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전후처리
건장한 체격의 염행이었지만, 포로가 되어 있는 모습은 초췌했다. 어깨에는 마초가 남긴 상처의 여파로 아직까지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항상 강단 있는 표정을 짓고 있던 얼굴에는 뭔가에 쫓기는 듯한 불안과 두려움이 떠올라 있었다.
마초는 한참 동안 말없이 염행을 응시했다.
‘벌써 삼십 년 전인가. 이 녀석과 싸우다 죽을 고비를 넘겼던 순간이.’
하늘이 선택한 무재를 가지고 장군의 아들로 태어난 마초다. 누구하고 싸워도 이길 것 같던 혈기 넘치는 시절이 있었다. 그런 오만한 젊은 시절에 인생 최초의 패배를 안겨준 사내가 염행이었다. 지난 생 기준으로 딱 올해, 건안 원년(196년)의 일이었다. 그 후로 29년을 더 살다가 회귀해서 다시 3년을 더 살았으니, 벌써 32년이나 지난 일이 된다.
마초는 그런 염행을 바라보며 물었다.
“천하의 염행이 딱하게 됐군. 내 목을 노리던 기백은 다 어디 갔는가?”
“복파장군…….”
염행은 고개를 들어 마초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내 팔이 묶여서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을 힘겹게 움직여 바닥에 고두하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소장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대는 장제의 편을 들어 나를 죽이려 했지. 그런데 목숨을 살려 주길 바라는가?”
“살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소장의 죄는 소장의 목으로만 갚게 해 주십시오!”
싸움터에서 맞서 싸우다 패한 게 어떻게 죄라는 말인가? 그러나 염행은 마치 자신이 대역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자못 비장한 어조로 탄원하고 있었다.
“소장은 노모를 모시고 있습니다. 부디 소장이 죽더라도 어머니만은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염행은 그러면서 자신의 죄를 가족에게 연좌하지 말 것과 재산을 몰수하지 않을 것을 청했다.
“염행, 그대는 지금 나와 협상을 하려 하는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저 복파장군께서 자비를 베풀어 가족을 지킬 수 있도록 해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가족을 지킨다. 그 말을 듣자 마초는 입맛이 써지는 것을 느꼈다.
“이 사람아.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면 이런 큰 싸움에 끼어들지 말았어야 할 게 아닌가? 그랬으면 이렇게 오라에 묶일 일도 없었을 것이 아닌가? 그렇게 가족이 소중하다는 사람이 대체 왜 그런 무모한 짓을 했느냐 이 말이다.”
말을 거듭할수록 마초의 목소리가 커졌다. 마치 염행을 추궁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구에게 말하는 듯했다.
옆에서 마초의 심문을 듣고 있던 나관중은 한숨을 쉬었다.
왜 가족이 소중한 줄 모르고 위험한 짓을 벌였는가?
마치 젊은 날의 마초 자신에게 하는 말인 것 같았다.
“그것은…….”
“야심, 그놈의 야심 때문이었겠지.”
마초는 내뱉듯이 말했다.
사실 다 알고 있는 얘기였다. 그 또한 야심도 이루고 싶고 가족도 지키고 싶은, 그저 평범한 사내였을 것이다. 마초의 말을 들은 염행은 고개를 푹 떨궜다.
“휴우.”
마초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가족을 지키지 못한 후회 속에서 살아 온 십 년, 회귀해서 가족을 지키기 위해 싸워 온 지난 삼 년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가 다시 입을 연 것은 다시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염행. 노모를 모시고 있다고 했는가?”
“그렇습니다.”
“행운아로군. 내 어머니께서는 내가 어릴 때 돌아가셨다. 그러니 나는 노모를 모실 기회도 얻지 못했지.”
마초의 친어머니는 마초가 다섯 살 때 죽었으니 기억조차 흐릿했다. 마초는 씁쓸한 표정으로 염행을 보며 말했다.
“어머니를 모시고 서북 3군으로 떠나라. 시간을 줄 테니 가산을 전부 정리해서 가라. 그리고 다시는 무위성 동쪽으로 돌아오지 마라.”
“저, 정말입니까? 살려 주시는 겁니까?”
“그래. 내 마음이 변하기 전에 빨리 떠나라.”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복파장군!”
