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마초연의-116화 (116/306)

116화. 익주의 거상 (1)

“<백호통의>에 따르면, 제후는 아홉 명의 여인을 취할 수 있고, 경과 대부는 한 명의 처와 두 명의 첩을, 사(士)는 한 명의 처와 한 명의 첩을 취할 수 있다고 하였다. 나의 직위가 이미 복파장군에 이르렀고, 아버님이 가진 현후의 작위 또한 내가 세습할 예정이며, 천자를 모시고 사직을 바로 세워 천하에 그 이름이 높거늘 이런 나의 안사람 된 몸으로 어찌 첩 한둘을 들이는 데 연연해야겠는가?”

“…라고 대답하신 건 설마 아니죠?”

“아니지.”

“그럼 뭐라고 대답하셨는데요?”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

마초 일행의 조문단은 장안을 떠나 익주로 향했다. 그리고 익주로 향하는 길 위에서 마초는 나관중을 붙들고 울분을 쏟아내고 있었다.

“흠, 주공은 채 소저를 첩으로 맞을 기회가 있었는데 거들떠보시지도 않았잖아요. 태양 부인께 이런 얘기를 해 드리고 싶은데, 채 소저의 입장이 있으니 그러기도 난처하군요.”

“그러니까! 나는 이렇게 죽기 살기로 일만 하고 있는데 마누라가 있지도 않은 첩을 걱정하며 나를 겁박하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마초는 나관중을 붙들고 열변을 토했다. 억울해하는 마초에게 안타까운 시선을 보내던 나관중은 문득 한 가지에 생각이 미쳤다.

“주공, 그런데 왜 태양 부인께 그렇게 잡혀 사십니까? 좀 더 당당하게 나가셔도 되지 않습니까?”

마초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지난 생의 기억이 머리에 남아서 그런 듯하네. 하원은 나 때문에 죽었으니까. 사소한 다툼을 하려고 해도 엄두가 나지 않더군.”

무거운 얘기였다. 나관중도 입을 다물었다.

“주공, 그러고 보면 이번 익주행에서 지난 생에 인연이 있는 이들을 많이 만나시겠군요.”

마초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익주에는 지난 생의 부하들과 동료들, 적들이 있다. 그리고 익주의 한 귀퉁이인 한중군은 지난 생의 원수, 장로가 다스리고 있었다.

“얼마 전 서량 정벌에서는 지난 생의 원수들을 만났었지요. 이번에 또다시 지난 생의 원수를 만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건…….”

마초도 수없이 고민한 문제였다. 그러나 이제는 답을 찾았다.

“이번 생에는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책임을 물을 수는 없지. 지난 생의 원한은 잊을 것이다.”

“역시… 잘 생각하셨습니다.”

“나는 패륜아가 아니라 영웅이다. 이번 생에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이지. 그들도 이번 생에 나와 원수질 일을 하지 않은 이상 나의 원수가 아니다. 이번 생에는 이번 생의 은원에 집중한다. 굳이 과거의 원수를 찾아서 목을 베는 일은 없을 거야.”

마초는 일단 지난 생의 원한을 무시하기로 했다.

“지금 내 가족은 멀쩡히 살아 있다. 나는 과거에 잃었던 사람들보다 지금 내게 남아 있는 사람들, 그리고 지금 내가 해야 하는 일에 집중하겠다.”

마초의 답변을 들은 나관중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떨 때 보면 참으로 가련한 인물이다. 부디 그가 지금과 같은 마음을 계속 가질 수 있기를…….’

마초의 지난 생에는 너무 많은 피가 흘렀다. 그러니 원수도 너무 많다.

이번 생의 피로 지난 생의 피를 씻기 시작하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살육을 벌여야 한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 게 최선일 것이다.

그때, 나관중의 머리에 한 가지 생각이 미쳤다.

‘아니 잠깐. 그럴 거면 양관과 조앙은 왜 죽인 거야?’

나관중은 갑자기 기가 막혀서 마초를 쳐다봤다. 마초는 여전히 우수에 찬 얼굴을 하고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선택한 주군은 부패한 호족 한두 명에게 누명을 씌워 죽인 것 정도로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사내였다.

* * *

익주 최대의 도시, 성도.

성도에 도착한 마초 일행을 맞이한 건 유언의 넷째 아들 유장이었다.

“유장이 복파장군을 뵙습니다. 먼 길을 오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유장은 비대하지만 여물지 못한 체격에 심약해 보이는 청년이었다. 마초는 그를 보며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유계옥… 젊은 시절부터 뚱뚱했었나 보군.’

원래의 역사에서는 유범과 마등이 내통하는 것을 이각이 알아채면서 첫째 유범과 둘째 유탄은 처형당한다. 셋째 유모는 병을 앓아 정신이 온전치 않았다. 그러니 유언의 사후 익주의 기업을 이어받은 것은 넷째 아들 유장이었다.

