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마초연의-106화 (106/306)

106화. 약탈자

서량, 천수군 평양현.

이곳은 마등이 처음 거병할 때부터 마가군의 영향력이 미치던 고을이었다. 마등은 다른 군벌들이 그렇듯 도적이나 이민족으로부터 이곳을 지켜 주고 조정 대신 세곡을 받았다.

그렇게 10년간 마가군의 보호 아래 살아왔으니 아무도 이곳이 약탈을 당하리라고 생각지 못했다.

오늘 평양현을 약탈하러 온 이들은 흉노 기병들이었다. 현의 수비병들이 저항해 봤지만, 흉노 기병들이 작달막한 말에 탄 채 날리는 화살은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유목민 병사들은 하나하나가 농경민의 무장들 같은 실력을 갖고 있으니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마지막까지 격렬하게 저항하던 평양현의 현위도 이내 흉노 우두머리의 앞에 무릎을 꿇는 신세가 되었다. 현위는 수염을 부르르 떨며 외쳤다.

“이놈들, 남흉노는 관중도독께 귀부했거늘 어찌 감히 우리 고을을 약탈한다는 말이냐?”

흉노 기병들의 우두머리는 마흔 살 정도의 건장한 사내였다. 중앙아시아 양식의 금은 장신구를 치렁치렁 매달고 있으니 한 눈에도 보통 신분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사내는 한인들의 말을 알아듣는 듯 현위를 보며 씩 웃었다.

“귀부라. 그것은 누가 결정한 것인가?”

발음까지 완벽한 한어였다. 현위는 이민족의 추장이 너무나 유창한 한어를 구사하자 당황해서 그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흉노는 단일 민족이 아니다. 사내는 그중에서도 서역의 혈통이 섞인 듯했다. 코가 크고 눈두덩이 깊게 패어 있었다. 두건 아래로 드러난 머리카락은 갈색이었다.

“남흉노의 어부라 선우가 분명히 관중도독의 편에 섰다. 네놈 또한 흉노의 두령일 텐데 어찌 선우의 뜻을 따르지 않느냐!”

현위는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흉노를 이끄는 사내는 현위를 잠시 내려다보다 입을 열었다.

“그렇지. 맞는 말이다.”

사내는 그러면서 머리에 쓴 두건을 벗었다.

현위는 사내가 두건을 벗자 흠칫 놀랐다.

‘이, 이건…….’

사내의 두상은 사람의 그것 같지 않았다. 이마는 납작하고, 머리통은 폭이 좁고 뒤로 부자연스러울 만큼 길었다.

편두(扁頭).

오늘날 외계인의 두개골이라는 의심을 사기도 하는 고대 유목민의 풍습이었다. 어린아이일 때부터 머리를 나무틀로 눌러서 폭이 좁고 길쭉한 두상을 만드는 것이다. 선우의 수많은 첩들 중 하나였던, 중앙아시아 출신인 사내의 어머니가 금관이 잘 어울리는 위치에 가라며 만들어 준 것이었다.

사내는 현위가 놀라는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네 말처럼 모든 흉노는 선우의 뜻을 따라야 한다. 그러니 이제 선우의 뜻을 바꿔야겠군.”

“그게 무슨… 컥!”

현위가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사내가 뽑아 든 만도가 현위의 가슴에 박혔다. 현위는 피를 토하며 몇마디를 이어 보려 했지만 사내는 무심하게 만도를 위로 올려 현위의 어깨로 뽑아냈다.

“선우를 바꾸면 선우의 뜻이 바뀌지 않겠는가.”

“커, 커억…….”

어부라 선우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이다. 이 사내는 필시 선우의 계승권을 주장할 만큼 어부라와 가까운 친족일 것이다.

현위는 거기까지 생각한 뒤 숨이 끊어졌다.

어부라 선우의 아우이자 흉노의 왕위 계승권자 중 한 사람.

흉노 약탈자들을 이끄는 사내, 호주천은 현위의 시신을 치우게 하고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약속은 이행해야겠지. 밭에 소금을 뿌려라.”

“대왕, 소금이 없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호주천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이 선생이 의뢰한 건 천수의 고을 하나를 잡아서 밭에 소금을 뿌리라는 것이다. 약속은 지켜야 하거늘 소금이 없다는 게 무슨 소리냐?”

선우 어부라와 대립하는 호주천의 일파가 장제의 편에 붙었다.

장제군의 두뇌 역할을 하는 이유는 이들에게 마가군 휘하의 고을을 약탈하고 밭에 소금을 뿌리라고 주문했었다. 마가군이 흉노를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고 있다고 선전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런데 부하의 말은 갑자기 소금이 없다는 것이다.

“그, 그게…장 대인이…….”

장 대인이라는 사내는 부하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휘적휘적 나타났다.

“주호천 대인. 내가 그만 실수로 소금 부대에 구멍을 내 버렸네. 미안하게 됐소.”

“주호천이 아니라 호주천이다.”

