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마초연의-126화 (126/306)

126화. 방울 소리

파군 임강현 인근의 한 수채.

이곳은 장강수로맹의 일원으로 금범군이라 불리는 수적단이 사용하는 곳이었다. 이 수적단은 자신들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배에 비단으로 된 돛을 올렸는데, 사람들은 비단 돛을 보고 이들을 금범적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 이름이 마음에 들었는지 아예 자신들이 금범군이라고 자칭하기 시작한 것이다.

장강의 질 나쁜 청년들은 죄다 금범군에 모여 있었다. 이들이 주 활동 무대로 삼는 파군과 형주는 물론, 먼 강동에서부터 장강을 천 리나 거슬러 올라와서 금범군에 입단한 자들도 있었다. 그만큼 금범군의 명성은 청년들의 가슴을 뛰게 하는 곳이 있었다. 그들은 싸우면 반드시 이겼다. 싸움의 상대는 관부와 이민족, 수적과 군벌을 가리지 않았다.

그런 금범군의 수채에 파군의 대부호 심미와 장강수로맹주 누발이 찾아왔다. 파군 최고의 실력자들이 왔지만 금범군의 단원들은 그저 멀뚱거리며 심미와 누발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민망함을 견디지 못한 심미가 먼저 말했다.

“어흠, 감 대협은 안에 계신가?”

심미를 멀뚱히 바라보던 청년이 대답했다.

“대형을 무슨 일로 찾으시오?”

청년의 말투가 불손하자 심미의 옆에 있던 누발이 험한 인상을 더욱 찡그리며 말했다.

“네놈의 혀가 건방지구나. 어디 수로맹주인 내 앞에서도 말을 짧게 할 수 있겠느냐?”

“그렇소.”

금범군 청년이 퉁명스럽게 내뱉자 누발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네 이놈! 감히 졸개 따위가 수로맹주인 나에게…….”

딸그랑.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누발의 등 뒤에서 방울 소리가 울렸다.

눈을 가늘게 뜨고 수로맹주와 기 싸움을 벌이던 졸개 청년은 방울 소리를 듣자 놀란 새우처럼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는 자세로 착지해서 군례를 취하고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대형!”

졸개 청년뿐만이 아니었다. 한껏 편안한 자세로 휴식을 취하던 청년들은 어느새 전원이 절도 있게 군례를 취하고 있었다. 심미와 누발은 그들 모두의 시선이 닿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딸그랑.

구리 방울이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한 청년이 다가왔다.

청년은 실로 눈에 띄는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손에는 물소 꼬리로 만든 긴 깃발을 들어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치렁치렁한 붉은 비단옷을 입고, 허리에는 구리 방울을 달아 걸을 때마다 방울 소리가 울리게 했다. 머리에는 관을 쓰지 않고 비녀를 꽂아 풍성한 장발을 제멋대로 늘어뜨리고 있었으니, 이 시대의 기준으로 화려함을 넘어서 기묘한 차림이었다.

‘이런 기묘한 차림이 어색하지 않을 만큼…….’

‘대단한 미남이군.’

청년을 바라보던 심미와 누발은 자신도 모르게 몸이 굳는 것을 느꼈다. 방울 소리를 울리며 심미와 누발의 앞으로 다가온 청년은 별안간 방울을 빼서 소리가 나지 않도록 묶고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야, 야, 일어들 나라. 내가 방울을 잘못 달았다.”

방울을 묶은 미청년이 그렇게 말하자 주변 청년들이 하나둘씩 투덜거리며 일어났다.

“뭐야? 대형이 또 멍청한 짓을 했나?”

“대형. 나이 서른도 안 돼서 정신이 오락가락하면 어찌하오?”

“매일 술독에 빠져 있으니 그것도 무리는 아니지. 삼십 년도 안 살았지만 벌써 남들 삼백 년치 술을 마셨을걸.”

대형이라고 불리는 청년은 호쾌하게 웃으며 부하들에게 말했다.

“으하하, 이 녀석들아. 오늘 마실 술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는 게 우리 금범군의 신조 아니냐?”

청년은 그렇게 말하고 심미와 누발을 수채 안으로 안내했다.

