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남방의 신의
자신이 곧 죽을 줄만 알았던 원약에게 불만이 있을 리 없었다. 왕평을 마초가 데려가겠다는 조건까지 수락하고 깨끗이 항복했다.
어안이 벙벙한 것은 더벅머리 소년, 왕평이었다.
“나를 죽이지 않는가?”
“네가 죽어 버리면 죗값을 못 치르잖아? 목숨을 살려줄 테니 죽었다 생각하고 내 밑에서 20년간 일해라. 그럼 아마 너도 이름난 무장이 돼 있을 거다.”
마초는 그렇게 말하고 왕평의 밧줄을 풀어 주게 했다. 그리고 등을 돌려 걸어가던 마초는 뭔가가 생각나서 갑자기 멈춰 섰다.
“그런데 황 군사를 찌르고, 내 목숨을 노렸던 놈을 그냥 수하로 삼을 수는 없지. 황 군사와 나에 대한 사죄의 뜻으로 네가 매일 빼놓지 않고 해야 하는 일이 있다.”
“그… 그게 무엇인가? 아니 무엇입니까?”
마초가 관용을 베푼다는 것을 알게 되자 왕평의 말투가 변했다. 마초는 황권에게 다가간 후, 손짓으로 맹획까지 함께 불렀다. 마초가 황권과 맹획에게 뭐라 귓속말을 하자 두 사람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한 건 여기 황권 군사가 알려주실 거다. 맹획 아장이 도와줄 테니 잘 따라라. 그럼 잘해 보라고, 왕평. 참수형 대신 받는 벌이니까 절대 흐트러짐이 없도록 하고.”
마초는 그렇게 말하고 사라졌다.
왕평은 당황스러웠다. 오늘 그에게 일어난 일은 당황스러움의 연속이었다.
재빠른 몸놀림이라면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다. 마가군 수장 마초는 대단한 고수라고 알려져 있었지만, 근거리에서 기습한다면 자신이 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왕평의 도끼날은 마초의 몸에 닿지도 못했다. 자신을 막아선 황권이라는 사내는 무장도 아닌 군사였고, 올돌골이라는 거구의 남만족 무사도 장수가 아니라 기껏해야 백부장 정도 되는 위치인 듯했다. 그런데도 상당한 강자들이었다.
무엇보다 마지막에 자신을 막아선 장료라는 무장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정교한 검술을 지니고 있었다. 열 번을 싸운다 한들 한 번도 이길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죽이려고 했던 마초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자신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 수하로 삼았다.
‘놀라운 도량이다. 이런 사내라면 함께 큰일을 해 볼 만하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왕평은 사라져 가는 마초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고 손을 모아 군례를 올렸다. 그런 왕평의 뒤에서 인기척이 일었다.
“왕평이라고 했나. 잘 부탁하네.”
황권이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왕평은 황권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군사 어르신, 발은 괜찮으십니까? 목숨이 오가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서로 할 일을 했을 뿐이니. 그보다 복파장군께서 자네의 처분을 나에게 지시하고 가셨네.”
“죽을 목숨을 살려 주셨으니 뭐든지 하겠습니다만…….”
왕평은 그렇게 말하며 황권을 올려다보았다.
사실 내려올 만한 처분이 없었다. 봉록 몰수나 태형이 나올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계급을 깎자니 애초부터 병졸인 왕평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황권의 입에서는 의외의 말이 나왔다.
“앞으로 매일 글을 읽을 것. 단 하루도 빼놓지 말고, 삼 년간. 그게 복파장군께서 내리신 처분이다.”
“어르신…….”
왕평은 쓸쓸한 웃음을 띠고 황권을 바라봤다.
“참으로 송구합니다. 저는 글을 읽지 못합니다. 어릴 때 고아가 돼서 걸식하던 저를 원약 두령이 거둬서 키워 주셨지요. 판순만 사이에서 자라다 보니 한자를 읽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
“그게 글 읽는 것과 무슨 상관이지? 어제까지 못 읽었으면 오늘부터 읽도록 하게.”
