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물고기가 물을 얻은 듯
황권은 용모가 범상치 않았다. 탄탄한 근육과 올올이 뻗친 수염을 보면 이름이 황권이 아니라 장비라고 해도 믿음이 갈 정도였다. 나관중은 그런 황권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권은 그냥 문관이 아니라 전장에서 활약했던 군사다. 죽을 때까지 주로 무관직이나 외직에 있었지. 과연 딱 봐도 무골이구나.’
역사 속의 황권에 대해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기록을 통해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그에 대한 당대의 평판이 대단히 좋았다는 것이다.
황권은 유장을 섬기다 유비에게 투항했고, 시세가 부득이해져서 다시 조조에게 투항했다. 그가 조조에게 투항한 후, 익주에 남은 황권의 처자식이 유비에게 주살 당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있음직한 일이었으나 황권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나와 그는 서로 신뢰가 두텁다. 이는 사실이 아닐 것이다.”
실제로 유비가 황권의 처자식을 주살했다는 소문은 헛소문이었다. 투항한 후에도 그저 자신의 일을 할 뿐, 옛 주인에 대한 신뢰를 거두지 않는 그의 당당함에 여러 사람이 탄복했다.
이처럼 당당할 수 있는 사람은 대체로 한 가지 부류뿐이다.
‘그만큼 스스로의 능력에 자신감이 있는 것이다.’
황권은 유비 휘하에 있을 무렵, 한중을 둘러싼 조조군과의 전투에 참가하여 큰 공을 세운다. 법정과 함께 유비군의 전략 전술을 담당한 것이다.
황권에게 천하에 이름을 떨칠 만큼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나관중은 그의 재주가 보통이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역사서의 짧은 기록을 통해 추정할 수 있는 그의 모습이 그랬고, 또 지난 생의 마초가 잠시 만나 본 황권의 모습이 그러했다.
—숨어서 책략을 꾸미는 게 아니라, 호방하게 스스로를 드러내고 전장을 주유하는 군사. 마가군에 딱 어울리지 않아?
마초는 그렇게 말할 만큼 황권을 어지간히 마음에 들어 했다. 그가 익주에서 데려오려는 대장장이, 군사, 선봉장 중 군사가 바로 황권이었다.
마초는 그렇다 치고, 식솔들의 목숨을 구원받은 비관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연신 황권에게 깊숙이 절을 했다. 묵묵히 인사를 받던 황권이 슬슬 무안해질 때가 돼서야 비관은 인사를 그쳤다.
일행은 자리를 옮겼다.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기 위함이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마초였다.
“비가를 습격할 정도라면, 파군은 이미 판순만의 손에 들어갔겠군. 그들이 파군태수의 치소와 민가를 약탈했소?”
황권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복파장군. 제가 확인한 바로 대대적인 약탈의 징후는 없었습니다. 그저 비 대인의 저택과 비가 소유의 장원들, 비단 공방들을 습격했을 뿐입니다. 다만 비가의 가노들을 끌고 갔는데, 이는 군의 관리로서 용서할 수 없는 일입니다.”
“어째서 비가만 노린다는 말인가? 빈백 아우, 짚이는 곳이 있다고 했지? 말해 보게.”
비관이 대답했다.
“판순만의 대두령은 원약이라는 자인데, 비가와는 선대 때부터 교분이 있습니다. 친밀한 사이는 아니어도 경조사 때 인사하고, 어려울 때 서로 돕는 정도는 되었지요. 즉 원래는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다소 문제가 생겼습니다.”
“왜 갑자기 문제가 생겼다는 것인가?”
“심가 때문입니다.”
비관은 이를 부득부득 갈며 말했다.
파군의 심가는 과거에는 비가만큼 위세가 큰 대호족이었다. 그러나 비가의 인척인 유언이 익주목으로 부임한 이후, 비단 생산에서 비가에 밀리고 있는 상태였다. 심가의 가주 심미는 비단 생산에서의 열세를 장강 교역으로 뒤집어 보고자 장강 뱃꾼들의 우두머리 누발이라는 자에게 공을 들여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그런 와중에 익주목 유언이 애첩을 들이며 비가와의 사이가 멀어지자, 심미는 유언의 둘째 아들 유탄에게 줄을 대서 장강 교역의 이권을 하나둘씩 잠식해 왔다.