“심 대인, 누 맹주. 많이 놀라셨소? 내가 방울을 달면 싸움의 신호라서 저놈들이 긴장하는데 깜빡하고 방울을 달고 와 버렸지 뭐요. 왜냐면 어젯밤에 엄청난 술고래를 상대하느라 아직 술이 덜 깼기 때문이지. 와하하하!”

청년은 잘생긴 얼굴을 막 쓰면서 크게 웃었다. 누발은 아무리 봐도 적응이 되지 않는 청년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이 모자라 보이는 젊은 놈이 장강 최고의 실력자라니.’

청년은 한참을 껄껄거리면서 자신이 얼마나 많은 술을 마셨는지 자랑하고 나서야 본론을 꺼냈다.

“자, 두 분이 이 감모를 만나러 온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오. 말씀해 보시오.”

감녕, 자는 흥패.

금범군의 수장이자 장강에서 당할 자가 없다는 젊은 무사가 눈을 반짝 빛냈다. 흐리멍덩하던 눈에는 더 이상 취기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되니 원래도 잘생긴 얼굴이 더욱 잘생겨 보여서 심미와 누발 같은 중년의 사내들도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아마 젊은 여인이라면 이 사내의 앞에서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 극히 힘들 것이다.

누발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감 대협. 비가놈이 외지인을 끌어들여서 판순만 원약을 굴복시켰소.”

“나도 들었소. 서량의 마초라지요? 두 분은 판순만을 끌어들여서 비관을 잡으려다 실패한 셈이니 속이 좀 쓰리시겠소.”

감녕은 남의 일처럼 말했다. 누발이 말을 이었다.

“그런 간단한 문제가 아니오. 비관과 마초가 후계자로 유범 중랑장을 지지하고 있소.”

“그래서?”

“만약 유범 중랑장이 정권을 잡으면 우리가 곤란해지오. 비가놈과 장강 교역을 나눠 갖게 되면 더 이상 금범군에 보호비를 낼 방법이 없다는 말이오.”

“그때는 뭐 형주로 떠나야지. 핫하하하!”

감녕은 다시 한번 얼굴을 막 쓰며 웃었다.

누발은 침을 삼켰다. 이 제멋대로인 무법자는 아마 진짜로 형주로 떠날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감 대협, 비관을 살려 두면 그게 여의치가 않을 것이오.”

“응? 무슨 말이오?”

“비관은 형주목 유표에게 줄을 대고 있소. 비가는 대대로 형주 강하에 살다가 수십 년 전 익주로 이주한 집안이오. 그가 비단 교역에서 재미를 보는 건 형주 쪽 연줄에 힘입은 바가 크다는 말이오. 그러니 비관이 마초의 위세를 업고 장강 교역을 잡아 버리면 어떻겠소? 형주로 가서 유표에게 의탁하시는 것도 쉽지 않다는 말이오.”

“뭐, 그때는 강동이라도 가야 하나? 기왕이면 손책을 때려잡고 내가 왕 노릇을 하면 좋겠는데.”

비관이 진짜 유표에게 줄을 댔는지 대지 않았는지 누발은 모른다. 그러나 일단 감녕을 끌어들이기 위해 되는 대로 주워섬겼다.

그럼에도 감녕은 그저 웃을 뿐 딱히 참전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계속 실없는 농담을 하며 웃던 감녕이 불쑥 물었다.

“그나저나 참 기막힌 우연이군. 마침 어젯밤에 다른 손님이 와서 비관과 마초를 제거하자고 했는데 말이야.”

“그게 무슨 소리요?”

그때, 감녕의 등 뒤에서 장막을 열어젖히고 한 청년이 나타났다. 잔뜩 흐트러진 차림새를 한 문관풍의 사내였다. 하얀 얼굴에는 총명함과 오만함이 동시에 떠올라 있었다.

“인사가 늦었군. 소생은 사공부에서 군사로 있는 곽가라고 하오.”

“곽가라면…….”

사공 조조가 가장 신임하는 모사 중 하나다. 지금은 유언의 조문객으로 와서 성도에 머무르고 있을 터였다. 그런 그가 금범군의 수채에서 나타나자 심미와 누발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곽가는 그런 그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어제 감 대협과 대작하다 겨우 살아났소. 의관이 단정치 못한 점 양해해 주시오.”

