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마초연의-120화 (120/306)

120화. 회유

며칠 후, 파군으로 향하는 마초 일행에게 이회가 찾아왔다.

“맹기! 잘 있었는가?”

“덕앙(이회의 자), 이 친구야! 이게 얼마 만인가?”

마초는 어릴 적 농현에서 동문수학한 친구 이회를 만나 오랜만에 회포를 풀었다. 이회가 건녕군 독우로 추천받아 익주로 돌아간 지 거의 4년 만이었다.

“하원과 결국 혼인했다는 얘기는 들었네. 듣자 하니 기주 상산까지 쳐들어가서 하원을 구해 왔다지? 자네들이 정이 깊은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일 줄은 나도 몰랐군.”

“아아, 결국 그렇게 되었네. 그보다 덕앙, 자네는 건녕에서 고생이 많나 보군.”

마초는 쓸쓸한 눈으로 이회를 바라봤다. 이회도 아직 20대 중반에 불과했는데 머리숱이 벌써 심상치 않은 징후를 나타내고 있었다. 마치 얼마나 고생이 극심한지 웅변하는 듯했다.

‘지난 생에서 마흔 즈음에 다시 만났었지. 그때는 덕앙의 머리가 이미 돌이킬 수 없이… 진행되어 있었다. 그런데 설마 이렇게 빨리 나타날 줄이야.’

이마가 넓어지기 시작한 이회는 그저 씁쓸한 표정으로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건녕군 독우라는 자리가 참 사람 피를 말리더군. 설마 이 나이에 머리가 빠질 줄 누가 알았겠나.”

“군 내를 돌면서 현령들, 현장들을 감찰하는 자리가 아닌가? 태수의 신임만 얻는다면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을 텐데 어찌 그런가?”

“말도 말게. 건녕태수는 그저 허울만 좋은 자리일 뿐, 실제 건녕을 다스리는 이들은 따로 있네.”

이회의 임지인 건녕군은 익주 남부에 있다. 오늘날의 운남성 쿤밍시에 해당하는 지역인데, 이 일대를 남중이라고 부른다. 남중은 산세가 험하고 중국의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이 시기까지도 중앙 정부의 행정력보다 호족들의 입김이 강한 곳이었다.

그중에서도 건녕에서 가장 세력이 강한 것은 한인 호족 가문인 옹가였다. 이들은 전한의 개국공신 옹치의 후손이라고 전해지는데, 그만큼 일찌감치 건녕에 자리를 잡고 인근의 남만족들을 복속시켜 왕이나 다름없는 기반을 닦아 놓고 있었다. 새로 옹가의 가주가 된 옹개라는 청년은 특히 영리하고 성정이 독해서 모두가 두려워했는데, 신임 독우 이회가 뻣뻣하게 굴자 그를 길들이려고 갖은 공작을 벌이고 있었다.

옹개라는 이름을 듣자 구석에서 가만히 얘기를 듣고 있던 맹획의 표정이 변했다. 마초는 그 모습을 보고 물었다.

“맹획, 너도 옹개를 알고 있느냐?”

“흥, 알다뿐인가. 꿈에서도 잊을 수 없는 녀석이다.”

“그래? 너하고도 은원이 있다는 말이냐?”

“익주목 유언에게 붙어서 우리 부족을 쫓아낸 게 바로 그놈이다. 그놈 같은 한인 호족들, 남만 귀족들, 익주 중앙 관리들이 전부 한 패거리다. 남만인이었던 우리 아버지는 한인 집안 맹가의 데릴사위로 들어가서 한인들의 농사 기술, 길쌈 기술을 전수했지. 그걸 탐탁지 않게 보던 남만 귀족들과 옹가 같은 한인 호족들이 유언에게 줄을 대서 우리 부족과 싸움을 벌였고…….”

맹획은 거기까지만 말했다. 사정을 대강 알고 있는 마초는 거기까지만 듣고도 고개를 끄덕였다.

‘맹획의 아버지는 건녕 호족들과의 내전 중 전사했다고 하던데, 그 싸움이었나 보군.’

그렇다면 맹획은 옹개에 대한 원한이 골수에 맺혀 있을 것이다.

마초는 맹획에게 말을 걸었다.

“옹개에게 복수하고 싶으냐?”

“흥, 당연하지.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훨씬 중요한 일들이 많이 있다. 내가 이끄는 남만인들이 살아갈 터전을 얻는 것이다. 복수는 그다음의 일이다.”

