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종전의 조건
더벅머리 소년 평은 그대로 마초를 향해 달려들었다. 덥수룩하게 자란 머리에 가려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금니를 꽉 깨물며 이가 드러났다. 머리 위로 잔뜩 치켜든 손도끼가 마초의 머리를 노리고 날았다.
챙!
막아선 것은 황권이었다. 체중이 소년보다 두 배나 나갈 법한 건장한 군사는 마초의 옆에 시립해 있다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장검을 들어 소년의 손도끼를 막았다. 소년은 황권의 힘과 체격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튕겨 나갔다.
팔짱을 끼고 호상에 앉아 있는 마초는 여전히 느긋했다.
“이 녀석아, 암살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되는 줄 알아? 아직 어린놈이고 배포가 가상하니 태형 몇 대로 넘어가 주마. 그쯤에서 그만둬라.”
지금 마초의 옆에는 전장에서 이름을 떨치는 무장들과 그런 무장들과도 대등하게 검을 겨루는 군사가 있다. 마초는 초조해하지 않았다.
그러나 검을 맞대 본 황권의 생각은 달랐다.
“복파장군, 보통 놈이 아닙니다. 일단 몸을 피하십시오.”
“어허, 판순만 꼬맹이 따위를 보고 몸을 피한다니 안 될 말이지. 황 군사가 있는데 내가 뭘 걱정하겠소?”
마초는 여유가 넘쳤다. 황권은 가볍게 볼 일이 아니라고 한마디 하려 했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한번 소년이 육박해 들어왔다. 이번에는 양손에 손도끼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쨍! 쨍!
소년의 양손에 들린 도끼는 모두의 예상보다 더 빠르게 움직였다. 황권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단단한 검술로 두 번의 참격을 막아냈다. 그리고 눈을 부릅뜨고 그대로 소년에게 살초를 날렸다. 그 또한 소년을 생포하고 싶었지만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소년은 미끄러지는 듯한 움직임으로 황권의 검을 피했다. 그 광경을 보자 마초도 눈을 가늘게 뜨고 소년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솜씨는 있군. 황 군사, 물러서는 게 좋겠소. 저 꼬마를 잡아라!”
마초는 좌우를 바라보며 호령했다. 올돌골과 맹획이 앞으로 나섰다.
평이라고 불린 소년은 좌우를 둘러보고 천천히 황권의 앞으로 다가왔다. 더벅머리가 눈을 다 가렸지만 용케 앞은 보이는 모양이었다. 소년은 능숙한 솜씨로 손도끼를 빙글빙글 돌렸다. 가만히 그 모습을 보던 황권은 손도끼를 노리고 검격을 날렸다.
챙!
황권의 검이 손도끼에 닿기 직전, 소년은 손을 풀어 손도끼를 놓았다. 황권의 검은 허공에 뜬 손도끼를 때렸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손도끼가 허공을 날고, 소년은 그대로 황권의 발아래를 미끄러지며 발등을 찍었다. 손에는 어느새 비수가 들려 있었다.
푹!
“큭!”
발등에 비수가 박힌 정도로 치명상은 입지 않는다. 그러나 그대로 발이 묶이게 된 것은 사실이다. 소년은 황권을 찌르고 그대로 미끄러져 다시 마초 쪽으로 다가왔다.
이번에는 맹획과 올돌골이 막아섰다. 소년은 맹획 쪽을 피해서 올돌골 쪽으로 달려들어 왔다.
“죽인, 다!”
올돌골이 노호성을 지르며 대도를 휘둘렀다. 소년은 달려오는 와중에도 몸을 웅크려 아슬아슬한 차이로 대도를 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년에게는 승산이 전혀 없어 보였다. 두 사람의 키 차이가 무려 세 척이나 났기 때문이다.
소년은 아랑곳하지 않고 올돌골을 향해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척.
소년은 발로 올돌골의 무릎을 밟고 뛰어올랐다. 그리고 공중에서 오른손의 손도끼를 사선으로 크게 내려쳤다. 올돌골은 상체를 크게 숙이며 소년의 공격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소년은 손도끼를 내려치는 결대로 회전해서 올돌골과 등을 맞댔다. 그대로 한 바퀴 돌자 소년의 몸은 올돌골의 등 뒤에 떨어졌다.