염행은 머리를 바닥에 쿵쿵 찧으며 마초에게 감사했다. 마초는 여전히 씁쓸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옆에 시립해 있던 나관중이 다가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주공, 참으로 옳은 결정을 하셨습니다. 장제군을 격멸하면서 힘과 위세는 충분히 보였습니다. 이제 도량을 보이신다면 마음으로 감화되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입니다.”
“뭐 그런 건 아무려면 어때. 그런 것보다 그저 마음이 내키지 않는군.”
원래의 역사에서 염행은 한수 휘하에 있다가 마초가 거병할 때 함께 거병했다. 그리고 승패가 기울자 조조는 염행에게 사자를 보내 노모를 생각하라며 투항을 권한다. 무장으로서 나름대로 야심도 있었고, 어린 시절의 마초에게 치명상을 입힐 만큼 재주도 있었던 염행은 결국 가족의 안위를 위해 투항하는 길을 택했다.
태수의 치소를 나가던 염행은 문득 다시 뒤돌아 마초를 바라봤다. 처음 무기력하던 눈빛은 제법 생기가 돌아와 있었다.
“복파장군. 이놈이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덕분에 노모를 계속 모실 수 있게 되었으니… 언젠가 반드시 이 은혜를 갚겠습니다.”
마초는 그저 쓴웃음을 지었다.
“흰소리 그만두고 썩 나가게. 자네한테 도움을 받을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세상일 나중에 어찌 될지 모르는 것이지요. 이 염행, 은혜를 입고 편하게 죽을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니 두고 보십시오. 언젠가 복파장군께 은혜를 갚겠습니다.”
“시끄러워. 이 무위성 동쪽으로 넘어오지나 마.”
마초는 손짓을 해서 염행을 물리쳤다.
염행은 특별히 뛰어난 재주를 가진 인물은 아니다. 그저 한 가지, 일신의 무예가 쓸만했는데 자신의 칼에 어깨를 크게 다쳤으니 이제 그 또한 별 볼 일 없는 수준일 것이다.
염행은 길게 머리를 숙여 읍을 하고 물러났다.
“흥, 마지막까지 뒷맛이 쓴 녀석이군.”
마초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미숙했던 젊은 날의 자신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안겼던 상대. 다시 만나면 혼쭐을 내주리라 다짐했었다. 심지어 다시 만난 염행은 4대 1로 비열하게 습격하다 실패하기까지 했으니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베어 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가족을 챙기는 그의 평범한 모습이 마초를 뭔가 찜찜하게 했다.
이런 식으로 가족을 팔아 자비를 구하는 상대를 한두 번 본 것도 아니다. 그때마다 매번 단호하게 대처해 왔다.
‘그러나 염행만은 베고 싶지 않았다.’
지난 생에서, 그리고 이번 생에서 두 번이나 연달아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회귀하지 않고 계속 살아 있었으면 나도 이제 오십이군. 나이를 먹으니 쓸데없는 감정이 풍부해졌나?’
마초는 잠시 감상에 젖었지만 이내 그런 생각을 떨쳤다. 염행과의 일은 끝났다.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이 중요하다.
그다음으로 또 다른 거물 포로들이 끌려왔다. 중상을 입고 결국 죽어버린 호주천을 제외하고, 장제와 한수 그리고 성공영이 끌려왔다.
먼저 장제가 입을 열었다. 얼마나 격렬하게 저항했는지 이곳저곳 피투성이가 된 노장은 아직 눈빛이 살아 있었다.
“마초. 천하를 다 가진 것 같으냐? 하지만 기억해둬라. 네놈도 언제고 나와 같은 운명이…….”
퍽!
장제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마초가 장제의 가슴팍을 발로 내지른 것이다.
“더러운 동탁군 잔당 놈이 말이 많구나.”
“커억…….”
“저승에 가면 이각, 곽사, 서영이 사이좋게 반겨 주겠군. 동탁군 출신들과 술잔이나 들고 있거라. 곧 여포도 그쪽으로 보내 주마.”
마초는 그렇게 장제를 비웃고 영을 내렸다.
“역적 장제를 참수하라.”
장제는 형장으로 끌려 나가는 순간까지 뭐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마초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는 한수와 성공영의 얼굴은 평온했다. 이미 죽음을 각오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마초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나왔다.
