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서량으로
마등은 좌중을 돌아보며 껄껄 웃었다.
“비서랑이 큰일을 해냈군. 회의는 빨리 끝내고 비서랑이 가져온 술을 즐기도록 하세.”
회의를 빨리 끝낼 생각에 다들 마음이 급해졌다. 남은 업무보고는 두 명이었다.
허도의 조정에 다녀온 알자복야 황보력이 먼저 나섰다. 그는 조정의 알자복야 관직을 유지하면서 마가군와 조정의 연락 역할을 맡고 있었다.
“천자께서 연호를 바꾸셨습니다. 새 연호는 건안(建安)이니 올해가 건안 초년이 됩니다.”
“평안한 세상을 세운다는 뜻인가. 요즘 세상에 썩 잘 어울리는 연호로군. 천자께서는 강녕하시오?”
“그렇습니다. 올해 열여섯이 되셨는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의젓하십니다.”
“그야 권신들에게 그만큼 시달렸으니까 평범한 열여섯 공자들과는 다르겠지. 천자께서 허도로 가시며 연주목 조조가 새롭게 조정에 입조했다고 들었소.”
“그렇습니다. 조정의 운영 자금을 그가 대고 있고, 그 대가로 사공 벼슬을 받았지요.”
황보력은 허도에서 본 조조의 모습을 떠올렸다. 조조가 천자 유협을 대하는 태도는 예법에 흐트러짐이 없었지만, 그 이상의 충심은 느껴지지 않았다.
‘머리를 숙이는 모습이 그토록 당당한 사내는 처음 보았지.’
조조는 자신의 영지로 찾아온 천자를 봉대하고 조정의 운영비까지 전부 대고 있었다. 그의 행동은 누가 봐도 충신의 그것이었다.
그러나 마등과 황보력을 비롯한 관중도독부의 핵심 인물들은 조조가 과연 충신으로 남을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마초가 이렇게 단언했기 때문이다.
—조조는 절대 충신으로 남지 않습니다. 우리가 관중을 안정시키고 조정이 낙양으로 돌아오게 되면, 결국 천자를 놓고 조조와 싸워야 할 것입니다.
이제까지 마초의 장담은 빗나간 적이 없었기에 다들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황보력이 허도의 상황을 보고한 뒤, 마지막으로 입을 연 것은 별가종사 순유였다.
“관내 8군의 보리 수확 결과를 점검했습니다. 올해부터는 양식의 자급자족이 가능합니다.”
“우와아아!”
좌중에서 다시 한번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2년간의 기근이 드디어 끝난 것이다.
마등 또한 만면에 가득 웃음을 띠고 순유에게 말했다.
“순 별가가 참으로 고생이 많으셨소.”
“제가 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는 벼슬하는 이들보다 밭 가는 이들의 공입니다. 벼슬하는 이 중에서는 저보다 삼보윤 두기, 홍농태수 장기, 치중종사 부간, 주부 배잠, 그리고 이 자리에 없는 하급 관원들이 노고가 많았습니다.”
순유는 좀처럼 우쭐대는 법이 없었다. 마치 자신이라면 그 정도는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는 동탁 시절부터 중앙 정치에서 이름난 인물이었다. 마등은 황보숭의 추천장을 본 순유가 찾아오자 그를 별가로 삼고 관중도독부의 사무를 총괄하게 했다. 이 또한 마초가 강력하게 추천한 것이었다.
—순공달의 재주는 천하를 평안케 할 만합니다. 그에게 전적으로 맡기십시오.
—뭘 맡기라는 거냐?
—그냥 다 맡기십시오.
순유를 강력하게 추천하는 마초와는 달리 마등에게는 일말의 불안감이 있었다.
‘공달은 명문가 출신이고, 중앙 정계에만 있었으며, 조용한 성품이라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뛰어난 인물이지만 거친 서량 사람들과 잘 융화될 수 있을까?’
그러나 일을 맡긴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그런 불안감은 씻은 듯 사라졌다. 순유는 순식간에 관중도독부의 업무를 장악하고 실질적인 2인자로 자리 잡았다.
그에게 볼멘소리를 하는 박힌 돌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한 번은 내정에만 주력하던 순유를 마초가 뜬금없이 백파적 토벌에 데리고 간 적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마초가 서량 출신 관리들 편을 든다거나, 명문가 출신 선비를 곯려 주려는 의도라거나 하면서 입방아를 찧었다.
‘그런데 내정만 하던 순공달이 사실 군략에 더 능할 줄은 아무도 몰랐지.’
순유가 천변만화하는 군략으로 백파적들을 소탕하고 돌아오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그때 이후로 거친 서량 출신 관리들은 순유에게 감히 대들 엄두도 내지 못했다.
마등은 부하들과 백성들에게 공을 돌리는 순유를 바라보며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순 별가가 관중도독부의 일을 맡게 된 것이 나의 큰 복이오. 자, 그러면 회합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지. 식사를 들여라! 그리고…….”
마등은 기대감에 찬 백관들을 돌아보며 잘생긴 얼굴로 씩 웃었다.