“거기까지만 들으면 그저 호족 가문들끼리 가세를 겨루는 것처럼 들리는군. 비가와 심가가 경쟁하는데 판순만은 왜 끼어들게 된 건가?”
“장강 교역을 하려면 배가 대량으로 필요합니다. 그런데 삼파 일대의 배 만드는 일은 판순만이 꽉 잡고 있습니다.”
“배를 만든다고?”
이민족이 한인들의 배를 만든다니, 이민족 문화에 어지간히 익숙한 마초도 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렇습니다. 형님은 서량의 강족이나 선비족처럼 가축을 기르며 사는 이들이 익숙하시겠지만, 판순만은 우리와 똑같이 농사를 짓고 교역을 하며 사는 이들입니다. 목재를 생산하는 일부터 배를 건조하는 일까지 전부 판순만들이 장악하고 있고, 심지어 뱃꾼들 중에도 판순만이 많습니다.”
“그렇군. 그렇다면 교역용 배를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났다는 건가?”
“맞습니다. 작년에는 태풍 때문에 비가, 심가 할 것 없이 배들이 전부 못 쓰게 된 적이 있었지요. 그때, 판순만들이 심가에게 매수되었는지 심가의 배부터 만들어 공급하고, 우리 비가에서 주문한 배는 차일피일 미루며 어깃장을 놓더군요.”
“큰 분쟁이 일어났는가?”
“그때는 어떻게 넘어갔습니다. 우리가 알아서 배를 만들려고 하니 어떻게든 공급을 해 주더군요. 저도 분쟁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으니 대금도 두둑하게 지급했고요. 다만 그 일이 있은 후, 심미라는 놈이 저를 따로 찾아와서 협박한 적이 있습니다.”
“뭐라고?”
“비단 생산은 반으로 줄이고, 장강 교역에서는 아예 손을 떼라고 하더군요. 그렇지 않으면 뜨거운 맛을 볼 거라고.”
“그래서 자네는 뭐라고 했는데?”
비관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거대한 어깨가 힘없이 축 처졌다.
“에휴, 그야…….”
“아니 뭐라고 했냐니까?”
“죽고 싶지 않으면 다시는 나타나지 말라고 했지요.”
“그 말만?”
“아니 뭐, 저도 화가 나서 한 대 쥐어박으면서…….”
“어디를 어떻게 쥐어박았는데?”
“머리를 땅에 처박고 뒷덜미에 도끼를 들이대며… 얘기…했지요.”
비관의 고백을 듣는 마초도 기가 막혔다.
“쥐어박은 게 그 정도면 마음먹고 때렸으면 사람을 잡았겠군.”
“형님, 장사치들끼리 얕잡아 보이면 끝입니다. 저라고 좋아서 그랬겠습니까?”
“됐네, 이 사람아. 어쨌든 그렇게 시원하게 두들겨 팼으니 심미도 자네에게 원한이 꽤 깊겠군.”
“예. 그런데 설마 판순만을 동원해서 보복할 줄은 몰랐지요.”
마초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심미의 사주를 받은 판순만들은 단지 비관의 저택을 습격했을 뿐이다. 저택을 불태우고 가노들을 잡아갔지만 민가를 약탈하거나, 관원을 공격하지 않았다. 여기까지는 그저 비관과 심미 사이의 세력다툼에 불과하다. 대성호족들 사이에 흔히 있는 일이니 이것뿐이라면 싸움에 끼어들 이유가 부족했다.
나관중이 옆에서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주공, 비 대인의 사정은 딱하지만 우리가 싸움에 끼어들기에는 명분이 없습니다.”
“음, 그렇기는 한데…….”
인상을 쓰고 있던 마초가 문득 비관을 보며 물었다.
“빈백, 심미의 밑에 있다는 누발이라는 자 말인데, 장강 뱃꾼들의 우두머리라고 했지?”
