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익주의 거상 (2)
마초는 비관을 알고 있었다. 지난 생에서 촉에 귀부한 후, 만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빈백(빈백은 비관의 자)… 파군 호족인 건 알고 있었는데, 지금 여기에 있다고?”
“예. 유 익주의 부고를 듣자마자 한달음에 달려와서 오늘까지 계속 머무른 모양입니다.”
“잘 됐군. 회합에서 몇 번 본 게 전부지만 꽤 영리해 보이더군. 친교를 쌓아 두면 도움이 될 만한 인물이야.”
“그렇습니까? <계한보신찬>의 기록으로 보면 말솜씨가 좋고 사람과의 교제에 뛰어나다고 적혀 있더군요.”
마초는 그 말을 듣자 피식 웃었다.
“정확하게도 적어 놓았군. 그와 술잔을 나누고 말을 몇 마디 섞은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새 수십 년을 사귄 절친한 벗처럼 변해 있더군. 대단한 재주꾼이야. 그 재주를 대의가 아니라 가문의 이익을 위해 써서 그렇지.”
“비관이 그렇게 말솜씨가 뛰어납니까?”
“정확히는 아첨을 잘하지. 입에 발린 말로 환심을 사는 실력은 아마 천하제일일걸. 하지만…….”
비관에 대해 평가하던 마초는 눈을 치켜뜬 채 입꼬리를 한껏 올렸다.
“인생을 두 번 사는 나에게 그까짓 아첨은 통하지 않는다. 그에게 말려들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만 얻어내야겠어.”
나관중은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태어난 마초는 천하의 누구보다 많은 인생의 곡절을 거친 사람이다. 노련한 마초라면 아직 청년에 불과한 비관의 말솜씨에 말려들지 않을 것이다.
마초는 사람을 보내 비관을 별채로 불렀다. 한 시진이 지나기 전, 마초와 나관중이 앉아 있는 별채에 비관이 들어섰다.
비관은 20대 초반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풍채가 당당했다. 얼핏 보면 아첨에 능하다는 것을 짐작하기 어려운, 마치 무장처럼 근골이 탄탄한 거구의 청년이었다.
마초는 비관을 보고 잔잔히 웃으며 인사말을 건넸다.
“일찍이 파군에 비빈백이라는 영준한 선비가 있다고 들었소이다. 오늘 비 공자를 뵈니 참으로 그렇소.”
“이 관은 비대하고 재주 없으나 항상 천하의 영웅을 흠모해 왔습니다. 오늘 복파장군을 뵈니 가슴이 두근거리고 다리가 후들거려 서 있기가 힘들 지경입니다. 청컨대 자리를 내어 주셔서 비루한 몸뚱이가 바닥에 쓰러지는 일을 면하게 해 주시지요.”
“으하하, 비 공자는 농이 지나치시군. 이쪽으로 앉으시오.”
마초는 피식 웃으며 비관을 앞에 앉혔다. 상갓집이라고는 하지만 상주가 마음껏 즐기라고 산해진미와 금준미주를 깔아 놓은 별채다. 비관과 마초 사이에는 어느새 술잔이 오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관중은 어느 순간, 비관의 눈빛이 번뜩이는 것을 보았다.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호랑이 같은 눈이구나. 저자가 단순히 주공과의 친교를 쌓기 위해 왔을 리 없다. 틀림없이 꿍꿍이가 있을 거야.’
비관은 술이 조금 들어가자 대뜸 호칭부터 바꿨다.
“아이고, 맹기 형님!”
“으응? 형님?”
“그럼 형님이 아니고 뭡니까?”
“아니 잠깐. 비 공자도 흥평 오 년생이라고 하지 않았소? 그럼 우리는 동갑이 되는데.”
“생일이 몇 달이나 차이가 나는데 어찌 생년만 따질 수 있겠습니까? 형님께서 빠른 흥평 오 년생이시니 마땅히 형님으로 모셔야지요!”
비관의 말투는 참으로 당당했다. 그런 말투로 아첨을 하면 묘한 설득력이 있었다. 비관은 이상한 논리로 마초를 형님으로 만들었는데, 그 기세가 하도 당당하여 마초 자신도 모르는 새 비관의 말솜씨에 휩쓸리게 되었다. 말을 듣다 보니 비관은 은근히 아는 것도 많고 말에 조리가 있었다.
“으흠, 우형은 어려서부터 싸움터를 떠도느라 학문이 깊지 않네. 빈백 아우는 가문의 일을 챙기느라 다망한 와중에서도 학식이 깊으니 참 대단하단 말이야.”
“아이고, 맹기 형님! 원래 영웅은 공부 따원 안 합니다!”
마초는 비관에게 휩쓸리지 않기 위해 나름대로 비관을 띄워 주려고 했지만, 도저히 비관의 아첨 솜씨에는 당해낼 수 없었다. 나관중은 그 모습을 보고 얼른 끼어들어 비관에게 말을 걸었다. 그대로 두면 마초가 휩쓸려 버릴 것 같았다.