“뭐 그거나 그거나. 나는 같은 한인들 이름도 잘 못 외우니까 좀 봐 달라고.”

호주천의 옆에는 최정예 흉노 기병 이십여 기가 있었다. 게다가 호주천 자신은 흉노에서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무사다.

그러나 그 앞에 선, 장 대인이라는 자는 조금도 위축되는 기색이 없었다.

“장 대인. 장제군에 식객으로 있으면서 무위도식하다 갑자기 우리의 원정에 따라나설 때부터 뭔가 이상했다. 우리를 방해할 셈인가?”

“에이, 무슨 그런 무서운 말씀을? 내가 실수로 소금 부대를 망가뜨린 것뿐이니 너그럽게 봐주시오. 이 선생에게는 내가 잘 말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이 선생이 내 말이라면 또 껌벅 죽거든.”

장 대인은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실눈으로 반달을 만들며 호주천을 향해 활짝 웃었다.

“어쨌든 현위까지 참살했으면 원정의 목적은 달성했지 않소? 마가군도 어지간히 겁을 먹었을 테니 이제 무위로 돌아갑시다.”

호주천은 가만히 장 대인이라 불리는 청년을 응시했다.

지극히 평범한 체격에 평범한 외모를 한 청년이었다. 등에 장검을 메고 있지 않았으면 무사로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행동거지도 전혀 위엄이 없고 어딘가 모자라 보였다.

이런 자가 뭘 믿고 자신의 앞에서 이리 당당할 수 있다는 말인가?

잠시 장 대인을 쏘아보던 호주천은 이내 말머리를 돌렸다.

“돌아가면 이 선생과 담판을 지어야겠군. 그대는 이제부터 우리의 원정에 따라오지 못 하게 하겠다.”

“으하하하! 역시 호주천 대인은 통이 크셔! 선우가 되면 나도 좀 어여삐 봐주시오.”

호주천이 자신의 말을 들어 주자 장 대인은 손뼉을 치며 깔깔 웃었다.

약탈은 순식간에 끝났다. 이곳은 마가군의 세력권이니 오래 머물 수 없었다. 흉노 기병들은 관청의 금붙이들을 챙긴 후 바로 말을 달려 평양현을 떠났다.

한인 기병들은 따라가기도 힘든 속도였다. 그러나 장 대인이라 불린 청년은 힘들이지 않고 대열의 후미에 붙어 있었다.

“소금은 좀 그렇지.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좀 심하지 않나.”

청년은 뒤에서 혼자 중얼거렸다. 그저 돈이나 벌자고 장제군에 붙어 있는 그는 그렇게까지 극단적인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청년은 품에서 술병을 하나 꺼내 입으로 가져갔다. 관중도독부의 명물로 알려진 독한 소주 한 병을 몰래 챙겨 둔 것이다.

목구멍이 타는 듯 자극이 강한 술이었다. 속으로 넘기자 취기가 은근하고도 뜨겁게 올라왔다.

“이건 참 훌륭한데. 마가군은 이런 걸 자주 마신다는 거지?”

청년은 잠시 마가군에 들어갈 걸 그랬다고 후회했으나 잠시 후 생각을 바꿨다.

이제 곧 마가군의 후계자 마초와의 싸움이 시작될 것이다. 이번 싸움에서 마초만 잡는다면 그까짓 소주 정도는 얼마든지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 *

마초의 군사들은 나는 듯 빠르게 무위까지 진군했다.

적석산의 저족, 농서의 강족, 북지의 남흉노까지 포섭했으니 군사들이 어느새 4천 5백에 달했다. 전원 기병으로 이루어진 이들의 후미에는 3백 마리 낙타가 산더미 같은 짐을 지고 뒤를 따르고 있었다.

평양현의 약탈 소식이 전해진 것은 무위에 근접했을 때였다.

마초는 그 즉시 군의를 소집하고 벽력같이 소리를 질렀다.

“내가 직접 어부라 선우를 만나 마가군과 흉노의 맹약을 주선했다. 그런데 어떤 쥐새끼 같은 놈들이 감히 관중도독부 관할을 약탈했다는 말인가!”

남흉노의 지원군을 이끌고 온 어부라의 아들 표가 나섰다. 당혹감과 분노가 섞여 한껏 일그러진 표정이었다.

“복파장군. 흉노 내부에 아버지를 거역하고 독자적으로 움직일만한 자는 단 한 명, 제 숙부 호주천뿐입니다. 필시 그가 일을 벌였을 것입니다.”

호주천은 어부라 다음 가는 세력을 가진 흉노의 2인자다. 이미 수 차례 실패를 거듭한 어부라의 입지는 그렇게 강하지 않았다. 유목민에게는 형제 상속이 빈번하니, 어부라의 아우 호주천에게는 차기 선우 자리가 약속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런데 실패만 거듭하던 어부라가 마가군과 손을 잡은 후, 대성공을 거뒀다. 근황병의 일원으로 하내 전투에서 승리하고 한 조정에게 인정받았다. 마초가 주선해 주는 대로 서량으로 이주해서 새 기반도 잡았다.