“뭣들 하는가? 한 숙부와 성공 장군의 밧줄을 풀어 주고 상석으로 모셔라.”
마초는 당황하는 한수를 굳이 상석에 앉히고 성공영을 그 옆에 앉혔다. 그리고 한수를 향해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숙부께서는 어찌 조카를 이리 곤란하게 하십니까?”
“맹기, 이게 무슨 짓이냐?”
“이제 막 연금에서 풀어 드리려 했는데 군사까지 일으켜 다투셨으니 마가군의 입장이 곤란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어쨌든 일이 이렇게 됐으니 이번 싸움을 치렀던 서평, 금성, 무위 땅에 계시면 곤란합니다. 서쪽 주천군에 적당한 장원을 구해 드릴 테니 그곳에서 편안하게 사십시오. 나중에 좋은 날이 오면 다시 예전처럼 술잔을 나눌 수 있겠지요.”
성질대로라면 한수와 다시 단기접전을 벌여 손목을 잘라 버려야 했다.
그러나 법정이 그런 마초를 끈질기게 설득했다.
‘서량 호족들을 다스리려면 그들을 분열시키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그들이 하나의 구심점이나 공통된 이해관계를 갖지 못하면 결국 눈치를 보다 아군에 충성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주공께서는 장제군을 엄중히 처벌하시고, 한수군에는 아량을 베푸십시오. 이를 통해 그들이 서로를 미워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식민 통치의 기본 원칙.
그것은 피지배층을 분열시키는 것이다. 법정의 헌책을 들은 마초는 한동안 고민했으나 결국 법정의 말을 따르기로 결심했다.
‘통쾌하게 분풀이를 하는 것은 작은 일이고 서량을 안정시켜서 후방의 위협을 제거하는 것은 큰일이다. 여기서는 효직의 말을 따르는 게 좋겠군.’
한수는 마초가 베푸는 뜻밖의 관용에 얼떨떨했다. 마초는 뒤이어 한수군의 장졸들도 마가군에 편입시키거나, 서쪽의 비단길 일대에 사민하는 등 관대하게 처분했다. 지휘부가 전원 참수되고 병사들은 강제 해산된 장제군과 완전히 다른 처우였다.
법정은 그 모습을 보며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장제군의 잔당 일부는 도적이 되어 치안을 어지럽힐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구 한수군 출신들이 토벌하게 되겠지. 그들끼리 서로 싸우다 보면 더 이상 뭉치지 못할 만큼 깊은 골이 파일 것이다. 서량의 민생만 잘 관리한다면 앞으로 대규모의 반란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법정은 계략을 쓸 때 피도 눈물도 없었다. 나관중은 법정이 조조군 책사들과 다른 게 뭐냐며 가끔 몸서리를 쳤지만, 마초는 그런 법정이 썩 마음에 들었다.
마초가 그렇게 한수군에 대한 처리를 마무리하려고 할 때, 누군가 마초에게 물었다.
“하나 여쭙겠습니다. 복파장군께서는 이미 관중을 얻으셨거늘, 어찌하여 그렇게 집요하게 서량을 평정하려고 하셨습니까?”
한수의 상장, 성공영이었다. 마초는 성공영을 보며 씩 웃었다.
“그 이유는 그대가 더 잘 알 텐데. 그대가 세력의 수장이 된 후,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지 않았나? 우리 마가군에는 그 모습이 극히 위험해 보인다네. 그래서 미리 후방의 위험을 없애러…….”
거기까지 말하던 마초는 문득 뭔가를 깨달았다.
‘지난 생에서 비슷한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조정에 입조한 마등을 대신하여 마초가 마가군의 수장이 된 후, 마가군은 빠르게 세력을 확장했다. 허도의 조조에게는 그 모습이 극히 위험해 보였다. 그래서 조조는 서량을 정벌해서 후방의 위험 요소를 없애기로 결심한다.
‘조조가 나에게 했던 말을… 내가 성공영에게 그대로 하고 있군.’
마초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복잡한 기분이 드는 것을 느꼈다. 잊고 있었던 15년 전의 기억이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 * *
“마맹기. 실로 훌륭하다. 천하를 주유한 지 30년, 이제까지 수많은 강적과 싸웠지만 설마 아들뻘 되는 후진에게 죽기 직전까지 몰릴 줄은 몰랐군.”
