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유재백묘공산
남중의 깊은 산골에서 발원한 장강은 익주 남부를 흐르며 익주의 수많은 지류와 합류한다. 익주 동부의 파군에 이르면 탕수와 한수, 부수가 합류하면서 그 흐름이 실로 도도해진다.
파군 임강현은 그런 장강의 유역에 만들어진 고을이었다. 이곳은 장강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들, 장사를 하는 상인들, 상선을 타는 뱃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이곳에서 선적된 익주의 비단과 향료는 장강 하류의 형주와 강동에서 풍부한 물산으로 바뀌어 다시 돌아왔다. 때문에 임강현은 장강 교역으로 부를 축적한 호족들의 위세가 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임강현 최대의 호족, 부릉 심가의 가주 심미는 대단히 초조해하고 있었다. 그가 경쟁자 비관을 무너뜨리기 위해 동원한 판순만들이 비관이 데려온 외지인들에게 패했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누 맹주. 비가 놈이 덩치만 큰 줄 알았더니 재주가 보통이 아닐세. 외지인을 끌어들여서 판순만 두령 원약을 무릎 꿇렸는데, 심지어 그 외지인이 복파장군 마초라고 하네.”
심미의 앞에 앉아 있는 중년 사내는 이마에 죄수의 문신이 없는 게 이상할 만큼 험상궂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장강 뱃사람들의 우두머리, 장강수로맹주 누발이었다.
누발은 마초의 이름을 듣자 안 그래도 험한 인상을 더욱 찌푸렸다.
“심 대인. 서량에서 말젖이나 짜 먹던 애송이가 장강까지 와서 행패를 부리다니, 그놈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모르겠으나 파군의 사내로서 내버려 둘 수 없소.”
“자네의 기백은 대단하네만 마초는 천하에 이름이 높은 무장일세. 그놈이 이끄는 남만족들은 또 좀 사나운가? 게다가 파군태수까지 마초와 비가 놈을 싸고돌고 있으니 큰일일세. 파군태수의 이름으로 나를 불러서 비가놈과 화해를 시키면 방법이 없다는 말일세.”
“우리와 끈이 닿은 유탄 공자가 익주목을 승계하기만 하면 다 잘 될 줄 알았는데… 마초라는 놈 때문에 일이 틀어지게 생겼군. 제기랄.”
혼자 거칠게 욕설을 내뱉던 누발은 문득 뭐가 생각난 듯 물었다.
“심 대인, 성도의 소식은 전해진 게 없소?”
“유탄 공자가 생각보다 기반을 탄탄하게 잡은 모양이더군. 한중의 장로와 남중의 옹개가 전부 유탄 공자를 지지한다고 하네. 그리고 이건 극비인데, 사공 조조도 유탄 공자 쪽으로 힘을 써줄 생각인가 보더군.”
“잘 됐구려. 그러면 서량은?”
“서량의 마가군은 유범 중랑장을 지지한다고 하네. 마초가 익주 선비들의 모임에 나가서 부소와 호해의 고사를 언급했다더군. 진나라는 장남이 승계하지 않아서 망했다고 말이야.”
“오호라…….”
거친 세계에서 우두머리가 되는 자들이 대체로 그렇듯이, 누발 또한 험상궂은 외모와는 달리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 자였다. 심미의 말을 들은 누발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들어 보시오, 심 대인. 그렇다면 오히려 일이 쉬워질 수 있소.”
“그게 무슨 소리인가?”
“우리는 유탄 공자가 정권을 잡을 때까지만 버티면 되오. 마초가 유범의 편에 섰다면 그의 힘을 빌린 비관도 마찬가지일 터, 그러니 유탄 공자가 정권을 잡기만 하면 비관 대신 우리에게 이권을 몰아줄 거요.”
“그건 나도 아네. 허나 이제 곧 마초가 우리와 비가 놈을 강제로 화해시키려 할 터인데, 그때까지 어찌 버틴단 말인가?”
