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무위 전투 (3)
굳게 닫혀 있는 무위성의 성문이 마침내 열렸다.
“상대는 멀리 가지 못했다. 전속력으로 진군하라!”
선봉에 선 것은 진서장군 한수였다. 한수는 4천 기병을 휘몰아 퇴각하는 마초의 뒤를 쫓았다. 가벼운 무장을 한 경기병이었다.
4천 경기병으로 마초를 이길 수는 없다. 그러나 한수의 임무는 마초를 이기는 게 아니다. 마가군의 퇴각을 멈추게 하고 마초를 붙들고만 있으면 성공이다.
‘서평에서 청야전술을 펼쳤으니 맹기 조카도 나에게 원한이 있을 것이다. 내가 직접 나간다면 지나치지 못하고 나에게 덤벼들 것이다.’
그것이 한수의 계산이었다.
마초는 퇴각하는 마가군의 최후미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한수가 다가오는 것을 보자 마초는 피식 웃은 뒤 크게 외쳤다.
“한 숙부, 조카에게 먼저 싸움을 걸었다 패했으면 곱게 은퇴하시는 게 도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조카와 세 번이나 칼을 맞대는 건 너무 후안무치하지 않습니까?”
“맹기 조카, 이는 대의를 위한 것이다.”
문답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한수가 수신호를 보내자 4천 기병들이 일제히 좌우로 분열했다.
“활을 쏴라.”
휘이이잉.
좌우에서 대각선으로 마초를 향해 화살이 날아들었다. 한수가 이끄는 군사들은 한수군 최고의 정예병들이었다. 정확하게 위치를 잡고 십자포화를 퍼부었다.
“한수군은 월길, 표, 천만이 상대한다. 대열을 흐트러뜨리지 말고 응사하라!”
4천 한수군에 맞서는 마가군은 1천 5백. 강족, 흉노, 저족의 부대였다. 방덕과 서황이 이끄는 주력군은 여전히 뒤로 빠져 있었다.
월길, 표, 천만이 이끄는 유목민 기병들이 나섰다. 대열의 맨 앞에는 큼직한 방패를 앞세운 채였다. 그리고 저마다 화살비를 퍼붓기 시작했다.
양쪽 군사들이 화살로 교전했지만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으니 서로 치명적인 타격은 입지 않았다. 한수의 목적은 그저 마초를 붙잡아 두는 것이다. 마초 또한 아직 승부를 걸 생각은 없었다.
“과연 한 숙부가 노련하군. 하지만 숙부가 생각하지 못한 게 있지.”
마초의 표정에는 여유가 있었다.
기병 한 명이 휴대할 수 있는 화살은 많아야 50발 정도다. 보급을 장제군에 의지하고 있는 한수군의 화살 수는 그보다 훨씬 적어서 30발이 되지 않았다. 화살 또한 숙련된 장인이 목재와 철을 소모해서 만드는 귀한 물건이다. 무한정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마초는 그 화살의 물량 차이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한수군의 화살이 바닥을 보일 때쯤, 뒤에서 저족의 천만이 이끄는 낙타들이 마초에게 다가왔다.
“좋아. 화살을 보급하고 일제 사격한다!”
낙타는 말보다 세 배의 짐을 실을 수 있다. 저족의 낙타 300마리가 저마다 잔등에 가득 실은 화살을 풀어놓았다. 마가군 궁기병들의 전통이 새 화살로 가득 찼다.
이번에는 마가군 궁기병들이 좌우로 크게 분열하기 시작했다. 한수군보다 더욱 빠르고 일사불란한 동작이었다. 그렇게 교전 거리를 좁힌 마가군 궁기병들은 화살을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이런 제길!”
한수의 부장 장횡이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 같은 궁기병이라도 짐낙타를 통해 화살을 나르는 마가군은 화살 개수가 많으니 화력이 훨씬 강했다. 한수군의 화살이 떨어지며 화력 차이가 벌어지는 순간, 마초는 즉시 교전 거리를 좁혀서 화력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도록 했다.