“저, 비 공자. 그나저나 오늘 찾아오신 데는 이유가 있을 듯합니다. 이제 통성명을 했으니 본론을 말씀하시지요.”
나관중이 끼어들자 마초는 그때서야 정신을 차렸다.
‘이런, 이놈의 기세에 휩쓸릴 뻔했군. 안 되겠다. 정신을 차려야지.’
비관은 마초가 정신을 차리는 모습을 보자 순간적으로 나관중을 노려봤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관중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잠깐 생각하던 비관이 입을 열었다.
“이 아우가 곧 죽게 생겨서 찾아왔습니다. 형님께 간청하면 목숨을 구할 수 있을까 해서요.”
“곧 죽게 생겼다니 그게 무슨 얘긴가?”
“실은…….”
비관이 풀어놓는 이야기는 이러했다.
비가는 파군을 근거지로 하는 대성호족이다. 조상 대대로 형주에 살았지만, 비관의 조부 대에 파군으로 이주해서 자리를 잡았다고 했다. 비단의 생산과 장강을 통한 형주와의 비단 교역이 비가의 주 수입원이었다. 파군에는 이런 집안이 한둘이 아니었는데, 비관이 아직 어린아이일 때 비가가 결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한 계기가 생긴다.
비가의 인척인 태상 유언이 익주목으로 부임한 것이다. 유언의 아내 비씨는 비관의 재당고모였으니 그의 아들들인 유범, 유탄, 유장과 비관은 먼 친척 형제가 된다.
익주목 유언의 비호를 받기 시작하자 비가의 사업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비관이 가주가 될 때에 이르자 파군의 비단 생산과 장강을 통한 비단 교역은 비가가 거의 장악하다시피 할 정도였다. 비가에는 매년 엄청난 수입이 들어왔다.
그러던 차에 유언과 비씨의 금슬이 결정적으로 틀어졌다. 유언이 첩을 들였기 때문이었다. 자연스럽게 처가 쪽 친척인 비가에서 가져가던 특혜도 조금씩 줄어들었다. 비가가 거의 독점하던 장강 교역에 다른 파군 호족들이 끼어들었다.
“그 호족이 누구인가?”
“부릉 심가의 가주 심미입니다. 돌아가신 유 익주의 애첩에게 끈이 닿아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는데 사실 여부는 저도 모릅니다. 장강을 오르내리는 뱃꾼들의 우두머리 누발이라는 자가 심미를 돕고 있습니다.”
“뱃꾼들의 우두머리라고?”
“예. 자기들끼리는 장강수로맹이라고 거창하게 부르더군요. 어쨌든 장사하는 입장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처음에는 심미, 누발과 수익을 나누며 조용히 지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유 익주께서 돌아가시고 성도에 와 보니, 유탄 공자가 저보고 장강 교역에서 물러나라고 하더군요.”
“으흠…….”
마초는 턱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유언의 둘째 아들 유탄은 원래 장안에서 망나니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미오성에 유폐된 것을 마초가 구해서 익주로 돌려보냈다. 그런데 이감이 가져온 정보에 따르면, 익주로 돌아간 유탄은 사람이 바뀐 것처럼 유언에게 효도를 다하며 주변의 평판을 관리해 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익주 호족들 사이에는 유탄을 지지하는 세력이 꽤나 두텁게 형성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유언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보고 후계자 자리에 욕심이 났나 보군. 그렇게 자기 사람을 늘리는 과정에서 저 심미, 누발이라는 놈들과 유착된 게 틀림없다.’
마초는 비관을 바라보며 말했다.
“빈백 아우. 오늘 뜻이 맞는 아우를 만났으니 곤궁한 사정을 돕고 싶은 마음은 크네. 허나 장강 교역을 비가가 하느냐, 심가가 하느냐는 익주의 집안일이 아닌가? 우형이 끼어들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듯하네.”
“형님. 이는 곧 형님의 일이기도 합니다.”
비관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마초는 모르는 척 물었다.
“뭐가 나의 일이라는 말인가?”
“형님께서는 얼마 전, 서량을 평정하셨지요.”
“그랬지.”
“서량 땅은 척박합니다. 농사도 제대로 되지 않고, 철이나 소금도 풍족하지 않습니다. 서량 땅에서 큰돈을 벌 수 있는 길은 딱 두 가지뿐이지요.”
“그 두 가지가 뭔가?”
“첫째는 전쟁입니다. 서량은 말(馬)이 풍부하고 사람들은 억셉니다. 서량 기병대를 앞세워 중원의 세력과 전쟁을 하면 크게 한몫 잡을 수 있습니다.”
마초는 피식 웃음이 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내 고향의 대외적인 인식이란 게 이 정도로군. 그래, 두 번째는 뭔가?”
