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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마초연의-118화 (118/306)

118화. 호방한 군사

“이런 천하의 패륜아 같은 놈! 복파장군 씩이나 되어서 내 촉금 십만 필을 먹고 파군으로 튀었단 말인가!”

유탄은 길길이 날뛰었다. 그도 그럴 것이, 며칠 전 익주의 후계자로 자신을 지지할 것처럼 말을 흘리며 촉금 십만 필을 요구했던 마초가 약속했던 촉금을 받자마자 입을 싹 씻었기 때문이다. 마초는 파군의 지인을 만나고 오겠다며 떠났는데, 떠나기 전 익주 문사들의 모임에 홀연히 나타나서 이런 말을 남겼다.

—시황제가 부소를 태자로 세웠어도 진이 망했겠소?

400년 전, 최초로 천하를 통일한 진의 시황제는 장남 부소 대신 18번째 아들 호해에게 황위를 물려 줬고, 진나라는 결국 망했다. 마초는 그렇게 유언의 장남 유범을 지지하는 뜻을 은근히 드러내고 파군으로 사라졌다.

서량 마가군의 후계자이자 조정의 복파장군인 마초의 말은 묵직했다. 서량이 유범을 지지한다는 뜻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으니, 익주 호족들은 벌써부터 유범이 익주를 계승할 가능성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그러니 유언의 생전부터 후계자 자리에 공을 들여온 유탄은 순식간에 촉금 10만 필만 빼앗긴 꼴이 된 것이다. 유탄의 옆에 앉아 있던 젊은 선비도 혀를 차며 말했다. 유탄의 꾀주머니, 팽양이었다.

“마초 그자가 이토록 신의가 없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공자께서는 부디 마음을 굳게 먹으십시오. 어차피 마초가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다음 계획이 있지 않습니까?”

“으음…팽 선생의 말이 맞소. 천하에 나를 지지해 줄 외부 세력이 서량의 마가군만 있는 건 아니지.”

유탄은 팽양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마초가 포섭되지 않을 경우에 대비해서 이미 두 번째 계획을 세워 두었다. 그 사람의 세력은 마가군보다 훨씬 멀리 있어서 조문 사절이 오는데도 시간이 더 걸렸다. 이제 그 사람이 보낸 사자가 조문을 마치고 유탄과 만나러 올 시간이었다.

“유탄 공자. 강녕하시오?”

휘적휘적 방 안으로 들어온 것은 흰 얼굴의 서생이었다. 언제 상갓집에 다녀왔냐는 듯, 머리는 산발을 하고 앞섶은 풀어 헤쳐서 꼭 밤새 술을 마신 사람의 행색 같았다. 서생의 좌우에는 제법 무골인 것처럼 보이는 두 장한이 따르고 있었다.

“아이고, 천하에 명성이 높은 곽 군사를 이렇게 뵙다니요. 영광입니다.”

유탄은 손바닥을 비비며 눈앞의 서생, 곽가를 향해 비굴한 웃음을 지었다.

‘흥, 더벅머리 선비 놈이 호방한 척하기는. 제 주인의 위세를 믿고 건방지기가 이를 데 없군. 나는 이래 봬도 곧 군웅이 될 몸, 잠깐의 치욕 쯤은 감수해 주마.’

유탄은 속으로 그렇게 욕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갖은 호들갑을 떨며 곽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애썼다. 곽가는 현재 허도에서 천자를 모시고 있는 강력한 군벌, 조조가 보낸 사신이었기 때문이다. 유탄이 마가군 외에 줄을 대려는 군벌이 바로 조조였다.

곽가는 그런 유탄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 피식 웃었다.

“유탄 공자. 익주목이 되고 싶으시오?”

“곽 군사. 이를 말이겠습니까?”

“그러신가? 그런데 이를 어쩐다. 익주목의 인수를 들고 오기는 했는데, 주인이 다른 사람이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돌아가신 유 익주께서 익주를 장악한 지 십 년이 넘었소이다. 이제 다시 조정에서 파견한 관리가 익주를 다스릴 때가 온 것 같지 않소?”

