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난세와 싸우는 자
서량, 천수군 외곽의 한 저택.
우드득.
한수는 눈앞에 놓인 민물고기 요리를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생선뼈를 통째로 씹어 부수는 소리가 저택 안을 울렸다.
“어르신, 체하시겠어요. 제가 살을 발라 드린대두.”
“허허. 됐다, 이 녀석아. 손가락이 없다고 생선을 못 먹어서야 되겠느냐.”
한수의 시중을 들기 위해 붙어 있는 시비가 한수를 걱정했다. 한때 서량을 주름잡는 군웅이었던 한수는 시비를 바라보며 마음씨 좋은 노인처럼 허허 웃었다.
기근을 견디지 못하고 마가군을 습격하다 마초에게 패한 지 벌써 2년이 넘었다. 이후로 쭉 이 저택에 갇혀 있었으니 이제 유폐 생활에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그래서, 네가 올해 나이가 몇이라고 했지?”
“아이참. 그런 건 왜 물으셔요? 올해 열아홉입니다.”
“허허, 이 녀석아. 그러면 적당한 사내를 만나 혼례를 치르는 게 낫지 않겠느냐? 마가군에 젊은 사내놈들이 한둘이 아니지 않느냐.”
“모르는 소리 마세요. 제 아버지도 양주자사부의 병졸이었는데 난에 휩쓸려 제가 어릴 때 죽어버렸지요. 육남매가 다 굶어 죽고 저만 살아남았습니다. 군문에 든 사내랑은 혼인 안 할 거예요.”
“어허허, 이런 이런.”
한수는 쓴웃음을 지었다.
시비가 말하는 난(亂)이란 한수 자신이 일으킨 반란이 틀림없었다. 학정을 일삼는 양주자사 경비를 참살한 게 10년 전이다.
그때 양주자사부의 군관이었던 마등이 마지막 순간 군관직을 내던지고 반란에 동참하지 않았다면 반란은 실패했을지도 모른다.
‘세상살이가 참 얄궂구나. 허나 서량에서는 흔한 일이지.’
한수는 모르는 척 시비에게 계속 말을 붙였다.
“그래도 너무 고르다간 혼기를 놓친다. 가뜩이나 난리통에 죽는 자들이 많아서 젊은 사내가 모자라지 않느냐? 서량에 젊은 놈들 태반이 병졸인데 그럼 누구하고 혼인할 셈이냐?”
“아유, 서량 사내는 아주 질색이라구요. 저는 돈을 모아서 관중으로 떠날 거예요.”
“관중으로?”
“그럼요. 제가 어르신 잘 모신다고 마가군에서 돈도 두둑하게 줍니다. 삼 년만 더 모으면 관중에 밭을 살 수 있어요. 암만 노처녀라도 밭을 가지고 있는데 혼인할 사내 하나 못 구하겠어요?”
“허허, 그래. 그런데 관중도 상황이 말이 아닐 텐데. 기근 때문에 사람이 숱하게 죽어 나가지 않았느냐.”
“그것도 옛날 말이랍니다. 관중도독부가 들어선 후로 가뭄에도 굶어 죽는 사람이 없어졌으니까요. 게다가 관중도독의 아드님이신 복파장군은 천하무적이잖아요? 관중이라면 죽지 않는 사내를 찾아서 혼인할 수 있을 거예요.”
“허허, 과연 네 말이 옳다.”
한수는 눈을 빛내며 미래를 꿈꾸는 시비에게 너털웃음을 지어 보였다. 까무잡잡한 얼굴을 가진 이 소녀는 대담하고 영리하게 난세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투둥.
그때, 밖에서 큰 소리가 울렸다. 뒤이어 소란스러운 소음이 뒤섞여 들려왔다.
“으응, 뭐지? 어르신, 나가서 무슨 일인지 보고 오겠습니다.”
“허허허.”
시비는 여느 때처럼 기민한 동작으로 미닫이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한수는 그저 수염을 쓸며 묘한 웃음만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시비는 멀리 나가지 못했다.
퍽!
몇 발짝 가기도 전에 저택으로 뛰어든 병사 하나가 시비의 가슴에 칼을 찔러 넣었다. 칼날을 타고 솟구치는 피는 바닥에 후두둑 떨어질 만큼 양이 많았다. 시비의 까무잡잡한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아… 아윽…….”
칼에 맞은 시비가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는 사이, 몇몇 병사들을 이끌고 장수 하나가 방에 들어왔다. 뺨에 큼직한 칼자국이 있었다.
“어르신, 모시러 왔습니다.”
