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파 전투 (1)
판순만의 대두령 원약은 진노했다.
“악씨, 석씨 이 괘씸한 놈들. 촉금 몇 필에 눈이 멀어 감히 내가 잡아 온 포로들을 빼돌려!”
그의 양옆에는 부하 두호와 부호가 시립해 있었다. 두호가 원약의 분노를 달랬다.
“대두령, 비관이란 놈이 건 재물이 한두 필이 아니라 십만 필이니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옥석을 골라낸 셈 치고 악씨와 석씨의 일은 잊어버리시지요. 그까짓 비가의 가노들이 뭐 대단한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게 아니란 말이다! 비가 놈의 목적은 가노를 빼돌리는 게 아니야. 악씨와 석씨가 그 가노들을 빼돌리면서 우리와 척을 지게 되지 않았느냐? 그 교활한 놈의 진짜 목적은 그렇게 해서 우리의 전력을 줄어들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가노를 다 구했는데 왜 남만족들을 앞세워 이곳으로 진군하고 있겠느냐?”
원약은 분을 참지 못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비관 이놈, 고작 운 좋게 호족으로 태어나서 행세하며 살던 놈이, 오냐 오냐 하니까 이제 나에게 싸움까지 걸어! 하늘 높은 걸 가르쳐 주마, 이 건방진 놈!”
비가를 습격해서 먼저 싸움을 건 것은 자신이었지만 원약의 머릿속에 이미 그 사실은 날아가고 없었다. 또 다른 부하 부호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그런데 이상하군요. 듣자 하니 비관이 마초라는 중원의 군벌 하나를 끌어들인 모양이던데, 우리 근거지로 진군하는 놈들은 태반이 남만족이라고 합니다.”
“마초라는 놈은 유언이 죽어서 조문하러 왔는데 무슨 병사가 있겠느냐? 병사가 없으니 건녕에서 남만 떨거지들이나 몇 명 그러모아서 싸움하러 오는 것이겠지. 몇 년 전에 부임한 건녕군 독우라는 놈이 서량에서 왔다던데, 아마 그놈과 연이 닿아 있을 것이다. 제 놈이 제법 이름이 나 있으니 적당히 위세만 보여주면 우리 같은 이민족들은 알아서 항복할 것이라고 여기고 있을 것이다.”
원약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정면을 응시하다 벌떡 일어났다.
“허나! 마초 제까짓 놈이 아무리 이름이 높아도 상관없다! 이곳 파군에는 파군의 방식이 있다!”
파군은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미치기에는 너무 먼 곳이다. 원약은 마초가 제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그의 명성에 굴복해 줄 생각이 없었다. 자신을 꺾고 싶다면 실력으로 꺾어야 할 것이다.
“마초는 호구곡 입구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아마 호구곡을 통과해서 올 생각인가 봅니다.”
“멍청한 놈… 제 발로 호랑이의 입으로 기어들어 오다니. 통과시켜 줘라.”
원약은 분노에 찬 눈으로 내뱉듯이 말했다.
“호구곡을 통과하는 그 순간, 마초와 비관의 패거리들을 전원 몰살할 것이다.”
* * *
비관이 가진 재물을 풀어 목표로 했던 가노들을 되찾았지만, 마초 일행은 아랑곳하지 않고 판순만의 근거지 호룡산을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군사 황권이 큼지막한 천에 그린 지도를 펼쳐 놓고 계책을 설명했다.
“호룡산 중턱의 너른 평야 지대가 판순만 대두령 원약의 근거지입니다. 이곳으로 들어가는 길은 두 갈래, 호구곡과 용구곡이 있습니다.”
“호랑이의 입과 용의 입인가? 이름 한번 거창하군. 우리는 어느 길로 진입해야 하오?”
“호구곡입니다. 이곳은 호룡산으로 들어가는 최단 거리입니다. 초입은 군사 열 명이 동시에 지나갈 수 있는 큰 길이지만, 점점 좁아져서 호구곡의 끝에 이르면 한 명만이 지날 수 있는 좁은 길이 됩니다. 이후 갑작스럽게 탁 트인 개활지로 이어지게 되지요.”
“으흠, 과연 호랑이의 입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지형이군. 그렇다면 적들은 지형을 활용한 매복계를 쓰겠군.”
“그렇습니다. 호구곡의 끝에 한 명의 뛰어난 무사가 길을 막고 있으면 대군도 막아낼 수 있습니다. 이때 지형에 익숙한 판순만들이 우회해서 호구곡을 통과하는 아군의 뒤를 들이친다면, 아군은 앞은 막히고 뒤를 공격받아 진퇴양난의 형국이 됩니다.”
“판순만 중에 그렇게 뛰어난 무사가 있소?”