곽가는 그렇게 말하고 껄껄 웃으며 양옆의 두 장한 중 하나를 가리켰다.

“여기 이분은 태산의 여건 공이오. 문무를 겸비하고 도량이 커서 주목의 자리를 맡고도 남음이 있는 호걸이시오. 여건 공에게 익주를 맡기는 것이 바로 조정의 뜻이외다.”

여건은 큰 키에 제법 강단이 있어 보이는 사내였다. 여건이 슬쩍 눈 인사를 하자 유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아니, 그럼 지금 내가 아니라 이 사람을 익주목으로 임명하겠다는 것이오? 곽 군사는 나를 능멸하기 위해 이 먼 곳까지 조문을 왔는가! 조정의 뜻? 사공 조조의 뜻이겠지!”

악에 받쳐 소리를 지르는 유탄. 그러나 여전히 태연한 곽가다.

“어허, 이런, 이런. 그리 흥분하실 일이 아니외다.”

“그게 무슨 소리요?”

“요즘 같은 난세에는 덕 있는 자가 지방을 다스리는 것도 좋은 일이지. 하여 이 곽가가 묘안을 하나 준비해서 사공께 간언을 드렸소.”

익주는 멀다. 조정에서 임명한 익주목이 어지간한 수완가가 아니라면 감투 하나 썼다고 익주를 장악할 방법이 없다. 설령 어지간한 수완가라고 해도 그 과정에서 죽거나 크게 다치기 십상이다. 여건의 능력이 아무리 출중해도, 익주에 단단한 기반을 가진 유탄이 마음먹고 저항한다면 쉽지는 않을 터였다.

반면 유탄 또한 곤란하기는 마찬가지다. 주목 정도의 벼슬을 하려면 조정의 권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손책이나 손권 같은 영웅들조차 조정에서 인정한 관직 없이 주목의 역할을 하느라 갖은 고생을 했다. 조정에서 엉뚱한 사람을 익주목으로 세운다면 마땅한 관직이 없는 유탄도 어지간히 곤란해질 것이다.

“뭐라고 간언을 했다는 거요?”

“여기 있는 여건 공이 익주목이 되어 무사히 익주를 장악한다면 모르나, 만에 하나라도 실패한다면. 그때는 유탄 공자와 여건 공이 서로 곤란해질 것이오.”

“그건 그렇지요.”

“두 사람이 서로 곤란해지면, 상대적으로 이득을 보는 것은 누구겠소?”

유탄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형님… 유범 중랑장만 이득을 보겠군. 조정에서 온 익주목이 나에게 살해당하거나, 혹은 그 반대의 일이 일어나면, 틀림없이 형님이 나서서 익주를 집어삼킬 것이오.”

“그러니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아야 하지 않겠소? 하여 내가 사공께 특별히 허락을 받았소.”

곽가는 능글능글한 웃음을 지으며 유탄을 응시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에 따라, 이 익주목의 인수를 태워 버리고 돌아갈 수도 있소이다. 그러고 나서 익주 호족들의 추대를 받아 누군가가 익주목에 올라야 한다고 표가 올라온다면… 사공께서 아마 승인하는 쪽으로 힘써 주시지 않겠소?”

“곽 선생! 참으로 감사합니다! 그래, 그 ‘어떤 일’이 대체 뭡니까?“

유탄은 대번에 말투가 바뀌었다. 곽가는 그런 유탄을 보고 크게 웃었다. 그는 본래 경멸감을 숨기지 않는 성격이었다.

“으하하하, 그야 그만큼 상서롭지 못한 일이 일어나야겠지요. 이를테면…….”

“이를테면?”

“익주를 방문하고 있는 귀한 손님이 필부의 손에 죽는다거나 하는 그런 일 말이지요.”