“아니 저는 글을 못 읽는다니까요?”
당황한 왕평의 뒤에서 맹획이 이죽거렸다.
“흥, 어지간히 머리가 둔한 녀석이군. 네놈은 이제부터 마가군이다. 그리고 마가군의 군정 책임자인 복파장군이 글을 읽으라고 했다.”
“그, 그렇지요.”
“그러면 읽으면 되는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저는 글을 못 읽…….”
“흥, 글을 못 읽으면 군 생활 끝나냐? 마가군에 놀러 왔어?”
맹획은 왕평의 사정 따위는 개의치 않고 쏘아붙였다. 왕평은 그저 답답해서 가슴을 칠 뿐이었다. 맹획은 그런 왕평에게 죽간 하나를 내밀었다.
“내일까지 외워 와라. 내가 한 번 들려줄 테니 잊어버리지 말고. 그대로 계속 외우다 보면 읽을 수 있을 거야.”
* * *
다음 날.
“너 나랑 장난하냐?”
“소, 송구합니다, 맹획 아장. 어제도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글을 읽지 못해서…….”
“이 자식이 말귀를 못 알아듣네? 밤송이를 까라면 까는 거야!”
맹획은 왕평이 어제 알려준 죽간을 제대로 외우지 못하자 불같이 화를 냈다. 왕평은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맹획의 비난을 듣고 있었다.
마초는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으하하, 맹획이 잘하고 있군. 역시 지도자가 되려는 녀석이라 그런가 뭔가 달라.”
나관중은 기가 막혔다.
“저게 잘하는 건가요?”
“그럼. 저런 방법이 효과가 좋지.”
“왕평이 글을 못 읽는 건 나름의 사정이 있을 텐데, 자칫 너무 기가 죽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글자를 많이 봐도 그 모양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습니까?”
“이봐, 관중. 군문에 든 지 벌써 4년이 돼 가는데 그런 소리를 하나? 안 되면 되게 하는 거야.”
마초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한참 동안 웃고 나서 말했다.
“왕평은 전술의 천재다. 하지만 글을 모르니 저 녀석이 부대를 이끌려면 옆에서 여러 명이 도와줘야 하지. 그게 바로 저 녀석이 노년에서야 빛을 본 이유다. 글 잘하는 군리들을 여러 명 부릴 만한 위치가 아니면 저 녀석에게 큰일을 맡길 수 없어.”
마초는 지난 생에서 만난 30대의 왕평을 기억하고 있었다. 왕평은 무예에도 능했지만, 그보다 뛰어난 식견과 탁월한 부대 장악력이 더 돋보이는 지장이었다.
그러나 군령장 한 줄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초급장교에게 큰일을 맡기는 사람은 없다.
“저 녀석에게 가장 필요한 건 무예도, 병법도 아니고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이야. 나이를 더 먹으면 글을 깨우치기 더 힘들 테니, 지금 아무것도 모를 때 죽기 살기로 까막눈을 탈출하게 만들어야지. 자기도 욕먹기 싫으면 어떻게든 배우겠지.”
“과연… 주공께서는 그런 생각이 있으셨군요. 그런데…….”
나관중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맹획이 발을 탕탕 굴러가며 왕평을 닦아 세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나관중은 한숨을 쉬었다.
“저러다 마음이 다치지나 않을지 걱정입니다.”
“마음은 당연히 다치겠지. 그거야 뭐, 나한테 도끼질까지 하려던 녀석이니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어쨌든 저러다 보면 언젠가는 까막눈을 탈출하지 않겠나?”
마초는 왕평의 인권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 * *
판순만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마초 일행은 파군태수의 치소에 도달했다. 판순만의 세력은 태수도 손쓰지 못할 정도였는데, 외지인인 마초가 나서서 분쟁을 해결하자 파군태수 조작은 한달음에 치소 밖까지 달려 나왔다.