마초가 꿈에도 잊을 수 없는 그 사내, 머리가 희끗한 조조가 15년 전의 모습 그대로 마초의 앞에 나타났다. 마초는 뭐라고 대답하려 했으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조조는 껄껄 웃으며 자신의 할 말을 했다.
“내 큰아들 자수(조조의 장남 조앙의 자)가 살아 있었으면 그대와 좋은 맞수가 되었을 텐데, 그것 하나가 못내 아쉽군.”
“…….”
“내가 나이를 먹어 보니 세상일은 실력보다 운이 더 중요한 경우가 많다는 걸 깨달았다네. 그대에게는 그저 운이 따르지 않았을 뿐이야. 그대가 이십 년만, 아니 십 년만 먼저 태어났어도 천하를 놓고 나와 겨뤘을 것이다.”
“…….”
“그래, 이제 실컷 싸웠느냐? 천하에 이름도 떨칠 만큼 떨쳤느냐? 그랬으면 이제 됐다. 귀부해서 열후의 지위에 올라라. 그대가 원하는 싸움터는 내가 만들어 주마.”
“…….”
“복파장군 마원의 후손이지? 복파장군이 공을 세웠던 남쪽으로 가서 선조의 명성을 이어라. 형주에, 강동에 그대와 칼을 맞댈 만한 상대가 잔뜩 있다.”
“…….”
“천하는 넓다. 이 서량에 집착하지 말고 나와 함께 천하를 주유하는 것이다.”
조조의 목소리는 묵직한 저음도 아니고 큰 목소리도 아니었다. 그러나 마치 여러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소리가 겹쳐서 울리는 특이한 목소리였다.
마초는 눈앞의 조조를 바라봤다. 키가 작고 체격은 왜소하다. 얼굴은 미남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심지어 젊지도 않아서, 쉰일곱 살이 된 지금은 머리와 수염이 희끗희끗하다. 눈 밑이 시커먼 것은 단순히 승상의 일이 바빠서만은 아닐 것이다. 첩보에 의하면 조조는 수시로 심한 두통을 앓는다고 했다.
그러나 이 초라한 사내의 말에는 알 수 없는 힘이 있었다.
마초는 생각했다. 자신이 뭐라고 대답했었는지.
“나는…….”
* * *
지난 일을 떠올린 마초는 쓴웃음을 짓고 성공영에게 물었다.
“성공 장군. 그대가 계속 싸워 온 이유는 무엇인가?”
“몰라서 물으십니까. 중앙 조정에 이용만 당하던 서량의 역사를 청산하고…….”
“새 나라를 세우겠다고? 하지만 내가 한의 복파장군으로 있는 이상 그대는 절대 이기지 못하네. 암살이 유일한 방법이었는데 그것도 실패했지. 장료보다 더 뛰어난 살수는 구할 수 없다. 그대도 잘 알겠지.”
“되고 안 되고를 따질 거였으면 애초에 싸움을 시작하지도 않았겠지요. 결과는 하늘이 정하는 것, 저는 그저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복파장군께서 그만두라 하셔도…….”
“그만두라는 게 아니다. 싸움의 방식을 바꾸라는 거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서량에 그대가 바라는 나라를 세워라. 조정이 관직을 사고팔지 않는, 관리가 백성을 핍박하지 않는, 그런 나라를 세우는 것이다. 그래서 서량의 백성들이 한이 아닌 그대의 나라에 살도록 만들어라.”
“…진심입니까?”
“그래. 나는 이곳 무위까지를 마가군의 경계선으로 삼고 이보다 더 서쪽에 있는 장액, 주천, 돈황의 3군에는 침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성공영, 그대가 정녕 그렇게 한의 신하가 되기 싫다면…….”
마초는 성공영을 보며 힘주어 말했다.
“서량에 한이 아닌 다른 나라를 직접 세워라. 장액, 주천, 돈황에서 시작하라. 아니, 먼 서역까지 뻗어가도 좋다. 나는 이 무위를 넘어 더 서쪽으로 진군하지 않겠다.”
성공영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한참 뭔가를 생각하던 그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복파장군을 두 번이나 암살하려고 했습니다. 그런 나를 어째서 이렇게까지 배려하는 겁니까?”
“귀찮으니까.”
“예?”