그러나 한 주를 장악한 군웅의 자리는 비범한 인물에게만 허락되는 법이다. 유장은 난세에 익주목의 자리를 이어받기에는 지나치게 평범한 인물이었다. 결국 그는 익주를 제대로 장악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휘둘리다 결국 유비에게 익주를 뺏기게 된다.

“마초가 유장 공자를 뵙습니다.”

마초도 유장을 보며 정중하게 답례했다. 지난 생에는 자신의 적이었던 사람이다. 그러나 개인적인 원한은 없다. 이번 생에서는 굳이 나쁘게 얽히고 싶지 않았다.

익주목 유언은 생전에 익주의 황제나 다름없이 행세하던 인물이다. 빈소는 고인의 생전의 행적을 증명하듯 장대하게 차려져 있었다. 마초는 준비해 간 제문을 읽고 나서 상주인 유언의 둘째 아들 유탄과 인사를 나눴다.

“유탄 공자께서 심려가 크시겠습니다.”

“때가 되면 부모를 떠나보내는 것이 세상의 이치인 것을… 저보다 수장을 잃은 익주가 걱정입니다. 이 난세에 아버님의 위엄으로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막고 있었는데, 이제 익주의 혼란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막막합니다.”

유탄은 눈물 자국이 가득한 침통한 얼굴로 말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익주 걱정에서는 전혀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익주의 혼란을 왜 네가 수습하냐?‘

마초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지만,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유탄은 은근히 마초의 눈치를 살피며 되물었다.

“그래도 서량의 영웅이신 복파장군께서 직접 조문을 와 주셨으니 참으로 영광입니다. 그래, 익주에는 얼마나 머무르실 생각이신지요?”

“글쎄요. 유범 중랑장이 도착하려면 한 달 정도 시간이 필요하니 그때까지는 머무르려고 합니다. 건녕과 파군에 제 벗들이 있으니 오랜만에 만나 보고 다시 성도로 돌아올 생각입니다.”

“아, 건녕군 독우 이덕앙(덕앙은 이회의 자)이 복파장군의 어릴 적 친구라고 하셨지요? 그런데 파군에도 지인이 있으십니까?”

“그렇습니다. 익주 전체가 상중이니 폐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다녀가겠습니다.”

“천만의 말씀, 복파장군이 가시는 곳마다 대접에 소홀함이 없도록 제가 손을 써 두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천천히 볼일을 보고 가시지요.”

마초 일행은 유탄이 권하는 대로 별채로 이동했다. 조문객들의 식사를 대접하는 별실이 아니라, 으슥한 곳에 지어져 인적이 뜸한 건물이었다.

상중에는 쾌락을 절제하는 것을 미덕으로 한다. 그래서 상을 치르는 상주는 육식과 성관계를 금하는 것이 원칙이고, 조문객들에게도 정갈한 음식을 대접할지언정 요란한 연회를 베풀지는 않는다.

그러나 유탄이 안내한 별채는 비단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실내에 익주의 산해진미가 차려져 있었다. 오직 마초 일행만을 위한 것이었다.

유탄은 마초에게 은근히 웃음을 띠며 말했다.

“지금 같은 난세에는 큰 고을에 주인이 없으면 아니 됩니다.”

익주목의 자리를 비워둘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 뜻은 자명했다. 천자의 측근이자, 인접한 세력 마가군의 후계자인 마초에게 자신을 지지해 달라는 것이다.

마초는 유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불쑥 말했다.

“지당하신 말씀이지요. 하루빨리 덕 있는 자를 익주목으로 세워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유탄 공자, 익주 하면 비단이 유명하지요?”

“그렇습니다. 천하가 안정되어 있을 때는 일 년에 백만 필을 만든 적도 있다지요. 다만 지금은 혼란스러운 난세라 비단을 북쪽으로 내다 팔 길이 없으니, 저는 그것이 참으로 걱정입니다.“

“만약 서량의 주인과 익주의 주인이 서로 한 몸처럼 밀접하게 교류하게 된다면 어떻겠습니까? 익주의 비단을 서량을 통해 서역으로, 또 중원으로 팔 수 있으니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역시 복파장군은 말이 통하는 분이군요. 으하하하!”

마초는 마치 유탄을 지지하는 대신 비단 교역의 이권을 원하는 것처럼 넌지시 말을 흘렸다. 유탄 또한 원하던 바였다. 조금씩 간을 보며 겉돌던 두 사람의 이야기는 점점 구체적으로 변해 갔다.

“그러자면 유범 중랑장이 문제인데.”

“형님은 조금 완고한 면이 있어서 말이지요. 그런데 복파장군은 형님의 생명의 은인 아닙니까?”

유탄은 마초에게 은근히 부탁을 했다. 마초가 협천자를 하며 유범이 죽지 않도록 도와준 생명의 은인이니, 그 사실을 앞세워 유범에게 익주목 계승을 포기하도록 압박해 달라는 것이다.