“그렇습니다. 원약의 두 부하, 두호와 부호입니다. 파군의 이름난 한인 무사들이 여럿 도전했지만 전부 패했습니다. 둘 중 하나는 길을 막고, 하나는 뒤를 칠 것입니다.”
“좋소. 그렇다면 우리도 앞뒤에 하나씩 강한 무장을 배치해야겠소.”
마초는 편제를 짠 후 지체 없이 호구곡으로 진입했다.
황권의 말대로 처음에 열 명이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넓던 길은 조금씩 좁아지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부터 급격히 좁아졌다. 진군하는 마가군 병사들은 도합 육백이었으니, 두 명이 한 조가 되어 30줄이나 길게 늘어서서 호구곡을 지나야 했다.
“이 상황에서 앞뒤로 공격받으면 꼼짝없이 당하겠군. 판순만도 제법인걸.”
마초는 대열의 중간에서 그저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마가군 병사들이 호구곡을 거의 통과할 무렵, 길은 다시 한번 좁아져 한 명이 지날 정도가 되었다. 양옆으로는 가파른 비탈길이었는데 나무가 없고 비탈이 높아 복병을 두기는 적합하지 않았다.
예상대로 호구곡이 끝나는 곳에서 한 무리의 판순만 병사들이 마가군을 막아섰다. 그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앞으로 나섰다.
“이 파군의 진정한 주인은 우리 파족이다. 한의 고조께서도 우리를 인정하셨는데, 감히 파족의 영역에 병장기를 들고 진입하다니 간도 크구나!”
대두령 원약의 오른팔로 불리는 두호였다. 아직 쌀쌀한 날씨였지만 상체를 벗고 울룩불룩한 근육을 드러내고 있었다. 얼굴에는 싸움에 나서는 판순만 전사들의 풍습대로 붉고 푸른 염료를 잔뜩 칠한 반면, 손에는 한인 무사들이 쓰는 길고 곧은 직도를 들고 있어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네놈들은 이곳을 지나지 못한다! 불만이 있는 자는 앞으로 나서라. 나, 두호가 생사를 가름하리라!”
두호가 유창한 한어로 외치는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호구곡에 울려 퍼졌다. 파군에서 이름난 무사라더니 그 기세가 과연 대단해 보였다.
주춤거리는 군사들을 뒤로하고, 한 사내가 터덜터덜 걸어서 두호의 앞으로 나섰다. 장검을 칼집째 어깨에 들쳐 멘 장료였다.
“헉, 헉, 산길을 걸으려니까 힘들구만. 네가 바로 호두냐?”
“호두가 아니라 두호다, 이 발칙한 놈!”
“아, 그랬나? 뭐 이름 같은 건 아무려면 어때.”
장료는 익숙지 않은 산길을 걷느라 숨이 턱까지 찼는지 헉헉거리며 숨을 골랐다.
“힘들지만 돈을 받았으니 일을 해야지. 어서 덤벼라. 내가 숨이 차니 빨리 끝내자.”
“이놈이…….”
모욕을 당하자 두호의 눈이 벌겋게 충혈되었다. 두호는 발로 바닥을 구르며 함성을 질렀다. 전투 개시를 알리는 판순만 전사들의 전통이었다.
“거 되게 시끄럽네.”
장료는 실눈을 뜨고 그런 두호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발을 세 번째 구르는 순간, 두호는 구름발로 땅을 박차고 앞으로 튀어나왔다.
“타앗!”
두호가 쥔 직도가 크게 포물선을 그리며 장료를 향해 날았다. 예상치 못한 시점에, 예상치 못한 궤도로 날아가는 예상치 못한 빠르기의 일격이었다. 두호는 평범한 무사라면 이 일격으로 절명시킬 자신이 있었다.
부우웅!
그러나 장료는 두호가 발을 구르기도 전에 반 발짝 뒤로 물러났다. 두호가 휘두른 직도는 장료의 코끝 한 치 앞을 크게 헛치고 지나갔다. 중심을 잃은 두호의 발을 장료가 툭 차자 두호는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크윽, 네놈이!”
두호는 번개처럼 빠른 동작으로 땅을 굴러 일어났다. 벗어 던진 등허리가 흙과 풀로 범벅이 되었다. 두호는 분함과 부끄러움 이전에 생명의 위기를 느끼고 머리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이 눈 찢어진 놈은 보통 놈이 아니다. 마치 내 몸놀림을 읽고 있는 것처럼 한 치 차이로 칼을 피했다. 이놈을 상대하려면 큰 동작으로는 안 된다.’
두호는 그렇게 생각하며 칼을 곧추세워 장료 쪽을 향하려 했다.
그러나 땅을 굴러 일어선 순간, 이미 장검을 든 오른손을 한껏 뒤로 젖힌 장료가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나를 원망하지 마라. 일이니까.”
