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익주로
예주 영천군 허현.
장안을 탈출한 천자 유협은 이곳을 임시 수도로 정했다. 장안이 있는 관중에는 대기근이 들어 있었고, 낙양은 동탁이 불태워서 폐허가 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천자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북쪽의 하내나 하동, 또는 남쪽의 영천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북쪽에는 현재 중국 최강의 군벌 원소가 있다. 그는 동탁이 세운 천자라는 이유로 당금 천자 유협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 원소의 세력권과 거리가 있으면서도, 원소에 버금갈 만큼 강성한 군벌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허현이었다. 유협은 폐허가 될 낙양이 재건될 때까지 허현에 5년간 머무를 것을 천명했다. 그 후 이곳은 허도, 허현의 황도라고 불리고 있었다.
지금 허도의 최고 실력자는 사공 조조였다. 허도 근처의 연주에서 세력을 키우던 군벌인 그는 천자가 허도로 오자 조정에 입조해 사공 벼슬을 받았다. 빈털터리 천자가 조정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자금이 전부 그의 주머니에서 나왔다. 조조가 본래 가지고 있던 명성, 연주의 탄탄한 기반, 휘하의 숱한 용장과 강병들, 그리고 천자를 모시고 있다는 정통성.
누가 봐도 조조의 행보는 위풍당당했다. 그러나 조조를 섬기는 사공부의 책사들에게는 걱정거리가 하나 있었다.
“익주목 유언이 죽었다고. 봉효, 그것이 정말인가?”
큰 키에 긴 수염을 부르르 떨며 묻는 책사는 제법 위엄이 있었다. 동군 호족 출신으로 지금은 사공부 책사들의 좌장격인 사내, 정욱이었다.
정욱의 앞에 앉은 사내는 사공부 책사 곽가였다. 그는 흰 얼굴의 젊은 청년이었는데, 산발을 한 머리와 풀어 헤친 앞섶, 두통으로 인해 찡그린 표정이 영락없이 밤새 마신 술이 덜 깬 모양새였다.
“그렇소, 정 공. 공식적으로 소식이 전해지려면 아직 열흘은 더 걸릴 것이오.”
“그렇다면 조만간 중랑장 유범이 익주로 돌아가겠군. 일이 아주 골치 아프게 되었구만.”
“역시 정 공은 말이 좀 통하는구려. 만약 유범이 익주의 기업을 물려받기라도 하면 골치가 아파지지요. 그는 야심가였던 아비와는 달리 천자의 측근이오. 자칫 잘못하면 익주의 막대한 물산이 천자의 측근 손에 들어가게 생긴 것이오.”
“더욱 위험한 건 그가 마초와도 친분이 있다는 거지. 그렇지 않은가?”
유범은 마초와 함께 천자를 장안에서 탈출시킨 공신이다. 정욱이 묻자 곽가도 산발을 한 채 쓴웃음을 지었다.
“마초, 그 애송이가 벌써 관중을 재건하고, 서량까지 손에 넣었지요. 게다가 익주는 곡창 지대. 만약 유범과 마초가 연계하여 중원으로 쳐들어온다면 큰 우환이 될 것이오.”
곽가의 말에 정욱도 고개를 끄덕였다. 몇 년 후에는 천자가 낙양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때를 틈타 마가군이 출병해서 천자를 봉대한다면 순식간에 천하의 판도가 바뀌게 된다.
그러니 천자의 측근이자 마초의 측근인 유범이 익주목의 지위를 승계하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잠시 고민하던 정욱이 입을 열었다.
“몇 가지 방법이 떠오르기는 하지만 전부 지나친 수단뿐이군.”
정욱의 고민이 하찮다는 듯, 곽가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정 공, 뭐가 지나치다는 것이오? 할 때는 하는 게 우리 방식이 아니었소?”
“이 문제는 그렇게 쉽게 결정할 수 없네. 자칫 잘못하면 사공께 흙탕물이 튈 수 있는 일일세. 순령군과는 의논해 보았는가?”
순령군, 상서령 순욱의 이름이 나오자 방금 전까지 깔깔거리며 웃던 곽가가 얼굴을 확 찌푸렸다.
“정 공은 순령군을 믿소?”
“그게 무슨 말인가?”
“나는 그가 사공의 사람이 맞는지조차 의문이오. 그가 사공을 위한 계책을 낼지, 유협을 위한 계책을 낼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이런 일을 먼저 의논하겠소? 정 공에게 처음 가져오는 것이오.”
“허허, 이 사람. 말을 조심하게. 그런 소리는 절대 입 밖으로 꺼내지 말게.”
정욱은 곽가를 나무랐지만, 그 또한 곽가가 무슨 뜻으로 그러는지 이해되는 바가 있었다. 순욱은 자신이 마치 조조의 수하가 아니라 그저 재야의 선비인 것처럼 행동할 때가 있었다. 조조가 그런 순욱을 싸고돌기에 드러내놓고 불만을 토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걱정하지 마시오. 나의 뜻이 곧 사공의 뜻이오. 사공께 흙탕물이 튀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오.”