그러다 보니 어부라 선우의 아들인 표가 차기 선우로 가장 유력해졌다. 호주천은 마가군 때문에 눈앞에 보이던 선우 자리를 놓치게 생긴 것이다.

“숙부는 야심이 큰 인물입니다. 아버지를 실각시키고 스스로 선우가 되기 위해 반대편에 선 게 틀림없습니다.”

표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호주천의 돌출행동 때문에 입장이 대단히 난처해진 것이다.

그때 법정이 나섰다.

“호주천 대인이 선우 자리를 노리고 어부라 선우에게 반기를 들어 장제의 편에 섰다. 이렇게만 보면 아주 간단하지요. 그런데 더 생각해 볼 문제가 있습니다. 왜 하필 평양현이었을까요?”

마초는 분을 누그러뜨리고 진지한 표정으로 법정을 바라봤다.

“효직은 호주천에게 숨은 의도가 있을 거라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평양현은 오랫동안 아군의 세력권이었던 곳입니다. 무위에서 전투가 벌어질 것을 뻔히 예상하면서 굳이 천리길을 달려 평양현을 쳤다는 건 뭔가 의도가 있는 겁니다.”

“의도가 무엇일까?”

“선전일 것입니다. 이 싸움은 마가군이 서량의 지배자라는 사실을 공인하는 싸움입니다. 그러니 오랫동안 마가군 관할이었던 고을을 약탈해서 아군의 위신을 실추시킨 겁니다. 마가군이 서량의 관할구역을 보호하지 못한다는 걸 서량 호족들에게 보여 주려는 목적입니다.”

마초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법정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그런가. 우리가 보호해 주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면 서량 호족들은 동요하겠군. 만약 그때 장제가 아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다면… 장제의 편으로 돌아서는 호족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마가군이 중앙 조정과 긴밀한 관계를 갖게 되면서 서량 호족들은 상대적으로 소외감을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기근을 이겨낸다는 명분으로 관할 군현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으니 호족들이 중간에서 이익을 취하기도 힘들어졌다.

호족들 입장에서는 그저 전쟁이 줄어들었을 뿐, 동탁 시절보다 더 살기 나빠졌다고 여기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전쟁이 줄어들었다는 명분도 유지하기 어렵지. 우리 관할에서 약탈이 일어나 버렸다. 그것도 내가 직접 아군으로 끌어들인 흉노의 손으로.”

호주천의 습격은 마가군에게 상상 이상으로 큰 정치적 타격이 될 것이다.

법정이 말을 이었다.

“이는 한인들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을 꿰뚫고 있는 자의 책략입니다. 호주천은 이민족이고 또 원래 병주에서 활동하다 최근에 서량으로 이주했으니 그가 직접 생각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모략에 능한 모사가 뒤에 있을 것입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이유가 틀림없었다.

좌중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우리는 어쩌면 처음부터 이유의 손에 놀아나고 있는 건 아닐까?’

‘이번 원정은 처음부터 이유의 의도대로 진행됐다. 유폐된 한수를 탈출시켜서 우리가 출진하게 만들었고, 마가군을 사칭해 서량 곳곳을 약탈해서 우리가 소부대로 무위로 추격하도록 유도했다.’

‘이제 남흉노의 호주천을 끌어들여 마가군 관할까지 약탈했으니…….’

“만약 이번 싸움에서 진다면 이번 원정은 대실패로 끝나게 됩니다. 복파장군, 일단 물러난 뒤 내년에 다시 도모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아무리 이유의 재주가 신묘해도 우리 관중도독부의 세력은 적보다 훨씬 큽니다. 명성에 다소의 타격을 입더라도 확실한 방법을 택하는 게 나을 수도 있습니다.”

법정은 침착하게 마초를 보며 진언했다.

“그런가. 효직의 말은 이렇게 판이 커진 이상 전투에서까지 지면 너무나 큰 타격을 입는다는 말이군.”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건 적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마초의 푸른 눈이 번쩍 빛났다.

“이유라는 놈이 갖은 모략으로 판을 짜 놓았지. 그러나 한 번 싸움에서 지면 모두 허사가 되는 것이다.”

이유의 책략으로 인해 판돈은 한껏 커졌다.

그러나 누가 이기는 패를 쥐고 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인 것이다.

마초는 자리에서 떨쳐 일어나며 말했다.

“내 뜻은 정해졌다. 우리는 이대로 무위로 전진한다. 서량을 어지럽힌 죄를 물어 장제와 이유를 처형할 것이다.”

만약 패배하면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것이다.

그러나 승리하면 적의 모든 책략들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법정은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예상했던 그대로의 답변이었다. 나관중과 방덕, 서황을 비롯한 제장들이 전부 군례를 올려 마초에게 화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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