“둘째는 서역과의 교역입니다. 서량을 장악하면 안식국(파르티아), 대진국(로마) 같은 대국부터 구자국, 차사국, 우전국 같은 수많은 소국들까지, 서역의 뭇 나라들과 교류할 수 있습니다. 이들을 통해 유리와 포도주, 금 세공품과 향신료를 중원으로 들여오면 엄청난 이득을 볼 수 있습니다.”
머나먼 익주 남쪽, 장강 유역의 파군에 사는 젊은 청년이라고는 보기 힘든 식견이다.
‘큰돈을 벌려면 이 정도는 돼야 하나 보군.’
마초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우의 말이 맞네. 계속 말해 보게.”
“천하가 혼란해지고 군웅들이 등장한 지 벌써 십 년이 넘었습니다. 그런데 서량을 장악한 군웅은 올해 최초로 등장했지요. 바로 관중도독과 그 아드님이신 맹기 형님입니다. 형님은 결국 전쟁과 서역 교역, 두 가지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분입니다.”
“잘 알고 있군. 그래서, 내가 익주의 일에 끼어들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형님께서 전쟁이나 서역 교역을 하시려면 익주목이 유탄 공자여서는 안 됩니다.”
“어째서?”
“전쟁을 하시려면 익주가 후방의 위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기왕이면 익주와 동맹을 맺어 풍부한 군량을 활용할 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요. 그러려면 같은 천자의 측근인 유범 중랑장이 익주목이 되어야 합니다. 유탄 공자가 익주목이 되려면 유범 중랑장을 몰아내야 하는데, 천자의 측근인 유범 중랑장을 몰아내고 익주목이 된 자가 이후에 천자의 편에 서겠습니까? 틀림없이 유탄 공자는 다른 군웅의 편에 설 것입니다.”
“일리가 있군. 허나 빈백 아우. 내가 계속 천자의 편에 서 있으리란 보장도 없지 않은가? 우리는 숱한 차별을 받아 온 서량 군벌일세. 사람들은 우리 마가군이 정말 천자의 편이 맞는지도 의심하고 있을 걸세.”
마초는 빙글빙글 웃으며 비관을 놀리듯 말했다. 그러나 비관의 말은 단호했다.
“형님은 계속 천자의 측근으로 남을 겁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형님이 권신이 되려고 했다면, 하내 전투에서 승리한 후 천자를 모시고 관중으로 돌아왔겠지요. 천자를 끼고 제후들에게 영을 내렸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지요.”
“그야 조정의 운영 자금이 없었으니까. 관중을 재건하려면 조정은 오히려 방해가 되기도 했고.”
“부귀와 공명을 얻으려면 힘들게 관중을 재건하는 것보다 폐허가 된 관중에 천자를 모시는 게 훨씬 빠른 길이죠. 그러나 형님은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결과를 두고 역시 서량 군벌은 충성심이 부족하다느니, 어쩐다느니 하고 떠들고 있지요. 그러나 아는 사람의 눈에는 보이는 법입니다. 왜 천자를 두고 관중으로 돌아갔을까? 충성심이 부족해서? 아니죠. 부귀보다 치란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비관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말이 거기까지 가자 마초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형님은 결국 대의를 위해 싸우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계속 천자의 편에 서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마초는 대꾸하지 않고 굳은 얼굴로 되물었다.
“전쟁은 그렇다 치세. 서역과 교역을 하는 건 뭐가 문제인가?”
“서역과 교역을 하려면 비단이 꼭 필요하실 겁니다.”
“그렇지.”
“저와 거래를 트십시오. 원하시는 만큼 비단을 공급해 드리겠습니다. 유탄 공자가 아마 비단 공급을 약속했겠지요. 그보다 더 싼 값에, 더 많은 물량을 드리겠습니다. 단, 그만큼의 비단을 생산하려면 제가 장강 교역권을 계속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마초는 비관을 향해 눈빛을 쏘아 보냈다. 비관은 마초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거래 얘기를 꺼낸 거상은 눈앞의 상대에게 언제 아첨했냐는 듯 마초가 뿜어내는 안광을 정면으로 받았다.
이내 마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빈백.”
“예, 형님.”
“자네가 해 줘야 할 일이 있다.”
마초는 종이에 몇 글자를 써서 내밀었다.
“이건 무엇입니까?”
“사람들의 이름. 내가 익주에서 찾고 있는 사람들이 몇 명 있네. 비가의 영향력을 이용해서 자네가 좀 찾아 주게.”
“형님, 그 말씀은…….”
마초는 비관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우의 뜻이 내 뜻과 같다. 나는 익주목의 후계로 유범 중랑장을 지지할 것이다. 곧 공식적인 자리에서 발표하도록 하지.”
“혀, 형님! 이 관은 오늘 죽는다 한들 형님의 은혜를 다 갚지 못…….”
“단.”
마초는 단서를 달았다. 비관과 나관중의 시선이 마초의 입으로 모였다.
“유탄이 촉금 십만 필을 바치기로 했으니, 그걸 받은 후에 발표한다.”
마초는 푸른 눈을 빛내며 입꼬리를 한껏 올려 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