맹획의 말버릇은 영락없는 사춘기 소년이었으나 내용은 제법 어른스러웠다. 마초는 그런 맹획이 썩 마음에 들어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떠올랐다.

“기특한 녀석. 그래, 그 마음을 잊지 마라. 주변 사람들을 지키는 게 먼저다. 그리고 혹시 알아? 열심히 주변 사람들을 지키다 보면…….”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마초는 허공을 보며 말을 던졌다.

“언젠가 복수를 할 기회도 오겠지.”

* * *

이회가 데려온 남만족들은 도합 오백 명 정도였다. 이들과 마초가 이끌고 온 수행 군사들을 합치면 육백이 넘는 숫자가 된다. 이들은 공식적으로는 건녕군을 떠나 유랑민이 되려는 남만족들이었고, 이회는 이 유랑민들을 파군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인솔해서 이곳까지 온 것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병사로 쓰기 위한 장정들이지. 건녕에 맹획을 따르는 백성들이 수만에 달할 것이다. 이들은 그중에서도 용감하고 날랜 사내들만 뽑은 남만의 정병들이니, 이들이 이번 싸움을 책임지는 병사가 될 것이다.”

아군은 도합 육백. 그리고 앞으로 싸워야 하는 원약 휘하의 판순만은 아마도 이천이 넘을 것이다. 그동안 불리한 싸움을 몇 번이나 뒤집어 줬던 마가군 기병대도 없다.

그런 어려운 싸움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마초는 태연했다.

“파군에 익숙한 황 군사가 있으니까. 뭐라도 계책을 짜내 주겠지.”

반면 나관중은 걱정이 많았다.

“주공, 정말 괜찮을까요? 저는 아무래도 걱정이 됩니다.”

“괜찮아. 황 군사는 지난 생에도 파군에서 원약의 반란을 토벌한 적이 있었다고. 나도 전해 들은 일이라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그때 해낸 일을 지금이라고 못 하겠어?”

“그래도 그때는 익주의 관군을 이끌고 싸웠을 것 아닙니까? 지금처럼 병력이 열세에 있지 않았을 텐데요.”

“그래 봐야 3배 차이야. 장수의 질은 우리가 훨씬 높다. 황 군사를 믿어 보자고.”

마초의 기대처럼, 그날부터 황권은 착착 싸울 준비를 해 나가기 시작했다.

황권에게는 가후처럼 앉은 자리에서 천 리 밖을 내다볼 재주는 없었다. 법정처럼 상황을 정확하게 예측하는 능력도 없었고, 순유처럼 재상과 장수의 일을 동시에 할 수 있는 풍부한 지식도 없었다.

대신 그는 누구보다 부지런히, 성실하게 발로 뛰었다. 그가 남만병 오백의 이름을 다 외운 것은 남만병이 합류한 지 삼 일째 되던 날이었다. 오 일째에 편제가 짜였고, 팔 일째가 되자 뿔피리와 깃발을 활용한 신호체계가 새로 잡혔다. 황권은 그러면서 전투에 나설 선봉장들과도 일일이 검을 맞대 보고 무력을 평가해서 전투 배치를 정했다.

“무장들과 검을 겨루는 군사라니. 참으로 마가군 군사답지 않은가?”

마초는 황권을 보다 보면 흐뭇한 웃음이 떠오르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십 일째가 되는 날, 황권이 전투 준비가 끝났음을 알리자 군의가 열렸다. 상석에 앉은 마초를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나관중, 장료, 이감, 마대가, 왼쪽에는 황권, 비관, 맹획, 올돌골이 자리했다.

“정면 대결로는 승산이 없습니다.”

황권의 말은 언제나처럼 명쾌하고 단호했다. 좌중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볼멘소리를 한 것은 역시 혈기왕성한 마대와 맹획이었다.

“황 군사, 그게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이보다 더 불리한 싸움도 여러 번 이겨냈습니다.”

“흥, 남중의 정병 한 명은 판순만 세 명을 상대할 수 있소. 군사께서 제대로 계산하신 거 맞소?”

“마대 공자, 정예 기병이라면 그런 극적인 승리도 가능하겠으나 지금은 거의 전원이 보병입니다. 맹획 두령, 군의는 용맹을 자랑하는 자리가 아니라 이길 방법을 논하는 자리라는 점을 명심하시오.”

황권은 짧은 답변으로 마대와 맹획의 항의를 정리했다. 마초는 태연한 얼굴로 황권을 보며 물었다.

“일리 있는 말이오. 군사의 의견을 말씀해 주시오. 만약 군사가 방법을 찾지 못했다면 나도 출진을 연기하겠소.”