“오호.”
마초는 소년의 잽싼 몸놀림을 보고 탄성을 금할 수 없었다. 저 정도로 가볍게 움직일 수 있는 고수는 마초가 지난 생에 만난 사람들 중에도 몇 명 되지 않았다.
‘꼭 그 녀석 같은걸.’
마초는 급박한 와중에도 유비 휘하의 장수였던 왕평을 떠올렸다. 왕평은 글자를 몰라서 자기 이름도 겨우 쓰지만 누구보다 영리하고 또 무예에 능한 자였다.
이제 왕평처럼 재빠르게 움직이는 소년의 앞에는 호상에 앉은 마초만이 있었다. 소년은 등 뒤의 올돌골과 맹획, 황권을 뒤로 하고 그대로 직진하며 마초만을 노렸다.
“죽어라!”
소년의 새된 목소리가 호구곡에 울려 퍼졌다. 소년은 땅을 박차고 마초의 품 안으로 달렸다.
그러나 눈을 한 번 깜박하는 정도의 시간이 흐를 동안 전황이 바뀌었다.
마초를 향해 달리는 소년의 옆에서 장료가 나타났다. 장료는 무심한 동작으로 장검을 들어 소년의 목을 내리쳤다. 소년은 황급히 몸을 틀어 피하려 했지만 칼날이 더 빨랐다.
쩡!
장료가 휘두른 장검은 그대로 땅을 내리찍었다. 칼날과 땅 사이에는 소년의 목이 끼어 있었다. 칼날이 목에 박혀서 선혈이 튀었다. 목을 깊이 베었다고 하기보다 4분의 1쯤 잘려 나갔다고 표현하는 게 더 적절하리라.
깊숙한 목의 상처와 함께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소년은 땅에 쓰러진 채 위를 올려다봤다. 소년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실눈을 뜬 장료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봐, 다 끝난 싸움에서 무슨 짓이냐? 네가 복파장군을 찔렀다고 치자. 그러면 너는 무사할 것 같으냐?”
장료는 혀를 차며 물었다. 소년은 말이 없었다.
군사들이 달려와 땅에 쓰러진 소년을 포박했다. 마초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황권의 상처를 살피고, 상처가 깊지 않은 것을 확인한 후 올돌골과 맹획의 어깨를 두드리고 장료에게 다가갔다.
“천하의 장문원도 암살하지 못한 이 마초가 엉뚱한 꼬맹이 손에 죽어서야 되나. 덕분에 살았네.”
“아, 거참, 언제까지…….”
뭐라고 불만을 떠드는 장료를 뒤로 하고 마초는 소년에게 다가갔다.
나이도 어리고 몸집도 작지만, 무예는 대단한 소년이었다. 14,5세에 불과한 지금도 황권, 올돌골 같은 고수들과 겨룰 정도니 10년 후에는 대성할 만한 자질이 있었다. 탐나는 재목이었다.
마초는 여유 있는 미소를 띠며 소년의 덥수룩한 머리를 뒤로 젖혔다. 얼굴부터 확인할 셈이었다.
얼굴을 드러낸 소년은 사슴 같은 눈망울과 날렵한 턱선을 가지고 있었다. 장성하면 선이 가는 미남이 될 것이 분명해 보이는 외모였다.
그리고, 어딘가 마초의 눈에 익은 얼굴이었다.
“으흠, 어디서 봤더라? 아니면 내가 아는 누군가와 닮은 사람인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마초는 문득 무언가가 떠올랐다. 소년의 턱을 콱 부여잡고 얼굴 이곳저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포박된 소년이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서, 설마…….”
마초의 얼굴 표정이 경악으로 변하는 걸 보고 나관중이 끼어들었다.
“주공, 왜 그러세요? 아는 사람입니까?”
마초는 나관중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멍하니 소년을 바라보다 물었다.
“이름이 무엇이냐?”
포박된 소년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말했다.
“왕평이다.”
마초가 지난 생에서 유비에게 귀부한 후 만났던 촉한의 무장, 왕평이었다.