“마초를 먼저 칩시다.”
“뭣이?”
심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누 맹주, 그러다 일이 틀어지면 죽은 목숨일세. 서량 마가군이 얼마나 난폭한지 못 들었나? 장수는 마초에게 대적하다 팔다리가 잘렸고, 대사마 이각은 마초의 아비 마등이 산 채로 회를 떠 버렸다고 하네. 게다가 홍농왕을 시해했던 이유는 잡아서 사지를 찢어 버렸다지 않나?”
“사내가 한 번 살고 한 번 죽는 거요. 그렇게 겁이 많아서 어디다 쓰겠소?”
“이기기만 한다면 해 볼 만하지. 그러나 마초는 무예의 달인이고 그 밑에 있는 놈들도 보통 놈들이 아닐세. 자네가 용맹한 건 내가 익히 알지만, 말젖 먹고 자란 서량 왈패놈들을 무슨 수로 당하겠는가?”
“나에게는 무리일지도 모르지. 그러나 우리 남방에도 저놈들에게 뒤지지 않는 호걸이 하나 있지 않소? 감 대협을 앞장세워 마초를 칩시다. 감 대협이라면 저들에게 질 리 없소.”
“으음…….”
심미는 누발의 말을 듣고 침음을 흘렸다.
누발은 금범군의 수장을 끌어들이자고 말하고 있었다. 확실히 그 사내라면 어떤 적과도 맞서 싸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감 대협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마초와 싸워 줄까? 그자는 제멋대로라 우리 말도 안 듣지 않나?”
“내가 일을 좀 꾸며서 설득해 보겠소. 감 대협이 나서 주기만 한다면 마초는 장강의 고기밥이 될 것이오.”
“…알았네. 나는 누 맹주만 믿겠네. 꼭 감 대협을 끌어들여 주게.”
심미는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누발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언제까지 장강에서 노닐 수 있나 보자, 마초. 이곳은 네놈이 살던 모래바람 부는 서량이 아니야.”
* * *
“풍요로운 장강을 떠나 모래바람 부는 서량으로 향하는 게 쉽지는 않을 것이오. 봉록은 넉넉히 드리겠으나 돈이 있어도 쓸 시간이 없을 만큼 일이 거칠 것이오. 그러나 서량은 또한 선비가 뜻을 펼칠 만한 곳이외다.”
파군의 한 저택.
마초는 세 명의 젊은 선비들을 앞에 놓고 열띤 투로 말하고 있었다.
“우리 관중도독부에서는 지하 수로를 놓아서 서량의 소출을 두 배로 늘려 볼 생각이오. 이 계획이 성공하면 수천 년간 이민족의 땅이었던 서량이 비로소 완전한 한의 영토가 될 것이오. 이렇게 서량을 개발하며 얻은 경험은 천하 곳곳에서 요긴하게 쓰일 것이오. 병주에서, 요동에서, 남중에서, 교주에서 전부 말이오. 그리되면 비로소 사해가 하나가 될 것이오.”
지금 마초의 앞에 있는 선비들 중 두 사람은 마초가 파군태수 조작에게 문의해서 찾아 달라고 한 사람들이었다. 원래 익주에서 데려가려던 문관들이다. 나머지 한 사람은 원래 계획에 있던 사람은 아니었지만, 지금 파군에 머무르고 있는 것을 알고 급히 수배해서 데려온 인물이었다.
“자, 우리는 귀공들을 천하에서 가장 귀한 선비로 만들어 줄 수는 없소. 그러나 우리와 함께 수년을 고생하면 귀공들은 천하에 가장 유용한 선비가 될 것이외다. 그것만은 내 보장하리다.”
마초의 말이 끝나자 세 명의 선비 중 마르고 꼬장꼬장해 보이는 인상의 청년이 말했다.
“복파장군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는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 복파장군께서는 우리가 관중도독부에 무엇을 드릴 수 있는지는 말하지 않으시는군요.”