“결코 없다니, 어찌 그리 장담할 수 있는가?”
“그야 나는 어디까지나 ‘예상’만 할 거니까. 자, 봅시다. 마초는 이제 막 서량을 아울렀소. 그런데 사람됨이 용맹함이 지나치고 경솔하여 방비가 없으니…….”
곽가는 정욱을 마주 보며 씩 웃었다.
“필시 필부의 손에 죽을 것이오. 이게 내 ‘예상’이오.”
* * *
“죽어라!”
맹획은 일성을 내지르면서 칼을 들어 마초를 찔러 갔다. 수련을 위해 날을 죽이고 천을 감은 칼이었다. 하지만 쇠로 되었으니 맞으면 크게 다칠 수도 있었다.
마초는 맹획이 내지르는 칼을 너무나도 쉽게 피하고 자신의 칼로 맹획의 머리를 때렸다.
깡!
“으윽!”
쇠를 치는 것 같은 소리가 울리며 맹획이 머리를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에라이, 설마 너 같은 필부한테 죽겠냐? 그리고 기껏 도법을 가르쳐주는데 스승님한테 ‘죽어라’가 뭐냐? 한심한 놈.”
“흐, 흥, 그 정도의 각오가 없으면 이기지 못한다고 했잖아.”
“너는 각오가 있거나 없거나 나를 못 이겨. 그 정도의 실력 차이가 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한 번 이겨보겠다고 헛짓거리하지 말고 초식을 자신의 몸에 배게 만드는 것에나 신경 써라. 대련에서 승패에 집착하면 무공이 늘지 않는다.”
“흥, 알았다.”
마초는 피식 웃으며 칼을 거뒀다.
“좋아, 오늘 연무는 여기까지. 오늘 가르쳐 준 것들은 절대 잊지 말고 수시로 혼자 연습해라.”
“흥, 갑자기 무슨 소리야?”
“이제 이렇게 가르쳐 줄 날도 얼마 남지 않아서 그런다.”
마초가 말하자 맹획이 입을 다물었다. 마초는 주저앉아 있는 맹획에게 손을 내밀었다. 맹획은 잠시 마초를 올려다보고 마초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이제 성인이 된 맹획은 어느새 키가 훌쩍 자라서 마초보다 약간 더 커졌다. 상투를 틀거나 관을 쓰지 않고 찰랑찰랑한 머릿결을 내려뜨리고 있는 건 그대로였다.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겠다는 듯 한인들의 관복에 남만족의 화려한 문양을 수놓아서 입고 있었다.
“너를 처음 만났을 때 약속했었지. 적당한 때가 되면 남만족을 이끌고 새롭게 정착할 만한 곳을 알아봐 주겠다고.”
“흥, 그래서 그때가 올 때까지 네 밑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열심히 배웠지. 무예, 병법, 그리고 사람들을 이끄는 법.”
맹획은 매번 툴툴거리면서도 마초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고 열심히 배웠다. 어린 나이에 남만족의 수장이 된 그에게는 무리를 통솔할 수 있는 우두머리로서의 소양이 필요했던 것이다. 장평관 전투, 미오성 전투, 하내 전투, 무위 전투 등 굵직한 사건들을 거친 맹획은 이제 어지간한 무장들만큼의 경험을 쌓은 상태였다.
마초는 그런 맹획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생각보다 일찍 그때가 왔다. 익주로 갈 준비를 해라.”
“흥, 익주로 간다고?”
“익주목 유언의 조문 사절로 내가 결정됐다. 너와 남만병들도 나를 따라 익주로 간다. 익주에 가면 너희가 정착해서 살 만한 곳이 있다. 남만병을 이끌고 그곳을 얻는 전투에 참여해라. 너의 활약으로 새 터전을 얻는다면 남만병들도 너를 진심으로 우두머리로 인정할 거다.”
마초는 맹획의 어깨를 두드렸다. 2년이 넘게 동고동락한 그와 이제 곧 헤어질 시간이 다가올 것이다.
“그리고 맹획 말고 익주로 갈 사람은…….”
이번 익주행은 단순한 조문이 아니다. 아직 출사하기 전의 익주 문관들을 데려와야 하고, 마초가 원하는 대장장이와 군사와 선봉장을 얻어야 했다. 맹획과 남만병들이 살아갈 만한 터전도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따로 원하는 목적도 있었다. 그러니 어지간히 신뢰할 만한 사람들을 데려가야 했다.
하지만 거기장군부의 장수들을 동원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서황은 문관으로 차출되었다. 서황의 부재로 인해 발생한 연병의 공백은 방덕이 메워야 했다. 머리 쓰는 문관들도 잔뜩 데려가고 싶었지만, 법정과 순유는 산처럼 쌓여 있는 행정 업무를 처리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결국 또 나관중인가. 그리고 이감, 올돌골, 마대…….”
