 가족을 돌보지 않는 패륜한 자입니다. 어찌 귀한 따님을 주시려 하십니까?”

그로 인해 혼담은 깨지고, 마초는 유비에게 귀순한다. 마초가 첩과의 사이에서 얻은 어린 아들은 장로가 손수 내동댕이쳐 죽인다. 마초는 그렇게 다시 가족을 잃었다.

* * *

그리고 지금, 197년 1월.

한중태수 장로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흰 얼굴의 청년을 바라보며 말했다.

“서량 마가군이 익주의 정세에 개입하고 있다는 말인가?”

흰 얼굴의 청년, 곽가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장 사군. 마초가 파군에서 한바탕 난리를 쳤지요. 곧 한중까지 소식이 전해질 겁니다.”

“심미와 누발이 죽었다고 했던가. 유탄 공자가 익주를 거의 다 먹었는데 타격을 좀 받겠군.”

“유탄 공자가 재물을 탐내 뒤가 구린 일을 많이 벌이는 건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호족들과 구신들의 지지도 유범 중랑장 쪽으로 기울겠지요. 유범 중랑장은 장자이고, 조정의 고관이기도 하니까요. 흔들리던 호족들과 구신들에게 마초가 명분을 준 셈입니다.”

“허허, 그러나 유탄 공자가 쌓아 놓은 기반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네. 곽 군사, 자네는 권력이 무엇에서 나온다고 생각하나?”

곽가는 장로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사군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알겠습니다. 권력은 결국 칼에서 나오지요.”

“그렇다네. 대의명분이니, 재물이니 하는 것도 결국 무력이 비슷할 때 의미가 있는 것이지. 익주의 칼이란 칼은 유탄 공자가 다 쥐고 있네.”

익주에는 칼이라 부를 만한 무력 집단이 몇 가지가 있었다. 곽가는 이들 모두에 대해 상세히 알고 있었다.

“먼저 남중의 남만병이 있겠는데, 남중 호족 옹개가 유탄 공자를 지지하고 있지요. 그리고 동주병(東州兵, 난리를 피해 익주로 도망쳐 온 관중 출신 이주민 집단)들은 부현에 주둔하고 있고요.”

“동주병들을 이끄는 장임은 익주 제일이라고 불리는 대단한 무장이기도 하네. 그러니 유범 중랑장이 대의와 명분을 가졌다 한들 어쩌겠는가? 남만병과 동주병, 두 자루 칼을 유탄 공자가 쥐고 있는데.”

장로는 넉살 좋은 태도로, 마치 정치 이야기를 하는 촌로 같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수염이 길고 풍채가 좋은 그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하니 정말로 자신과는 상관없는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곽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장 사군, 하지만 익주에는 칼이 한 자루 더 있지요.”

“으흠, 그게 무슨 소린가?”

“장 사군이 이끌고 계신 한중의 천사군. 제가 한중에 온 것은 그 때문입니다.”

“허허, 천사군이라니 부끄럽구만. 그저 교단의 청년들 몇몇이 질서 유지를 하고 있는 것뿐일세.”

“내전이 일어날 겁니다.”

곽가는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있던 장로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어찌 그리 단언하는가?”

“유범 중랑장이 칼을 얻었습니다. 마초입니다. 지금 그의 수하에 천 명가량이 있는데, 마초가 이끄는 천 명은 평범한 장수가 이끄는 만 명에 필적합니다. 그러나 유탄 공자는 이 사실을 모르고 유범 중랑장과 충돌하겠지요. 남만병과 동주병만을 믿고 말입니다.”

“오호, 그러면 곽 군사는 유범 중랑장이 마초의 일천 군사만으로 내전에서 승리하리라 보는 것인가?”

“아무리 마초라도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습니다. 다만 마가군이 참전해서 익주를 구원하러 온다면 어떻겠습니까? 유범 중랑장이 그때까지 버티기만 한다면 마가군을 등에 업고 익주를 장악할 수 있겠지요. 만약 그렇게 되면…….”

“익주와 관중의 통로가 되는 이 한중은 마가군 손에 떨어지겠군.”

“바로 보셨습니다. 그게 바로 제가 장 사군께 온 까닭입니다.”

장로는 다시 한번 껄껄 웃었다.

