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마초연의-102화 (102/306)

102화. 서량의 주인

서량, 천수군 기성.

기성의 유력 호족 조앙이 군량을 빼돌리다 군령에 의해 참수당했다는 소식은 나는 듯 빠르게 기성으로 전해졌다.

조가장을 가득 메웠던 식객들은 가주인 조앙이 죽자 썰물이 빠지듯 조가장을 떠났다. 을씨년스럽게 변한 조가장에는 졸지에 과부가 된 안주인의 통곡 소리만이 울리고 있었다.

“으흑흑흑! 상공!”

조앙의 아내 왕이는 조앙의 위패 앞에서 눈물을 뿌렸다.

왕이는 울다, 혼절하다, 다시 깨어나서 우는 것을 며칠간 되풀이하며 겨우 남편의 장례를 치렀다. 몇 남지 않은 식객들은 모두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봤다.

“마님 사정이 딱하게 됐구만. 조 대인이 마가군의 군량을 빼돌리다 참수를 당했다고? 허허, 참… 천수 최고 부자인 조 대인이 그랬다니 말이 안 되지 않나?”

“쉿, 말을 조심하게. 만약 마가군이 이번 원정에서 대승이라도 거두면 서량은 죄다 마가군 세상이야. 동 상국 시절에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간 자들이 얼마나 많았나? 미리미리 조심해야 하네.”

“아니, 말이야 바른말이지. 조 대인이 여색은 좀 밝혀도 작은 재물을 욕심내는 위인은 아닌데… 뭔가 수상하지 않나?”

“어허, 이 사람아. 그렇게 입을 함부로 놀리다 콧구멍으로 계란국 한 사발 들이켜도 나는 모르네.”

조앙의 사람됨을 잘 아는 식객들이 저마다 입방아를 찧었다. 조앙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재물을 까먹기만 할 뿐, 그렇게 독하게 재산을 불리는 위인이 아니었다. 다만 서량 최고의 실력자 마초가 군령에 의해 참수했다고 하니 식객들도 어쩔 도리가 없이 그저 공허한 음모론만 제기할 뿐이었다.

조앙의 장례가 끝나자 왕이는 가산을 정리했다. 가져갈 수 없는 것은 주변에 베풀었다.

그래도 적지 않은 재물이 손에 남았다. 조가는 그만큼 큰 부자였다. 재물들을 정리하던 왕이는 문득 서역에서 들어온 귀한 유리 거울에 시선이 닿았다.

“…아직 젊고, 아름답구나.”

몰락한 사족 집안에서 태어나 미색 하나로 유력 호족의 처가 된 몸이다. 왕이는 가만히 거울 속의 자신을 들여다봤다.

남편이 남긴 재산이 적지 않았다. 미모도 아직 건재하다. 전쟁 때문에 과부가 하도 많으니 재취가 큰 흠결이 되는 시대도 아니다.

어디든 가서 충분히 새 삶을 시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어디로 가서 어떤 사내와 함께 살아갈 것인가?

가만히 거울을 들여다보던 왕이가 말했다.

“장안으로 갈 것이다.”

남편의 죽음은 의심스러운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유력자의 후처가 되어 언젠가 그 진상을 밝힐 것이다. 만약 장안에 마땅한 유력자가 없다면 낙양이든, 허도든, 업이든, 어디까지라도 갈 생각이었다.

만약 왕이의 생각대로 조앙의 죽음이 마초의 공작이었다면?

“마초를 내 손으로 파멸시키고야 말리라.”

왕이는 이를 갈며 내뱉었다. 아름다운 두 눈이 섬뜩한 안광을 뿜었다.

* * *

“아, 뭔가 허무한걸.”

절영의 잔등에 앉아 먼 산을 바라보던 마초가 말했다. 말을 타고 따르던 나관중이 마초를 보며 대답했다.

“시원해하실 줄 알았습니다만.”

“글쎄. 10년간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양관과 조앙에게 원수를 갚는 순간을 생각했었지. 그런데 막상 놈들을 참수하고 나니 뭔가 뒷맛이 쓰구만.”

나관중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저는 누군가에게 그렇게 깊은 원한을 가져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주공께서는 두 사람을 벤 것을 후회하십니까?”

양관과 조앙을 처리할 계책을 낸 것은 나관중 본인이다. 스스로 괜한 짓을 했나 싶어 우울해하고 있었다.

잠시 그 모습을 보던 마초는 피식 웃으며 나관중의 어깨를 툭 쳤다.

“후회는 무슨. 나는 그 두 놈과의 은원을 정리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착한 척 한 번 하고 매일 밤마다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게 세상에 무슨 도움이 되겠나?”