왕평은 글자도 모르는 까막눈이지만 병법에 뛰어나고 무예 실력도 대단했다. 다만 평민 출신 특유의 거친 기질과 굽힐 줄 모르는 성격 탓에 적이 많았는데, 마초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좋아하는 편이라 원만히 잘 지낼 수 있었다. 나중에 나관중에게 듣기로는 노년에 낙곡에서 위나라의 침공을 막아내며 결정적인 무공을 세운다고 했는데, 마초가 기억하는 청년 왕평은 충분히 그런 영웅이 될 만한 자질을 갖춘 영민한 장수였다.
‘그리고 얼굴 전체가 살에 파묻힌 뚱뚱보였지. 그런데 설마 어릴 때는 미소년이었다니!’
날씬하고 잘생긴 어린 왕평을 보니 기가 막혔다. 그러나 왕평을 심문하기 전에 먼저 할 일이 있었다.
마초는 원약을 다시 끌고 오게 했다.
“원약. 아까 하던 얘기를 마저 해야겠다. 어째서 비가를 습격한 거냐?”
마초는 원약을 물고를 낼까 하다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물었다. 원약은 왕평의 기습을 통해 마초의 목을 취할 수 있다고 확신했었던 모양이다. 기습이 실패로 돌아가자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 그것은…….”
“당황하지 말고 천천히 말해라. 들어 주마.”
마초는 원약에게 호상을 내어 주고 군사들을 시켜 포박을 풀어 주게 했다. 마초가 노호성을 터뜨리지도 않고, 끔찍한 악형을 가하지도 않은 채 느긋하게 기다리자 원약은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마초… 듣기로는 짝을 찾을 수 없을 만큼 난폭한 자라더니, 헛소문이었나?’
그러나 마초의 인성이 어떤지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반쯤 삶을 포기하고 있던 원약은 다시 살아날 희망이 보이자 말투부터 바꾸고 공손하게 말했다.
“일이 이렇게 됐으니 뭘 더 숨기겠습니까? 복파장군께 전부 사실대로 고하겠습니다.”
원약이 들려주는 얘기는 이러했다.
파군의 판순만은 자신들이 파군의 진정한 주인이라는 뜻에서 파족이라고 자칭하는데, 조상 대대로 이곳에서 살아 온 긍지 높은 부족이다. 이들은 강족이나 선비족 같은 유목민이 아니라 땅을 일궈 농사를 짓고, 배를 타고 장강을 오르내리며 어로와 교역을 하는 정주민족이었다. 그러면서 오랜 세월 자연스럽게 한인들과 어울려 살다 보니 반쯤은 한인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한인 호족들과 거래도 하고, 교역도 하고, 때로는 다투기도 하면서 미묘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부릉의 심가가 장강 일대의 유력 호족으로 떠오르면서 그 미묘한 균형이 깨지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듣던 비관이 말했다.
“심가가 끌어들인 장강수로맹 때문인가.”
“그렇소, 비 대인. 원래 장강은 우리 파족의 놀이터나 다름없는 곳이오. 아시다시피 장강의 뱃꾼들 중에는 우리 파족 사람들이 적지 않지요. 그런데 최근 한인 뱃꾼들이 뭉쳐서 장강수로맹이라는 단체를 결성하니, 그 위세를 당해내기 어렵게 되었소. 수로맹 소속이 아니면 일감을 얻기도 힘드니 파족 뱃꾼들은 먹고 사는 일이 어려워지고 있었소. 이렇게 일거리를 잃은 파족 뱃꾼들이 정주 부락으로 와서 행패를 부리니 파족의 대두령인 내 입장에서는 여간 곤란한 게 아니었소.”
“그러나 뱃꾼들끼리의 크고 작은 다툼은 언제나 있었던 일 아니오? 나이 어린 나도 알고 있는 이치인데, 원약 두령은 이런 일을 겪어본 적이 없다는 말이오?”
“그래서 우리도 방법을 찾았지요. 우리 속담에 이길 수 없는 상대와는 친구가 되라는 말이 있소. 아예 우리 파족 뱃꾼들도 장강수로맹에 가입해서 한인들과 섞여 살기로 했소.”
“묘안이오. 헌데 그리하기로 했으면 조용히 수로맹에서 활동하면 되지, 왜 우리 비가에 시비를 건 것이오?”