‘이놈아, 나는 네 생명의 은인이기도 하다. 미오성에 갇혀 있던 걸 빼내 준 게 누구인지 잊었느냐?’

마초는 기가 막혔지만 겉으로는 그저 웃음으로 마무리했다.

“그렇지요. 유범 중랑장이 오면 제가 한번 설득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이것 참, 제가 요즘 고민이 하나 있는데…….”

“천하의 복파장군께서 고민하시는 문제가 무엇입니까?”

“갑자기 거느리는 식구들이 늘다 보니 봉록을 제때 주지를 못 하고 있습니다그려.”

마초는 악당 같은 웃음을 지으며 유탄을 응시했다. 유탄은 대번에 마초의 뜻을 알아채고 손뼉을 치며 웃었다.

“으하하하, 천하의 복파장군께서 재물이 없어서 곤란하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렇다면 마땅히 이 유탄이 융통해 드려야지요!”

“그래 주시겠습니까? 이러면 안 되지만 유탄 공자의 뜻이 정 그렇다면 조금만 신세를 지겠습니다.”

“이 탄이 비록 학문은 보잘것없으나 재물을 모으는 데는 어지간히 재주가 있습니다. 얼마가 필요하십니까?”

“촉금 십만 필. 유탄 공자께 너무 큰 폐를 끼칠 수도 없으니 아쉬운 대로 그 정도로 만족하도록 하지요.”

촉금 십만 필이면 어지간한 대성호족의 전재산을 처분해도 구하기 어렵다. 유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시, 십만…….”

“정확히는 ‘아쉬운 대로 십만’이지요.”

“아니, 복파장군… 그 정도의 재물을 융통하는 건 아무리 저라도…….”

마초는 유탄이 뭐라고 우물거리자 못 들은 척 말을 끊었다.

“나는 유범 중랑장과 같이 싸운 전우이자 같은 천자의 측근이올시다. 그런 내가 유탄 공자를 지지하면 판이 바뀝니다. 만약 관중도독의 이름으로 천자께 유범 중랑장을 익주목으로 추천하는 표가 올라간다면 어떻겠소? 그걸 촉금 십만 필로 막을 수 있다면 너무 싸지 않습니까?”

마초의 말을 듣자 유탄은 다시 한번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그러나 눈꼬리가 파르르 떨리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실로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복파장군께서 저를 지지해 주신다면 촉금 십만 필이 대수겠습니까? 어떻게든 구해 드려야지요.”

“와핫하하, 역시 말이 통하는군! 잘 생각하셨습니다.”

마초는 하늘이 떠나가라 웃으며 유탄의 어깨를 두드렸다. 유탄은 애써 웃음을 지은 채 몇 마디를 더 나누고 별채에서 물러났다.

유탄이 나간 후, 촉금 십만 필을 얻어 싱글벙글한 마초에게 나관중이 말했다.

“주공, 누가 봐도 감쪽같았습니다. 유탄 공자는 진짜로 주공이 촉금 십만 필을 대가로 자신을 지지하려는 것처럼 봤을 겁니다.”

“그까짓 촉금 십만 필, 중원을 통째로 얻으려는 우리에게는 전혀 대단치 않은 것이다. 유탄이라는 놈의 수준에 맞춰 준 것뿐이지.”

“어쨌든 유탄 공자는 주공이 자신에게 매수되었다고 생각하게 되겠군요.”

“그래. 이제부터 유범 중랑장이 올 때까지 파군에 가서 여러 사람을 만나고 다녀야 하니 촉금 십만 필은 그 활동 자금으로 쓰자고.”

마초가 말하는 파군은 익주 동부에 있는 파, 파동, 파서의 3군을 뭉뚱그려서 칭하는 것이었다. 마초와 나관중이 마가군으로 끌어들이려는 사람들은 대부분 파군에 있었다. 유범이 허도에서 성도로 올 때까지는 아직 한 달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으니 그동안 파군에서 필요한 사람들을 만날 계획이었다.

“그런데 유탄에게는 파군의 지인을 만난다고 둘러댔지만 사실 파군에는 아는 사람이 없어. 나야 지난 생에서 아는 사이인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이 나를 모르겠지. 성도에 머무르는 동안 파군에서 온 조문객을 하나 사귀어서 동행하는 게 좋겠군.”

“주공, 그것 말입니다만… 아까 저를 통해서 파군의 호족 한 명이 주공과 회견 요청을 해 왔습니다.”

“그래? 마침 잘 됐군. 이름이 뭐라고 하던가?”

파군 출신의 지인을 억지로라도 만들어야 하던 차에 진짜 파군 호족이 만나자고 한 것이다. 마초는 눈을 빛내며 그의 이름을 물었다.

나관중이 대답했다.

“비관입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