“허허허, 좋은 말일세. 그래서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내전이 벌어지면 가장 큰 공을 세우십시오. 한중의 기업을 보전하려면 유범 중랑장과 마초를 쫓아내셔야 합니다. 남만병과 동주병만으로 마초를 제압하는 건 어려울 테니, 사군께서 천사군을 이끌고 먼저 마초를 잡으십시오.”

“말은 좋구먼. 그런데 내가 무슨 수로 마초 같은 용맹한 자를 잡겠나?”

“제가 기병을 빌려 드리겠습니다. 호랑이 같은 용장들과 표범 같은 강병들로만 이루어진 기병대입니다. 남만병, 동주병, 그리고 마초가 이끄는 부대 모두 보병이 주력입니다. 최정예 기병 수백을 앞세우면 짓밟을 수 있습니다. 이들을 천사군의 선봉에 세워 큰 무공을 세우십시오.”

익주는 기병이 귀하다. 남중에서 좋은 말이 나지만 차마고도를 지나는 데 적합한 작은 짐말이라 군마로 쓰기는 쉽지 않다. 만약 곽가가 중원의 최정예 기병대를 끌어들인다면 익주의 내전에서 엄청난 활약을 할 것이다.

“사공부의 기병대가 참전한다면 다른 이들이 눈치채지 않겠는가?”

“아직 세간에 선보인 적 없는 부대입니다. 군기와 표식도 철저히 감출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게다가 중원 최고의 무사가 이 기병대를 이끌 것이니, 설령 마초라 해도 당해내지 못할 것입니다.”

곽가는 이미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 기병대를 한중으로 이동시키고 있었다. 비밀리에 육성하고 있는 최정예 기병대였다. 허저가 그들을 이끈다면 설령 마초라도 당해낼 수 없을 것이다.

“허허, 내가 그렇게 하면 사공부는 무엇을 얻는가?”

“익주를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 그렇게 되면 마가군은 경거망동하지 못하겠지요.”

마가군이 익주를 친다고 해서 익주를 얻기는 쉽지 않다. 유비도 수년이 걸려서 얻은 익주다. 외부 세력이 쉽게 장악하기에는 땅이 너무 크고 독립성이 강한 지역이다.

반면 익주에 토착 정권이 들어서는데 그 정권이 마가군과 관계가 돈독하다면? 마가군 입장에서는 가장 좋은 상황이다. 익주와 수년간의 전쟁을 치르는 수고 없이, 배후에 동맹군을 두고 익주의 풍부한 물산으로 보급을 받으며 중원과의 전쟁에 전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초를 죽여서라도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

만약 일이 잘 풀리지 않아 마가군이 익주를 침공하게 되더라도, 마초가 죽은 상태에서 마등이 익주를 정벌하려면 수년간의 격렬한 싸움을 치러야 하니 중원의 일에는 상관할 수 없을 것이다.

장로는 곽가를 보며 허허 웃었다.

“내가 듣기로 사공부의 주축은 순령군(상서령 순욱을 말함) 같은 밝은 선비들인 줄 알았더니, 자네 같은 모사꾼도 있었구만.”

“난세에 대의명분이나 논하는 선비가 무슨 쓸모가 있습니까? 그런 선비는 결국 표리부동하게 사는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분에 못 이겨 자결하기 딱 좋지요. 저는 그저 솔직하게 살다가 죽을 생각입니다.”

“허허, 그럼 자네는 어떻게 죽는 게 좋다고 생각하나?”

“모름지기 난세의 선비라면 누구보다 악랄하게 모략을 쓰다가 화살 속에서 죽거나, 풍토병에 걸려 죽거나, 술병으로 죽거나 해야지요. 불쌍하게 자결하거나 편하게 늙어 죽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곽가는 악당으로 살다 악당으로 죽고 싶었다.

장로는 그런 곽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죽간 한 첩을 내밀었다.

“죽을 것 같으면 읽어 보게. 죽기 전에라도 태상노군을 믿어야 천국에 간다네.”

곽가가 죽간을 보니 천사도의 경전이었다.

* * *

파군의 분쟁을 해결한 마초는 성도로 귀환했다. 건녕군 독우 이회가 데려온 남만병과 마초에게 귀부한 장강의 금범군들을 합쳐서 천 명에 가까운 병력이 그를 따랐다.