“아이고, 복파장군! 얼마나 노고가 많으십니까!”
“조 태수. 대단치 않은 일이오. 판순만들이 비관 대인을 협박하기에 그저 의협심을 조금 발휘했을 뿐입니다.”
파군태수 조작은 연회 자리까지 만들어서 마초와 일행을 극진히 대접했다. 자리가 무르익었을 무렵, 마초는 조작에게 한 가지 부탁을 건넸다.
“파군 관내의 젊은 선비들과 교류하고 싶은데, 젊고 이름난 선비 두 사람이 불러도 듣지 않더군. 태수께서 여기 적힌 두 사람을 좀 불러 주시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조만간 복파장군과 자리를 만들겠습니다. 태수의 명이라면 선비들이 감히 거역하지 못할 겁니다.”
조작은 마초의 부탁을 받아 두 사람의 선비를 찾아 주기로 한 뒤, 문득 뭔가에 생각이 미쳤다.
“복파장군, 명사들과 교류하는 걸 좋아하시지요?”
“글쎄, 명사보다는 젊고 유망한 선비들을 만나는 걸 좋아하오. 왜 그러시오?”
“복파장군께서 만나보고 싶어 하실만한 인물이 지금 파군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한 번 불러 볼까 합니다.”
“오호. 그게 누구요?”
조작은 딱 보기에도 그저 범용한 사내였다. 그런 그가 추천하는 인물이라니 마초는 별로 신뢰가 가지 않았다. 그저 의례적으로 놀란 척을 하며 조작을 바라봐 주었다.
그런데 조작은 평소 마초가 만나고 싶어 하던 인물의 이름을 말했다.
“장중경입니다.”
“뭣이!”
마초는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장중경은 형주 남양 사람인데, 본명보다 자인 중경으로 더 많이 불린다. 그는 화타와 함께 이 시기 천하에서 가장 유명한 의원이었다. 장중경이 장강 유역의 갖가지 질병을 치료하며 진료 기록을 모아서 지은 <상한론>은 오늘날까지도 한의학에서 가장 권위 있는 자료로 남아 있을 정도다. 비록 <삼국지연의>에서 관우와 조조를 치료하며 이름이 높아진 화타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후세에 끼친 영향력은 오히려 더욱 큰 의원이었다.
“장중경 선생이 파군에 있다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풍토병에 대한 연구를 하다 보니 형주에서 장강을 거슬러 파군까지 오게 됐다고 하더군요. 앞으로 한두 달 정도 머무르며 환자를 보고 돌아간다고 합니다.”
마초는 그 길로 장중경을 찾아 나섰다. 조작은 장중경을 태수부로 불러들이려 했지만, 마초는 굳이 거절하고 자신이 직접 장중경을 만나러 갔다.
장중경이 진료소 겸 거처로 사용하고 있는 허름한 고택 안에서 마초와 장중경이 마주 앉았다. 장중경은 벌써 머리가 희끗희끗한 초로의 선비였다.
“복파장군 하면 이 남쪽에도 이름이 높지요. 제가 사는 형주에서는 사람들이 복파장군을 관서의 사자라고 부르더군요.”
“큰 싸움을 몇 번 치르니 헛되이 이름만 알려졌습니다. 사람을 해하며 얻은 명성이 아무리 높은들 장 선생처럼 사람을 살리며 얻은 명성에 비하겠습니까?”
마초는 겸양의 말을 하며 다소 과장된 언사로 장중경에 대한 존경심을 드러냈다.
의원이 큰 존경을 받지 못하는 시대다. 남들의 존경과 인정에 아주 민감한 사람은 이런 시대에 의원의 길을 걷지 않는다. 장중경은 그저 쑥스러워할 뿐이었다. 하지만,\ 강력한 군벌의 후계자인 마초가 계속 존경심을 드러내면 사람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어느 정도 상대의 마음이 열린 듯하자 마초는 슬슬 본론을 꺼냈다.
