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마초연의-127화 (127/306)

127화. 호후의 추억

시간을 거슬러 15년 전, 동관 전투.

조조와 목숨을 걸고 싸운 후 마상회담을 하던 그날의 일이 마초의 눈앞에 떠올랐다.

“마맹기. 실로 훌륭하다. 천하를 주유한 지 30년, 이제까지 수많은 강적과 싸웠지만 설마 아들뻘 되는 후진에게 죽기 직전까지 몰릴 줄은 몰랐군.”

마초의 기억 속에 있는 장년의 조조는 그저 평범한 모습이었다. 그는 남들보다 잔학해 보이지도, 강인해 보이지도 않았다. 총명하게 빛나는 눈과 피로감이 깃든 눈매가 묘한 대조를 이룰 뿐, 그것 말고는 그저 나이 많은 여느 귀족으로만 보이는 외모였다.

“천하는 넓다. 이 서량에 집착하지 말고 나와 함께 천하를 주유하는 것이다. 이제 싸움은 여기서 끝내도록 하세.”

조조는 수많은 항장들을 받아들이며 자신의 세력을 확장해 왔다. 여포, 관우, 심지어 유비까지도 자신의 사람으로 끌어들이려 시도했던 그다. 여기서 마초에게 귀부를 권유하는 것은 진심이리라. 그는 그 정도의 도량과 배짱이 있는 사내였다.

“나는…….”

마초는 생각했다. 그리고 대답했다.

“살아 있는 한 멈추지 않는다. 싸움을 끝내고 싶은가? 내 목을 취하던가, 그대의 목을 내놓아라. 방법은 그것뿐이다.”

“오호라.”

조조의 눈이 반짝 빛났다. 예순이 가까운 승상의 눈에 소년 같은 열정과 호기심이 떠올랐다.

“이 전쟁의 승패는 이미 기울었네. 자네가 더 잘 알고 있겠지. 그런데도 계속 싸우겠다는 말인가?”

“간사한 혀를 놀리지 마라, 조조. 내가 살아 있는 한 싸움은 끝나지 않는다.”

“하하하, 아무래도 그대가 죽지 않으면 내가 묻힐 곳이 없겠구나!”

조조는 하늘을 보며 크게 웃었다.

척.

마초는 오른손의 창을 길게 뻗어 조조를 겨누었다. 창이 닿기에는 너무나 먼 거리였지만 지켜보는 이들은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마초가 들어 올린 창끝이 마치 조조를 곧 꿰뚫을 듯한 기백을 뿜어냈기 때문이다. 전황이 불리하다는 게 거짓말인 것처럼, 마초가 발하는 기백은 그를 지켜보는 수백의 장수들과 수만의 군사들을 모두 압도할 만큼 강렬했다.

그런 마초와 조조 사이로 한 장수가 끼어들었다. 아름드리나무 같은 체격의 거한이었다. 거한은 마초와 조조 사이를 막아서고 마초가 발하는 기백을 정면으로 받아냈다. 그만은 마초를 보고도 위축되지 않았다.

“포판진에서 나를 막아섰던 놈이구나. 호랑이처럼 용맹하고 백치처럼 모자라서 호치라고 불린다고 했나.”

호치라고 불리는 거한은 마초를 앞에 두고도 동요하지 않았다. 지금 해야 할 일만 생각하는 단순한 머리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인간은 상상력이 있다. 마초와 같은 기백을 뿜어내는 상대의 앞에 서면 그 상상력이 공포를 만들게 된다.

그러나 호치에게는 아무런 공포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마치 아무것도 상상하지 않는 사람처럼 담담하게 마초의 앞을 막아섰다.

상대의 손이 공포로 굳지 않는다면 남는 것은 오직 힘 싸움뿐이다.

‘조조가 도망치기 전에 찌르려면… 저 호치를 적어도 10합 이내에 쓰러뜨려야 한다.’

그럴 수 있을까?

마초는 창을 거뒀다.

“조조, 실로 용맹한 장수를 곁에 뒀구나. 호치보다는 호후(虎侯)라고 부르는 게 더 어울리겠군.”