익주목 유언의 장남이며, 천자 유협의 측근이자 마초와 함께 천자를 호위해서 허도로 어가를 옮긴 공신인 유범은 그때쯤 성도에 도착해 있었다. 유범은 자신을 둘러싼 세간의 추측들에 단호히 선을 그으며 장례를 치르는 것에만 집중했다.

그러나 모두가 짐작하고 있었다. 며칠 후 장례가 끝나면, 익주의 지배권을 놓고 장남 유범과 차남 유탄 사이에 충돌이 일어날 것이다.

유범은 밤을 틈타 마초와 단둘이 마주 앉았다.

“남의 이목이 있으니 복파장군과 이렇게 단둘이 인사하는 것도 어렵군. 파군에서 많은 고초를 겪으셨다고 들었소. 무사하셔서 참으로 다행이오.”

“유 중랑장, 그보다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유탄 공자는 이미 익주목의 지위를 승계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잘 아시겠지요.”

유범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알고 있소. 그러나 돌아가신 아버님의 자리를 놓고 아우와 다투자니 세상 사람들의 눈과 귀가 두렵소.”

“두려우면, 이대로 익주목의 자리를 넘기실 작정입니까?”

마초는 담담하게 물었다.

유범이 익주목이 되면 자신에게 매우 유리하다. 유범은 자신이 근황의 노선을 견지하는 한 든든한 동맹이 될 것이고, 비관과의 인맥을 활용해서 많은 부를 쌓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리하게 유범에게 익주목이 되라고 요구할 생각은 없었다. 다른 의도는 아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우 유탄과 싸워야만 하기 때문이다.

‘가족과 싸우는 게 보통 일은 아니지. 강요할 생각은 없다.’

마초 자신도 가족을 지키는 것을 첫 번째로 생각하고 있었다. 어떤 대의가 있고 명분이 있어도 가족을 저버리는 것은 가혹한 길이다. 남에게 그 길을 가라고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유범은 쓴웃음을 지었다.

“글쎄, 아우를 치고 내가 익주목이 되고 싶은 마음은 분명히 있소. 이 혼란한 세상에 익주 같은 큰 땅의 주인이 폐하에게 충성을 다한다면 폐하께도 큰 힘이 될 것이오. 그리고 나는 아우를 잘 아오. 그는 이 거대한 익주를 잘 다스릴 수 있는 위인이 아니오. 그러나… 나에게 대의가 있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아우와 피 흘리며 싸워도 되는지 모르겠소.”

“익주를 갖고는 싶은데 결심이 잘 서지 않는다는 말이군요.”

“부끄럽지만 그렇소.”

마초는 유범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배신할 사람은 아니다.’

유범은 믿을 수 있는 인물이다. 그의 말은 솔직했다. 적절한 명분만 주면 유탄과의 싸움에 나설 것이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결심할 수 있도록 제가 도와드리지요.”

마초는 품속에서 비단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유범에게 내밀었다. 시랑군 대장 이감이 유탄의 주변을 조사해서 만들어 온 보고서였다.

“복파장군, 이것이 무엇이오?”

“제 수하 중에 정보 수집에 능한 자가 있습니다. 유탄 공자에 대해 이상한 소문이 들리길래 조사를 조금 해 봤지요.”

두루마리를 읽던 유범의 눈이 커지고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놈이… 어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가! 복파장군, 이 문서의 내용이 사실이오?”

마초는 분노하는 유범을 향해 담담하게 말했다.

“전부 사실입니다. 유탄 공자가 돌아가신 유 익주의 애첩과 사통하고 있습니다.”

유언의 첩 노씨는 유탄보다 서른 살 가까이 나이가 많았는데, 한중태수 장로의 모친이기도 했다.

‘유탄이 아버지의 여인을 취했으니 도덕성을 문제 삼아 끌어내릴 명분이 생겼다. 이제 유범 중랑장도 움직이겠지.’

유범은 한참 동안 분노를 쏟아낸 후, 이내 깊은 탄식과 함께 한 방울 눈물을 보였다.

“이렇게 됐으니 어쩔 수 없구려. 내가… 내가 익주목이 되겠소.”

“잘 생각하셨습니다. 이 마초가 돕겠습니다.”

마초는 침착한 태도로 유범을 달랬다. 흔들리던 유범의 눈빛은 이내 결연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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