“아니… 그보다 곽 군사께서 감 대협에게 대체 무슨 제안을 한 것입니까?”

곽가는 감녕을 한번 돌아봤다. 감녕이 어깨를 으쓱하자 곽가가 말을 시작했다.

“마초가 살아 있으면 유탄 공자가 정권을 잡는 데 걸림돌이 되오. 마침 마초는 성정이 난폭하여 남들의 원한을 많이 샀으니, 이역만리 타향에서 필부의 손에 죽어도 이상하지 않겠지요?”

“으음… 사공부가 유탄 공자를 선택했다는 말은 들었는데, 설마 이 정도로 개입되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어디까지나 비공식적인 일이오. 비관과 마초를 죽이면 유탄 공자의 승계에 반대하는 세력도 감히 목소리를 낼 수 없겠지요. 유탄 공자가 익주를 무사히 승계하면, 여기 있는 감 대협이 파군태수가 되실 것이오.”

곽가가 말하자 감녕은 휘파람을 불었다.

“호족들 보호비로 꾸리기에는 금범군이 너무 커져서 말이오. 금범군 운영비를 대려면 아무래도 태수 관직만 한 게 없지.”

“감 대협, 그러면 우리와 함께 비관과 마초를 치시는 거요?”

“내키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지. 심 대인과 누 맹주는 거사를 언제로 잡았소?”

“닷새 후, 비관과의 회담 자리요. 그때 필히 마초가 같이 나올 테니, 소수 병력을 이끌고 판순만인 척하며 비관을 죽이고, 마초는 그 와중에 휘말려서 죽은 것처럼 꾸미면 되오.”

감녕은 심미와 누발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그것도 전략이라고 짰소? 마초는 절정고수요. 내가 직접 나선다고 해도 백 합을 겨루게 될 듯한데, 아무리 우리 수하들이 용맹하다지만 내가 마초와 싸우고 있는데 무슨 수로 그렇게 쉽게 거사를 치르겠소? 나만 한 고수가 하나 더 있지 않으면 실패하는 전략이오.”

“으음… 감 대협, 그렇다면 그만두실 생각이오?”

“아니, 해야지. 마침 나만 한 고수가 하나 더 있으니.”

감녕이 이랬다저랬다 하자 심미와 누발은 어리둥절했다. 곽가가 나서서 설명했다.

“나와 같이 온 사람 중에 절정고수가 한 명 있소. 그가 마초를 막고 있는 동안 감 대협이 일을 처리하실 거요.”

감녕이 빙글빙글 웃으며 곽가의 말을 받았다.

“그와 적당히 비무를 해 봤는데 승부를 내지 못했지. 정말 대단한 고수더군.”

누발은 그 말을 듣고 곽가의 옆에 서 있는 두 명의 사내들을 봤다. 둘 다 어지간한 무골로 보였는데, 특히 그 중에 한 명은 엄청난 거구의 사내였다. 곽가와 감녕이 말한 절정고수는 저 거한이 틀림없으리라.

“이분이 감 대협과 비등할 정도의 고수라면 이미 천하에 이름이 알려졌을 텐데요. 행여나 곽 군사의 정체가 탄로 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그건 걱정하실 필요 없소. 이 사내는 사공께 귀부한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철저한 무명이오. 마초는 이 사내가 사공의 휘하라는 것을 절대 눈치채지 못할 것이오.”

곽가가 논의를 정리했다.

“두 분은 예정대로 닷새 후 회담장에서 마초와 비관을 치시오. 내가 이 사내를 보내 마초가 허튼짓을 하지 못하도록 막겠소. 감 대협께서 그사이에 일을 처리하실 거요. 이 모든 것은 판순만의 소행이어야 하니 제대로 위장하는 것을 잊지 마시오.”

곽가는 그렇게 말하고 소매를 떨치며 수채를 나섰다. 무골로 보이는 두 명의 사내가 곽가의 뒤를 따랐다.