“그렇습니다. 뱃꾼들을 모아서 장강수로맹이라는 단체를 결성하고 스스로 수로맹주로 칭하고 있습니다. 뱃꾼들은 거칠고 싸움에 능한 자들이 많은데, 장강에서 교역을 하려면 뱃꾼들과의 관계도 중요해서 아주 이만저만 골치 아픈 게 아닙니다.”
“그 수로맹에 혹시 비단 돛을 달고 다니는 수적단이 있는가?”
“아니, 금범군을 아십니까?”
오히려 비관이 화들짝 놀라며 마초에게 되물었다.
“장강을 제집처럼 오르내리며 수적질을 하는 자들입니다. 장강 상류의 온갖 부랑자들은 금범군에 다 모여 있는데, 그 금범군 두령이라는 자가 워낙 흉폭하여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는 자들이지요. 얼마 전 누발이 만든 수로맹에 가입했다고 들었습니다. 틀림없이 심미도 금범군을 믿고 제 집을 습격했을 것입니다.”
“오호. 금범군이 그렇게 대단한가?”
“금범군은 수틀리면 상대가 호족이든, 군웅이든 가리지 않는 지극히 사나운 자들입니다. 장강을 끼고 장사를 하는 자들 중 금범군의 눈치를 보지 않는 자들은 없습니다. 만약 그들이 수로맹에 가입하지 않았다면 심미도 그렇게 막 나가지 못했을 겁니다.”
“좋아. 그렇다면 심미가 공격받으면 수로맹주 누발이 참전할 것이고, 누발이 공격받으면 수로맹의 일원인 금범군이 참전하겠군.”
“맞습니다.”
금범군 얘기가 나오자 비관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반대로, 방금 전까지 고민하던 마초는 금범군의 얘기를 듣자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좋아, 결정했다. 심미를 친다.”
“예?”
“예?”
비관과 나관중이 동시에 마초에게 반문했다.
“뭘 그렇게 놀라? 심미라는 놈이 판순만을 움직여 빈백 아우의 가족을 습격했다며? 그러면 받은 만큼 돌려줘야지. 판순만을 때려잡으면 심미라는 놈이 나올 테니, 그때 잡으면 되겠군.”
그리고 심미를 잡으면 수로맹주 누발과 수로맹의 일원인 금범군이 등장할 것이다. 마초가 진짜로 원하는 것은 금범군의 두령을 마가군으로 끌어들이는 일이었다.
“주공, 하지만 우리가 익주의 싸움에 끼어들 만한 명분이…….”
“빈백 아우의 식솔들을 건드린 것은 곧 나의 식솔을 건드린 것과 같다! 이보다 더 중요한 명분이 어디 있는가!”
“…두 분이 그 정도의 사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어허! 나와 빈백 아우의 사귐은 물고기가 물을 얻은 것과도 같으니, 비서랑은 여러 말 말라!”
마초가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호통을 치니 나관중은 그저 기가 막힐 뿐이었다. 마초는 금범군의 두령이 어지간히 마음에 들어서 어떻게든 등용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물론 그가 대단한 인물이기는 하지. 그러나 맹장이라면 이미 대단한 맹장이 세 명이나 있지 않은가?’
방덕, 서황, 그리고 이번에 얻은 장료까지. 금범군 두령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맹장이 셋이나 있는 마가군에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 끌어들일 가치가 있을까 싶었다.
당황한 건 나관중만이 아니었다. 도움을 받는 당사자인 비관도 어지간히 당황한 눈치였다.
“맹기 형님, 잠시 노여움을 가라앉히시지요. 형님께서 서량 최고의 영웅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허나 이 파군 일대는 촌구석이라 서량에서 쌓은 명성이 통하지 않습니다. 아마 형님께서 직접 가셔도 판순만들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을 겁니다.”
“내 명성이 통하지 않는다고?”
“그렇습니다, 형님. 판순만들을 혼내 주고 끌려간 가노들을 되찾고 싶은 마음은 제가 가장 큽니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냉정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명성이 통하지 않는데 무슨 수로 그들을 설득하겠습니까?”
“빈백 아우. 싸움을 명성으로 하나?”
마초는 비관을 바라보며 자신감에 찬 웃음을 지었다.