퍽!
장료의 칼이 번득이자 두호의 목이 그대로 허공으로 날았다. 자신의 칼을 곧추세우려던 두호의 오른팔은 올라오다 말고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장료는 그렇게 칼을 한 번 휘두르고 다시 터덜터덜 걸어 자리로 돌아왔다.
“아이고, 산길 좀 걸었다고 이게 다 힘드네. 서량에서 너무 오래 무위도식했나?”
장료의 중얼거림이 끝나기도 전에 두호의 목만 남은 몸이 땅에 쓰러지며 쿵 하는 소리가 울렸다. 파군 최고의 무사는 그렇게 서량에서 온 불청객에게 1합을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장료는 믿기 힘든 투장의 결과를 보고 우두커니 서 있는 병사들을 향해 말했다.
“뭣들 하고 있어? 적장이 죽었으니 계속 전진해라.”
* * *
마가군은 전령을 따로 운영하지 않았다. 병사가 600명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선두의 병사들은 계속 뒷사람을 바라보며 소식을 전달했다.
“장료 장군이 적장 두호를 벴다!”
“장료 장군이 적장 두호를 벴다!”
대열의 중간에 있는 마초는 소식을 접하자 황권을 돌아보며 웃었다.
“황 군사도 처음에는 장문원을 의심했지. 그렇지 않소?”
“복파장군. 처음에는 장문원이 절정고수라는 말을 믿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장문원과 검을 겨뤄 보고 복파장군의 장담이 맞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황권은 진영을 짜기 위해 장료, 이감, 마대, 맹획, 올돌골과 일일이 검을 맞대 보고 역량을 평가했다. 하나같이 전장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할 수 있는 무장들이었지만 황권은 군사면서 그들과도 제법 그럴싸하게 초식을 추고 받았다.
그러나 단 한 명, 장료만은 아예 건드리지도 못했다. 황권뿐만이 아니었다. 장료는 상대의 수를 미리 읽는 듯 움직이기 때문에 격검에서는 어지간한 맹장들도 그를 건드리는 것조차 버거워했다.
‘방덕과 서황이라도 동귀어진 정도가 가능할까, 이기기는 힘들겠지. 아니, 천하를 다 뒤져도 장료보다 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마초 자신조차도 다시 겨룬다면 승패를 장담하기 어려웠다.
“복파장군. 두호를 벴지만 호구곡을 지나면 넓은 개활지가 나옵니다. 적들은 개활지에서 아군을 둘러싸고 나오지 못하도록 막을 것입니다. 그동안 뒤쪽에서 부호가 습격하는 것이 적들의 계책일 것입니다.”
“알겠소. 이제 곧 뒤쪽에서 싸움이 벌어지겠군. 구경하러 가 볼까.”
말이 달리기 힘든 산길이다. 마초는 유유자적 절영의 고삐를 잡고 걸어서 대열의 후미로 향했다.
후미에서는 절벽을 타고 우회한 판순만 병사들이 나타나서 마가군의 꼬리를 잡았다. 만약 전방이 막혀 있었으면 꼼짝없이 포위되는 대형이었다. 그들의 선두에서 난동을 부리는 장수는 판순만의 부호였다.
“감히 신성한 호룡산에 들어와서 살아 돌아가길 바라느냐! 파족의 부호가 여기 있다! 누가 나와 겨루어 보겠느냐!”
부호는 큼지막한 대도를 들고 고함을 질렀다. 그 기세가 자못 흉맹하여 남만족 병사들도 주춤거릴 정도였다.
“흥.”
부호의 앞으로 나선 것은 남만족 전통 문양이 수 놓인 비단옷을 입은 청년이었다. 키는 어느새 8척에 달할 정도로 크게 자랐다. 스스로 한족이 아니라고 역설하듯이, 상투를 틀지 않고 늘어뜨린 검은 머리는 어깨를 다 덮을 정도로 내려와 있었다.
“부호. 너희들의 터전을 뺏고 싶지는 않다. 싸움이 끝나도 판순만의 여인과 아이들은 계속 살아가게 해 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부호는 승리를 장담하는 듯한 청년의 말을 듣자 기가 막혔다.
“네놈은 파군 최고의 무사, 두호와 부호의 이름을 들어 보지 못하였느냐! 어디서 굴러먹던 놈이기에 이리도 방자한 것이냐?”
부호의 앞에 선 청년은 지난 3년간 매일같이 연마한 자신의 병장기를 꺼내 들었다. 1척 8촌의 손잡이와 3척 2촌의 칼날, 완만하게 휘어진 곡선을 가진 5척 장도였다.
“남중의 맹획이다. 내가 상대해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