한 명은 태산태수이자 유사시 익주목이 되는 임무를 받은 여건이었다. 또 다른 한 명은 아름드리나무 같은 거대한 몸통에, 어지간한 무사들의 다리보다 굵은 팔뚝을 가진 거한이었다. 거한은 비무를 해서 승부를 내지 못했던 감녕을 한 번 쳐다보고 곽가의 뒤를 따랐다.

* * *

회담은 파군 임강현의 한 포구에서 열렸다.

비가와 심가의 대립 속에 매일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긴장하던 파군태수 조작은 오늘의 회담을 계기로 드디어 걱정에서 해방될 수 있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비관이 마초를 끌어들여 판순만을 제압했으니 대세가 비관 쪽으로 기운 듯 보였다. 심미의 입장에서는 아쉽겠지만 이제는 비관의 요구 조건을 수용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시름 놓고 들떠 있는 조작에게 부장 엄안이 다가와서 말했다.

“태수 어르신. 아직 긴장을 늦추면 안 됩니다. 심미는 그렇다 쳐도 수로맹주 누발은 흉계가 많은 자이니 무슨 계략을 꾸몄을지 모릅니다.”

“이 사람아, 누발이 무슨 흉계가 있든 내 관할에서 패싸움만 안 벌이면 돼. 이제부터는 호족들 일이야.”

“바로 그 패싸움을 벌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소장은 금범적들의 동태를 경계하겠습니다.”

엄안은 매사에 깐깐한 장수였다. 조작은 그런 그를 보며 혀를 찼다.

‘저러니까 출세를 못 하지. 능력으로 보면 태수나 장군 정도는 했어야 할 위인인데 말이야.’

저렇게 깐깐하게 구니 역사서에 이름을 남기기는커녕 변변한 관직 한 번 못해보고 잊혀질 것이다. 조작은 엄안을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회담장의 중앙에서는 비관과 심미가 마주 앉아 있었다. 주로 논의를 진행하는 것은 그 둘이었다. 누발과 감녕, 마초와 이회가 같이 앉아 있었지만, 별달리 할 말이 없었다. 이 모든 일이 시작된 건 비관과 심미의 다툼 탓이니 제3자들은 그저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마초는 감녕을 보며 말했다.

“감 대협이라 했나?”

“그렇소.”

“이 지루한 회담이 끝나면 연회가 준비되어 있소. 그때 나와 따로 좀 앉읍시다. 내가 감 대협에게 할 말이 있소.”

“오호, 복파장군 같은 영웅이 이 감모에게 할 말이 있으시다?”

“일단 들어 보시오. 감 대협에게 나쁜 얘기는 아닐 것이오.”

“으하하, 이거 영광이군요. 마침 이 감모도 복파장군에게 할 말이 있으니 꼭 그쪽으로 가겠소.”

마초와 감녕이 그렇게 말을 주고받는 사이, 심미와 비관은 회담을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비관이 요구한 조건이 거의 다 관철된 회담이었다. 심미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비관은 심미와 읍을 주고받은 후 통 크게 웃었다.

“하하하! 심 대인, 오늘은 좋은 날이니 이 비모가 연회를 준비했습니다. 지난 일은 한 잔 술로 다 잊고, 앞으로는 둘이 힘을 합쳐 파군의 발전을 위해 애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허허… 비 대인께서 이리 도량이 크신데 이 심모가 몰라봤소. 그저 부끄러울 따름이외다.”

비관과 심미는 사업가들이다. 의례적인 인사말을 주고받으며 마치 십년지기라도 된 듯 의좋게 연회석으로 향했다.

술이 두 순배 돌고 연회의 분위기가 슬슬 무르익어갈 무렵, 누발은 심미와 감녕에게 눈짓을 했다.

“내키지는 않지만 할 수 없지. 태수 벼슬이 있어야 부하들을 먹여 살리니까.”

감녕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변소에 가는 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회장 밖에는 어느새 판순만의 복장을 한 무사들이 가득 모여 있었다. 감녕은 그런 그들을 보며 품 안에서 뭔가를 꺼냈다. 천으로 칭칭 감겨 있는 구리 방울이었다. 감녕이 손가락에 힘을 주자 천은 너무나도 쉽게 찢어졌다.

“그럼 시작해 볼까.”

딸그랑.

감녕의 허리에 매달린 구리 방울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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