“그야 나는 세 분이 어떤 사람인지 익히 알고 있으니까.”
마초는 씩 웃으며 꼬장꼬장한 인상의 청년, 동화에게 말했다.
“내가 배움은 짧아도 사람을 볼 줄은 알지요. 동유재(유재는 동화의 자)는 원리원칙에 철저하고 헤아림이 세밀할 것이오. 등백묘(백묘는 등지의 자)는 대담하면서 변설이 뛰어날 것이고, 등공산(공산은 등방의 자)은 절개가 굳고 과단성이 있을 것이오. 세 분 모두 관중도독부에 꼭 필요한 인물들이오.”
마초가 부른 세 명의 선비 동화, 등지, 등방은 놀라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셋 다 자기 자신을 마초가 말한 것처럼 평가하고 있었다.
셋 중 가장 어린 올해 스무 살의 등지가 말했다. 원래의 역사에서 거기장군까지 올랐던 무골답게 얼굴이 크고 어깨가 넓은 청년이었다.
“복파장군의 헤아림이 실로 놀랍습니다. 저희 셋은 아직 관직도 없는 무명인데 어찌 그리 면밀하게 파악하셨습니까?”
“핫하하, 백단향은 주머니에 들어 있어도 그 향기가 방 안에 가득하고, 날카로운 송곳은 주머니에 들어 있어도 뚫고 나오는 법. 세 분의 사람됨을 짐작하는 데는 몇 마디를 나눠 보면 충분했소이다.”
사실 동화, 등지, 등방은 마초가 지난 생에서 알던 사람들이었다. 유비군에 귀부한 후 같은 촉한의 중신으로 수차례 만났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초는 그런 사실은 쏙 빼놓고 마치 자신의 안목으로 흙 속의 진주를 알아본 양 꾸몄다.
셋 중 키가 작고 살집이 있는 청년이 나섰다. 지금쯤 형주에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 명단에 빠져 있었던 등방이었다. 그는 남중을 다스리는 내항도독까지 올라갔던 인물로, 원래 형주의 호족 출신이지만 파군으로 이주한 숙부의 장례 때문에 마침 파군에 와 있다고 했다.
“복파장군의 헤아림이 밝은 것을 잘 알겠습니다. 어차피 글 읽은 자로 언젠가는 출사해야 할 몸. 조상 대대로 살아 온 형주에서 출사할 수 있다면 가장 좋겠으나, 형주목 유표는 큰 인물도 아니고 충의지사도 아니니 저도 고민이 많았습니다. 형주의 가산을 정리한 후, 관중도독부가 있는 장안으로 이주하겠습니다.”
<계한보신찬>에서는 등방에 대해 ‘재물을 가볍게 여기고 용감해서 흔들리지 않았다’고 평했다. 청년 등방은 그런 평가가 무색하지 않게 빠르고 과감하게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등지 또한 등방의 뒤를 따랐다.
“저는 앉아서 공문서의 자구를 고치고 예법을 논하는 일에는 맞지 않습니다. 복파장군께서 지방관, 무장, 그리고 사신 같은 실질적인 일을 맡겨 주신다면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핫하하하! 이를 말이겠소. 우리 관중도독부에서 원하는 선비가 바로 딱 등백묘와 같이 문무를 겸비하고 실리를 중시하는 인재올시다.”
마초는 크게 웃으며 등지의 말을 받았다.
신중한 성격답게 마지막까지 고민하던 동화가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복파장군께서 저를 높게 봐 주시는 것은 감사합니다. 저 또한 관중도독부로 가서 재주를 펼치고 싶으나, 한 가지 먼저 약조해 주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동유재는 허튼 요구는 하지 않을 사람이란 걸 알고 있소. 말씀해 보시오.”