곽가는 그렇게 말하며 도자기로 된 찻주전자를 손에 들고 물끄러미 바라봤다. 주전자는 말(馬)을 탄 사람 모양이었다.

곽가의 말뜻을 눈치챈 유탄은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후, 이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마초… 어린 나이에 너무 눈에 띄기는 했다. 사공부에 벌써 마초를 제거하려는 자들이 있군. 내가 아니라도 제 명대로 살기는 힘든 자다.’

유탄은 머릿속으로 어떻게 해야 마초를 티 나지 않게 죽일 수 있을지 생각했다. 곽가는 그 모습을 보며 그저 비웃는 듯한 미소를 띠고 있을 뿐이었다.

* * *

성도에서 유언의 빈소에 조문한 마초 일행은 파군으로 향했다. 마초가 익주에서 찾으려던 인물들이 대부분 파군에 있기 때문이었다. 성도에서 알게 된 파군의 대성호족 비관이 안내를 맡았다.

파군으로 향하는 길 위, 나관중이 마초의 곁에 말머리를 바싹 붙이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참으로 다행입니다. 마침 파군에 갈 핑계가 필요했는데, 때맞춰 파군의 호족이 우리에게 접근해 주니 말입니다.”

“그러게 말이야. 비관의 집안 고모하고 혼인한 유언이 익주목으로 부임하면서 가세가 갑자기 커졌다고 했지? 그런 걸 보면 세상일은 운이라는 게 참 중요하단 말이야.”

“그런데 유언이 익주에서 새로 들인 첩에 푹 빠지면서 비가와의 사이가 소원해졌다니, 참…….”

그렇게 중얼거리던 나관중은 문득 마초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런데 주공, 유언의 첩이라면 혹시 그 사람 아닐까요?”

“아아. 장로의 모친 말인가?”

“예, 유언이 한중태수 장로의 모친을 총애해서 가까이 뒀다는 기록을 본 적이 있습니다. 주공께서는 잠시 한중에도 있으셨죠? 그게 사실입니까?”

“나도 비슷한 얘기를 들은 적은 있어. 다들 쉬쉬하느라 자세한 내막까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런데 이상하단 말이야.”

“예? 뭐가요?”

“일단 장로도 나보다 나이가 한참 많아. 그런데 그 모친이면 대체 나이가 몇이나 됐을까? 못해도 쉰은 훌쩍 넘었을 텐데 익주목 씩이나 되는 권력자의 애첩이 되다니, 뭔가 이상한걸.”

“아니 뭐, 그야 여인도 사람에 따라서 미색을 오랫동안 유지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아무리 그래도 50대의 애첩은 쉽게 볼 수 있는 게 아니지. 어쩌다 그렇게 됐을까? 혹시 장로의 모친이 나를 애첩으로 삼지 않으면 철퇴로 머리를 깨 버리겠다고 협박한 건 아닐까?”

“…설마 그런 여인이 천하에 둘이나 있겠습니까? 장로는 도가의 인물이니 그 모친도 양생술을 익혀서 오랫동안 젊음을 유지하고 있었겠죠. 아니면 유 익주의 애첩이 여러 명일 수도 있고요.”

마초와 나관중은 그렇게 세상 쓸데없는 문답을 주고받으며 파서에 도달했다.

흔히 파군이라고 부르는 곳은 파, 파동, 파서의 3개 군이다. 이 삼파 지역의 입구에 해당하는 곳이 파서였다.

그런데 파서군에 도착하자마자 심상치 않은 소식이 전해졌다. 파서태수가 보낸 전령이었다.

“파군의 비가가 습격을 받았다고?”

“그렇습니다!”

“비가라면 이 일대에서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는 대성호족인데, 대체 어떤 놈들이 비가를 습격했다는 말이냐?”

“그것이… 투수의 판순만(板楯蠻) 오랑캐들입니다!”

판순만이라는 말을 듣자 마초는 얼굴을 찌푸렸다.