이감을 제외하면 어딘가 신뢰가 가지 않는 인물들뿐이다. 마초는 한숨을 푹 쉬었다.
“할 수 없지. 이 정도로 어떻게든 해보는 수밖에.”
그때 마초의 옆으로 한 명이 다가왔다. 빙글빙글 웃고 있는 실눈의 청년이었다.
“으하하, 복파장군. 익주로 조문을 가신다고요?”
“…그렇네만.”
“먼 곳에서 무슨 일이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지요. 만약을 대비해서 이 장료가 따라가겠습니다.”
“네가 왜 따라와?”
“복파장군은 이제 천하가 주목하는 영웅입니다. 혼자 있는 틈을 타서 암살자가 붙는다거나 그럴 수도 있지 않습니까? 저 같은 뛰어난 검객이 호위해야…….”
“암살 위험 때문이라면 너랑 같이 있는 게 제일 위험하지 않냐?”
“무슨 그런 서운한 말씀을! 그때는 이유가 봉록을 줄 때였고, 지금은 복파장군께 봉록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장료는 자신이 꼭 따라가야 한다고 강변했다. 잠시 고민하던 마초는 결정을 내렸다.
“알았다.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탁월한 결단이십니다. 으핫하하하!”
장료는 마초를 바라보며 껄껄 웃었다. 마초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데려오려는 선봉장은 지금 수적질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 녀석이 만약 싸움이라도 건다면 골치가 아파진단 말이야. 이감이나 올돌골도 그 녀석에게 대적하기는 어려울 테니…나 하나밖에 없는 것보다는 저 녀석이 같이 있는 게 낫겠지.’
마초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장료도 속으로 생각했다.
‘나도 연병이라면 자신이 있지만, 방 장군이 내 연병 솜씨를 알면 보나 마나 엄청나게 부려 먹을 거야. 이런 재주는 나중에 때가 오면 보여줘야지. 받은 만큼 일하는 게 기본 아닌가.’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생각을 하면서 익주행을 결의했다.
* * *
마초가 익주로 떠나기 전날, 아내 양하원이 마초를 붙잡았다. 전에 없이 차분하고 교양 있는 말투였다. 호칭도 달라져 있었다.
“상공.”
“하원. 왜?”
“우리가 부부의 연을 맺은 지 2년이 넘었는데 ‘하원’이 뭡니까? 남들이 들을까 부끄럽습니다.”
“…알았소, 부인. 무슨 하실 말씀이 있으시오?”
“있지요.”
양하원은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낮에 의원이 다녀갔습니다. 회임이라더군요.”
지난 생에서 아내와 아이들은 마초의 눈앞에서 비참하게 죽어갔다. 마초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눈앞의 아내를 꽉 안을 뿐이었다.
“고맙소. 내 익주에서 돌아오면 해산할 때까지 집에 머무르겠소.”
“고마우면 안아 줘요.”
“응?”
현대의 임산부들은 임신 초기에 부부관계를 피한다. 그러나 의학 상식이 부족한 고대인이자 남들보다 강건한 체질을 가진 양하원에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서량 원정에서 돌아오자마자 다시 익주로 떠나는 남편과 뜨거운 사랑을 나눈 후, 양하원은 마초의 곁에 누워서 말했다.
“기분이 어때요?”
“글쎄, 다시 아버지가 된다니.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소.”
“그놈의 다시, 다시, 다시 타령 좀 안 하면 안 돼요? 내가 재취하는 홀아비하고 혼인했나요?”
“진짜로 다시 태어나 버린 걸 어쩌란 말이오?”
사소한 일로 티격태격하던 두 사람은 이내 다시 서로의 몸을 끌어안고 사랑을 나누기 시작했다. 두 번째 사랑을 나누고 나서, 자리에 누운 마초에게 양하원이 다시 말을 걸었다.
“익주에는 그렇게 미인들이 많다지요? 지난 생에서 보니까 어땠어요? 정말 그렇던가요?”
“익주는 흐린 날이 많으니 익주 처녀들은 햇빛을 많이 안 봐서 얼굴이 하얗다는 속설이 있지.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얘기요.”
마초는 양하원의 물음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익주 여인들의 험담을 했다. 두 번에 걸친 결혼생활 동안 터득한 비법이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양하원은 불쑥 말을 끊었다.
“그렇다면 부인이 회임한 틈을 타서 바깥에서 첩질을 하는 일은 없겠군요.”
“부인, 말씀을 가려 하시오. 내 머릿속에는 가족의 안위와 대업뿐이오. 잘 알지 않소?”
“좋아요. 그 각오를 잘 지키시기 바라요. 만약 익주 미인과 놀아났다는 사실이 내 귀에 들어오는 날에는…….”
양하원은 곧 먼 길을 떠날 남편을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하얀 이가 가지런하게 드러났다.
“상공은 머리 깨진 시신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