도덕성에 흠집이 나면 나는 대로 대업을 이루는 게 더 의미 있는 일이다. 이게 마초의 생각이었다.

‘그래, 사실 역사 속의 주공은 애먼 사람 한두 명 죽였다고 괴로워할 인물이 아니지.’

나관중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마초가 이끄는 2천 기병대는 서평성에 이르렀다.

예상대로 한수는 군을 이끌고 성문 앞으로 나와 벌판에서 마가군 기병대를 맞이했다. 병사 수가 약 1만이니 무려 다섯 배의 우위가 있었다.

대열을 정돈한 마초는 사자 투구를 쓰고 절영을 탄 채 유유히 전장 한가운데로 나아갔다.

잠시 후, 한수군의 대열이 갈라지며 한 무장이 역시 단기로 마초에게 접근해 왔다.

“맹기 조카. 오랜만에 보는구나.”

한수였다.

마초는 한수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거리는 30장이 넘지만 눈이 좋은 한수는 마초의 표정 변화를 알아볼 수 있었다.

“한 숙부. 그날 제게 단기접전에서 패하고 군웅으로는 끝난 줄 알았는데, 제가 숙부를 잘못 봤습니다. 설마 탈출하셔서 1만이나 되는 무리를 다시 모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허허. 네가 걸음마를 할 때부터 한 조정에 저항해 온 나다.”

한수는 마초와 칼을 나누다 잘린 오른손 엄지를 들어 보였다.

“이까짓 손가락 좀 잃었다고 내 뜻이 꺾일 줄 알았더냐.”

“글쎄요. 숙부, 큰일은 뜻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 마가군 쪽에 서든지, 아니면 장제의 무리들 편에 서든지 정하셔야지요. 그래도 마가군이 낫지 않겠습니까? 장제군은 동탁군의 잔당이라 상종하지 않는 편이 좋으실 텐데요.”

마초는 빙글빙글 웃었다. 한수는 무표정하게 받아쳤다.

“천자의 벼슬을 받더니 완전히 조정의 사람이 됐구나. 맹기, 우리는 결국 서량 사람이다.”

“그렇지요.”

“썩어빠진 한이 서량을 계속 다스릴 수 있겠느냐? 한 조정은 관직을 팔아먹고, 식량을 수탈하고, 전쟁이라도 치르게 되면 가장 먼저 서량 사람들을 병사로 징발한다.”

“그것도 그렇지요.”

“양 한 마리 잡아본 적 없는 책상물림들이 짜는 이민족 정책은 또 어떠냐. 기껏 교역을 트고 관계가 개선되려고 할 때마다 쓸데없이 개입해서 결국 약탈을 부추기지 않느냐.”

“그것도 맞는 말씀입니다.”

마초는 태연한 말투로 대답했다. 한수는 계속 격정을 토로했다.

“그동안 충분히 참아 왔다. 이제 더는 서량의 통치를 한에 맡기지 않겠다. 나는 목숨이 붙어 있는 한 한에 저항할 것이다. 만약 내가 쓰러지면…….”

거기까지 말한 한수는 옆을 흘긋 돌아봤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한수군의 군무 책임자인 성공영이 있었다.

“…다른 누군가가 내 뜻을 이을 것이다. 그렇게 끊임없이 싸워서 언젠가는 이 땅에 서량 사람들의 나라를 세울 것이다!”

한수는 힘 있는 목소리로 자신의 목표를 드러냈다. 한수의 군사들이 저마다 환호성을 지르며 그런 한수에게 응답했다.

“우와아아!”

“진서장군!”

마초는 그런 한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 숙부가 인물은 인물이군. 지난번에는 군량 도둑질이나 하다 잡혀서 초라한 꼴이 됐지만, 저렇게 대놓고 역모를 말할 수 있는 자가 천하에 몇이나 되겠나.’

어찌 보면 대단히 위험한 발언이었다. 한수는 1만이 넘는 군중 앞에서 대놓고 역모를 꿈꾼다고 선언한 것이다.

한 조정에 맞서서 서량의 자치를 위해 20년간 투쟁해 온 한수였기에 가능한 말이었다.

한수는 자신의 장검을 뽑아 마초를 겨누며 말했다.

“맹기, 나도 한때는 수성 형과 함께 서량의 독립을 위해 싸우고자 했다. 그러나 수성 형은 결국 조정의 편에 서서 관중도독이 되었지. 이제 너를 앞세워 서량을 통째로 들어서 조정에 바치려 하지만, 이 한수가 살아 있는 한 그리 호락호락하게 되지 않을 것이다.”