마초는 호치를 칭찬하는 말을 남기고 말머리를 돌렸다.

조조는 멀어져 가는 마초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호치가 없었으면 마초는 이 자리에서 조조에게 창을 내질렀을 것이다.

“내 등용 제의는 거절했으면서 내 수하의 용맹은 칭찬하고 물러갔다. 자신도 나와 같은 군웅이라는 것인가.”

조조는 멀어지는 마초의 뒷모습을 보며 젊은 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길들일 수 없고, 굽힐 줄 모르는, 기병을 이끌면 누구보다 강한, 극히 난폭한 무장. 마초에게서 여포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러나 여포 또한 내 손에 죽었지.”

조조는 수염을 쓰다듬었다.

‘마초는 군사를 귀신같이 잘 부리니 당장 죽일 방법은 없다. 그러나 전투보다 전쟁, 전쟁보다 정치의 힘으로 마초를 압박하면… 몇 년 안에 마초의 목이 업성으로 보내질 것이다.’

저런 마초를 자신의 수하로 품을 만큼 그릇이 큰 자가 있다면 또 모를 일이다. 그러나 조조 자신조차 실패한 일을 할 수 있는 그런 영웅은 천하에 없을 것이다.

* * *

다시 현재, 비관과 심미의 회담이 열리고 있는 파군 임강현의 포구.

마초의 눈앞에 세 사람이 나타나 머리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마초는 그들 중 가장 말석에 있는 한 사람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경악과 당황이 섞인 복잡한 감정이 눈빛에 드러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나관중이 얼른 마초의 옆구리를 찔렀다.

‘주공, 놀라신 게 너무 티가 납니다!’

마초는 그제야 표정을 수습하고 헛기침을 했다. 다행히 눈앞의 세 사람은 마초의 표정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옆자리의 나관중이 소매로 입을 가리며 마초에게만 들릴 만한 소리로 물었다.

‘아는 사람들입니까?’

‘아아… 저들 중의 한 명. 뒤쪽의 덩치 큰 녀석.’

‘그렇군요. 누구입니까?’

‘허저다.’

이번에는 나관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초가 그런 나관중을 보고 혀를 차자 나관중도 그제야 겨우 표정을 수습했다.

‘아니, 허저라고요? 조조의 호위무사 허저, 호치라고 불리는 그 허저, 주공이 조조를 죽이려는 걸 막아낸… 아니, 방해한 그 허저 말입니까?’

‘누가 누구를 막아냈다는 거야? 내가 마음만 먹었으면 늙은 조조 따위를 찔러 죽이지 못했을 것 같아?’

마초는 갑자기 기분이 팍 상해서 나관중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나관중은 ‘그렇다면 왜 마음을 안 먹었느냐’고 되묻고 싶은 유혹을 간신히 참았다.

그새 마초에게 인사하러 온 세 사람은 고개를 들었다. 그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흰 얼굴의 선비가 말을 꺼냈다. 방금 전 얼핏 보기로는 의관과 태도가 상당히 불량해 보였지만, 의관을 정제하고 정중한 태도를 갖추니 제법 기품이 있었다.

“소생은 곽욱이라고 합니다. 부릉에서 책 읽고 밭 가는 것으로 소일하는 백신(白身, 벼슬이 없는 사람)입니다. 마침 대영웅이신 복파장군께서 먼 파군까지 오셨기에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곽욱 선생이라. 뒤쪽의 두 장사는 누구요?”

“저와 가깝게 교류하는 벗들입니다. 여총과 허위라고 합니다.”

무골로 보이는 두 사내가 손을 모아 마초에게 인사했다. 마초도 손을 모아 답례했다.

나관중이 초조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

‘저 허위라는 자가 사실 허저란 말이죠?’

‘그래, 얼굴을 아는 건 허저뿐이지만 가명을 들으니 다른 두 명도 누가 누군지 대충 짐작이 가는군. 저 곽욱이라는 놈은 나이나 외모로 봐서 곽가가 틀림없다. 여총은…….’