“기근이 끝났으니 금주령도 폐한다. 비서랑이 가져온 소주도 같이 들여라. 오늘은 모두 함께 크게 취할 것이다.”
“으와아아아!”
백관들은 다시 한번 열광적인 환호를 질렀다. 순유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옆에 있는 젊은 관리를 돌아봤다. 자신이 오른팔처럼 부리고 있는 주부 배잠이었다.
“문행(배잠의 자), 자네가 술을 좋아하지? 그동안 노고가 많았으니 오늘은 마음껏 취하게. 내일은 등청하지 않아도 좋네.”
“별가 대인께서 어쩐 일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쉴 때는 쉬어야 일도 잘하니까. 자네는 밤낮없이 일만 하는데, 그런 식으로는 오래 버티지 못하네. 때로는 몸과 마음에 휴식을 주도록 하게.”
“그야 복파장군에게 죽도록 열심히 하겠다고 맹세했으니까요. 하필 이 좋은 날 복파장군이 없는 게 아쉽군요.”
마초의 주문은 열심히 하지 말고 잘하라는 것이었지만 배잠은 그새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그때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복파장군 등청!”
“복파장군 등청!”
하인들이 복창하는 소리가 울리자 회합실 안 모두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다.
“설마 복파장군이 벌써 돌아왔다고? 백파적을 토벌하러 출진한 게 불과 열흘 전 아닌가?”
“빨라도 한 달은 걸릴 원정인데 설마 벌써 돌아올 리가…….”
마등은 관중도독이면서 동시에 거기장군이다. 마등은 2년 전부터 거기장군부의 일, 즉 군무는 아예 마초에게 맡겨두고 있었다.
군량이 모자라니 대규모 전쟁을 치를 형편은 되지 않았지만 크고 작은 도적떼와 이민족 분쟁은 언제나 있었다. 마초는 직접 육성한 천여 명의 기병대만을 이끌고 동분서주하며 그런 분쟁을 해결하러 다니고 있었는데, 이번 원정은 제법 큰 세력을 이룬 이락이라는 백파적 우두머리를 토벌하는 것이었다.
“이락이 이끄는 무리가 삼천에 달한다고 하네. 아무리 복파장군이라도 열흘 만에 토벌하고 돌아온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 않는가?”
“그러게나 말일세.”
그러나 관중도독부의 회합실에 들어선 것은 틀림없는 마초였다.
은빛 갑옷에 사자 투구를 쓰고, 품이 큰 비색 전포 자락을 휘날리는 눈부신 미남자. 스물셋이 되며 근골이 제법 두텁게 변한 마초가 들어섰다. 등에는 마가의 5척 장도와 천자에게 받은 보검을 교차하여 메고 있었고, 손에는 묵직해 보이는 자루를 들고 있었다.
“복파장군 마초가 관중도독을 뵙습니다.”
마초는 군례를 올리고 마등에게 손에 든 자루를 내밀었다. 마등은 자루 안의 내용물을 확인하고 피식 웃었다.
“이락의 목이군. 어찌 이리도 빠르게 얻었는가?”
“새로운 안장과 마구 덕분입니다. 기병들이 더욱 빠르고 강해졌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또 뭔가?”
“일을 빨리 끝내야 소장도 무예를 단련할 시간이 있지 않겠습니까?”
마초는 원정을 떠나지 않는 날은 매일같이 무예 수련에 몰두하고 있었다. 장수에게 요구되는 것이 일신의 무예뿐만도 아니고, 마초의 무예는 그만하면 천하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힐 만한 수준이었지만, 그는 이상할 정도로 단련에 집착했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그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언젠가 여포와 다시 싸우는 순간을 대비하고 있는 것이다.
마등은 그런 마초의 어깨를 두드렸다.
“고생이 많았다. 마침 오늘은 비서랑이 좋은 술을 빚어 왔으니 마음껏 취하도록 하자.”
“알겠습니다. 단 내일은 소장이 가장 먼저 회견을 청합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날의 술자리는 실로 흥겨웠다. 관중도독부의 백관들은 오랜만에 맛보는 술에 너나 할 것 없이 취해서 인사불성이 되었다.
게다가 나관중이 새로 개발한 소주는 이 시대에 흔히 먹던 탁주와는 달랐다. 도수가 높아서 백관들은 자신이 취하는 줄도 모르고 픽픽 쓰러져갔다.
“어허, 한 잔만 마셔도 탁주 한 말을 마시는 것처럼 독한 술이군.”
“그렇습니다. 빨리 취하고, 빨리 깨지요. 그리고 탁주보다 다음 날 숙취가 덜합니다. 이 술은 아주 깔끔하게 술자리를 끝낼 수 있습니다.”
나관중은 뿌듯한 표정으로 소주의 장점을 말했다.
그러나 서량 출신 관원들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으음, 그렇다면…….”
“빨리 깨고 또 마실 수 있다는 말 아닌가?”
아예 술을 끊거나, 밀주를 빚어 겨우 한두 되씩 홀짝이는 생활이 2년이나 지속된 참이다. 관중도독부의 관원들은 술을 마시고, 토하고, 일어나서 다시 술을 마시며 하룻밤 동안 독한 소주 한 수레를 기어이 다 비웠다.