“우리는 판순만의 본거지로 쳐들어가서 빼앗긴 가노들을 되찾아 온다. 설득 따위는 할 생각이 없으니 명성도 필요 없다. 오로지 실력으로 빼앗아 주지.”
“아니, 하지만 우리 셋이 판순만을 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물론이지. 내가 자네에게 찾아 달라고 한 사람 중에 건녕군 독우 이회라는 자를 기억하는가?”
“예, 그럼요. 형님의 어릴 적 친구분이라고 하셨지요.”
“그래, 그가 지금쯤 내 서신을 받았을 테니, 곧 군사들을 이끌고 이곳에 당도할 것이다.”
나관중이 끼어들었다.
“주공, 그렇다면 이 독우가 끌고 온다는 군사들이 설마…….”
“그래, 남만족이다. 공식적으로는 그저 유랑민들이지만, 병장기를 들면 강인한 병사가 되지. 남만이라면 판순만을 상대하기에 부족함이 없겠지.”
마초는 이회에게 서신을 보내 건녕의 남만족들 중 맹획을 따르던 무리들을 파군으로 보내라고 했다. 맹획의 부대에 편입시키기 위함이었다. 마침 파군에서 판순만, 그리고 금범군과 싸울 일이 생겼으니 그들을 병사로 쓸 참이었다.
곤란해진 것은 파서태수였다.
“복파장군, 판순만이 대성호족 비가를 습격했으니 그들을 토벌하는 것은 이치에 맞는 일입니다. 그러나 태수된 입장으로 섣불리 관군을 내어 드릴 수는 없습니다. 이 점은 부디 양해를…….”
“물론이오. 태수께서는 걱정하실 필요 없소. 단, 한 가지 청이 있소.”
“관군을 내어 판순만을 치는 것만 아니라면 뭐든지 괜찮습니다. 말씀하시지요.”
마초는 황권 쪽을 돌아봤다.
“이번 싸움에 군리 황권 선생을 군사로 모시고 싶소. 물론, 황 선생이 동의한다는 전제하에.”
황권은 굵직한 팔뚝으로 팔짱을 낀 채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황권은 잠시 생각한 후 입을 열었다.
“우리 한인들이 판순만의 영역을 존중하는 것처럼, 그들 또한 우리의 질서를 존중해야 합니다. 허나 그들은 한인 호족들 사이의 일에 끼어들어 행패를 부리고 한인 가노들을 끌고 갔으니 마땅히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복파장군께서 저를 쓰시겠다면 기꺼이 돕겠습니다.”
“하하, 역시 명쾌하군. 잘 부탁드리오, 황 군사.”
“다만 한 가지, 우려되는 점이 있습니다. 판순만의 본거지인 투수 유역의 삼림은 나무가 울창해서 군사들이 일제히 활을 쏘기 어렵습니다. 숲속의 좁은 길목을 한 사람의 무사가 지키면 대군이라도 막아낼 수 있는데, 저들 중에는 뛰어난 무사들이 두 명 있어서 자칫하면 군사들만 상할 수 있습니다. 충분한 대비가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그들보다 더 뛰어난 무사를 내보내서 잡으면 되지 않는가?”
마초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고 조금 떨어져 있던 장료를 불렀다.
“장료, 자는 문원. 판순만의 무사가 얼마나 뛰어난지 모르겠으나, 여기 있는 장문원은 곧 천하에 이름을 떨칠 만한 뛰어난 검객이오. 그 문제는 장문원이 알아서 해결할 것이오.”
장료는 갑자기 판순만과 싸우라고 하니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그걸 본 마초가 장료의 귀에 뭐라고 속삭였다. 귓속말을 들은 장료의 표정이 환해졌다.
“특별 봉록이요?”
“쉿. 이번에는 피할 수도 있는 싸움을 내 의지로 하는 거니까 특별히 주는 거야. 원래 싸운다고 특별 봉록을 더 주고 그런 건 없다고.”
“이를 말이겠습니까? 이 장료, 받은 만큼 확실히 일하겠습니다.”
장료는 실눈을 더욱 가늘게 뜨고 싱글벙글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