퍼퍼퍼퍽!
“으아아악!”
한수군도 나름대로 서량에서 잔뼈가 굵은 역전의 용사들이다. 그러나 화살이 떨어지는 데는 도리가 없다. 물러나자니 훈련도가 높은 마가군 궁기병들이 거리를 허락하지 않았다. 돌격해서 단병접전을 벌이자니 그 전에 빗발치는 화살에 맞은 병사들이 쓰러져 갔다.
“10장 전진하라!”
“10장 전진!”
수십 번씩 활을 당기다 보니 겨냥이 조금씩 부정확해졌다. 마초는 그때마다 조금씩 부대를 전진시켜서 명중률 저하를 보완하고 있었다.
“이럴 수가 있는가.”
순식간에 전세가 기울자 한수는 장탄식을 했다.
보급 낙타가 만들어 주는 우세한 화력, 유목민 기병들의 숙련된 기동, 그리고 마초의 정확한 지휘가 합쳐지니 1천 5백이 4천을 압도하고 있었다. 심지어 마가군의 주력은 나서지도 않은 채였다.
한수군의 대열이 엉망으로 흐트러졌다. 그러나 마초는 돌격해서 결정타를 넣지도, 퇴각하던 길을 마저 가지도 않았다. 그저 군사들을 정돈하고 가만히 자리 잡은 채 무위성을 응시할 뿐이었다. 마치 뭔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나와라, 이유. 상대해 주마.”
격전을 치른 월길, 표, 천만의 이민족 기병들이 뒤로 빠졌다. 그리고 대열의 뒤에 있던 방덕과 서황이 전진해서 마초의 곁으로 다가왔다. 전부 3천 기병이었다.
한수가 격파당하며 시간을 끌고 있는 사이, 무위성에서는 보병과 기병이 합쳐진 3만 대군이 쏟아져 나왔다. 장제군과 한수군, 남흉노의 호주천 일파가 전부 연합한 세력이었다.
둥. 둥. 둥. 둥.
북소리를 신호로 3만 대군이 각각 자리를 잡았다. 두텁게 쌓은 방원진이었다. 마초는 그 모습을 보며 씩 웃었다.
“학익진이 아니라 방원진이라. 숫자는 열 배나 되는 놈들이 겁은 많군.”
기묘한 광경이었다.
퇴각하는 마가군과 추격하는 장제군. 그러나 오히려 추격하는 장제군이 수세를 취하고 있었다. 방어에 특화된 방원진을 짜고 마가군의 공격을 대비하고 있었다. 심지어 숫자도 장제군이 열 배나 많았다.
마초의 옆으로 법정이 다가와 말했다.
“적은 우리가 반드시 돌격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틀림없이 복파장군께서 단숨에 적 지휘부를 노릴 것이라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아군은 기병 중심이며, 수적 열세에 처해 있고, 단위부대의 전투력은 뛰어나다.
이런 경우는 보통 단숨에 적진을 돌파해서 적의 지휘부를 노리는 전술을 쓴다. 마초는 더욱 그런 전술을 즐겨 사용해 왔다.
“그래, 그러니 저 많은 병력으로 우리를 포위하는 대신 방어태세를 굳히고 있는 거겠지. 내가 돌격할 때까지 기다리려고.”
“맞습니다. 적은 함정을 파 놓고 복파장군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마초는 두 손으로 사자 투구를 들어 올려 머리에 썼다. 투구에 매달린 흰 술이 길게 바람에 나부꼈다.
“돌격한다. 전부 짓밟고 진군할 것이다.”
“존명!”
법정은 마초를 향해 군례를 올리고 총공격의 신호를 보냈다.
마가군의 양 날개가 사전에 약속된 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먼저 우익의 서황이 나섰다.