이들은 파족이라고도 불리는데, 파군 일대를 근거지로 삼는 이민족이다. 아직까지도 한족의 사회에 동화되지 않고 자신들의 독자적인 문화를 유지하며 살고 있었다.

파군 일대는 초고대부터 황하 문명과는 별도의 독립적인 문명이 자연적으로 발생한 지역이다. 한족 중심의 역사에는 그저 판순만이라고만 기록되었지만, 이곳에 남은 삼성퇴 유적 등을 통해 추정할 수 있는 바는 이들이 고도로 발달한 기술과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진짜 문제는 이들의 싸움 실력이지.’

판순만은 간간이 역사서에 등장하는데 전부 싸움을 한 기록이고 전부 이긴 기록이다.

진나라 소양왕 때는 쇠뇌로 신령한 호랑이를 잡았다는 신화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고조 유방 때에는 고조가 삼진을 정벌하는 데 종군해서 큰 공을 세웠다. 후한 안제 때는 강족들이 파군까지 쳐들어와 약탈한 적이 있었는데, 한의 정규군도 어쩌지 못한 강족의 침략을 격멸한 것이 판순만이었다. 또한 50년 전인 후한 환제 때는 형주에서 일어난 무릉만들의 반란에 참전해서 무릉만을 격퇴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판순만이 어쩐 일로 비가를 습격한다는 말인가? 빈백(비관의 자) 아우, 짚이는 데가 있는가?”

비관은 이를 악물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보는 이가 섬찟할 정도의 분노가 전해졌다.

“…제가 판순만을 가볍게 대한 적이 없습니다. 배후에 누군가 있을 겁니다. 짚이는 데가 없는 건 아닙니다만, 확실히 알아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일행은 일단 파서태수의 치소로 길을 재촉했다. 파의 비가장은 이미 판순만의 습격을 받아 쑥대밭이 되었고, 준비가 없는 상태에서 가 봐야 자칫 봉변을 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파서태수의 치소에는 비관의 식솔들이 모여 있었다. 비가장이 습격을 받는 와중에도 비관의 가족 친지들은 무사했다. 어머니와 동생들의 손을 잡고 흐느끼던 비관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파서태수에게 물었다.

“태수께서 힘써 주신 덕에 다행히 식솔들의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습니다.”

“비 대인. 참으로 다행입니다만, 비 대인의 가족분들을 구출한 것은 제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런 위험한 일을 했다는 것입니까?”

“우리 파서군의 군리 중 담력이 남다른 이가 하나 있습니다. 그 친구가 목숨을 걸고 파군으로 들어가서 가족분들을 호위해 왔습니다.”

“그분께 갚을 길 없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분이 대체 누구십니까?”

비관과 파서태수가 말을 주고받는 사이, 문이 열리고 한 사내가 들어왔다.

그는 문관의 관복을 입고 있었다. 다만 옷깃 위로도 양감이 느껴질 만큼 두터운 근육이 그가 보통 문관이 아님을 말해 주었다. 거대한 턱과 올올이 뻗친 수염, 허리에 찬 묵직한 장검도 문관에게는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행색이었다.

사내의 얼굴을 보자 마초의 눈이 빛났다. 나관중도 그 모습을 보자 짚이는 게 있었다.

“내가 찾던 인물 중 하나다. 설마 이렇게 쉽게 찾을 줄이야.”

“그럼 저 사람이 바로…….”

“그래. 문무를 겸비한 호방한 성품의 군사. 꼭 우리 쪽으로 끌어들여야 하는 인물이지.”

그동안 비관은 자신의 가족들을 구출해 준 사내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이 관은 대인 덕분에 가문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대인께서는 존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사내는 당당한 걸음걸이로 걸어와서 군례로 화답했다. 옷깃 아래로 드러난 굵직한 아래 팔뚝에는 핏줄이 잔뜩 솟아 있었다.

“황권, 자는 공형. 응당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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