“들어 보시오. 처음에는 우리도 조용히 활동하려고 했소. 그런데 금범적들 때문에 일감이 확 줄었소.”
금범적은 말 그대로 비단 돛을 달고 장강 상류를 주름잡는 수적단이다. 자신들이 부르는 이름은 금범군이지만 다른 이들은 비단 돛 단 도적이라는 뜻에서 금범적이라고 불렀다. 원약의 말은 최근 이들의 활동이 강성해지며 장강 중류에 있는 형주와의 교역이 위축되어 일감이 줄었다는 것이었다.
“자, 그런데 비 대인도 아시다시피 금범적을 힘으로 당해 낼 수는 없소. 그래서 심미 대인과 누발 수로맹주도 갖은 애를 써서 금범적을 떠받들어주며 수로맹에 가입하도록 회유했소이다.”
“그래서요?”
“이번에는 금범적이 뜯어가는 보호비가 문제였소. 금범적은 사실상 수로맹 위에 있는 이들이오. 이들에게 보호비를 주면 교역의 이권이 남는 게 없다는 말이오. 우리 삶은 조금 나아지나 싶다 금범적의 보호비 때문에 다시 어려워졌고… 그때 심미 대인이 제안한 게 있소.”
“심가가 무슨 제안을 했소?”
“교역을 크게 해야 먹고 살 수 있다고 했소. 교역을 두 배 크게 하면 두 배가 아니라 세 배, 네 배의 이문을 볼 수 있으니 그리 해야 한다고 말이오.”
듣던 비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한 상인이라 규모의 경제의 이치를 이해하고 있었다.
“말은 맞는 말이오. 그렇다면 심가가 원약 두령을 꼬셨겠군. 교역을 크게 하려면…….”
“비가를 흡수해야 한다고 했소. 심가가 비가를 흡수하면 두 배가 아니라 세 배, 네 배의 이문이 남는다고. 일이 잘됐을 경우 구체적으로 얼마를 줄 건지도 제시했소. 우리는 그저 비 대인에게 겁을 주는 역할을 맡았소.”
“그래서, 내가 겁을 잔뜩 집어먹으면 심가가 와서 나를 협박해서 내 재산을 흡수할 계획이었겠군.”
한인 호족끼리 다투면 파군태수가 끼어들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민족과의 분쟁이 되면 파군태수도 끼어들기 부담스럽다. 자칫 전면전이 될 수도 있고, 익주 자사부에도 이민족이라 어쩔 수 없다고 적당히 핑계를 댈 수 있기 때문이다.
마초는 거기까지 얘기를 듣자 피식 웃었다.
“이민족과 한인들 가리지 않고 하나 같이 먹고 살기 힘든 시대로군.”
흉노 선우 어부라도, 강족 족장 철리길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마초는 결국 생존과 이익을 미끼로 그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던 바 있다.
그래서 이번에도 비슷한 수단을 써 보기로 했다.
“내가 원약 두령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 준다면 어쩌겠는가?”
원약은 마초를 빤히 바라봤다.
“복파장군.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내가 파군에서 금범적을 없애 준다면 어쩌겠는가 말일세.”
“그야… 금범적만 없으면 그럭저럭 먹고살 만하지요. 그러면 싸울 일도 없습니다.”
게다가 무력을 담당하던 두호와 부호가 죽었고, 5개 부족 중 2개 부족이 이탈했다. 판순만은 당분간 파군에서 다시 힘을 쓰기는 어려울 것이다.
“좋아. 스무날 안으로 금범적을 파군에서 없애도록 하지. 대신 세 가지 조건이 있다.”
“말씀하십시오, 복파장군.”
“첫째, 이번 싸움에 은원은 없다. 전부 잊는다.”
“우리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리하겠습니다.”
“둘째, 스무날 동안 뭐든지 내가 시키는 대로 한다.”
“그 또한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저 따를 뿐입니다.”
“좋아. 마지막 셋째.”
마초는 턱으로 옆에 묶여 있는 소년을 가리켰다. 바로 이 조건을 위해 원약을 두들겨 패지 않고 꾹 참은 것이다.
“저 왕평은 이제부터 내 수하로 삼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