“한 숙부의 말은 참으로 달콤하여 듣는 이의 마음을 홀리는군요. 그런데 숙부께서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우리 서량이 독립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조정이 관직을 팔아먹고, 식량을 빼앗아 가고, 이민족 정책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라면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썩어빠진 한 조정을 계속 섬기며 살아갈 셈이냐?”

“하하, 숙부께서는 좀 더 생각의 폭을 넓혀 보십시오. 우리 손으로 한을 바꾸면 됩니다.”

“뭣이?”

한수의 눈썹이 꿈틀했다. 마초는 여유 있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번 원정이 끝나면 마가군은 관중과 서량을 한 손에 넣습니다. 관중의 생산력과 지리적 이점, 서량의 강대한 기병대를 한 손에 쥔 거대 세력이 탄생하는 것이지요. 나는 마가군을 이끌어 조조와 원소를 꺾고 천하의 패권을 잡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내 손으로 한을 바꿀 수 있습니다.”

조정을 장악하고 조정의 부조리를 직접 개혁한다.

마초의 계획을 들은 한수가 인상을 찌푸렸다.

“한의 천자라도 될 셈이냐? 설령 네 말대로 된다고 치자. 13주를 다스리는 천자가 되면 똑같이 서량을 천대할…….”

“어허이, 거참. 천자 같은 건 안 합니다. 내가 가족들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걸 아시면서?”

마초는 혀를 찼다.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황실에서는 가족들끼리 죽고 죽이는 일이 빈번히 일어난다.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어쨌든 한 숙부, 문제의식에는 공감하지만, 방법에 현실성이 없습니다. 서량에 독립 정권을 세워 봤자 중원이 통일되면 강대한 중원 세력과 싸워 이길 수는 없는 일입니다. 진정 서량 사람들의 삶이 나아지기를 바란다면 서량 독립 같은 허황된 얘기를 할 게 아니라, 나와 함께 천하로 나아가서 한을 개혁해야 합니다.”

“싸워 보지도 않고 나약한 소리를 하는구나. 서량 사람 모두가 똘똘 뭉치면 날랜 병사가 10만이다. 그중 범과 같이 용맹한 자를 선봉에 세우면 어찌 한 번 싸움으로 중원을 평정하지 못하겠느냐?”

“아니, 그러니까 그걸 내가 다 해봤다니까요.”

마초는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이미 지난 생에서 서량 10군의 맹주가 되어 중원을 장악한 조조에게 도전했었던 마초다. 심지어 한수도 함께였다.

그리고 결과는 참혹한 패배였었다.

하지만 회귀자도 아닌 한수가 마초의 그런 심정을 알 리 없는 일이다. 한수는 수염을 부르르 떨며 영을 내렸다.

“우리가 가는 길이 다르니 어쩔 수 없구나. 오늘 마가군과 승부를 겨룰 것이다!”

한수가 외치자 뒤에 있던 성공영이 나서서 수신호를 보냈다. 상징적인 수장은 한수였지만 그는 2년간 유폐되어 있었던 몸이다. 실제 한수군의 군사들을 지휘하는 것은 성공영이었다.

“화살을 쏴라.”

한수군 군사들은 성공영의 조련 하에 정예병이 되어 있었다. 한수가 직접 이끌 때보다 한층 일사불란한 동작으로 움직여 화살을 퍼부었다.

마초도 지지 않고 외쳤다.

“거리를 유지한 채 응사하라!”

마가군 2천 기병대 중 절반 이상이 궁기병이다. 양쪽의 궁병들이 마초와 성공영의 지휘하에 화살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양쪽 다 결정적인 피해는 입히지 못하고 있었다. 마초와 성공영은 섣불리 전진하지 않고 신중하게 상대를 탐색했다.

해가 조금씩 기울어가자 성공영이 먼저 결단했다. 성공영은 한수를 보며 말했다.

“진서장군, 적이 먼 길을 왔지만 아직 예봉이 흐트러지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여기서 군사를 물리시지요.”

한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호령했다.

“퇴각의 징을 쳐라!”

한수군 병사들이 먼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양쪽 다 큰 피해 없이 첫날의 교전이 끝났다. 바닥에 수북하게 떨어진 화살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해가 떨어지자 마초는 제장들을 자신의 군막으로 소집했다.

“한수군이 만만치 않군. 우리는 야음을 틈타 군막을 걷는다. 밤 동안 30리 밖으로 물러날 것이다.”

그 상태로 아침이 되면, 밤새 마가군이 철수한 것으로 알고 한수군의 기병대가 추격에 나설 것이다.

“내일은 한수군의 사기를 꺾어 볼까.”

마초는 두 눈은 형형하게 빛나는 채, 입꼬리만 올려서 악당 같은 표정으로 씩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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