다음 날.
“우욱…….”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겨우 등청한 마등에게 아침부터 마초가 찾아왔다.
“맹기. 할 말이 대체 뭐기에 이렇게 급하냐? 보다시피 이 아비는 술을 많이 마셔서 머리가 아프다.”
“아버지, 때가 됐습니다. 지금이 적기입니다.”
“적기라니, 대체 뭘 하겠다는 말이냐?”
마등이 묻자 마초가 대답했다.
“서량 정벌입니다. 서량의 군웅들을 전부 정리하여 후방에 적을 남겨 두지 않겠습니다.”
“으흠.”
마등은 말없이 꿀물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꿀물 한 사발이 바닥을 드러내자 대답했다.
“원래 서량 정벌은 올해 가을걷이까지 마친 후, 내년에 하려고 하지 않았더냐. 왜 하필 지금이냐?”
“서량의 상황이 변했습니다. 무위로 도망친 장제가 생각보다 세력을 빠르게 회복하고 있습니다.”
“장제의 이야기는 들었다. 무위는 몹시 척박한 땅인데, 무슨 조화를 부렸는지 작년부터 소출이 몇 배로 늘어서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고 하더구나. 장제의 모사 이유는 꾀가 많은 자니 뭔가 지모를 쓰고 있을 것이다.”
마가군은 그동안 관중 재건에 집중하느라 서량에는 소홀했다. 장제가 더 커지기 전에 제거해야 한다는 것에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다.
게다가 마초가 출진하려는 이유는 또 있었다.
“장제를 토벌하고 서량의 정세를 안정시키면 서역과의 교역을 재개할 수 있습니다.”
비단길(Silk Road).
중국의 비단이 중앙아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팔려나가는 길이다. 지금 마등과 마초가 있는 장안이 비단길의 동쪽 끝이 된다.
이 비단길 가운데 장제가 점거한 무위군이 있다. 그러니 장제를 토벌하지 않고서는 서역과의 교역을 재개할 수 없는 것이다.
“서역 교역이라. 그야 서역에 비단을 내다 팔고 유리나 향신료 같은 것들을 들여오면 막대한 이익을 남길 수 있겠지. 그런데 너무 이르지 않느냐?”
“교역로를 지금 미리 개척해 둬야 5년 후, 10년 후에 효과를 볼 것입니다.”
마등은 꿀물을 마시자 숙취가 조금 가시는지 조반을 들였다. 기름진 고기 국물에 마늘잎을 잔뜩 넣은 국수였다. 시비가 들어와 마등과 마초의 앞에 각각 독상을 두고 나갔다.
“일단 들자꾸나.”
마등은 대답을 듣기도 전에 젓가락을 들어 국수를 먹기 시작했다.
후루룩.
국수 한 그릇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국물까지 남김없이 마신 마등은 그릇과 젓가락을 상에 내려놓았다.
탁.
“장제를 토벌하고 서역 교역로를 확보한다라. 맹기, 너의 말이 옳다. 그런데 이 아비는 걱정이 앞서는구나.”
“무슨 걱정 말입니까?”
“너는 불과 3년 사이에 너무나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무위를 비롯한 서량의 변방은 이곳과는 풍토와 문화가 또 다르다. 장제는 그런 변방에서 잔뼈가 굵은 무장이고, 무엇보다…….”
“무엇입니까?”
“장제의 곁에는 이유가 붙어 있다.”
이유.
<삼국지연의>를 통해 동탁의 사위로 각색된 인물이다.
실제 역사상의 이유는 동탁이 서량에서 세력을 일굴 때 이미 이름 있는 학자였고, 동탁이 조정을 장악했을 때는 조정 내 친 동탁파의 대표 격인 인물이었다.
“이유의 지모가 뛰어난 것은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열 배의 세력 차이를 극복하고 이각과 곽사를 참했습니다.”
“기책(奇策)을 써서 그렇게 할 수 있었지. 그때는 우리 편에 가후가 있었고, 이각과 곽사의 곁에는 지모 있는 자가 없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마등의 얼굴에서 어느새 숙취가 사라져 있었다. 맨주먹으로 관서 최대의 세력가가 된 사내는 원정에서 돌아오자마자 다시 장거리 원정을 떠나려는 아들이 걱정되는지 거듭 타일렀다.
“이유를 얕보지 마라. 그는 무력만 가지고 있던 동탁을, 천하를 호령하는 자리에 올린 인물이다. 게다가 지금은 가후도 없으니, 그의 지모를 더욱 무겁게 경계해야 할 것이다.”
원래의 역사에서 이유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지난 생에서 마초가 나이가 들어 천하 정세를 신경 쓰기 시작할 무렵 이유는 이미 고인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마초의 개입으로 인해 역사가 바뀌었다. 한 세대 전의 인물인 이유와 정면으로 부딪치게 된 것이다.
마초는 마등을 향해 군례를 올리며 대답했다.
“주공께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절대 방심하지 않고 서량을 평정하겠습니다.”