“방법을 찾지 못한 건 아닙니다. 지금 아군과 적의 차이는 6백 대 2천이니 세 배가 넘습니다. 이 차이를 두 배까지만 줄이면 됩니다. 그렇게 된다면 아군이 가진 우위, 즉 강력한 선봉장을 활용해서 이길 수 있는 여지가 생깁니다.“

“좋소. 적을 8백이나 줄여야 하는데, 방법이 있소?”

“판순만은 한 개 부족이 아니라 여러 부족의 연합체입니다. 옛적 고조께서 삼진 정벌에 큰 공을 세운 판순만의 7개 거족에게 조세와 부역을 면제하셨는데, 지금은 두씨, 부씨, 공씨, 악씨, 석씨의 5개 대성이 판순만의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들 중 두, 부, 공의 3개 씨족은 판순만 대두령 원약을 따르는 이들이고, 악씨와 석씨는 원약과의 관계가 느슨하지요. 이 2개 씨족을 이탈시키면 딱 8백 정도의 병력이 빠집니다.”

“2개 씨족을 이탈시키고 3개 씨족만 상대한다. 어떻게 해야 그리할 수 있겠소?”

“판순만은 오랜 세월 한인과 밀접하게 어울려 살았으니 사고방식이 한인과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니 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으로 회유하시지요.”

황권은 판순만의 악 씨와 석 씨를 회유하기 위한 계책을 설명했다. 자리에 모인 마가군 장수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단 한 사람, 비관만이 얼굴이 흙빛이 될 뿐이었다.

* * *

이튿날, 마가군 주둔지 근처의 작은 악씨촌 마을.

악씨촌의 촌장은 자신을 찾아온 마초를 보며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마초의 근거지 서량이 파군에서 수천 리 떨어져 있었지만, 촌장은 오랜 삶의 경험으로 한 조정에서 높은 관직을 받은 이들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을 찾아온 이 마초라는 청년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제안을 했다.

“촉금 십만 필을 내신다고요?”

“그렇소. 원약 두령에게 잡혀간 비관 대인의 가노들을 되돌려 주면 해당 씨족 전체에 촉금 십만 필을 사례하겠소.”

“아니, 그야 잡혀간 가노들 중 오랫동안 봉직한 자, 유능한 자, 충직한 자들이 많다고는 들었습니다만…….”

아무리 그래도 그들의 몸값으로 촉금 십만 필은 너무나 비현실적인 금액이다. 마초는 그런 촌장을 보며 말을 이었다.

“비관 대인의 속사정이야 내가 어찌 알겠소? 허나 확실한 건 비 대인이 가노들만 되찾는다면 촉금 십만 필을 낼 의향이 있으시다는 것이오.”

생각지도 못했던 거액의 현상금에 촌장의 눈빛이 흔들렸다. 마초는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한인들은 이 정도의 돈이 걸리면 반드시 움직인다. 이들이라고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역시 황 군사의 계책이 맞았군.’

재물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사람은 없다. 마초는 그런 촌장을 바라보며 은근히 말했다.

“사는 마을은 달라도 같은 씨족끼리는 교류가 활발하지 않소? 촌장께서 악씨 씨족의 다른 마을들과 협력하여 비 대인의 가노들을 구출해 주시오. 사례는 가노들을 찾아 준 씨족의 씨족회의 앞으로 돌아갈 테니 말이오.”

“으음… 허나 원약 대두령과의 우의 문제도 있습니다. 그렇게 쉽게 결정하기는…….”

“석씨촌에서는 한다고 하던데?”

“석씨가요?”

석씨들이 움직인다는 이야기를 듣자 촌장의 눈빛이 더욱 크게 흔들렸다. 마초는 크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두르지 않으면 석씨 씨족에 선수를 빼앗기게 될 것이오.”

촌장은 마초가 떠나고 난 뒤에도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나 아무리 고민해도 결국 결론은 같았다.

“촉금 십만 필이면 단번에 대성호족이 될 수 있는 액수다. 아무래도 우리 씨족은 원약 두령과 함께하기는 어렵겠군.”

촌장은 결국 악씨 씨족의 다른 마을들을 돌기로 했다. 비관의 가노들만 구출한다면 단번에 큰 재물을 손에 쥘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악씨 씨족에서 옹개 같은 대호족이 나올 수 있다.

지금 주군이나 다름없는 원약도, 일이 그 지경이 된다면 악씨 씨족을 만만하게 보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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