“길을 열어라!”
서황의 호령과 함께 1천 기병들이 그대로 장제군 진영을 향해 달렸다. 그리고 장제군의 화살 사정거리에 들어가기 직전, 서황의 신호에 따라 크게 산개했다.
두두두두.
서황은 그대로 적진으로 돌격했다. 200기의 금철기만이 그의 뒤를 따랐다. 중갑을 입은 기병들은 화살을 두려워하지 않고 돌진해서 적진에 충돌했다.
퍽!
200기의 금철기는 장제군의 진영을 부수며 돌파해 들어갔다. 화살을 피하기 위해 산개했던 나머지 800 경기병들이 뒤이어 균열이 난 장제군 진영에 부딪혀 갔다.
퍽! 퍽! 퍽!
“응전하라! 물러나지 마라!”
장제군의 국연이 열심히 독전해 봤지만 허사였다. 서황이 이끄는 기병들은 장제군의 방원진에 큼직한 구멍을 냈다.
“같은 기병이고, 같은 서량병이 아닌가. 저들은 어찌 이리도 강하다는 말인가?”
장비의 차이, 훈련도의 차이, 무엇보다 지휘관의 차이가 컸다. 국연은 이를 악물고 마가군 진영을 바라봤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발생했다.
쇄애애액.
눈으로 보기도 어려운 먼 거리에서 화살 한 대가 날았다. 화살은 빠른 속도로 전장을 가로질러 국연을 향해 날아왔다.
퍽!
“커, 컥…….”
화살에 맞은 국연의 가슴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국연은 말머리를 붙잡고 버텨 보려 했지만 이미 치명상이었다. 점점 흐려지는 시야에 한 장수가 달려오는 게 들어왔다. 자신에게 화살을 날린 그 장수는 활을 집어넣고 긴 봉의 끝에 짧은 철봉을 매달아 놓은 마상편곤을 휘두르며 달려왔다.
“그대는…….”
“서량의 방덕.”
눈 깜짝할 사이 국연에게 육박해 들어온 방덕은 그대로 편곤을 휘두르며 국연을 지나쳤다.
퍽!
머리가 깨진 국연은 유언을 남길 새도 없이 절명했다. 국연의 피가 사방에 흩뿌려지는 와중에 방덕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돌입하라!”
서황이 뚫어낸 길로 방덕이 이끄는 1천 경기병들이 돌입했다. 방원진 안으로 들어간 방덕의 부대는 크게 흩어져서 진 안쪽을 마구 헤집고 다녔다. 장제군이 붙으면 만도와 편곤으로 도륙했고 떨어지면 화살이 날았다. 장제군의 진영은 눈 깜박할 새 아수라장이 되었다.
방덕이 적진을 이렇게 헤집는 목적은 하나였다.
“저곳인가.”
각각의 부대에서 전령들이 달려가는 곳. 바로 장제와 이유가 있는 본대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본대는 중앙이 아니라 우측으로 잔뜩 붙은 곳에 있었다.
방덕은 방원진의 안쪽을 헤집고 본대의 위치를 잡아냈다. 이제 마초의 차례였다.
마초는 비색 전포 자락을 휘날리며 선두에 섰다. 3백 금철기가 뒤를 받치고 7백의 경기병들이 뒤로 붙어서 쐐기 모양의 추행진을 이뤘다.
타탁.
마초는 말도 없이 절영을 몰아 앞으로 치고 나갔다. 서량의 1천 기병들이 뒤를 따랐다. 한 번 돌격으로 적의 지휘부를 무력화시켜서 싸움을 끝낼 생각이었다. 맨 먼저 선두의 마초가 적진에 충돌했다.
쾅!
“으아악!”
폭음과 함께 장제군 병사들의 비명 소리가 울렸다. 절영에 탄 마초는 가로막는 병사들을 그대로 짓밟고 일직선으로 달렸다.