한수의 수하, 장횡이었다. 한수는 고개를 돌려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군례를 올리는 장횡을 돌아봤다.
“장횡인가. 경계가 삼엄했을 텐데 노고가 많았네.”
“성공영 장군의 공입니다. 관중도독부를 정탐하여 경계병들이 교대하는 시기를 노렸습니다.”
2년 만에 복귀할 시간이 왔다.
한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군사들이 일어난 한수의 어깨에 화려하게 수놓아진 진서장군의 관복을 둘렀다.
저벅. 저벅.
관복 자락을 휘날리며 유폐된 저택을 빠져나가던 한수의 눈에 죽어가는 시비가 들어왔다. 입에서 피를 흘리는 걸 보니 목숨이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
한수는 무릎을 굽히고 자세를 낮춰 시비와 눈을 맞췄다.
“삼 년만 더 참으면 관중에 밭을 살 수 있다 하였더냐.”
“어윽, 어, 어르신…….”
“너를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자신이 삼 년이나 더 갇혀 있으면 세력 기반은 와해되고 완전히 잊혀진 사람이 될 것이다.
‘고통이라도 덜어 주는 게 낫겠군.’
한수는 장횡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장횡은 한수의 의중을 파악하고 자신의 검을 건넸다.
“아무것도 갖지 못하고 태어난 아이야. 난세에 맞서서 잘 싸웠다. 이제 편히 쉬거라.”
한수는 손가락이 잘린 오른손 대신 멀쩡한 왼손으로 검을 고쳐 쥐고 시비를 겨눴다.
퍽!
시비의 목뼈가 잘리는 소리가 울렸다. 시비의 머리는 땅바닥을 몇 번 구르고 멈췄다. 목이 잘린 시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잠시 그 모습을 보던 한수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아갔다. 자신을 구출하기 위해 달려온 군사들이 대낮처럼 환하게 횃불을 밝혀 놓고 있었다.
“진서장군!”
“진서장군, 무사하셨습니까!”
한수는 자신을 보며 외치는 군사들에게 손을 들어 답례하고 준비된 말에 올랐다. 뒤이어 장횡이 한수의 왼쪽에 서고, 옆 건물에 유폐되었다 구출된 부장 후선이 달려와서 오른쪽에 섰다.
그리고 또 한 명.
건장한 체격에 단정한 용모를 한 청년이 말 위에서 한수에게 군례를 올렸다.
“주공. 성공영이 주공을 뵙습니다.”
“으흠.”
잠시 성공영을 보던 한수는 말을 몰아 다가가서 성공영을 와락 끌어안았다.
“…주공?”
“이놈아. 내가 죽으면 그냥 네가 수장이 되라고 하지 않았더냐.”
“서량에는 아직 주공이 필요합니다. 마가군이 조정에 붙었으니 이제 서량에 멸한(滅漢)의 깃발을 올릴 만한 인물은 주공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장제가 있지 않느냐. 듣자 하니 무위로 도망쳐서 꽤 잘살고 있는 모양이던데.”
“그는 어디까지나 동탁의 수하였던 자. 우리의 이상을 실현할 만한 인물이 아니지 않습니까.”
“녀석도 참. 그래, 알았다.”
한수는 2년 동안 유폐되어 있던 저택을 잠시 바라본 후 등을 돌렸다. 이제 근거지 서평으로 돌아가서 조직을 정비해야 한다.
두두두두.
한수는 달리는 말 위에서 죽은 시비를 떠올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나를 너무 원망하지 말거라. 나도 내 나름의 방식으로 난세에 맞서 싸우는 것이니.”
* * *
장안성, 거기장군부.
이곳은 이각의 부하 번조가 생전에 쓰던 우장군부를 적당히 개조한 건물이었다. 마등의 직책인 ‘거기장군 영 관중도독’은 거기장군으로서 관중도독의 직무까지 대리한다는 뜻인데, 이는 거기장군이 관중도독보다 의전상 높은 직위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난 2년간 마등은 스스로 관중도독으로 자처하면서 실제 집무도 대부분 관중도독부에서 해결했다. 주된 업무가 기근을 막고 관중을 복구하는 것이니 군사보다는 내정에 치우쳐 있었기 때문이다.
실질적인 마가군의 군무 책임자는 복파장군 마초였으니 이곳은 자연스럽게 마초와 그를 따르는 무장들의 회합 장소가 되어 있었다.