‘아마 태산태수 여건이겠군요. 곽가에 여건에 허저… 이만한 인물들이 이 먼 익주까지 와서 정체를 숨기며 주공을 만나러 오다니, 너무나도 수상하군요.’

익주목 유언 같은 거물의 조문사절로 아무나 보낼 수는 없다. 믿을 만한 최측근을 보냈을 것이다. 곽가라면 납득할 수 있다.

‘저자가 만약 곽가라면, 어째서 정체를 숨기고 나에게 접근하고 있는가. 문제는 그것이다.’

마초는 짐짓 모르는 척 곽가로 추정되는 선비에게 물었다.

“곽욱 선생은 남방 사람이니 남방의 정세에 대해 잘 아시겠구려.”

“그저 책 읽는 서생이라 대강만 통하고 있을 뿐입니다.”

“나 같은 북방 사람에게 한 수 가르쳐 주시오. 지금 남방의 영웅이라면 강동의 손책이 있다고 들었소. 곽 선생이 보기에 그는 어떤 인물이오?”

“글쎄요.”

곽욱이라고 이름을 밝힌 선비는 흰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띄우며 웃었다.

“손책은 이제 막 강동을 아우르는 중이지요. 그가 죽인 이들은 모두 남의 인망을 크게 얻은 이들이었습니다. 그런 이들을 그렇게 많이 죽였지만, 아직도 전쟁터에서는 선봉에 서고, 사냥터에서는 위험을 무릅쓰지요. 그러니…….”

“그러니?”

“필시 필부의 손에 죽지 않겠습니까?”

마초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을 들으니 저 선비의 정체에 완전히 확신이 섰다.

‘곽가가 맞군.’

필부의 손에 죽을 만한 인물. 곽가가 생전에 손책을 두고 평했다고 전해지는 말이다.

마초는 뒤이어 허저 쪽을 보며 말했다.

“대단한 장사로군. 내 수하 중에도 힘을 좀 쓰는 자가 있는데, 장사에게 팔씨름 한판을 청해도 괜찮겠소?”

이때는 허저도 젊었다. 허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남쪽 익주의 촌부에게 무슨 대단한 재주가 있겠습니까? 복파장군께서 잘 봐주시니 사양치는 않겠습니다.”

허저는 그렇게 겸양의 말을 했다. 말로는 익주 출신이라고 했지만, 억양에는 미묘하게 예주 사투리가 섞여 있었다. 마초는 쓴웃음을 짓고 나관중을 돌아보며 말했다.

“관중, 지금 당장 진중으로 가서 장문원을 데려와라. 허 장사를 대적할 수 있는 건 그뿐이다.”

“예, 주공.”

나관중은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얼른 빠져나갔다. 그리고 전속력으로 진중을 향해 달렸다.

마초는 곽욱, 여총, 허위라고 자신을 밝힌 세 사람과 별 의미 없는 담소를 나누며 나관중을 기다렸다.

‘이걸로 두 가지가 확실해졌다. 조조는 곽가를 통해 익주의 정세에 개입하려 하고 있다. 그리고 곽가는 정체를 숨기고 파군에 와서 나에게 접근해서 뭔가 도모하려 하고 있다.’

곽가가 지금 도모할 만한 것들 중 가장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건 내 목숨이지.’

지금은 연회 자리라 칼도 없다. 강화 회담을 하는 자리라 장료도 진중에 두고 왔다. 만약 곽가가 암살을 시도한다면 최적의 상황이다.

‘그리고 나에게는 최악의 상황이군. 관중이 얼른 달려가서 장문원을 데려와야 할 텐데.’

마초는 손에 든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서 표정을 가렸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술은 마시지 않았다.

그러면서 허저의 술잔을 얼핏 보니, 그의 술도 거의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 * *

“왕평.”

“예! 맹획 아장!”

“놀러 왔어?”

“아닙니다!”

“그럼 억지로 끌려 왔어?”

“끌려 온 건 맞…….”

“뭐야?”