“저는 성정이 이러해서 이치에 맞지 않을 경우 직언을 피하지 않습니다. 이를 관중도독이나, 다른 문관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걱정됩니다. 복파장군께서 적합하지 않다고 보신다면 지금 말씀해 주십시오.”
동화는 소신이 뚜렷하여 상위자의 의견에 반론을 제기하는 일이 잦다. 이런 사람들은 잘못하면 조직의 질서를 어지럽힐 수도 있지만, 원래의 역사에서 동화의 행동은 문제가 됐던 적이 없다. 그만큼 헤아림이 꼼꼼하고 원칙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또한 제갈량 밑에서 일했으니까. 제갈량의 도량이라면 깐깐한 동화를 얼마든지 품을 수 있었겠지.’
마초는 그런 동화를 바라보며 자신 있게 말했다.
“걱정하실 필요 없소. 관중도독께서는 행정 일은 순유 별가에게 일임하신 상태요. 순유 별가 또한 식견이 넓고 도량이 큰 인물이니 유재의 직언을 고맙게 여길 것이오. 내 말이 틀린다면 언제든 자리를 내놓고 파군으로 돌아가셔도 좋소.”
마초가 그렇게 말하자 동화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고 마초를 향해 길게 읍을 올렸다.
“그렇다면 무엇을 더 망설이겠습니까? 관중도독부에 출사할 테니 필요한 곳에 써 주십시오. 동화가 복파장군을 뵙습니다.”
“등지가 복파장군을 뵙습니다.”
“등방이 복파장군을 뵙습니다.”
마초는 얼른 일어나서 동화, 등지, 등방에게 맞절로 답례했다.
“귀공들을 모시게 된 것은 이 마초의 영광이오. 며칠 안으로 내 수하의 이감 장군이 장안으로 가실 수 있도록 수행원들을 붙여 줄 것이니 잠시만 기다리고 계시오.”
애초에 파군에서 찾아서 데려가려고 했던 동화와 등지뿐만 아니라 등방까지 얻게 되었다. 게다가 서량으로 돌아가면 곧 장중경이 찾아와서 마가군의 의료 체계를 정비해 줄 예정이었다. 예상 외의 수확에 마초는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문관 사냥은 대성공이군. 이 정도면 서황을 되찾을 수 있겠지. 으하하하!”
가장 기쁜 것은 서황을 다시 군무 쪽으로 빼 올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기쁨에 겨워 있는 마초에게 나관중이 다가와 말했다.
“주공, 하지만 익주에서는 문관들만 데려가려고 했던 것이 아니지요. 군사, 대장장이, 그리고 선봉장을 찾으러 오신 것 아닙니까?”
마초가 따로 찾던 세 사람 중 군사는 이미 찾았다. 파서군의 군리 황권이다. 이번 파군 분쟁을 일단락한 후 잘 설득해서 파서군에서 사직하고 관중도독부로 갈 수 있도록 애써 볼 참이었다.
“군사는 찾았지만, 아직 대장장이와 선봉장이 남아 있지.”
“맞습니다. 특히 선봉장은… 이제 곧 만나게 되겠군요.”
“그래. 그 또한 크게 쓰이고 싶어서 형주로, 강동으로 계속 떠돌았지. 내가 큰 자리를 제시하고 진심으로 설득한다면 그 또한 흔들릴 것이다.”
마초는 선봉장을 설득하는 데 자신감을 보였다. 나관중도 고개를 끄덕였다.
“조작 태수를 통해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곧 비관 대인과 심미의 화해 회견을 주선한다고 합니다.”
“잘 됐군. 만나는 김에 장강수로맹의 주요 인사들도 다 같이 모아 달라고 해. 그러면 금범군의 수장으로 있는 우리 선봉장도 나올 테니, 그 자리에서 설득해야겠다.”
이제 며칠 후면 비관과 심미의 다툼을 중재하기 위한 회담이 열릴 것이다.
마초는 금범군의 수장으로 있는 ‘선봉장’을 그 자리에 같이 불러서 직접 설득할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