“장 선생, 파군에서의 연구가 끝나면 잠시 장안에 들러 주실 수 있겠습니까?”
“글쎄요, 장안에 가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평생 남쪽의 병을 연구한 사람입니다. 서북의 병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환자를 봐 달라는 게 아닙니다. 선생께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허허, 복파장군께서 이 촌부에게 무엇을 부탁하려 하십니까?”
“제 수하 중에 서역의 대진국에서 온 석공이 하나 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대진국의 군대에는 부대마다 의원이 상주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렇습니까? 서역에도 발전한 나라가 있다는 소문은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선생. 저는 마가군에 그들의 방식을 도입하려 합니다. 큰 부대에는 의원이 있고, 작은 부대에는 임시로 의원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훈련된 병사가 있는 그런 군을 만들 생각입니다.”
지난 생부터 치면 마초가 군문에 든 지 33년째이다. 그동안 다양한 환경에서 다양한 적들과 싸우며 느꼈던 것은 의료의 중요성이다.
‘군문에는 병이 자주 생긴다. 심한 경우 싸우다 죽거나 다치는 병사들보다 병으로 싸우지 못하게 되는 병사들이 훨씬 많기도 하지. 가벼운 상처를 제대로 치료하지 못해서 죽는 병사도 부지기수다.’
지금이라고 군문에 의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수가 너무 적었다. 마초는 오백 명에 한 명씩 의원을 배치하고, 일부 병사들에게 기초적인 의원 교육을 시켜서 위급 상황에서 써먹을 수 있게 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마가군 내의 의원을 최대한 늘려야 한다. 군문에 도는 질병을 미리 예방하고, 가벼운 상처를 입은 병사를 치료해서 복귀시킬 수 있다면 엄청난 이점이 된다. 이렇게 되면 병사들의 사기도 오르겠지.’
군문에 있는 의원이 이름난 명의일 필요는 없다. 종군하는 군의가 꼭 장중경이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마가군에 새로 편성할 군의들을 교육하고, 각종 질병의 예방에 대해 문서로 정리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상한론>을 지어 한의학 연구의 기틀을 잡은 장중경이야말로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장중경은 빙그레 웃었다.
“복파장군, 저는 그저 사람을 살리는 일이 좋아서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저보고 사람을 죽이는 군문의 일을 도우라니, 너무 짓궂지 않습니까?”
“선생, 이것은 사람을 죽이는 일이 아니라 살리는 일입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전란의 시대가 된 지 10년이 넘었습니다. 이각은 관중에서, 조조는 서주에서, 원술은 남양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지요. 선생께서는 이런 전란이 언제까지 가리라 보십니까?”
장중경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저 사람을 살리는 것이 목적인 그 같은 이에게는 참으로 가혹한 시대였다.
“몇십 년이 갈지 모르겠습니다. 이 촌부가 죽기 전에는 전란이 끝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누가 전란을 끝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힘 있는 자만이 가능하겠지요. 하북의 원소, 연주의 조조… 또는 관중도독 마등 대인.”
지금 천하에서 가장 강성한 군벌은 원소다. 그다음을 꼽자면 조조와 마등이 꼽힌다.
마초는 장중경을 바라보며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결국 셋 중의 하나가 패권을 잡아야 전쟁이 끝나고, 그래야 사람들이 죽지 않고 살겠지요. 그래서 도와 달라는 것입니다. 선생의 의술로 마가군을 강하게 만들어 전란을 끝낼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장중경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보다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누가 패권을 잡아야 할까?
일단 조조는 아니다. 그는 이미 서주에서 수십만의 백성들을 학살한 전력이 있다.
원소라고 보기도 어렵다. 그는 당금 천자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원소에게 대세가 기울 수는 있으나, 그가 정권을 장악한다면 황위를 둘러싸고 피바람이 불 것이다.