연회가 벌어진 이튿날, 마초는 아침부터 숙취에 찌든 마등을 찾아가서 결재를 받고 무장들을 복파장군부로 불러 모았다. 비서랑 나관중, 북지태수 방덕, 편장군 서황, 행령군 이감, 행군교위 월길, 아장 맹획과 마대, 그리고 2년 전 합류한 새 얼굴 군사장군 법정이 있었다. 마초는 그들을 돌아보며 선언했다.
“도독께서 허락하셨다. 출진은 스무날 후, 서량을 정벌하러 떠난다. 무위의 장제를 치고 서역과의 교역로를 확보할 것이다.”
서량 정벌.
거기장군부에 모인 무장들은 서로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기가 예상보다 좀 빠를 뿐, 자리에 모인 모두가 짐작하고 있었던 일이었다.
마초는 마가군의 첩보를 도맡는 행령군 이감을 돌아봤다.
“이감, 모두에게 지금 서량의 정세에 대해 말해주게.”
“주공, 그 전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방금 들어온 급보입니다.”
“급보? 무엇인가?”
“유폐되어 있던 한문약(문약은 한수의 자)이 탈출했습니다.”
“뭣이?”
“그게 사실이오?”
여기저기서 소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마초는 팔짱을 낀 채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아마 성공영의 짓이겠군. 경계가 만만치 않았을 텐데, 어떻게 뚫었다던가?”
“한문약을 감시하는 군사들은 삼 개월에 한 번 교체됩니다. 적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군사들이 교대하는 순간을 정확하게 노려서 쳐들어왔습니다.”
“그런가. 우리 쪽에 간자(間者, 첩자)가 있군.”
“아무래도 그런 듯합니다.”
좌중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침묵을 깬 것은 월길이었다.
“주공,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는데요. 관중도독부가 들어선 이후, 다 같이 기근을 극복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대체 왜 성공영과 내통해서 관중도독부를 무너뜨리려고 하는 겁니까?”
“정치란 게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다. 서량에 강력한 통치자가 생겼으니 몇몇 호족들은 불만이 쌓여 있겠지. 옛날에는 자기 동네에서 왕이나 다름없었을 텐데 이제는 관중도독부의 통제를 받아야 하니까.”
“아니, 옛날에는 동탁이 있었잖아요? 동탁 밑에서는 찍소리도 못 했을 것들이…….”
“그놈들은 그때가 더 살기 좋았을지도 모르지. 뇌물만 제때 바치면 되니까.”
마초는 잠시 생각하다 이감에게 물었다.
“이감. 한 숙부를 지키던 감시병들은 본래 어디 소속인가?”
“천수군의 군사들입니다. 태수의 치소가 있는 기성의 군사들이 교대로 맡고 있었습니다.”
“하필 기성인가.”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이 나왔다. 마초의 의중을 알아챈 나관중이 한숨을 쉬었다.
‘기성… 주공이 지난 생에서 처자식을 잃었던 곳이 아닌가. 그래서 일부러 피하고 있었는데.’
기성은 천수태수의 치소가 있는 곳이다. 그러니 마가군에게는 도독부가 있는 장안성과 옛 군영이 있는 농현 다음으로 중요한 곳이 된다.
그렇지만 마초는 갖은 핑계를 대며 기성에는 가지 않고 있었다. 아픈 기억을 떠올리기 싫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피할 수 없겠군. 좋아, 우리는 먼저 기성으로 간다. 가서 성공영과 내통한 게 누군지부터 찾아낼 것이다.”
마초가 선언하자 서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서량의 세력가들을 최대한 우리 편으로 끌어들여야지. 관중도독부 휘하 천수, 안정, 북지, 농서 4군의 유력자들을 전부 안정으로 소집한다. 그들을 모아 장제와 한수를 정벌하고 서량을 하나로 만들 것이다.”
“존명!”
서황과 방덕, 나관중, 월길, 이감이 일제히 손을 모았다. 마초도 손을 모아 답례했다.
‘느낌이 좋지 않군. 성공영이 먼저 움직였고, 무위의 장제도 세력을 키우고 있다. 그 뒤에는 동탁의 집권을 도왔던 모사, 이유가 있겠지.’
관중 전체가 이제 막 기근에서 벗어난 참이다. 그러니 이번 원정에는 많은 병력을 동원할 수 없다.
그 상태로 이유의 계략을 상대해야 하는 것이다. 마등이 크게 걱정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모르고 계신 게 있지. 내게 이유 못지않은 군사(軍師)가 있다는 것이다.’
마초는 고개를 돌려 법정을 바라봤다. 비쩍 마른 체격을 한 법정은 매서운 눈으로 마초의 시선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