“서량은 인구는 적지만 면적은 중원의 두세 개 주를 합친 것보다 더 크다. 이 큰 땅을 관중도독부가 다 관리하다가는 중원으로 치고 나갈 수 없다.”
“그래서 장액, 주천, 돈황의 3군은 나에게 맡기겠다는 것입니까?”
“그래. 한을 바로잡느냐, 멸망시키느냐는 방법의 차이일 뿐. 그대도 나처럼 서량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겠다는 목적은 같지 않은가? 내가 다 할 수 없는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게 맞지. 나는 그대에게 서북의 안정을 맡기겠다. 서량의 다른 곳은 내가 나의 방식으로 안정시키마.”
지난 생에서 성공영은 마초를 따라 거병했다. 그는 패하고 또 패하면서, 맹주인 마초가 서량을 떠난 다음까지도 저항을 이어 갔다. 그가 조조군에 귀부한 것은 조조가 위공에 오르면서 찬탈의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다음이었다.
즉, 한의 멸망이 확실해진 다음인 것이다.
“만약 복파장군께서 다스리는 서량이 예전과 똑같으면 어찌합니까?”
“관중도독부에는 뜻이 높고 능력이 출중한 인물들이 많다. 서량은 분명히 예전과 달라질 것이다. 만약 예전과 똑같다는 생각이 들면…….”
마초는 잠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때는 나를 쳐도 좋다’라고 하려고 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것까지는 너무 과도하게 멋진 척을 하는 것 같았다.
“뭐 그래도 그대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잖아? 나와 싸운다고 이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라고. 백성들이 못 살겠으면 그대가 있는 서북 3군으로 도망가겠지.”
성공영은 자신의 신념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자다. 그러니 다루기 까다로운 인물이다. 신념이 다른 마초에게 충성하지는 않을 인물인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말하자면, 이런 자들은 자신의 신념을 지킬 수 있게 해주면 뒤통수를 치지 않는다.
“정말 대담하시군요. 고작 그런 이유로 저를 놓아주시겠다니.”
“대담한 게 아니라 현명한 거지. 어차피 서북 3군은 너무 멀어서 행정력이 제대로 닿지도 않아. 그대가 가서 똑바로 하라고.”
마초는 성공영의 어깨를 툭 쳤다. 성공영은 긴 한숨을 쉬고 마초를 향해 군례를 올렸다.
“알겠습니다. 복파장군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다르지만, 마음으로 응원하겠습니다.”
“마음으로만 감사하지 말고 은혜를 갚고 싶으면 제대로 갚아야지. 대신 나도 조건이 두 가지 있다.”
“무엇입니까?”
“첫째, 한 숙부를 잘 모실 것.”
“그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둘째는 무엇입니까?”
“둘째는 비단 교역이다. 10년이 넘게 서역과의 비단 교역이 끊어졌지? 나는 이제부터 비단을 매년 십만 필씩 서역에 팔 작정이다.”
“십만 필이라. 어마어마한 물량이군요. 그걸로 뭘 하시려는 겁니까?”
마초는 나관중을 돌아봤다. 동서 문화 교류가 익숙한 원나라 때 사람인 나관중이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했다.
“서역의 보물을 얻을 것입니다. 후추, 포도… 그리고 목화의 종자와 면직 기술자가 필요합니다.”
목화와 면직물은 사실 고대부터 중국에 존재했다. 한반도에서도 6세기 백제 고분에서 면직물이 발견된 바 있다.
그러나 동서 문화 교류가 보편화된 14세기의 것과 품질이 같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관중은 중앙아시아의 목화 품종과 면직 기술자를 얻어서 중세 수준의 면직물 기술을 구현해 볼 계획이었다.
‘이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십 년이든, 이십 년이든 끈질기게 추진하면 틀림없이 세상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것이 나관중의 생각이었다. 그 생각을 이해한 성공영과 한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서량을 구 동탁군 계열과 한수군 계열로 분열시키려는 목적이 절반, 관리가 어려운 서북 3군에 대한 대리 통치 목적이 절반. 그렇게 한수와 성공영에 대한 관대한 처분이 끝났다.
그리고 마지막 한 명.
“역적 이유를 끌고 와라.”
잠시 후, 멋들어진 흰 수염을 기른 노년의 선비가 끌려와 마초 앞에 무릎을 꿇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