남는 것은 마등이다. 그는 셋 중 가장 약해 보이지만, 이미 수많은 사람들을 전란에서 구한 실적이 있다. 대담하게 이각을 쳐서 관중을 장악하고 대기근으로 죽을 사람들을 십만이 넘게 살려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장중경은 마초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알겠습니다. 복파장군과 관중도독께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보잘것없는 재주지만 기꺼이 마가군의 일을 돕겠습니다. 단, 몇 달간 지금 하고 있는 연구를 마무리한 뒤 장안으로 찾아가겠습니다.”
“선생, 정말로 고맙습니다. 이 초는 선생의 뜻을 받들어, 지지 않는 강군을 만들고 천하를 평안케 하겠습니다.”
마초는 장중경을 향해 연신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며 잔잔히 웃던 장중경이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복파장군. 그러나 조심하셔야 합니다. 저는 남쪽 사람이라 남방의 정세를 다소 알고 있습니다. 주의해야 할 상대는 원소와 조조뿐만이 아닙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북방 사람들은 복파장군을 두고 관서의 사자라고 부르지요. 남방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서북에 관서의 사자가 있다면, 동남에는 강동의 호랑이가 있다고.”
“아아, 그 친구.”
마초는 씩 웃었다. 장중경이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지금 세력은 미약하지만, 남방에는 강동의 호랑이라 불리는 영웅이 있습니다. 복파장군과 비슷한 나이의 젊은이입니다. 그의 재주는 가히 천하를 노릴 만하지만, 성정이 난폭하여 천하를 맡길 만한 인물은 아닌 듯합니다.”
“저 또한 대강 들은 바가 있습니다. 토역장군 손책을 말씀하시는 거지요?”
“맞습니다. 손책이 지금은 미약해 보이지만 그에게는 강력한 무기가 있습니다. 의원인 저에게는 그가 가진 무기가 보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장강의 풍토병입니다.”
장중경이 마초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복파장군께서는 북방 출신이라 모르시겠지만, 장강의 풍토병은 무섭습니다. 원소, 조조, 마등 도독은 전부 북방의 군웅들입니다. 그들 중 누구라도 중원을 장악한다면 천하를 통일하기 위해 장강을 넘어 형주와 강동을 노리겠지요. 장강은 그때 발톱을 드러낼 것입니다.”
“그 말씀은… 풍토병이 천하통일을 막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까?”
“막을 것입니다. 평생을 장강의 풍토병 연구에 바친 제가 보기에는 그렇습니다. 군문은 원래 병이 잦은 환경입니다. 수군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북방의 병사들이 생전 처음 와 본 장강에서 강동의 군사들과 싸운다? 풍토병이 돌아 한 번은 대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때 강동의 패자가 손책이라면…….”
장중경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일거에 전황을 뒤집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천하는 북쪽의 천하와 남쪽의 천하로 갈릴 수도 있겠지요. 그는 그 정도의 인물입니다.”
“으하하하!”
마초는 크게 웃었다.
장중경의 말은 정확히 10년 후, 적벽에서 그대로 실현된다. 북중국을 제패한 조조도 장강의 풍토병까지는 어떻게 하지 못했다. 결국 조조는 믿을 수 없는 병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적벽에서 대패하고, 이후로도 천하는 60년간 셋으로 나뉘어진 채 통일되지 못했다.
그러나 마초 또한 지난 생의 경험을 통해 이를 알고 있을 뿐이다. 이런 일을 미리 예측할 수 있는 건 장강의 풍토병 연구에 평생을 바친 장중경뿐이리라.
“선생께서는 실로 지혜로운 분이십니다. 그러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마초는 진지한 눈으로 장중경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천하를 쪼갤 생각이 없습니다. 언젠가 그와 싸우게 되는 날, 반드시 그를 꺾고 천하를 하나로 만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