“아, 아닙니다!”

“흥, 밤에는 조용히 대답하라고 했지? 말귀를 못 알아듣냐? 네 위로, 내 밑으로 한번 모일까?”

“아닙니! 다…….”

맹획은 오늘도 글을 다 외우지 못한 왕평을 따로 불러내 호된 질책을 가하고 있었다. 왕평은 이제 상당히 익숙해져서 겉으로는 반성하는 척 맹획의 말을 들으며 속으로는 전투가 일어나면 맹획의 뒤통수를 노리고 손도끼를 던질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딸그랑.

“응? 무슨 소리지?”

“글쎄요, 어디서 방울 소리 같은…….”

팟!

순간 맹획과 왕평은 동시에 몸을 낮췄다. 수십 명의 기척이 동시에 다가오는 것이 느껴진 것이다.

밤이라 시야는 어두웠다. 포구 근처라서 강물과 땅이 잘 구분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숨을 죽이고 풀숲에 숨어 수십 명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렸다. 훤히 드러낸 상체에 울긋불긋하게 칠을 해서 판순만의 복장을 한 무사들이었다.

“이놈들은 뭐지? 판순만인가?”

맹획이 중얼거리자 판순만 부락에서 자란 왕평이 고개를 내저었다.

“어느 부족도 쓰지 않는 화장이에요. 판순만인 척하는 한인들입니다.”

판순만으로 위장한 수십 명 무사들의 기세가 자못 거칠었다. 마른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보던 두 사람의 등 뒤에서 방울 소리가 들렸다.

딸그랑.

“으흠, 숨는 걸 보니 훈련이 잘된 놈들이네.”

미세한 인기척을 느낀 감녕이 두 사람이 숨어 있는 풀숲으로 다가왔다. 감녕은 쭈그리고 앉아서 맹획, 왕평과 눈을 맞추며 태연하게 두 사람을 칭찬했다. 잘생긴 얼굴이 파안대소로 한껏 무너졌다.

쉬익!

맹획은 앉은 자세 그대로 허리춤의 장도를 뽑아 감녕이 있는 쪽을 베어 올렸다. 그러나 감녕은 아주 약간 상체를 뒤로 숙여서 맹획의 참격을 쉽게 피해내며 입으로만 엄살을 부렸다.

“어이쿠, 꽤 제대로 배웠는데?”

“흥, 웬 놈이냐! 이곳에는 복파장군이 계시다. 허튼짓하려거든…….”

“바로 그 복파장군에게 볼 일이 있어서 말이야.”

감녕은 여유 있는 태도로 손을 털고 일어났다. 맹획과 왕평도 각자의 병장기를 뽑아 들고 감녕과 대치했다. 판순만 복장을 한 무사들이 그 모습을 보고 맹획과 왕평을 둘러쌌다.

맹획은 감녕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맹획도 이제 어지간히 뛰어난 무사라서 감녕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자는 틀림없이 절정고수다. 마초나 장료 정도가 아니라면 몇 합을 겨루는 것도 힘겨울 것이다.

“왕평.”

“예, 맹획 아장.”

“보통 놈이 아니다. 너는 이대로 복파장군께 달려가라. 네 몸놀림이면 빠져나갈 수 있을 거야.”

“예? 맹획 아장은요?”

“흥, 나는 키가 커서 너처럼 잽싸게 움직이지 못해. 잔소리 말고 달려가기나 해.”

맹획은 그렇게 투덜거리며 왕평의 앞을 막아섰다. 왕평은 가장 위험한 순간 맹획이 자신에게 뒤통수를 보여주자 손도끼를 던지려던 계획을 철회했다.

‘이 녀석, 어쩌면 괜찮은 녀석 아닐까?’

“달려!”

맹획은 짧게 부르짖으며 칼을 눈앞에 세우고 뒷발을 힘차게 밀었다. 맹획이 든 장도가 쐐기가 되어 감녕을 향해 전진했다.

감녕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맹획의 공격을 맞이했다. 아무 병장기도 없는 맨손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