목표는 단 한 명. 장제를 무위에서 재기하게 하고, 유폐된 한수를 탈출하게 하고, 마가군을 사칭한 약탈부대를 운영해서 서량 호족들의 여론을 뒤흔든, 이 싸움을 설계한 자였다.
“이곳에 있는 걸 알고 있다. 나와라, 이유!”
마초가 호령하자 적진이 갈라졌다. 멀리서 수레를 탄 나이 지긋한 선비가 보였다. 온화한 인상에 근사한 흰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허허. 천하에 이름 높은 복파장군을 이렇게 뵙게 되는군요. 영광입니다.”
이유는 더 이상 숨지 않고 마초의 앞에 나타났다.
숨을 이유가 없었다. 계획은 이유의 의도대로 진행되었다. 마초의 무용 때문에 조금 흔들리기는 했으나, 결국 마초는 1천 기병만을 이끌고 3만 장제군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다. 이제 마초의 목을 취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이유의 뜻대로 될 참이다.
마초는 멀리 보이는 이유에게 살기 가득한 웃음을 보냈다.
“꽤 근사한 낯짝을 하고 있군. 그런데 하는 짓은 더러운 도적놈들과 다를 바가 없구나.”
마초의 가시 돋친 말에도 이유는 여전히 온화한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그저 열심히 살다 보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뭐야?”
“죄를 짓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시대니까요. 어떤 난세라도 누군가는 정치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용상에는 암군이요, 조정에는 십상시의 수하들뿐이니…….”
“그래서 동탁에게 붙을 수밖에 없었다? 으하하하!”
마초는 이유의 말을 끊고 하늘이 떠나가라 웃었다. 한바탕 웃고 난 마초가 금마삭을 들어 멀리 있는 이유를 겨눴다.
“역적이 백 명 있으면 구국의 신념도 백 가지가 있지. 역적 이유는 들어라! 동탁을 도와 천하를 혼란에 빠뜨린 죄. 장제를 도와 변방을 어지럽힌 죄. 당금 천자의 형님이신 홍농왕을 시해한 죄! 그리고…….”
마초의 눈이 강렬한 푸른 안광을 뿜었다.
“감히 내 고향을 약탈하고 그 땅의 백성들을 주륙(誅戮)한 죄를 묻겠다.”
“허허허.”
“대한 복파장군 근황부도독 마초가 명한다. 대역죄인 이유를 거열형에 처해 본보기로 삼을 것이다. 방해하는 자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마초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수레에 탄 이유는 잔잔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허나 복파장군, 이곳은 아군의 진영 한복판입니다. 제가 복파장군을 이곳까지 끌어들인 까닭을 모르시겠습니까.”
“네놈이 마가군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길은 나를 잡는 것뿐. 아마 이 근처에 무예 좀 한다는 무장들을 매복시켜 놨겠지.”
“바로 보셨습니다.”
이유는 두 손을 들어 손뼉을 쳤다.
이유의 신호와 함께 본대의 병사들이 학익진으로 변환해 마초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틈에서 말을 탄 장수 두 명이 쏜살같이 달려 나왔다.
마초는 두 사람 모두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호주천, 그리고 염행.”
흉노 선우의 아우이자 흉노 최고의 무사인 호주천. 그리고 서량에서 창이 가장 빠르다는 염행이었다.
마초는 그대로 절영의 배를 차서 마주 달려 나갔다. 만도를 뽑아 든 호주천과 창을 비껴 잡은 염행의 모습이 급속도로 가까워지자 마초의 얼굴에 전투의 흥분이 떠올랐다.
“오랜만에 상대다운 상대를 만났군.”
2년간의 고된 수련. 그 결과 여포에게 얼마나 가까워졌는지 시험해 볼 기회가 왔다.
마초가 눈에서 뿜어내는 안광이 더욱 강렬해졌다. 입꼬리는 숨길 수 없는 희열로 인해 한껏 올라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